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북한인의 수기 .....(펌) |
---|
저는 1966년 8월 온성에서 태어나서 1982년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함경북도 온성군 강안탄광에 배치받아 일을 하던 중 당에 대한 충성심 부족, 조직 관념 부족,(이런 것으로 인하여 조직적으로 추궁도 받고 비사로청원으로 타락까지 됐음) 로동에 불성실, 사회생활에 충실하지 못한 것 등으로 인하여 1992년 11월, 비사회 주의 구루빠에 걸렸습니다. 구루빠에 걸려 40일간 취급을 당하다 구루빠는 중앙당 정치대학교 학생들로 구성되었는데, 각 기관 기업소의 안전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은 매 사람들의 생활 자료를 보며 불량한 사람들을 불러 가지고 지난 시기 왜 이러한 죄를 지었는가 검토하여 말을 잘 안 들으면 때리고 가두고 손에 족쇄를 채우고 취급이 끝날 때까지 밥을 날라다 먹이고, 취급이 끝나면 그만한 죄 값에 한하여 앞으로의 교양 한계를 만드는 단체입니다. 이들은 각 기관 탄광, 탐사대, 농장 어디든 초급 당부터 시작하여 인민 반까지 있는데, 말하자면 옛날 암행어사 행세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취급기간에는 밖으로 나오지 못해 집사람들도 만나지 못하며, 아무 때라도 이름을 부르면 방에서 나와 조사를 받는데, 그 과정에 솔직하지 못하면 쇠갈구리로 때리거나 구두 발로 차는 등 짐승 취급을 당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집사람들과 쪽지를 왔다 갔다 하였는데 이것이 알려져 죽게 매를 맞고 정신을 잃어 병원까지 실려가는 정도의 개 취급을 당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는 음식을 들어올 때 나갈 때 검사하였고 경비는 더 강화되었습니다. 이렇게 40일정도 취급을 받고 앞으로 생활을 잘 하겠다고 결심서를 쓰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북한 사회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전에 생활을 잘 못하여 탄광안전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사로청에서 조직적으로 비판을 받았는데도 그루빠가 내려와 지난 과거를 들추고 취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가면서 저는 2~3달 강제로동에 1년 로동교양소로 가게 되었는데, 2~3달 강제 로동 과정에 생활을 잘하면 거기서 마칠 수도 있었습니다. 강제로동대 생활과 탈출-첫번째 탈북 1993년 7월 13일 탄광안전부에서 불러서 가니 오후 기차로 온성군에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온성군에는 군당, 군사로청, 군안전부의 주최로 구성된 강제로동대, 즉 꼬빠꾸가 생겨나 구루빠가 만들어 놓은 문건에 따라 교양을 시켰습니다. 이런 교양단위에서는 강한 로동단련을 하였습니다. 강제로동대의 일과는 새벽 4시 30분 기상, 대렬훈련 30분, 구호를 외치며 온성군 시내를 돌고 와 식전작업을 하는데, 일하는 과정에서 걸어다닌 적이 없고 항상 뛰어다녀야 했습니다. 무거운 짐을 들어도 뛰는 흉내를 내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들어와 아침밥을 먹습니다. 밥은 소금국에다 강냉이밥을 물말이 해 주는데 때로는 김치를 준 적도 있습니다. 밥을 먹고 나와서 대렬훈련 하고 오전작업, 점심 먹고 오후작업, 저녁에 대렬훈련, 저녁을 먹고 학습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 10대원칙을 학습하고 저녁8시부터 사상투쟁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제일 싫은 시간이었습니다. 하루 일과과정에서 남들의 결함을 한 가지씩 들춰가지고 비판을 하는데 모임에 늦었다던가 발을 안맞췄다던가 상무들한테 규정을 위반하여 매를 맞은 사람들은 이 시간이면 또 매를 맞고 비판을 받습니다. 비판시간 첫 과정은 그날 입소한 사람들을 앞에 불러내놓고 무엇 때문에 왔는가 인사시키는데, 인사가 옷을 씌우고 모여들어서 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녀불문 나이관계 없이 누구한테나 차려지는 것입니다. 