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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으로부터의 탈출
REPUBLIC OF KOREA LATimes 3 439 2006-10-20 06:38:35
인터넷을 통해 지원된 위험한 여행이 탈북 난민들에게 미국에 정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도와주세요. 저는 중국인과의 결혼으로 인해 노예가 된 북한 사람입니다."

지난 2월, 데보라는 은밀히 그녀의 탄원을 그녀가 찾아낸 웹 사이트의 인터넷 검색 내용에 “탈북자”(북한으로부터의 탈출자라는 한국 말)라는 이름으로 게시했다.

답장은 그녀를 서울의 천기원목사에게 인도했다. 그의 지하 탈출망은 중국을 벗어나 남한에 도착한 500명 이상의 탈북자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데보라는 2년 전에, 그녀가 북한의 숫처녀를 찾고 있는 부자 중국인과 결혼을 한다면 그녀의 굶주리는 가족들을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했던 브로커를 따라 세계에서 가장 폐쇄된 나라로부터 피신을 했다.

그러나 사실은, 25세의 여성이 북경의 남자에게 성 노예로 팔려간 것이다. 거기에는 결혼이라는 것은 없었다. 데보라를 산 사람은 그녀에게 만일 그녀가 감옥처럼 갇혀 있는 방을 나오면 경찰(경찰의 방침은 모든 탈북자들을 북송시키는 것이다)에 신고 하거나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목사님, 저를 도와주실 수 있나요?” 데보라는 애원하였다. “저는 저의 인생을 그 남자의 성 노리개로 허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올해 초, 천 목사는 중국의 탈북자 들로부터 보내오는 수많은 구조요청 이메일을 받았다. 그중에 중국을 벗어나려다가 실패하여 북한의 수용소에서 고문을 당한 오빠와 그의 여동생이 보내 온 내용도 있었다. 그 오빠는 13살 때 굶주리는 가족을 위하여 음식을 구하려고 처음으로 두만강을 넘었다. 그리고 여동생은 시골의 농부들에게 아내나 성 노예로 팔려갔다.

그들의 헤어짐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지만, 데보라와 다른 탈북자들은 전례에 없는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재 집필하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미국에 정착을 허가 받는 최초의 탈북자가 되는 기회를 제안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천 목사와 미들랜드의 복음주의 교회 연합과 워싱턴의 보수파 유대인 지도자와 남부 캘리포니아의 한미 교회들과 그 밖의 다양한 후원자들에게 감사를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먼저 그들은 중국 밖으로 몰래 벗어나야만 했다.


비밀과 공포 속의 생활

2백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던 1990년대의 북한의 상황은 그리 비참하지 않았다고 탈북자들은 이야기한다. 그러나 식량부족은 계속되었고 지난주에 국제사회가 시작한 북한 핵실험에 대한 제재조치와 같은 여건들은 더욱 악화되었다. 수만 아마도 수십만의 북한 사람들이 값이 싼 야채와 고기와 김치가 유혹하는 중국에서 불법 체류 중이라고 생각된다.

탈북자들이 그들의 배를 채울 수는 있지만 생활 여건은 험하다. 그들은 체포되고 중국의 더러운 구치소로 보내지고, 많은 수감자들이 죽거나 사형당하는 북한의 수용소로 보내지는 현실의 공포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 중의 수백 명의 탈북자들을 천 목사가 남한에서의 안전을 찾도록 도왔고,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수용소에서와 같은 북한과 중국의 학대를 고발했다.

(사진설명) LA 한인 감리교회의 성도가 탈북자 나오미(카메라를 등지고 있음)를 안아주고 있다. 나오미는 천기원 목사가 세운 사역팀과 안전가옥의 비밀 탈출로를 통하여 입국한 여러 명의 탈북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 구조자는 엄청난 위험 속에서의 임무를 잘 수행하였다. 천 목사의 동료 중의 한 사람은 탈북자들이 튜브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것을 돕는 과정에서 익사하였다. 다른 다섯 명의 동료들은 중국의 감옥에 수감 중이다. 이전의 사업가였다가 목회자가 된 천 목사는 그가 몽고 국경으로 인도하던 탈북자들이 체포되고 그를 주범으로 지목하여 2002년에 중국 감옥에서 7개월 동안 갇혀있었다. 탈북자들의 고통은 천 목사에게 아픔을 준다.

