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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Republic o 나라사랑 4 725 2007-03-11 10:3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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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김일성의 혁명역사

「민족통일」 편집부

월간 「민족통일」은 사단법인 탈북자동지회(회장 김덕홍)의 기관지이다. 탈북자동지회는 조국통일과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 99년 2월 결성한 단체이다.

1. 김일성의 가정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에서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형직은 이 지방에서 대대로 살아온 농민의 아들이었으며 어머니 강반석은 이웃 용산면 칠골에서 살았던 하리교회 장로 강돈욱의 딸이다. 김형직은 1894년 생이고 강반석은 그보다 2년 위 1892년 생이다. 김형직은 1903년부터 남리에 있는 남리교회에 다닌 것으로 되어있다. 하리교회 장로의 딸 강반석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남리에서 산 김형직까지 교인이었다고 보면 김일성은 결국 교인의 집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있다.




아버지 김형직

김형직은 이 당시의 청년이면 거의 모두가 그러했듯이 1910년에 있은 한일합방에 대해 매우 큰 반감을 가졌다. 이로 하여 강동군 봉화리에서 교사로 있을 때에 비밀정치조직인 조선국민회에도 개입하였다. 그러나 조선국민회는 김형직이 조직한 것이 아니며 1914년 하와이에 갔다온 장일환이라는 사람이 조직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자료는 현재 강동군 봉화리에 있는 비석계의 비석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비석계 자체는 그 어떤 반일조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기에도 강석봉, 배민수에 이어 김형직은 세 번째인가 네 번째 자리에 자리매김 되어있다.

1917년 3월 장일환, 배민수, 김형직 등 9명이 처음으로 회합하여 조선국민회를 조직하였는바 회장 장일환, 서기 배민수로 김형직은 이름도 없다. 좋게 생각한다면 열성회원쯤 되지 않았을까 보아진다. 그러나 이 조직은 당국에 발각되어 1918년 2월 회원 전원이 검거됨으로 막을 내렸다. 이때 김형직도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였지만 부차적 인물로 판정되어 년중에 석방되었고 결국 만주로 갔다.

감옥기간 김형직은 한의공부를 하였다고 하는데 불과 몇 달 사이에 얼마나 공부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출옥 후에는 세브란스의전 졸업장까지 얻어 1926년 죽는 순간까지 의사행세를 한 것은 사실이다.

북한 출판물에도 그가 팔도구, 림강, 무송일대에서 광제의원, 무림의원 등의 간판을 걸고 그 밑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쓰여져 있다. 그러나 1924년 포평에 나왔다가 체포된 것은 그 어떤 독립운동 때문이 아니고 당시에도 금지품으로 되어있던 아편을 팔러 나왔다가 체포된 것이다. 체포된 뒤 련포리 주막집에서 탈주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샤만호 격침사건의 주역(?), 증조할아버지 김응우

북한 위정자들은 김일성이 대대로 애국적이며 혁명적인 가정에서 탄생하였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증조 할아버지 김응우를 샤만호 격침 사건의 지휘자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이것을 기정사실화 하기 위해 평양시 대동강에 있는 쑥섬에 그의 사적비까지 세워 놓았다.

사적비에는 “1866년 미제 침략선 ‘샤만호’가 대동강을 따라 이곳까지 왔을 때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증조할아버지이신 김응우 선생이 평양시 인민들을 조직 동원해 이곳에서 침략선을 격침시켰다”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이것은 날조이다. 당시 평양은 평안도 감영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도감영이면 감사도 있고 또 평양은 서북선에서도 중요 군사요충지이기에 적지 않은 군대도 있었다.

그런데 군대와 관청기관을 다 젖혀놓고 일개 이름 없는 농민에 불과하였던 김일성의 증조부가 당시로서는 대단히 거창하다 볼 수 있는 이 사건의 진두지휘 하였다니 말도 되지 않는 소리이다.