또한 그날 잘못한 사람들이 속한 조는 집체적으로 벌을 받는데 그러면 잘못하지 않은 조 사람들이 잘못한 사람들을 때리게끔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사상투쟁이 끝나면 김일성, 김정일을 우상화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고 내 나라가 제일로 좋다는 노래도 부르게합니다. 정말로 개보다 못한 생활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사회에 대한 분노와 저주 뿐입니다. 나는 더 참을 수 없어 도망을 쳐 집으로 왔다가 잡혀 가지고 너무나도 매를 맞아서 정신을 잃었는데 정신을 차리니 다리가 아파서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다음날 또 일판으로 내모는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세월이 흘러 지금은 글로 쓰지만 그때를 상상하면 말로 다 표현 못합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세상을 저주하다가 또다시 마음먹은 것이 더 이상 못 참겠다. 도망치자. 그리고 잡히지 말자. 몇십번 다짐하고 다시 도망쳐 이리저리 헤매었습니다. 중국에 가야겠다고 결심하고 93년 10월 4일 두만강을 헤엄쳐 중국에 넘어갔습니다. 중국에 처음 간 곳은 연변지대에 개산툰이라는 마을 구석 외골이라 불리는 전기도 없는 산골짜기였습니다. 여기에 있다가 그 집에 놀러온 사위와 딸을 따라 심양으로 갔습니다. 심양에서 옆집의 신고로 심양파출소에 체포, 다음날 료녕성 공안국에 이관되어 4일간 감방생활 하다가 단동으로 해서 신의주로 북한에 북송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체포되어 북송, 구류장에서의 생활 북한에 처음으로 끌려간 것이 93년 11월 26일이었고 신의주 신포량 보위부 구류장이였습니다. 구류장에서는 아침 5시에 기상해서 종일마루바닥에 앉아 있어야 하는데 손은 무릎에 올리고 눈은 정면으로 하여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움직이면 권총소지대로 손을 내밀게 하여 때리고 얼굴에 침도 뱉고, 때로는 문 열고 들어와 발로 차고 손으로 때리며, 때로는 벽에다 거꾸로 세우고 500개 셀 때까지 앉았다 일어났다 몇 백 번을 시키는 벌을 줍니다. 이렇게 하루 종일 앉아 있다가 밥 시간이면 밥을 먹습니다. 때로는 불러내다 조사를 하고 10시~11시에 잠을 재우는데 얼굴은 살창 쪽을 향해 돌아누워야 합니다. 화장실을 본다던가 용무가 있으면 손을 바닥에 짚고 “선생님, 화장실 갈 수 있느냐”고 물어서 보내면가고 안 보내면 못 갑니다. 너무 앉아있기 고달파 좀 움직이려고 변소를 가겠다고 하면 국과 물도 안주고 밥만 줍니다. 이렇게 신의주에서 한달 보름 넘게 있다가 다시 이감되어간 곳이 온성군 동포구류장입니다.이곳은 이전에 종신범, 정치범관리소였는데 해산을 한 후 이 건물을 정치범 보위부 구류장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오니 내 이름은 없어지고 대신 번호가 달립니다. 규정은 비슷하나 사람이 더 많고 감방도 다섯 개고 보위원들의 규정이 더 딱딱합니다. 방 안에 화장실이 있고 겨울에는 찬 마루바닥에서 부들부들 떨며, 움직이면 매를 맞았는데 앉아있기 고달파 오직 움직이며 매 맞는 것이 더 편안하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계호들이 벌주는 방법은 살창 쪽으로 끌어내가지고 살창에다가 족쇄를 걸고 사람의 손목을 걸고 공중에 띄워놓고 때로는 여럿이 들어와서 구두 발로 차고 손으로 때리며 짐승 취급을 했습니다. 자기들의 화가 풀리면 그만 두게 됩니다. 아침에는 이 닦는 소금 4~5알 정도를 주는데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낮에 앉아서 빨아먹으면 그렇게 짜고 짠 소금이 달기만 합니다. 감방 안에 숟가락과 칫솔은 손잡이가 없으며 옷에는 단추가 하나도 없습니다. 몸에는 일체 쇠붙이를 달고 있을 수 없게 만들어 놓아 이를 먹고 자살시도 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만들어놓은 법입니다. 밥은 옥수수를 푹 삶은 것으로 밥도 아니고 죽도 아니며, 국은 소금국에 염장 시래기가 몇 개 떠 있고 국물을 마시다 보면 밑에는 모래가 한 벌 깔려있습니다. 시간이 되면 밥그릇을 받아놓고 머리를 숙이고 정중히 앉아서밥 먹을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면 그들의 기분에 따라 빨리 먹을 때가 있고 늦게 먹을 때가 있습니다. 