그가 말하기를 탈북자들의 이메일에 적혀 있는 고통스러운 내용들이, 그에게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도와주게 만든다고 하였다.


생명의 선 이메일

중국을 벗어나서 천 목사를 향한 데보라의 여행은 그녀를 사온 사람이 그녀에게 방에서 컴퓨터를 통하여 어떻게 비디오 게임을 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주면서 시작이 되었다.

그 후에는 데보라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도록 고용된 개인 강사가 어떻게 인터넷을 사용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천 목사는 데보라의 이메일을 받은 후에, 그녀에게 메신저를 통하여 네 시간동안이나 질문을 할 수 있었다. 확신에 찬 데보라는 진실을 말하였고, 그는 그녀에게 북경에서 버스로 7시간 거리에 있는 심양으로 즉시 떠날 것을 지시했다. 데보라를 산 사람은 그녀가 음식을 구입하기 위해 외출하는 것을 조금씩 허용하였고, 그녀는 모아두었던 돈으로 차표를 구입하였다.

심양에서 연락했던 천 목사는 그녀를 만나서 자유를 향한 출발을 할 때까지 지낼 안전한 장소로 데려다 주었다.

(사진설명) 왼쪽의 탈북자 신찬미가 터스틴에서의 저녁약속을 위하여 미니 밴에서 내리는 크리스틴 김과 여동생 에밀리를 돕고 있다. 크리스틴과 에밀리 자매는 어바인의 베델 한인교회의 성도이며, 그 교회는 전국적으로 2,000여개 이상의 교회가 소속되어 있는 연합체에 속해 있다. 그리고 그 연합체는 미국에 정착하는 탈북자들을 돕기 위하여 일자리와 식사와 숙소를 제공한다.


도망치는 남매

북한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여동생은 오빠의 도움으로 여정을 시작했다. 그 오빠의 이름은 요셉으로 현재 32세이며 1998년에 처음 중국으로 탈출했었다. 그는 천 목사에게 처음부터 북에 남겨둔 여동생 찬미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국경 경비대를 피해 두만강을 건너서 가까운 친척집에 있었지만 굶주림에 지쳐있는 십대 소녀였다. 찬미는 지금 20세로 어머니를 위하여 쌀을 가지고 북한의 집으로 돌아갔다가,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몇 번의 월경을 한 후에 중국에 남기로 결심을 했었다.

그 이듬해, 그녀는 납치됐고 그녀를 겁탈하고 학대하는 남자들에게 두 번이나 팔려갔다. 그녀가 중국을 떠나 몽고로 가려고 하다가 체포된 후, 그녀는 북한의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그곳에서 19개월의 강제 노동을 하였다. 노동 단련대에서는 재소자의 5분의 3이 매일 죽었으며, 폭력과 굶주림이 계속되었다.

2년 후인 2005년 9월, 찬미가 석방될 때에 그녀는 반은 죽은 것 같았다고 요셉은 천 목사에게 편지를 썼다.

그녀는 몇 달 후에 회복이 되었고, 중국으로 다시 떠났다. 그리고 또 납치되어서 북경 남동쪽의 산동성으로 노예처럼 2,300달러에 팔려갔다.

그녀는 결국 핸드폰으로 오빠 요셉과 연락을 취할 수 있었고, 요셉은 깊은 시골에 있는 여동생을 구해 오기 위하여 차를 빌려서 네 시간을 달려갔다. 그들 남매는 8년만에 다시 만난 것이었고, 요셉은 이메일을 통하여 천 목사에게 “제 여동생을 구해주세요.”라고 애원하였다.

(사진설명) 왼쪽의 신찬미와 오빠 요셉이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연주 실황을 보고 있다. 요셉은 앞에 "same same"이라고 쓰여졌고, 뒤에 "But Different"라고 쓰여진 티셔츠를 입고 있다. 20세의 찬미는 LA로 가는 도중에 공항 판매점에서 15달러에 구입한 동물인형을 갖고 있으며, 한 번도 내려놓지 않았다.


