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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호프님 얘긴 별로 정확하지 않은 부분들이 많군요;;
REPUBLIC OF KOREA 4 310 2006-10-04 09:46:10
호프님은 그 전에 크리스트교에 관해서도 쓴 내용도
엉성하기 짝이 없고 잘못된 얘기들이 많더니만..;;;;;;;


조선시대 성리학의 학풍으로 말하자면
두 기둥이 바로 기호학파와 영남학파입니다.
기호학파는 경기도와 충청도 쪽이고, 영남학파는 경상도 쪽입니다.

조선시대 과거급제자들의 지역별 편향을 보면
(실질적으로 핵심인 문과기준에서) 서울쪽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이 기록은 타지역이 넘볼수 없는 수준이예요.
무슨 경상도쪽을 주로 썼다는겁니까?
영남학파가 강성해진 중기무렵엔 경상도 출신들이 (서울 제외하고) 비교적 높아지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에 반해서 평안도 함경도쪽의 서북지방 출신들은 눈에 띄게 차별을 받아 등용되지 못합니다.
오죽이나 서북지방을 차차별했으면 이젠 등용 좀 시키자는 상소문까지 올리는 신하들도 나왔겠어요?

그리고 호프님 말씀 중에...호남(전라도)쪽도 별로 없었다? 무슨 근거로 그러시는지?
조선시대에 특별히 전라도 출신들이 과거등용에서 차별받았단 얘긴 들어본 적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자료가 있으시면 알려주시길. 첨 듣는 얘기네요.
(고려시대엔 태조 왕건이 훈요십조에서 전라도쪽 사람들 등용하지 말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기사 읽어보세요.
이남희 원광대학교 한국문화학과 교수의 글인데
조선시대 과거 관련 부분만 퍼왔습니다.

->
조선시대에는 원칙적으로 양인 이상이면 과거에 응시해 관료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근대 이전 시대에 시험을 쳐 인재를 충원한 나라는 중국?조선?베트남뿐이다. 다른 나라의 지배층은 무사계급의 후예들이었다. 같은 아시아에 속하는 일본의 경우 과거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측면에서 조선의 과거제가 갖는 일단의 선진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과거제의 전통은 문인이 지배층을 구성하는 사회 구조와 맞물려 있었다. 의 ‘위령공편’을 보면 ‘학야녹재기중(學也祿在其中)’이라는 구절이 있다. 녹(祿)이라는 것은 공부하는 데 자연스레 있다는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과거 시험을 통과하면 경제적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물론 나아가 국가의 정치에도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는, 아니 공부는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던 것이다.

그랬던 만큼 조선시대 과거 시험에서 제일 중시되었던 것은 문과(文科)였다. 무인을 위한 무과나 기술관을 위한 잡과 역시 과거제의 일환을 이루었지만, 부차적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문과 시험은 초시?복시?전시 등 3단계로 구성돼 있다. 3년마다 치르는 정기 시험으로 식년시(式年試)라고 불렸다. 그 외에 비정기적인 별시(別試)가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정기 시험인 식년시에서 1차 시험인 초시의 경우 지역할당제가 있었다는 점이다. 초시 합격자 240명의 내역을 보면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한 관시(館試)에서 50명, 서울 거주자들을 대상으로 한 한성시(漢城試)에서 40명, 도별 거주자를 대상으로 실시되는 향시(鄕試)에서 150명을 선발했다.

향시 150명의 지역별 할당량은 경상도 30명, 충청·전라도 각 25명, 경기도 20명, 강원도평·안도 각 15명, 황해·함경도 각 10명이었다. 이렇게 지역할당제를 적용한 배경은 지역별 인구를 염두에 둔 안배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 240명을 대상으로 복시에서 33명을 선발했다. 왕 앞에서 치르는 전시는 33명에 대한 최종 등위를 매기는 시험이었다.

초시에만 지역할당제 적용해

이 같은 지역할당제는 초시에만 해당되었으며, 복시나 전시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면 최종 시험을 통과한 합격자 중에서 서울 거주자의 비율은 어떠했을까? 문과 합격자들의 거주지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서울 거주자의 비율은 무려 44%에 달한다.

1차 시험에 적용했던 지역할당제가 최종 시험 결과에 미친 영향은 시험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난다. 최종 문과 시험 합격자의 서울 거주자 비율을 보면 정기 시험인 식년시에서는 26.2%에 불과하지만 비정기 시험인 각종 별시에서는 53.4%로 높게 나타나고 있다.

식년시 합격자에서 서울 출신 비율이 낮은 것은 지역할당제가 적용되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다시 말해 지방 출신들에 대한 비율이 높았다. 하지만 지역할당제가 없는 비정기 시험에서는 서울 출신이 단연 두드러졌다.