낮에는 감방에 이가 많아 옷을 벗어볼 수 있는가 서로마다 계호원에게 제기합니다. 들어주는 계호가 있고 안 들어 주는 계호도 있습니다. 옷을 벗어 이 잡이를 하다보면 온 옷에 서캐 투성입니다. 이를 잡다보면 엄지손톱은 뻘건 색으로 물듭니다. 그리고 옷을 한 번 벗으면 비듬이 한 줌 정도씩 떨어지는데 아마 구류장에서 살 껍질을 세 네 번은 벗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개취급 당하며 한 달을 넘게 앉아있으니 이젠 움직이기도 싫고 움직이는 것보다 앉아있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심문 받으러 나가면 발과 손에 족쇄를 채우고 계호가 감시하며 따라오고 신문을 받을 때에는 “한국영사관에 갔는가, 교회에 갔는가, 한국사람 만났는가” 등을 지루하게 물어봅니다. 또, 돈도 꺼내 보여주며 “이게 어디 돈인가?” 중국 돈이라 하게 되면 얼마짜리인가를 물으며 중국에 있을 때 무엇을 하였는지 등을 꼬치꼬치 캐묻기도 합니다. 심문에 잘 응하지 않고 저들의 요구에 응하여 주지 않으면 걸상으로 때리며 난리를 부립니다. 신문 받고 나올 때 정말 살 것 같지 않아 죽으려고 마음먹고 기회가 생기면 손마디만한 돌 몇개와 옷자락의 실오라기, 저녁에 자면서 누더기 모포 자락을 눈치 보며 먹어보았지만 죽지 않으면 병이라도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대로 아니되었습니다. 옆 감방에는 새별군에 있다가 중국에 가서 5년 만에 잡혀 들어온 나이 50넘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힘들고 고달프니까 벽에 머리를 박아 졸도하고 정신이 들면 죽여 달라고 난리를 하며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아들 같은 계호들이 너무나도 악착같게 못살게 구니 죽으려고 하였던 것 같습니다. 봄에는 계호들이 벌을 주느라고 세워두면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하도 그러니 소나무 잎사귀를 끓여서 한 컵씩 줍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렇게 4달 보름 만에 구류장생활이 끝나 개처럼 밖을 내다보지도 못하고 차에 실려 간 곳이 함경남도 요덕군 대숙리 정치범 관리수용소 혁명화 구역이었습니다. 요덕 정치범 관리수용소 생활 1994년 4월 8일 동포 구류장을 떠나 관리소에 도착한 것이 4월 10일 밤 10 시경이었습니다. 깊은 산골 수수떡 같은 불빛이 보이고 사방은 어둠천지입니다. 외래자 합숙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구역보위부과장이 와서 우리가 여기에 있어야 할 기간을 알려주고 당의 관대정책에 의하여 죽어야 할 너희들을 용서해준다며 생활 잘하라고 합니다. 구역의 모든 수용생은 400명 넘어 500명 거의 되었습니다. 1반, 3반과 종합반에는 대부분 가족세대가 있고 2반은 모두 독신입니다. 구역은 앞뒤로 꽉 막힌 골짜기에 세개 통로가 있는데 두개 통로는 보위부 초소로 보위원들이 지키고 다른 한 통로에는 경비대 한개 중대가 산마루를 돌며 감시하며보초를 서고 있습니다. 구성으로는 보위부, 관리위원회, 온실, 상점, 외래자 합숙, 중앙창고, 오리사, 축산, 병원, 학교, 료양소, 발전소, 감자밭, 회관, 다음으로 1작업반, 2반, 3반, 종합반 등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나이 관계없이 7~8명 정도씩 3년 정도 글을 가르치고 병원도 말이 병원이지 약이 없고 풀뿌리를 갈아서 종이에 싸줍니다. 여기서는 보위부의 지시에 따라 분조원을 감시하는데, 아침에 눈을 뜨면 저녁 자기까지 지시와 감시 속에 내 마음대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개별 행동이 금지되고 2명 이상 친하거나 같이 다니지 못하며 변소를 가도 4~5명이 같이 가야 합니다. 보위부의 정치부 부장, 과장, 당 지도원, 그리고 각반의 담당 4명, 소장이나 부소장, 부장들이 한 달에 두 번 정도 왔다 가는데 이들이 한번씩 나타났다가 갈 때는 사람을 사형하지 앉으면 붙잡아 갑니다. 그래서 그들이 지나간 다음 구역에는 섬짓한 기운이 돕니다. 농산반은 농사를 짓고 종합반은 보위원들의 가구 제작과 농사에 필요한 농쟁이, 벌목 등의 일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구역에 여자들이 20~30명 정도 있었는데 이들은 여자소대로 구성되어 농사를 짓습니다. 