북한에서도 1967년 이전까지는 그래도 역사를 이렇게까지 왜곡하지는 않았다. 그때 ‘침략선 샤만호’라는 영화까지 나왔는데 물론 이 영화에서는 김응우란 이름조차 없다.




동생 김영주

여기서 참고로 김일성의 친동생인 김영주에 대해 한마디만 지적하고 넘어가자.

북한 출판물에는 일체 밝혀져 있지 않지만 김영주도 사실은 1934년부터 왕청유격대 아동단으로 있었다.

1935년 일제의 토벌로 근거지가 해산되고 내두산으로 진출할 때 그도 그 대오 속에 있었다. 그러나 1937년 교화일대에서 일제군경에 체포되었으며 즉시 귀순하였다. 이후 일본군 장교 통역관 등으로 전전하다가 해방을 맞았는데 그로 하여 처음에는 평양에도 오지 못하고 서울에 와서 헤매고 다녔다. 그러던 것을 1947년 김일성이 사람을 보내 평양으로 데려왔다.

원래 이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북한 위정자들이 하도 김일성 집안은 대대로 애국애족을 한 혁명적 가정이라고 떠들기에 한 마디 밝힌다.




2. 어린 시절




앞에서도 말했지만 김일성은 김형직의 만주행과 더불어 일찍 만주에 갔다. 만주에서 김형직은 팔도구, 림강, 무송으로 전전하였는바 자연히 김일성도 따라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12살 때 창덕학교에 나오게 된 것은 김형직의 요구였던 것이 사실이다. 김형직 자체가 민족주의 단체인 정의부 산하 한 사람으로 민족주의 정신이 비교적 강했던 것 같다.

김일성이 다니 창덕학교는 1909년 하리교회가 설립한 남녀공학의 학교이다. 김일성은 여기서 약 2년간 학교를 다니고 25년 무송에 있는 부모에게 돌아갔다.




타도 제국주의 동맹 결성과 카륜회의

1926년은 김일성의 신상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 해이다. 이해 6월 5일 아버지 김형직이 갑작스레 죽고 그는 그의 친우들의 주선으로 화성의숙에 입학하였던 것이다. 당시 화성의숙은 민족주의자 단체 정의부의 소속으로 교원 2명, 학생 30명이 있은 것으로 알려졌다.(숙장 최동호-최덕신의 아버지)

김일성은 여기서 이해 10월 김시운 등과 , 즉 를 결성하였다고 하는데 신빙성이 전혀 없다. 왜냐면 이때 김일성, 즉 김성주의 나이가 15살이라는 점으로 볼 때 이와 같은 정치단체를 꾸린다는 것은 어떻게 보아도 무리이기 때문이다.

혹 장난기의 소년들이 모여 오늘밤 우리 무엇 무엇을 묶자 했을 수는 있겠지만 만약 그랬다 하더라도 이것을 조선혁명의 시발점이요 뭐요 한다는 것은 역시 무리이다.

북한 위정자들은 에 대해 1945년 12월 부산에서 출판되었다는 최일천의 「조선 해외혁명운동 소사」를 들고 있다. 그런데 이 최일천 자체가 미지의 인물인데다가 여러 역사적 자료를 분석하여 보아도 당시 김일성이 화전에서 을 조직하였다고 하는 것은 신빙성이 없다.

이때 만주 한인 반일운동은 크게 두 갈래로 있었다고 본다. 그 하나는 민족주의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 운동이다. 민족주의 운동은 다시 길림에 본거지를 둔 정의부, 북만 녕안에 본거지를 둔 신민부, 남만 환인에 본거지를 둔 참의부가 있었다.