피신해야만 하는 아내

그러는 동안, 천 목사는 한국의 대학생으로부터 33세의 나오미라는 탈북자에 대한 조심스러운 이야기를 알게 됐다. 그 대학생은 '몸챗'이라는 웹사이트를 통하여 그녀를 만났으며, 그것은 고객이 돈을 지불하면 웹 카메라 앞에서 여성이 옷을 벗는 사이트였다.

1998년, 나오미는 중국에 사는 할머니와 이모를 만나도록 도와주겠다는 남자를 따라서 북한을 떠났다. 그러나 그녀는 500달러에 다른 남자의 아내로 팔려갔으며, 그 남자는 그녀를 노예처럼 부렸다. 그녀는 7개월 후에 달아났으며 중국 북동부에 사는 친척들을 찾았고, 중국남자와 결혼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임신 8개월이 되었을 때, 경찰이 그녀의 집으로 들이 닥쳤다. 수갑이 채워진 그녀는 다음날 아침에 북송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 경찰들은 친척들로부터 600달러의 뇌물을 받은 후에 그녀를 풀어주며, 일 년 후에 북한으로 돌려 보내겠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나오미의 아기가 태어난지 6개월이 되었을 때 경찰들이 그녀를 집 밖으로 끌어냈으며 북송시켜서 북한의 노동단련대에서 눈 덮인 산의 목재를 나르는 일을 하게 했다.

그녀는 다시는 북한에서 달아나지 않겠다는 반성의 연설을 한 후에 풀려 났으며, 곧 기운을 회복하여 남편과 아이를 만나려고 중국으로 몰래 돌아왔다.

(사진설명) 오른쪽의 신찬미와 오빠 요셉이 디즈니랜드에서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허풍을 떨고 있다.

가족 재회는 경찰의 추격으로 하루만에 끝이 났다. 나오미는 경찰이 자신을 찾는다는 것을 알고서 피신하였으며, 그녀가 큰 도시인 대련으로 달아나서 '몸챗'을 하였다. '몸챗'의 수입은 주당 200달러였으며, 그것은 그녀의 아이에게도 보내고 약간의 돈을 모으기에 충분하였다.

나오미는 천 목사에게 그녀가 자살을 생각해 보았다고 말하였으며, 자살을 망설이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의 남편과 아이가 저를 많이 사랑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고 진실된 삶에 인도되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제 아이를 위하여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중국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탈북자 이기 때문입니다.”


백안관에 탄원

천 목사는 나오미와 요셉과 찬미와 데보라와 그 외 탈북자들의 애원을 많은 시간동안 심사숙고하였다. 그는 미국정부가 2004년도에 제정된 법률의 핵심인 탈북 난민의 미국입국을 허용하는 부분이 아직 이행되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잘 알고 지내는 사람들을 동참시키기로 계획을 세웠다.

천 목사는 영어로 번역된 편지들을 자주 만나는 텍사스주의 데보라 파잌스에게 보냈다. 데보라 파잌스는 49세로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인권운동 단체인 텍사스의 미들랜드 목회자 그룹을 인도하는 사람이다. 이 그룹의 편지지 상단에는 “조지 부시와 로라 부시의 고향”이라는 문구를 사용함으로 대통령과의 연관성을 강조한다.

200여 개의 기독교, 천주교, 복음주의 교회 단체들이 모여서 종교의 자유를 포함한 국제 인권문제를 촉진시키기 위하여 미국의 외교 통상정책이 그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 연합체의 후원자는 논리적이거나 정치적인 장애물들이 탈북자들의 입국을 막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04년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북한 인권법안을 통과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사진설명) 왼쪽의 나오미와 신찬미가 LA 한인 감리교회에서 그들을 위한 기도를 천 목사가 인도하는 중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 탈북자들은 미국 정착을 위하여 비밀 탈출로를 통하여 처음으로 입국한 일행 중 일부이다.

