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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로 얼룩진 김정일
Korea, Republic o 나라생각 1 349 2007-03-11 09:53:40
김정일 정권을 해부한다-광기로 얼룩진 김정일의 유년시절

1941년 2월 16일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근교 브야츠크 태생의 김정일은 4살 때 해방과 동시에 김일성을 따라 북한에 입성했다.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은 1949년 9월 22일 당시 자궁외 임신으로 사산아를 낳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의 ‘정치사전’에 따르면 김정숙은 1919년 12월 24일 함북 회령 출생이다. 다섯 살 때 간도로 이사 갔다가 부모형제와 사별했다. 김정숙은 35년 열 여섯 살 때 김일성 빨치산부대에 들어가 밥 짓고 빨래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 일설에 의하면 김일성과 같이 활동했던 빨치산 1세대 최현이 김정숙과 맺어지도록 김일성의 ‘등을 떼민’ 것으로 전해진다.

어머니 김정숙의 죽음과 김일성의 지나친 애정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총을 잘 쏘았던 김정숙은 김일성의 생명을 구해준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글을 깨우치지 못한 문맹자였고, 여성다운 부드러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일성과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정숙의 죽음은 어린 김정일에게 적지 않은 정서적 영향을 미쳤다. 일례로 김정일은 후일 오로지 어머니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성혜림과 비정상적인 관계를 갖기도 한다. 그가 5살이나 연상인 성혜림에게 빠져든 이유를 두고 주위에서는 일찍 어머니를 여읜 탓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김정일은 어머니를 일찍 여읜 탓으로 김일성의 각별한 사랑 밑에서 성장했다. 때때로 안하무인격으로 비치는 김정일의 행동 스타일과 후계자 지명 이후 그의 황태자 같은 생활은 김일성의 지나친 애정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김정일은 성격이 괴팍하다 못해 괴악(怪惡)하다. 실제로 김정일은 어려서부터 장난이 심하고 말썽꾸러기였으며 벌레를 보고는 기어이 죽이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잔인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김정일의 성격을 특징지어주는 예로 평양에서 김일성의 이웃으로 살았으며, 비서실장이었던 홍순관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김정일, 7살 때 친동생 ‘슈라’ 익사 시켜
“김정숙과 김일성 사이에는 그 때(해방 직후) 자식이 셋 있었다. 둘은 아들이었고 하나는 딸이었다...(중략) 위의 아들은 ‘유라’(김정일)라고 부르고, 다음 아들은 ‘슈라’(1944년 출생)였으며, 딸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중략) 슈라는 1947년 7월, 정원 연못에 빠져 죽었다. 옆집이었기 때문에 와랴(김정숙) 나를 부르러 왔다. 와랴는 사샤가 자고 있는 것이라며 흐느껴 울었다. 사샤(슈라)가 빠진 것은 4m깊이의 연못이었다. 나는 사고 직후 김일성의 집을 경비 서는 젊은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사고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 전혀 기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사샤의 장례식이 언제 행해졌는지는 모르며 나는 참석하지 않았다.”
한편, 북한전문가 이기봉은 ‘김정일은 어떤 인물인갗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50년대 말 노동당부위원장 보좌관 출신으로 60년대 초 한국으로 망명한 인물의 증언을 인용해 슈라의 익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1945년 해방 후 김일성의 집은 평양시 중구역 만수동에 있었다. 1948년 초여름, 그 연못에서 동생 슈라(당시 4세)가 익사했으며, 7살이었던 김정일은 현장에 함께 있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형제는 연못 가장자리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먼저 연못에서 나온 김정일이 뒤따라 연못에서 기어 올라오는 동생을 몇 번이나 물속에 다시 집어넣었다고 한다.”
콩고 주재 북한 외교관으로 지난 91년 귀순한 고영환도 자신의 저서인 ‘망명 고관이 본 김정일’을 통해 ‘슈라’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46년 초여름 김일성의 아들인 유라와 슈라가 연못에서 함께 놀았다. 장난꾸러기였던 유라(김정일)는 슈라에게 물을 억지로 먹이거나 다리를 끌어당겨 물 속에 빠뜨리곤 했다. 그러는 동안 둘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연못 가장자리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유라는 깊은 곳으로 점점 빠지는 것이 두려워서 연못에서 나오려는 동생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으며, 동생이 얕은 곳으로 가려고 하면 거꾸로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어푸, 어푸’ 하면서 동생은 물을 마시고 있었으나 유라는 그것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재미있는 곳에 함정이 있다’는 말처럼 동생은 익사해버렸다.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김일성은 ‘연못의 물을 전부 빼버리고 흙을 채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오늘날 그 곳에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잔디만 자라고 있다.”