민족주의 운동도 하나의 세력으로 뭉치자는 노력은 있었으나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1929년에 오랜 기간에 걸친 투쟁 끝에 국민부로 되긴 하였으나 그 이후에도 이합집산이 크게 작게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

공산주의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1925년 서울에서 창건되었던 조선 공산당이 끊임없는 파쟁으로 28년에 조직된 당으로서의 존재를 마쳤다. 그러나 파쟁 분자들은 여기서 교훈을 찾는 대신 만주에 와서도 끊임없이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싸움에 나날을 보냈다. 하여 민족주의 단체간 또 민족주의 단체와 공산주의 단체간 공산주의자 단체에도 정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이 속에 나라 독립이라는 희망의 언덕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정국이 이런 때이고 보니 김일성을 포함하여 청년운동가들의 투쟁도 자연히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우왕좌왕 속에 어느 것 하나도 똑똑히 이룩된 것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 김일성은 민족주의자 단체인 정의부의 영향 속에서 공산주의자 단체인 엠엘의 영향 속으로 거기서 다시 민족주의자 단체인 국민부의 영향 속으로 이곳저곳 표류하였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의 선각자들인 차광수, 김근혁(김혁) 등의 움직임이 이것을 잘 말해준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알고 넘어갈 문제는 이 시기 김일성이 그 어디서도 주도적인 위치에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장춘현 카륜, 이통현 고유수, 회덕현 오가자 등지가 청년운동가들의 활동 무대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김성주라는 이름은 그 어디에도 없고, 혹 있다면 극히 미미한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종락, 차광수, 김근혁의 활동이 눈부시다.

북한 장편 혁명영화 ‘조선의 별’에서는 김일성, 즉 김성주야말로 이시기 청년운동가들의 중심이었던 듯이 묘사하고 있으나 역사적 기록은 이와 전혀 다르다. 따라서 김성주(김일성)가 1930년 5월 장춘현 카륜에서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 회의를 소집하고 주체적 반일무장 투쟁 노선을 내놓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아울러 1930년 6월 이통현 고유수에서 당 조직의 첫 세포인 ‘건설동지회’를 내오고 조선혁명군을 조직하였다는 것도 사실은 이종락의 부하로 움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총체적으로 이때까지의 김일성의 가계와 그의 활동을 볼 때 당시로서는 극히 평범한 일반적 가정에 일반적 활동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어떤 전설적 영웅이 태어날 수 있는 환경도 활동도 아니었음을 분명히 한다.




3. 동북지방에서의 활동




조선혁명군 조직

북한 역사위정자들은 김일성이 1930년 6월 이통현 고유수에서 항일유격대의 전신인 조선혁명군을 조직하고 자기 삼촌인 김형권을 책임자로 한 최효을 등 3명의 무장소조를 국내에 파견하였다고 한다. 과연 조선혁명군이라는 것을 김일성이 조직하였을까.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독립군의 형세는 점차 쇠퇴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3부 통합으로 국민부가 결성된 다음에는 독립군의 잔여부대를 통합하여 조선혁명군으로 개칭하였다. 이것이 조선혁명군의 본신이다.

여기에 이종락이 1930년 8월 당시 ‘동아혁명군’ 사령이었던 김광렬과 합작하여 새로 조선혁명군 ‘길강성 지휘부’라는 것을 내왔다. 하지만 이 조선혁명군 ‘길강성 지휘부’에서도 총지휘는 이종락이였다. 김일성이 굳이 이시기 이퉁현 고유수, 장춘현 카륜 등지에서 활동하였다면 이종락 부대의 한 부하군졸쯤은 하였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조선혁명군 길강성부대도 오래 존재할 수는 없었다. 1931년 1월 장춘에서 이종락과 김광렬, 장소봉 등이 일본 경찰에 체포됨으로 사령부 자체가 괴멸되었던 것이다.

김일성이 안도에 나타난 것은 5월이다. 그러고 보면 부대의 해산과 더불어 김일성이 갈 곳이 없어 당시 안도현 소사하에 있던 어머니를 찾아 안도에 온 것이 틀림없다.




명월구회의와 안도유격대

1931년 11월 안도현 명월구에서는 간도 각 현당 적극 분자들의 회의가 있었다. 오늘 북한역사 위정자들은 김일성이 이 회의를 조직하고 여기에서 항일무장투쟁 노선과 근거지 창설방침을 내놓았다고 하는데 물론 의심할 바 없는 허위이다. 김일성은 이에 조금 앞서 5월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는데 이때 이 회의에 참가하였다는 기록도 없지만 그가 참가할만한 명분도 아직 쌓지 못한 상태였다.