다음으로 무과(武科) 시험은 문과 시험과 마찬가지로 정기 시험인 식년시와 비정기 시험인 각종 별시로 나뉜다. 3년마다 시행하는 식년 무과는 초시·복시·전시 3단계로 치러져 총 28명을 선발했다. 초시는 서울 훈련원에서 주관하는 원시(院試)와 각 도의 병마절도사가 주관하는 향시(鄕試)가 있었다. 이 향시에 지역할당제가 적용되었다.

초시에서는 190명을 선발했는데 원시에서 70명, 향시에서 120명을 뽑았다. 향시는 경상도 30명, 충청?전라도에서 각 25명, 강원?황해?함경?평안도에서 각 10명을 뽑았다. 문과 시험과 같이 2단계(복시)·3단계(전시) 시험에서 지역별 안배에 관한 제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합격자 배출에 있어 지역 간의 격차가 심했다.

더욱이 비정기 시험인 각종 별시는 초시·전시 2단계로, 서울에서 보는 것이 원칙이었다. 선발 인원은 적게는 10여 명, 많게는 수백에서 수천, 심지어 1만여 명을 뽑기도 했다. 따라서 자연히 서울 출신이 많이 선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기술관의 등용문이라고 할 수 있는 잡과 시험(역과·의과·음양과·율과)에는 지역할당제가 없었다. 향시(鄕試)는 잡과 시험 중 역과의 한어과(漢語科)에만 실시되었다.

한어과의 초시 선발 인원 45명 중 역과 시험의 주무관청인 사역원이 주관하는 사역원시에서 23명을 선발하고,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각각 7명, 15명을 선발했다. 황해도와 평안도에서만 향시가 실시된 것은 이곳이 중국 사행(使行)이 지나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별 인재할당제를 적용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대략 위에서 본 것이 인재를 충원하는 시험 운영 방식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울 집중도는 높아졌으며, 지역 간의 격차도 커졌다. 영남 사림의 세력이 강성해짐에 따라 경상도 출신 합격자도 많이 나오게 되었다. 더욱이 심한 차별을 받는 지역이 드러나게 되었다. 바로 서북(西北) 지방이 그러했다.

인조 3년(1625) 10월18일, 인조는 이렇게 하교했다.
“하늘이 한 시대의 인재를 내는 것은 한 세상의 쓰임에 넉넉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어진 인재의 출생이 어찌 남방과 북방의 다름이 있겠으며, 참마음을 지닌 하늘이 어찌 지역을 가릴 리 있겠는가. 우리나라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길은 그 범위가 넓지 않아서 서북 지방의 인재는 절대로 수용하지 않고 있다.

간혹 종사하는 자가 있어도 모두 긴요한 직임이 아니니 이것이 어찌 어진 이를 기용함에 있어 신분을 따지지 않는다는 뜻이겠는가? 더구나 북방은 풍패(豊沛 : 중국 한 고조유방의 고향. 제왕의 고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널리 쓰임. 함흥은 조선조 태조 이성계의 고향이므로 견주어 한 말임)인 옛 고향이고 서쪽 지방은 중흥의 근기(根基)인데, 서북 지방에 어찌 쓸 만한 인재가 없겠는가. 서울의 자제들은 별다른 재주나 행실이 없는데도 아침에 제수했으면 저녁에는 승진시켜 100리 되는 지역의 수령으로 내보내는 데 반해 먼 지방의 준걸들은 지식이 있어도 재능을 지닌 채 헛되이 늙어가면서 문지기나 야경꾼 같은 직임을 면치 못하니, 나는 이를 통탄스럽게 여기고 있다.

예조로 하여금 남방과 북방에 구애되지 말고 고르게 인재를 등용해 공정한 국가의 도리를 보여 어진 사람이 버려지는 일이 없게 해야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서북 지방은 서울은 물론이고 삼남(三南 : 충청?전라?경상도)에 비해서도 차별받고 있었다. 인조 2년(1624) 1월5일 조강(朝講)에서 특진관(特進官 : 경연에 참시(參侍)해 왕의 고문에 응하는 관리) 이서는 이렇게 아뢰고 있다.

“서북지방이라고 인재가 없는 것이 아닌데 국가에서 거두어 쓰는 것은 삼남의 경우와 다른 점이 있으니 ‘차별 없이 훌륭한 인물을 뽑아 쓴다(立賢無方)’는 뜻에 맞는 도리가 아닙니다.”

그렇다. 인재의 출생이 어찌 남방과 북방의 구별이 있겠는가? 하늘이 그런 차별을 했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같은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서울 출신들은 승승장구하고 지방 출신들은 한직에 머물러 있는 시대였던 것이다. 그래서 인조는 서북(西北) 지방의 인재도 고르게 등용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서울은 물론 삼남에도 밀린 서북 출신들

이후의 실록에서도 서북인을 등용하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1654년 5월1일 효종은 북쪽 지방의 인재를 수용해 그들의 마음을 뭉치도록 해달라는 비변사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2년 후 효종은 친정(親政 : 임금이 직접 실시하는 인사 행정)하면서 “처음 입사(入仕)하는 사람은 서울의 권세 있는 집안 자제로 충차(充差)할 필요 없이 충신과 효자의 자손을 재능에 따라 참작해 기용하고 서북지방 사람들도 의당 기용해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라”고 지시했다.

