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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소평이 모택동에 대한 평가.(상)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81 2021-01-10 10:29:10
(上) 편


●  역사의 결정적 순간들  - 등소평
이 주도한
 모택동
에 대한 역사적 평가


◇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내막


문제는 모택동이란 우상이었다. 인구대국( 중국은 홍위병의 난동과 파괴를 부른 모택동의 극좌군중노선을 부정하지 않는 한 민생문제 해결에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었다. 모택동 사망 후 재기한 등소평은 역사결의의 채택을 통해 『모택동의 공은 1차적이고, 과는 2차적』이란 절충의 레토릭으로 모택동의 신성을 약화시켜 놓고 실사구시의 노선을 확립하고 「박정희 경제모델」을 모방함으로써 중국을 「경제성장 우등국」으로 변화시켰다.


세계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
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등소평이 주도한 역사결의 채택은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와 고르바초프의 「개방·개혁」 선언과 더불어 극좌 이데올로기의 존립 기반을 허물어버린 20세기 사의 일대 사변이었다


『문화대혁명은 모택동 동지가 일으킨 내란이었다』


● 모택동의 극좌노선 부정한 신중국의 반성문


● 모택동의 포퓰리즘 청산하고 등소평의 실용주의 확립


오늘의 중국을 견인한 역사적 문헌이다


<모택동>


1981년 6월27일,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11기 6중전회)는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이하 역사결의로 표기함)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역사결의
는 모택동(모택동)이 주도한 「문화대혁명」(문화대혁명)의 극좌노선을 부정하고, 등소평 체제를 확실한 이론적 기반 위에 올려 놓으면서 오늘의 중국을 경제 제일주의의 길로 이끈 역사적 문헌이다.


8개 부문, 38개 항, 약 3만 자로 구성되어 있는 역사결의의 실무적 작업은 중공당 최고 이론가 호교목 그룹이 맡았지만, 그 전문에는 20년에 걸친 권력투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한 등소평의 의지, 즉 그의 실용주의 정신이 철저하게 반영되어 있다.

등소평
은 1980년 3월부터 1981년 6월 사이에 무려 아홉 차례에 걸쳐 「역사결의 기초소조」에 문건의 기초와 수정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면서 세세한 부분에까지 간여했다.


문제는 모택동이었다. 중국은 모택동의 주술에서 깨어나 그의 신성과 극좌 이데올로기의 과잉상태를 약화시키지 않고서는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에 있어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역사결의가 작성되던 무렵만 하더라도 모택동을 비판하는 데는 아직도 용단이 필요했다.


모택동
은 이미 1976년에 사망했지만, 오랜 세월에 걸친 우상화 작업에 의해 여전히 중국 인민들의 마음속에 독특한 역사적 지위를 차지한 「창업황제 였다. 등소평은 그의 「역사결의의 기초에 대한 의견」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모택동
 동지의 오류에 대해 도가 지나치게 써서는 안 됩니다. 도를 넘게 되면 모택동 동지의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 당과 우리나라의 체면에도 먹칠을 하게 됩니다』


등소평
은 모택동을 부정하거나 기왕의 당 결의를 전면 무효화해서도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역사를 보는 그의 균형감각이 돋보인다.


『모택동
 동지의 공과에 대해 적절하게 평가하지 않으면 고참 노동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토지개혁 시기의 빈농, 중·하층 농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모택동 사상이란 깃발을 내려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 깃발을 내던지는 것은 사실상 우리 당 의 빛나는 역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등소평
은 『나에게도 잘못이 있었다』는 밑자락을 깔고 『모택동 동지가 만년에 이르러 사상에 일관성이 없고 어떤 이야기는 서로 모순되기도 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못박았다.


『대체로 1957년(전반기)까지 모택동 
동지의 영도가 옳았으나 1957년 (여름의) 반우파 투쟁 이후부터 오류가 점점 늘어났다』


그 오류의 핵심인 문혁
에 대해 등소평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문화대혁명」이 한 세대의 발전에 지장을 주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한 세대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문화대혁명」으로 무정부주의
와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범람하게 되었고, 사회기풍에 심각한 해를 끼쳤습니다』


등소평
은 「문화대혁명」 시기 중 「모택동 동지의 오류」와 「4인방의 도전」과 홍위병의 난동을 극복한 데 대해 중국공산당과 인민이 힘을 합쳐 「역전승한 기록」으로 평가했다.


◇  중국적 시장경제의 이론적 토대


역사결의
는 세계인구의 5분의 1을 점하는 중국의 인민을 기아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있어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12억 인구의 중국이 굶으면서도 「혁명의 수출」에 주력한다면 이웃나라가 불행해질 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격동하게 마련이다.