회의는 동만당 특위서기였던 동장영의 주도하에 왕중산, 김성도, 김일환, 임수산, 오중화 등이 참가하였다. 여기서 앞에서 주지한바와 같이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벌일 데 대한 문제와 근거지 창설방침이 결정되었다. 이 방침에 근거하여 먼저 연길현에서 유격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11월 영안과 안도에서 온 부대가 합쳐서 왕청유격대가 결성되었다. 여기서 안도에서 온 부대(정원 18명)는 김일성이가 왕덕림을 따라 동경성까지 갔다가 데리고 온 것이다.

이렇게 왕청부대, 영안부대, 안도부대까지 합쳐 만든 것이 왕청유격대인데 대장은 양성룡이고 전체 인원은 약 90명 정도이다.

그럼 김일성이 아버지가 물려준 두 자루의 권총으로 창건하였다는 안도유격대는 어떻게 된 것인가?

1960년 림춘추가 쓴 에는 김일성이 4월 이영배, 김철희 등과 함께 안도에서 유격대를 조직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중국 흑룡강성 당사연구소의 자료에는 안도유격대는 이영배가 조직하였다고 되어있다. 또 연변조선족 연구자들의 저작에는 애초 안도유격대 조직이란 말조차 없다. 어떻게 된 것인가?

북한 혁명영화 ‘민족의 태양’에서는 김일성이 유격대를 창건하고 어머니인 강반석과 사열하는 모습까지 나오는데 실로 소가 웃다가 옆구리 터질 일이다.

그러나 이때 안도에 위사령이라는 구국군 사령의 부대는 실재하였다. 그 부대 참모장이 김일성이 육문중학을 다닐 때 교사로 있었던 진한장인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다른 자료들을 보면 이 위사령의 부대에 조선인으로 된 몇 명 안 되는 별동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고 보면 김일성이 창건했다는 유격대는 사실상 최초에 유격대로 조직한 것이 아니고 그 위사령 구국군의 별동대로 조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 오의성 부대에서 이광이 별동대장을 하였다면 김일성도 위사령 부대의 별동대원쯤 못할 이유는 없다. 아무튼 대장은 아니었다. 각종 기록을 보면 안도 유격대의 첫머리는 이영배부터 시작되니 김일성이 대장이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 위사령 부대 참모장이 진한장이었으면 김일성이 여기에 있지 못할 까닭도 없다.

결국 김일성이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흥륭촌에서 유격대를 창건했다는 사실은 허위이고 위사령 구국군부대 별동대원쯤 하였을 수 있다는 추측만 남는다. 이것이 김일성 항일유격대 창건의 실제 진상이다.




민생단 사건

민생단은 일제가 1932년 2월 친일인사들을 모아 간도주민의 생활을 산업화한다는 명목으로 발족한 단체이다. 당시 실질적인 지휘자는 김동한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은 소련 볼세비키당에도 가입하였다가 1922년 트로츠키파로 몰려 조선으로 온 이후 철저한 친일 반공주의자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중국 공산당 연길현 노두구 구위 서기였던 송일이 붙었다. 우연히 김동한이 송일에게 보낸 편지가 연길현 유격대의 최현이라는 사람에게 입수되어 동만유격 근거지에서는 “민생단, 조선민족주의, 파벌주의는 일제의 주구이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대대적인 반민생단 투쟁이 일어나게 된다.

왕청현, 훈춘현, 연길현, 화룡현 등 각 현별로 숙반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경쟁까지 벌리는 정도였다. 누구든 과거 독립운동을 하였거나 공산주의파벌투쟁에 개입했던 경력만 있으면 그는 벌써 80%는 민생단으로 되어 버렸다. 게다가 일단 혐의자로 낙인되면 누구에게든 가차없이 가해지는 무차별 고문은 날에 날마다 더욱 놀라운 새로운 민생단 가담자를 만들어 냈다.