김일성 관저 '전용목수', 김정일 뺨 때린 후 '행방불명'
자신의 친 동생을 일순간에 물귀신으로 만든 김정일. 그러나 그도 어린마음에 분명 '죄책감'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심적 충격을 달래주고 감싸줄 사람은 분명 어머니였다. 그러나 이듬해 어머니조차 세상을 떠나고 그의 성격은 아마도 더욱 삐뚤어지게 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김정일의 성격을 특징지어주는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김정일의 어린시절 김일성의 관저에 있던 전용 목수와의 관계다. 김정일은 목수가 일을 하려고 톱, 대패, 정 같은 도구를 잘 정돈해 놓으면 어느 틈엔가 들어가 대패 날은 망치로 두들겨 부수고, 톱날은 시멘트바닥에 마구 긁어 못쓰게 만드는 등 장난을 일삼았다.
목수는 그것이 김정일의 장난이었음을 알고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수는 김정일이 시멘트바닥에 톱날을 긁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동안 참았던 분통을 터뜨리며 뺨을 한 대 때렸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관저 현관을 지나던 김일성이 그 광경을 목격하게 됐다. 목수는 새파랗게 질렸지만 김일성은 “참 잘했소. 아무리 수상의 아들이지만 말 안 듣고 장난만 치는 건 참을 수 없겠지”라고 태연하게 말하고 갔다.

뜻밖의 말을 들은 목수는 살았구나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김일성의 자상함에 눈물까지 흘렸다. 그러나 그건 목수의 착각 이었을 뿐이다. 김일성은 승용차에 오르자마자 호위국장에게 “목수 놈 당장 없애. 감히 어디에다 손을 대”라고 명령했다. 이후 목수는 행방불명 됐으며 김정일은 심한 장난을 해도 비호해 주는 아버지 손 밑에서 성격은 더욱 난폭해 졌다.

김정일의 괴팍하고 포악한 성격은 그가 북한의 귀족학교인 평양 남산학교에 입학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학교를 결석하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수업 중에도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가하면 학교 선생님들을 골탕 먹이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치 되풀이했다.

이처럼 김정일의 심한 장난 끼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 타고난 핏줄내림이었다. 아버지인 김일성도 일찍이 주위 사람들의 속을 썩인 악동으로 유명했다. 이는 북한 김일성 전기물(한설야의 '수상님의 어린시절', '만경대' 등)에도 잘 나타나있다.

황장엽, 상식을 초월한 김정일의 행동-권력투쟁 예감
한편, 지난 97년 남한에 망명한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는 과거 소련 방문기간 중 열일곱 살의 김정일이 김일성의 일정을 자신이 주도해서 짤 정도로 ‘맹랑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황장엽의 회고다.

“그는(김정일) 공식행사에는 참석하지 않고 숙소에 남아 있을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는 내게도 남아달라고 부탁하고는 했다. 그와 얘기를 하면서 받은 인상은 그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정권에 대한 욕망이 상당히 컸다는 것이었다. 저녁에 김일성이 돌아오면 김정일은 부관들과 의사, 간호원 등 수행원들을 집합시켜놓고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보고를 받고 이런저런 지시를 하곤 했다. 김일성을 수행한 대표단 중에는 중앙당 정치국원들도 많았는데, 김정일이 김일성의 사업을 직접 관장하고 부관들과 수행원들에게 구체적으로 일을 지시한다는 것은 상식을 초월한 행동이었다. 나는 어쩌면 이 소년이 자기 삼촌(김영주)을 내쫓고 권력을 승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다.”

김정일이 자기 삼촌을 내쫓고 권력을 승계할지도 모른다는 황장엽의 예견은 나중에 현실로 나타났다. 김정일은 70년대에 들자마자 본격적으로 삼촌 김영주와 권력투쟁을 벌였다. 이 권력투쟁은 ‘누가 더 김일성을 우상화하는갗 하는 데 집중되었고, 이 게임에서 김정일은 김일성과 빨치산 노간부들의 신임을 얻는 데 성공하게 된다.

어린시절부터 시작된 김정일의 악행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북한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들려오는 김정일 정권의 인민을 겨냥한 대량살육 소식이 바로 그 증거다. 이 같은 결과가 나오게 된 이유는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려는 김일성의 사심(私心)과 김정일 스스로 권력을 쟁취하려는 욕망이 어우러져 권력의 대물림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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