텍사스 억양의 고상한 여성인 파잌스는 탈북자들의 애원 때문에 깊이 관여하게 됐다고 말했다.“그 여성들은 인신매매의 피해자들이고, 그것은 항상 저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라고 말하며 그녀는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겼다. 주간 회의에서 이 연합체는 탈북자 각각의 이름 (데보라, 나오미, 요셉, 찬미, 요한, 한나)을 놓고 기도를 시작하였다. 요한은 13세에 두만강을 통하여 중국으로 건너가기 시작했으며, 다른 선교사의 안전한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한나는 35세로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 딸의 운동화를 사기 위해 중국으로 여행하는 동안 수면제를 먹여서 납치되고 팔리게 되었다.

파잌스는 나오미와 통역자를 통한 메신저를 이용하여 대화를 나누었으며, 나오미에게 “저는 당신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머지 않아 당신을 곧 만날 것이라고 믿습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파잌스는 천 목사에게 그들의 사연이 담긴 편지를 그녀와 개인적으로 절친한 사이인 부시 대통령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과 함께 발송했다고 말해주었다. 파잌스는 그녀가 직접 부시 대통령에게 편지를 전할 수는 없지만 국무부와 국토안보국의 정확한 경로를 통하여 편지를 전달했다고 알려주었다.

3월, 천 목사는 평소 가까이 지내던 인권 행동가 마이클 호로위츠를 만났다. 그는 법률가이자 전직 대통령인 레이건의 자문을 지냈으며, 워싱턴에 있는 국제 종교의 자유를 위한 보수성향의 허드슨 재단의 책임자이다.

호로위츠는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빌리 그레함 목사와 테레사 수녀의 영향을 받아 1997년도 남부 침례교 잡지에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인 10인 중의 한 명으로 등재되기도 하였다. 호로위츠는 박해를 받는 다른 종교 그룹들이 했던 것처럼, 외국에서 박해를 받는 기독교인들을 미국에서 난민으로 인정하는 법안을 위하여 활동을 하였다.

(사진설명) 서울에 본부를 둔 두리하나 선교회의 미국 지부인 LA 한인 감리교회에서 천 목사가 탈북자들을 위한 기도를 인도하고 있다. 이 예배에서 교회 성도들은 천 목사의 비밀 탈출로를 통한 더 많은 탈북자들의 중국 탈출을 돕기 위해 15,000달러 이상을 모금하였다. 사업가에서 목회자로 변화된 천 목사는 서울에 살고 있으며, 1999년 중국을 방문한 이후로 탈북자들을 돕고 있다.

북한 인권법의 초안 작성에 도움을 주었던 호로위츠는, 감옥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북한 사람들의 고난에 동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히틀러의 집단 수용소 체제에서, 그들이 더 열심히 더 지혜롭게 했더라면 더 많은 나의 민족을 구했을 것이라고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워싱턴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호로위츠는 국무부에서 약간의 탈북자들의 미국 입국을 동의한 사실을 3월 30일 천 목사에게 알려주었다.

기쁨이 가득한 천 목사는 탈북자 개개인에게 연락을 하여 그들이 미국으로 가기를 원하는지 한국으로 가기를 원하는지를 물었다. 그는 한국의 경우 탈북자들이 의사소통이 되고, 일반적인 문화를 나눌 수 있고, 자동적으로 국적을 취득하고, 3만 달러의 정착금을 받는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많은 탈북자들이 그곳에서 힘겹게 살며 철저하게 현대화된 남쪽에서 이방인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미국의 경우 천 목사의 조언에 의하면, “당신은 아무 것도 없이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열심히 한다면, 당신은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눈 높이를 낮춘다면, 미국은 당신에게 살기 좋은 장소가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탈북자들은 그 결정이 그들을 힘들게 했다고 후에 말했다.

북한에서 그들은 한국은 미국의 꼭두각시와 같은 나쁜 나라이고 미국은 승냥이와 같다고 배웠다. 천 목사의 조언은 그들이 중국에서 미국에 관하여 들었던 것보다 더 호감을 주었고, 자극을 받은 찬미와 나오미와 요셉과 한나와 요한은 미국을 선택했다. 데보라는 울면서 서울행을 결정했다. 그리고 안전한 가옥에서 함께 지내는 다른 두 여성과 합류했다.