나중에는 동만 당 조직부장이었던 가장 열렬한 반민생단 투쟁의 선구자 김성도까지 민생단에 걸려 처형되었다. 한마디로 혁명에 참가한 사람 모두가 민생단이 아니면서도 민생단이 되어야 하는 웃지 못할 사태가 초래되었다.

사태가 이지경이 되다보니 최대한 갓 조직된 근거지를 잘 꾸리고 모든 힘을 유격대를 강화해야 할 시점에 그 모든 것은 뒤로 젖혀놓고 서로가 민생단을 색출하느라고 피눈이 되어 날뛰게 되었다. 오죽했으면 이 반민생단 투쟁의 직접적 조직자였던 동만 당특위서기 동장영까지도 당황실색하였겠는가.

그럼 이때 김일성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김일성은 이때 왕청 유격대에서 양성용 밑의 정위를 하였다. 그런데 그해 말 양성용 역시 민생단 혐의자로 체포되고 보니 김일성도 무사했을 수는 없다.

김일성 자신은 이를 극구 부정하며 자기는 그 어떤 종파에도 가담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민생단에 몰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양성용이 민생단 혐의로 체포될 때 김일성도 함께 체포될 것이었으나 다행히 조아범, 진한장 등과 길림에서부터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해서 일개 병사로 강직되는 것으로 끝났다고 한다. 이 사실은 회상기 「혁명의 위기를 한 몸으로 막아」 저자 김경석이 어느 사석에서 한 말이다.

오늘 북한 역사위정자들은 김일성이 그때에는 이미 확고히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이었던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자체가 모순이다. 김일성이 북한 위정자들의 말대로 인민혁명군의 사령관이었다면 왜 자기 부대 내에서 있었던 이런 참혹한 일을 인정은 하면서도 제때에 멈추지 못했는가.

만약 김일성이 정말로 사령관이었다면 당연히 이 모든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조차 민생단 누명을 쓰고 일개 병사로 되어 아동단 학교 사업에나 간여하고 있는 정도였기 때문에 그 이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말하지만 그 시기 근거지에는 어떤 사령관도 없었다.

동만유격근거지 최고 권력자는 동만당 특위 서기였던 중국사람 동장영이고 그의 밑에 조직부장 김성도, 선전부장 여백기, 군사부장 김명균이 있었다.

또 이 밑에 각 현당 현위서기가 있었고 현위서기 밑에 현위 조직부장, 현위 선전부장, 현위 군사부장이 있었다. 각 현 유격대는 이 현위 군사부장 산하였는바 김일성이 양성용 사건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반민생단 사건같은 큰 정치적인 문제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할 주제가 되지 못했다.

결국 민생단 사건은 요영구회의를 거쳐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 수습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반민생단 투쟁 문제는 중국인들에 의해 확대되었고 또 중국인들에 의해 수그러든 것이지 여기에 김일성이 그 어떤 결정적 작용을 해서 수습된 것은 절대로 아니다.




동녕현성 전투

1933년 9월 동녕현성 전투가 있었다.

오늘 북한 역사위정자들은 동녕현성 전투도 김일성이 직접 지휘한 전투라고 한다. 사실이 그러한가?

이때 왕청유격대가 어떻고 훈춘유격대가 어떻고 하였지만 사실은 왕덕림의 전방 사령관이었던 오의성의 부대가 이 일대에서는 중심적인 항일무장 세력이었다.

왕덕림이 소련으로 수많은 장졸들을 인솔하여 넘어간 다음에도 한때 오의성의 부대는 2만에까지 이르렀다. 왕덕림은 일제의 포위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도주하였지만 오의성이 남아있는 것은 순전히 만주성위 위원인 주보중 때문이었다.

이때 중국 공산당 당원이면서 만주성위 위원이었던 주보중은 오의성부대 참모장으로 있었으며 여기에 진한장이 또 가세했고 그리하여 오의성이 그대로 항일의 기치를 내리지 않은 것이다.