중국
은 「대약진운동」 기간(1958∼1961년) 중 3000만 명의 인민이 굶어 죽었고,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으로 표기함) 기간(1966∼1976년)에는 철없고 파괴적인 홍위병(홍위병)들의 난동에 의해 1억 명의 인민들이 탄압을 받았다.


특히 문혁 
은 중국을 30년 이상 후퇴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의 사회구조를 황폐화시켰으며, 통치제도, 지도력, 교육제도, 그리고 지식인층을 파괴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결의는 「모택동의 이후」 중국 지도부의 뼈저린 각성을 바탕으로 작성된 반성문이다. 역사결의 채택 이후 16년간 「최고지도자」의 지위를 확립한 등소평은 중국을 「경제성장의 우등국」, 「세계의 공장」으로 변화시키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역사결의
 채택 이후 20년도 못 돼 한국에 있어 중국은 제1의 수출시장으로 부상했다.  이후 일본의 제1수출시장도 미국에서 중국으로 변화했다. 따라서 동아시아 3국이 그려갈 「21세기 삼국지」는 우리 민족의 진운에 엄청난 영향을 행사할 것이라는 점에서 역사결의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다.


중국공산당 중앙문헌연구실은 1985년 「역사결의
」에 대한 주석본을 발간했다. 30여만 자에 달하는 주석본에서는 역사결의를 130개 항목으로 나누고 사실과 이론 양면에서 「역사결의」에 대한 해설을 했다. 130개 항목 가운데 이론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항목은 30여 개인데, 그 중심내용은 모택동 우상화와 문화대혁명의 비판 그리고 중국의 사회주의 현대화 방식 등에 관한 것이다.


「역사결의
」와 그 주석본은 일당독재의 국가 중국에서 현재 이론을 불허하는 「정통 중국 현대사」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그것이 비록 최후의 승자 등소평에게 복무하는 문건이라 할지라도 그가 터를 닦은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 또는 사회주의적 시장경제의 성과·과제·전망 등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데 있어서는 거의 유일한 문헌이다.

이하 < > 안의 글은 「역사결의
」에서, 《 》 안의 글은 「역사결의 주석본」에서 인용한 문장이다.


●  모택동의 교만과 자만


<(1957년 이후) 10년 동안 당의 사업은 지도방침상 중대한 실책이 있었다.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경험부족과 경제발전법칙 및 중국 경제의 기본상황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다. 나아가 모택동 동지를 위시한 중앙과 지방의 적지 않은 영도 동지들이 승리로 인해 교만하고 자만하게 되었다. 일을 성급하게 이루려 했으며, 주관적인 의지와 주관적인 노력의 작용을 과대시한 나머지 진지한 연구와 실험도 하지 않고 총로선 (총노선)을 내놓자마자 경솔하게 「대약진운동」과 농촌인민공사화운동을 일으켰다.

지나치게 지표를 높이고 엉터리 지휘를 하며 허풍이나 공산화풍
을 일으키는 것을 표징으로 하는 좌경오류가 크게 범람하였다>


1952년 말까지 농·공업부문의 생산력이 전전
의 수준을 웃돌게 되자 모택동은 다시 과도기의 총노선(총노선)을 제기했다. 과도기의 총노선은 사회주의 개조가 기본적으로 완성되는 시기를 과도기로 단정하고 농업의 사회주의적 집단소유제, 상공업의 국유·국영화를 통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함과 동시에 자주국방력을 갖춘 부강한 사회주의 중국을 이룩한다는 것이었다.


중공
은 1958년 1월부터 농·공업분야의 낙후를 일소하고 비약적인 발전을 기하기 위해 제2차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모택동은 이를 추진하기 위해 「대약진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농민들은 낡은 농구를 사용하여 토지를 수없이 개간하고 수리관개시설을 대대적으로 건설했다. 증산을 위한 밀경밀식법(密耕密植法)도 개발되었다. 공업부문에서 대약진운동은 철강 생산량 증가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과도하게 할당된 목표량을 달성하기 위해 노동자·농민은 생산량만 중시했기 때문에 제품의 질이 형편없이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각종 통계와 결과보고는 과장·조작되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추진된 농촌의 인민공사화
는 오히려 식량생산량을 감소시켰다.


그것은 현실을 무시한 급진적이며 모험적인 개변이었다. 생활의 공동·집단화는 각 가정의 소멸로 인해 농민들의 생활의욕을 크게 감퇴시켰다. 자급자족을 위한 각종 공산품 제조도 전문적 기술과 성의 부족으로 조잡품만 생산하였으므로 결국 자원과 인력 낭비만 가져왔다.


          이상..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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