(사진설명) 탈북자 신요셉이 북한에서의 그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그는 중국으로 탈출하였으나 여자 친구와 함께 몽고로 가다가 중국 공안에게 체포되었다. 그리고 북한의 감옥으로 보내져서 고문을 당했다. 그는 중국으로 다시 도망 하였으며 그의 여동생 찬미를 8년 만에 다시 만났다. 이들 두 사람은 현재 뉴욕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데보라는 몇일 후에 천 목사로부터 그들이 미국으로 향하기 위하여 금방 출발했다는 연락을 받고서 마음이 흔들렸다. “만일 당신이 미국으로 가고 싶다면 지금이 기회입니다.”라고 천 목사는 메신저를 통하여 말했다. 데보라는 요한과 한나를 만나서 중국 서부로 4일 동안 기차를 타고 가기 위해 북경으로 가는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렀다.

한 편, 나오미는 그녀가 모아둔 돈으로 대련으로 가기 위해 요셉과 찬미의 기차표도 함께 샀다. 이들 두 그룹은 곤명으로 집결했고, '챤'이라고 불리는 부로커에게 13,200달러(일인당 2,200달러)를 주고 동남아시아로 그들을 안내하게 했다. 그들은 그들의 중간 도착지인 태국으로 가기 위해 삼일 동안 버스로 이동을 하였다.

천 목사는 약속 시간인 4월 14일 오후 8시에 매콩강 건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났다. 차 한 대가 와서 탈북자들의 가방 세 개를 전달해 주었으나 그들은 없었다. 천 목사의 핸드폰이 울리기까지 다시 한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오늘 밤에 못갑니다.” 그 부로커는 천 목사에게 간단하게 말하며, 다음날 오전 10시에 강을 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은 경찰과 국경 경비대에게 한 눈에 들킬 수 있는 시간이다.

다음날 아침 여섯 명의 탈북자들은 아침 식사 후에 선착장으로 향했다. 약한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그들은 가는 줄을 잡고 길고 좁은 보트에 올랐다. 그 배는 강기슭을 떠나 30분 정도를 달렸고, 하늘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곧 이어, 억수 같은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고, 그들은 겨우 앞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경찰과 국경 경비대들은 초소로 달려갔고, 탈북자들은 아무런 사고 없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흠뻑 젖었지만 생기가 넘쳤다. 그들은 천 목사와 포옹을 하였으며, 방콕의 미국 대사관으로의 마지막 일정을 위하여 기다리고 있는 미니버스에 올랐다. 그들은 방콕에 있는 천 목사의 안전가옥에서, 미국으로 가는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747기에 몸을 실을 때까지 두 주 동안 숨어있었다.

(사진설명) 탈북자들이 LA의 외신 기자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천 목사가 눈물을 닦고 있다. 이 탈북자들을 미국으로 망명이 허용된 최초의 일행이다. 천 목사는 그의 비밀 탈출로를 통하여 중국에서 남 몰래 살아가는 500명 이상의 탈북자들에게 자유를 안겨 주었다.



결국, 자유를 맛보다.

뉴저지 북동부의 뉴왁 (Newark)에 도착한지 두 주 후에, 그 탈북자들은 국회의원들에게 증언하고, 한미 교회 사람들과 축하를 하면서 워싱턴에 있었다.

그들은 관광객들처럼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며, 그들의 고향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청바지와 밝은 색상의 스포츠 의류를 입고 워싱턴과 링컨 기념관에서 사진도 찍었다.

워싱턴에서 몇 일을 지낸 후인 5월 21일, 탈북자들은 LA와 오렌지 카운티의 교회에서 그들을 안아주고 꽃다발도 주며 만남의 시간을 갖기 위해 모인 몇 몇의 한미 목회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LA로 날아갔다. 그것은 그들이 오랫동안 기도해 왔던 그 날이었다.