겨울에도 옷이 없이 추위에 떨며 옷도 여러 군데 기워 입고 바지도 아래가락을 잘라 몽당바지를 입고 다닙니다. 구역의 사망자수는 때로는 하루에 2~3명이 있을 수도 있고 평균 일주일에 한명 정도입니다. 50넘은 노인, 대학생들이 주로 몇 달을 넘기지 못하고 먹을 것을 못 먹어 길가에 풀이나 강변의 개구리알, 쥐, 하여간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먹다보니 부종이 오고 얼굴이 붓고 이렇게 세 번 붓고 내리고 하면 죽고 맙니다. 죽으면 사과상자 같은 함에 넣어져서 땅에 묻힙니다. 이렇게 죽으면 죄를 못 씻는 것으로 개인 자료에 오점을 남기게 되고, 자식들한테 영향이 있게 됩니다. 이렇게 영양실조와 병으로 죽은 사람만 제가 있는 3년 동안 120~130명 정도 됩니다. 구역에 들어오는 죄명으로는 제도비난, 권위 훼손, 크롭권(여럿이 모여 반란을 시도했다든가 정부를 비난했다든가 상관들을 비난했다든가 등), 외국도주, 쏘련 벌목공 등 하여간 10대 원칙에 어긋나는 모든 것들을 반동으로 몰았습니다. 구역에 들어왔던 사람들을 보게 되면 어느 나라 대사, 참사로 있던 사람들, 평양시 감찰과 과장, 96년도에 비행사 7명, 군대간부들, 다른 나라와 사업을 하다가 들어온 사람, 농산반에서 축산, 돼지를 죽였다고 당의 축산 정책 방해죄로 들어오고 중국에 갔다가 영사관이나 한국 사람을 찾다가 잡혀온 사람(95년도부터는 중국탈북자가 없었음) 하여간 여러 가지 루명으로 구역에 들어와서 고생하다 죽고 또 요행 살아나갑니다. 구역에 들어와서도 제대로 안하면 구역에서 떨어져 있는 다른 구역의 구류장에 가는데 여기에 갔다 오면 1년 연장되고 그래도 규정을 안 지키면 총살을 합니다. 담당 보위원들은 낮에 순찰을 돌거나 작업현장을 돌아볼 때 경비원들을 데리고 몽둥이를 가지고 돌아보다가 마음에 안 들면 불러내어 때리고 패고 합니다. 제가 있던 3년 동안 세 번이나 총살 즉 사형을 하였는데 모두 6명입니다. 1차에는 구역을 도주하였다고 하여 3명을 사형하고 2차에는 회령사람, 3차에는 한신호 외 한 사람을, 일을 잘 안 하고 말을 잘못했다고 해서 총살 시켰습니다. 사형시에는 구역을 다 모아놓고 관리소 소장이 올라오고 사형수들도 따라와 사형을 하는데 이런 날은 스산한 날입니다. 뿐만 아니라 먹을 게 없어 제대로 먹지 못하고 쥐를 잡아먹고 강냉이가 여물기 전 송치 채 씹어 먹으며 더운 물도 없어 제대로 씻지 못하고 얼굴과 손발은 다 트고 까칠해져 얼굴에는 푹 꺼진 눈만 남아서 헤매고 고생하는 곳은 그 세상 밖에 없을 것입니다. 명절날 되어야 기름 한 숟가락씩을 먹고, 된장, 간장 한 숟가락씩이 차려지고 평생 소금국에 푹 퍼진 죽인지 밥인지 하는 것을 먹고 산비탈을오르내리느라면 쓰러지고 허기져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피가 맺히고 한이 맺힌 쓰라린 산골짜기가 관리소 안의 한 구역입니다. 수용소 출감, 두 번째의 탈북 9년 4월 수용소에서 해제받고 사회로 나오니 집은 온데간데 없고 어머님은 돌아가시고 동생은 행방불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후에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 동생도 먹지 못하여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수용소에서 사회에 나오니 수용소 들어가기 전인 93년하고는 대조적으로 변했습니다. 배급을 안주니 사람들은 인색해질 대로 인색해지고 저들도 살기 바쁜데 누구를 알려고 안하고 또 죽은 사람도 수없이 많았고 죽어가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영양실조에 걸리고 병까지 들어 완전히 아우성이었습니다. 배급을 안주어 밤에도 사람들이 배급소 앞에 줄 서있고 기업소는 돌아가지 못하였습니다. 야산들은 다 불태워 밭으로 변했지만 곡식을 심어도 비료가 없어 수확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고향이라 찾았건만 살 수도 없고 살기 힘든 이 세월을 누굴 믿고 살아가겠는가 하는 생각 끝에 1997년 7월 21일 두 번째 탈북을 하여 중국에서 5년간 말할 수 없는 고생 끝에 2003년 3월 21일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습니다 Copyright (c) Daum Communications Corp. All rights reserved.
신고 0명
게시물신고
|
그렇게 쓰디쓴 고생을 다하신 님은 대한민국에서 꼭 성공하시리라 믿습니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