동녕현성 진공부대는 구국군 사충항이 인솔하는 구국군 3탄까지 합세하여 천백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왕청, 훈춘유격대도 참가했다고 하는데 총인원 200명이다. 이때까지는 양성용이 아직 민생단 혐의로 해임되기 전이었기에 왕청부대에서는 그가 지휘관이었으며 김일성은 방조자격이었다.

설사 김일성이 왕청, 훈춘부대 전체 지휘관이었다 해도 천백명의 대부대를 인솔한 오의성이 당연히 전반적 지휘를 맡기 마련인데 이것을 모두 김일성이 지휘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까무러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사실대로 김일성이 여기에 한 명의 군졸로 따라 갔다면 어떻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분수에도 맞지 않게 백전로장들을 젖혀놓고 당년 스물한살 홍안의 총각이 이 큰 싸움을 지휘했다고 하는 것인가.

북한 역사 위정자들의 담 큰데는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김일성의 선배 최용건

여기서 잠깐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을 후계자로 선택하는데 적극 찬성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하여 마지막까지 천대속에 살다 죽은 최용건의 경력을 살펴보자.

최용건은 1900년 6월 22일 평안북도 염주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정주 오산학교에서 수학하였고 당시 교장이었던 조만식선생의 가르침도 받은 사람이다. 그런 그가 3.1운동 이후 학교를 뛰쳐나와 21년에는 중국 광주에 갔다. 이후 곧 운남 강무학교에 입학하여 보병과를 졸업하였다.

24년부터는 직접적으로 중국혁명에 참가하였고 곧 호아포군관학교에 들어가 제5기 6구 대장을 하였다. 1927년 11월 광주에서 중국공산당이 조직한 무장폭동이 일어나자 섭정이 총지휘를 하는 부대 특무대장이 되어 봉기군과 함께 전력을 다해 싸웠다.

무장폭동의 실패로 구사일생 목숨을 건지고 탈출한 이후에도 그는 곧 김지강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혁명을 위해 동북으로 왔다. 여기서 그는 조선공산당 만주지부 군사부장을 비롯하여 공산당이 해산된 뒤에는 중국 각지를 전전하며 혁명을 위해 실로 모든 것을 다했다.

31년 9.18 사변 후에는 보청현 소성자에 군정강습소를 조직하고 앞으로 있을 무장투쟁의 핵심을 길러내기도 했다.

이후 이영호의 삼촌 이학만 등과 더불어 요하공농의용군을 결성하였으며 34년 후에는 구국군부대들과 연합하여 호림현성을 공격하는 쾌거도 단행했다. 33년 9월에는 우수리강을 시찰하던 광동군 참모장까지 사살하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의 빛나는 경력과 전투적 활약으로 하여 그는 마침내 동북항일연합군 제7군 군장으로 되었다.

그런데 오늘 북한에 있는 사람들 속에 과연 최용건의 빛나는 경력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김일성은 어렸을 때 마을에서 애들과 함께 썰매타기 한 것까지 무슨 굉장한 뜻을 가지고 하였던 것처럼 선전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왜 쓸쓸히 잡초속에 묻혀야 하는가.

최용건이 말고도 군장까지 하였던 사람은 둘이나 더 있다. 이학만, 허형식이다. 김일성은 기껏 사장밖에 못했을 때 이들은 당당히 군장까지 하였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들은 오늘 대성산렬사릉 상단자리에도 없다. 아무 것도 모르고 밥이나 하며 따라다닌 김정숙이는 상단에서도 가운데 자리에 있고 군장까지 하였던 이들은 말석 누구의 눈에도 띄우지 않는 자리에 있어야 옳은가?

그런 주제에도 죽는 순간까지 공산주의자들의 의리를 푸념했던 김일성이 가소롭다.




녕안현 남호두회의

1931년 겨울 동만당특위서기로 왔던 동장영이 1934년 5월에 전사하였다.