대부분 영양실조로 키가 겨우 150cm에 지나지 않는 북한 사람들은 진저리 쳐지는 과거와 화려한 현재의 삶을 생각하며 슬픔과 기쁨 가운데서 대부분 끈임 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북한에서 정기적으로 그들이 목격하여 온 공개처형의 몸서리 나는 상황과 어떻게 그들이 굶주림을 면하기 위하여 풀과 나뭇잎들을 모았는지 대하여 각각 일분씩 말하였다. 다음날, 그들은 호텔에서 천 목사와 함께 베게 싸움이나 한국 식당에서 접시에 음식을 채우며 웃으며 지냈다.

(사진설명) LA에 머무는 동안 천 목사가 찬미와 베게 싸움을 하고 있다. 이 여섯 명의 탈북자들이 그들에게 출국허가를 내어 줄 인정이 있는 나라로 가기위해 중국을 벗어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LAX호텔에서의 기자회견에서 탈북자들은 만일 그들의 신분이 알려지면 아직도 북한에 있는 가족들이 받게 될 보복을 두려워하여 선글라스와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그들의 얼굴을 가렸다.

찬미는 그녀가 '바둑'(내 친구)이라고 부르는 하얀 곰 인형을 가지고 연단으로 점잖게 걸어 나갔다. 그 인형은 그녀가 공항 숍에서 15달러를 주고 산 이후로 한 번도 내려놓지 않았다. 원고 없이 이야기를 하였으며, 그녀는 북한의 죄수들의 시체가 어떻게 트럭에 실려지고 산에 매장되는가에 대하여 설명했다. “우리는 그 시신들을 개처럼 하나씩 잡고서 마당으로 질질 끌고 갑니다. 우리는 사방 60cm의 구덩이를 팝니다. 그리고 매장하기 전에 삽으로 시신의 뼈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부러뜨립니다.” (자신의 형량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은 시신에 대한 북한의 처벌 방법이다).

난민들에게 억압이 끝나려면 무엇을 해야 하냐고 물었을 때, 찬미가 '바둑'을 손에 든 채로 “저는 김정일이 죽기를 원합니다.” “저는 국제 기자 분들에게 김정일이 죽기를 기도해 달라고 요철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여 단상을 다시 한 번 흥분하게 했다.

방청객들은 웃었고, 김정일은 자신의 명령에 충성하는 북한 군대의 총살형이나 교수형으로 확실하게 죽게 될 것이라는 진술로 방향을 바꾸었다.

LA와 오렌지 카운티에서의 5일 동안, 탈북난민들은 관광도 할 수 있었다. 찬미는 특별히 아더왕의 목마를 두 번이나 탔던 디즈니랜드에 매혹되었다. 그녀와 요셉은 겉보기에는 그것들의 상징성을 모르는 것처럼 춤추는 동물들과 작은 사람 모형들에게 매료되었으며, 그들이 작은 세계를 달리는 것처럼 정신없이 낄낄 대며 웃었다.

“만일 지구상에 이러한 장소가 있다면 그곳은 정말 아름다울 것입니다.” “천국이 어떤 곳인지 저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즐거움은 호텔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잠자는 그녀에게 악몽을 주었다. “저의 뼈를 부러뜨리지 마세요. 저는 아직 살아있어요. 저는 아직 살아있어요.” 그녀는 자는 동안 한국말로 잠꼬대를 하였다.

(사진설명) 왼쪽의 탈북자 하나와 나오미가 LA에서 열린 단독 기자회견에서 함께 온 탈북자들이 북한과 중국에서 당한 고문과 학대에 대하여 증언하는 동안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 증언은 그들이 억압된 고향 땅과 몰래 숨어살던 중국에서 당한 아픈 기억을 되살리게 했다.


새로운 기회들

그들의 일 년짜리 노동허가와 사회보장 번호, 탈북자들은 학교에 등록하거나 일을 할 수 있다. 그들은 일 년 후에 영주권이 주어질 것이고, 4년 후에 미국 시민권이 주어질 것이다. 전국적으로 2,300여개의 미국 내 한인 교회 연합은 숙소를 제공했고, 일자리를 제공했다.

그러나 먼저, 이 탈북자들 에게는 그들이 살기를 원하는 장소를 결정한 후, 국제 난민 위원회로부터 몇 주 후에는 그들이 미국에 입국하였던 뉴저지로 돌아갈 것이 요구됐다.