숙종 때도 서북지방 인재를 발탁해 쓰게 한 예가 있다(숙종 12년 12월17일). 숙종은 1703년 9월25일에도 “몇 해 전 관서 사람 양현망이 잠깐 청요직에 의망되었다 이내 막혀 버리고, 그 후로는 하나도 통청(通淸)된 사람이 없었다. 똑같이 한 나라의 인재인데도 버려두고 있으니, 원근을 똑같이 대하는 뜻이 아니다.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고 물었다.

이조판서 이유가 대답하기를 “하늘이 인재를 낼 때에는 서북지방을 차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도 출중한 자를 뽑는다면 어찌 한둘의 쓸 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마땅히 신하들과 상의해 통청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숙종은 중론이 하나로 모이기를 기다리자면 실로 기약할 날이 없을 것이니 결단하여 서북지방 인재를 수용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무반의 청요직이라고 할 수 있는 선전관(宣傳官)만은 끝내 서북인에게 천거를 허락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인재 충원의 근간을 이루던 과거제는 공식적으로 고종 31년(1894) 갑오경장 실시와 더불어 폐지되었다. 하지만 과거제가 남긴 유산을 우리는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나친 교육열 역시 과거제의 유산과 무관한 일은 아닐 것이다. 대학 입시나 고시에 대해 갖는 열기와 관심은 어쩌면 지난날의 과거에 대한 전 국민적 열병일지도 모른다.

정작 개인의 능력보다 그 사람의 출신과 배경을 중시하는 사회 풍조가 그런 현상을 한층 더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교육백년지대계’(敎育百年之大計)라는 말은 이미 상투적 어구가 되어 버린 듯하지만, 그럼에도 그 말이 담고 있는 무게와 함의는 지금도 여전히 새롭게 다가온다.

더구나 점차 국경이 무색해지는 세계화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로서는 국제경쟁력을 가진 좋은 인적 자원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장기적인 생존 전략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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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프 2006-10-04 11:54:00
    하하..제 부정확한 이야기에도 '서북지방에서 등용하지 않았다'는 부분 만큼은 님과 일치합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 우선 지역할당제가 '초시'에만 적용되었고
    - 서울거주자의 비율이 높았다
    는 게 위 교수님 말씀이네요.

    제 이야기 중 상충되는 부분은 결국
    - 그 당시에도 영남 세력이 컸나? 라는 말이고
    ( 이점에 대해 이미 님도 '조선중기 이후에는..'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 그 당시에도 호남 인재의 진출이 없었나? 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쓴 글 보시면 아시겠지만 호남에 차별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호남에 인재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당시 인재란 성리학/주자학의 '서원'에서 배출됩니다.
    쟁쟁한 서원들은 영남에 그 밀도가 높습니다.

    호남에 밀도가 낮았던 것은 제가 어느 글에서도 썼지만, 지리적인 이유가 큽니다. 호남은 빈농/소작과 대지주 간의 분화가 심한 지역입니다. 자영농과 중소지주를 기반으로 하는 성리학자들의 배출이 취약했습니다.

    전남 장성에 가면 구호가 '글이라 하면 장성만한 곳이 없다 (文不如長城)'인데..장성에조차 이렇다할 서원이 없었습니다. 장성에서 난 성리학 철학자가 있었나요?

    제 말의 핵심은, 이씨 조선 권력 기반의 핵은 결국 '서원, 향교'의 세를 보면 알 수 있다란 이야기입니다.

    '서울지역 거주자'라고 되어 있는데, 아마 한번 더 까면 그 '서울지역 거주자'의 집안 뿌리가 나올겝니다. 그럼 태반 이상이 영남일겁니다.
    (이조때 서울 거주자 10만 좀 넘는 수준일 것입니다.)

    오리지날 서울/경기 출신들이 진짜 비중을 높게 차지한것은 오히려 무관쪽이 가까울 것입니다. 지금 파주, 김포 이런 데에 무관들 집안이 꽤 살았던 것으로 압니다. 무술이니까....그거 배우고 가르치고 노하우 주고 받는 커뮤니티가 있어야지요...그러니까..군대하고 가까이 있게 됩니다. 즉 서울과 가까이 있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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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10-05 11:02:11
    호프님 믿을만한 자료 제시하세요.
    그냥 막연하게 카더라~ 이런 얘긴 사양합니다.
    이랬더라 저랬더라..그냥 자기 생각 읊조리는거 누가 못해요?
    첨 듣는 얘기들이니깐 보다 신빙성 높은 자료 제시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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