롱 비치 공항에서 나오미와 찬미는 천 목사(찬미는 천 목사를 아빠라고 부름)와 작별을 하면서 울었다. 천목사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찬미는 보안 구역을 통과한 후 한참동안 떠나기를 망설였다.

나오미는 천 목사에게 2,000달러를 다른 탈북자들을 도와주는데 사용해 달라고 전해 주려고 하였다. 그 돈은 한국 교회 연합이 탈북자 각자에게 준 돈이었다. 천 목사는 받기를 거절했지만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가 한국에 성공적으로 입국시킨 탈북자들의 일부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어떤 것이라도 후원을 한다.

“이러한 탈북난민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천 목사는 이 그룹을 가리켜 말했다. “이들은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졌습니다.”

(사진설명) LA의 기자회견장에서 20세의 신찬미가 외신기자들에게 자신의 사연을 말할 때 왼쪽의 천 목사가 그녀를 격려하고 있다. 그녀는 그녀를 강간하고 욕하는 중국 남자에게 아내로 팔렸다.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가는 탈북여성의 대부분은 곧바로 팔리거나 후에 남의 아내나 성 노리개로 팔린다고 탈북자들이 증언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중국으로 불법 입국을 했기에 체포되면 북한 수용소로 강제 송환이 당하기 때문이다.


후 기

뉴욕에 사는 데보라는 영어를 공부하며 일식당에서 일을 한다. 그리고 치과 의사가 되는 것을 생각 중이다. 나오미는 워싱턴 인근으로 이사했고, 양재 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등 하교를 위해 각각 두 시간씩을 투자한다.

한나는 한인 교회에서 제공하여 준 부에나 팤 타운의 집에 살며, 현재 운전면허 필기시험에 합격하여 흥분해 있다. 요한은 뉴저지의 빵 집에서 일한다.

찬미는 뉴욕의 네일 숍에서 먹고 자면서 견습생으로 일하며, 수입이 괜찮은 날은 80달러에서 100달러 정도를 번다. 요셉은 뉴욕의 공사장에서 임시직으로 일한다. “그는 돈을 너무 많이 씁니다. 그는 자동차를 사려고 돈을 모으는 중입니다.” 천 목사는 그가 화를 냈다가 회개를 했다가를 번갈아 한다고 말했다.

여름이 지나 세 명의 탈북자가 또 미국에 도착했다. 이 경우는 중국에서 직접 왔으며 북경의 반응은 거리를 두고 여유로 운 것 같았다. 국무부의 고급 관리는 정부는 모든 탈북자들을 환영하며, 교회들을 설득시키는 중이고, 후원자들이 그들을 찾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 진행 속도는 늦다.

그러는 동안 천 목사는 미국에서 입국이 승낙되어 동남아시아에서 출국허가를 기다리는 또 다른 여러 명의 탈북자들을 데리고 있다. 그들 중에는 찬미와 요셉의 어머니도 포함되어 있다.

매일 같이, 천 목사의 메일 박스는 중국의 탈북자들이 그들의 고통을 호소하고 도움을 애원하는 10개~15개의 새로운 이메일로 가득 찬다. 그는 오직 그들에게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빨리 그들을 도울 것이다.

(사진설명) 터스틴에서의 저녁식사 전에 신찬미가 감사기도를 했다. 그녀와 항상 함께 있는 곰 인형을 그녀는 친구인 "바둑"이라고 불렀다. 찬미는 16세 때 굶주림에 지쳐서 북한을 몰래 빠져나와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인신매매와 노예의 굴레에 걸려 들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비밀 탈출로의 도움으로 자유롭게 되었다. 그녀는 현재 뉴욕의 네일 숍에서 견습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valerie.reitman@latimes.com

Valerie.Reitman은 2001년에 천 목사와 함께 중국에 갔던 기자이며 사진작가로, 중국과 몽고 국경의 철조망 밑을 지나 몽고로 탈출하여 한국행을 시도하는 선발되고 보호받는 7명의 탈북자들을 만났다. 자세한 사진과 지난 기사는 ☞ http://www.durihana.com/technote2001/read.cgi?board=LAtimes&y_number=0&nnew=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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