그 뒤를 이어 특위서기로 된 사람이 만주성당 순시원으로 동만에 파견되었던 위중민이다.

위중민은 특위서기로 정식 임명도 되기 전에 당시 동만당 내에서 거세게 타번졌던 반민생단 투쟁에 휘말려 들었으며 그 와중에 다홍왜 요영구회의를 주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올바른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1935년 5월 코민테른 제7차 대회 때문에 소련 모스크바에 갔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중공대표인 왕명, 강생을 만났으며 그들로부터 인민민주주의전선을 형성할 데 대한 코민테른의 방침을 전달받았다. 물론 당시 코민테른의 방침이 반제인민전선을 형성하는 문제였으니 반민생단투쟁도 중지할 데 대한 것이 제기되었을 것이다. 결국 반민생단 투쟁문제는 김일성은 말할 것도 없고 동만당 특위서기였던 위중민조차 결론을 내릴 수 없어 코민테른에 의해서야 중지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본안건은 아니고 기본문제는 역시 인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하는 것이었다.

역사에 이미 널리 알려졌지만 구라파에서는 이때 이탈리아에 이어 독일에서 히틀러의 나치스당이 정권을 잡음으로써 국제파쇼에 의한 전운이 짙게 떠돌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코민테른에서는 인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던 것이다.

코민테른 중국공산당 파견원 왕명, 강생은 동북 반일항전에서도 중국, 조선, 만주, 몽고인이 합쳐 연합전선을 형성할 것을 제기하였다.

1935년 11월 2일 코민테른 기관지에 이라는 글이 나왔다. 이 글에서 중, 조, 몽, 만 피압박 민중은 굳게 단합하여 괴뢰 만주국을 전복하고 간도에 조선민족자치구를 건설해야 한다는 구호가 제시되었다.

여기서는 또한 중, 조 반일부대를 반일연합군으로 개편하고 조선사람은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게 하며 ‘한국민족혁명당’을 결성, 강화할 데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방침을 전달받은 위중민은 1935년 말에 만주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항일연군 2군, 5군 군정간부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날이 1936년 1월 20일인데 회의는 녕안현 남호두에서 개최되었다.

참가성원은 2군에서 왕덕태, 이학충이고 5군에서는 주보중, 관서범, 유충소, 김석봉 등이다.

북한 역사위정자들은 이 회의에 김일성이 참가하여 반제통일전선을 이룩할 데 대한 문제, 당을 창건할 데 대한 문제, 백두산 동남부에 새 형태의 유격근거지를 창설할 데 대한 문제 등을 내놓았다고 하는데 그는 애초에 이 회의에 참석했다는 기록조차 없었다. 당연히 이 회의에서는 코민테른에서 제기한 방침들을 토의하고 해당한 결정을 내렸다.

이로부터 한달 후 안도현 미혼진에서 항일련군 제2군 군정간부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남호두회의 방침을 관철하기 위한 회의로서 2군내 중요 군정간부들이 거의 참가했는데 김일성이 바로 여기에 참가한 것이다. 물론 회의소집은 위중민이 하였고 왕덕태, 이학충, 주수동, 안봉학, 김일성이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서 위중민은 국제당의 방침에 따라 조선인민혁명군을 따로 내올 데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것은 국제당의 방침이고, 또 2군과 5군 군정간부회의에서 논의되었던 문제였기에 사실 이때 조선인민혁명군을 따로 내오는 문제는 거의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다.

그런데 회의도중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조선인민혁명군 조직을 제일 적극적으로 지지할 줄 알았던 김일성이 반대해 나선 것이다. 그의 논리는 그때까지 중국인 부대, 조선인 부대를 따로 가르지 않고 싸워왔는데 이제 가른다면 여러 면에서 공동의 투쟁이 약화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분명 뜻밖의 일이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그때까지 하던 대로 계속 중, 조부대가 함께 싸워야 한다는 것인데 물론 위중민을 비롯해서 중국인 지도자들로서는 싫어할 근거가 없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조선인 대원들은 반일감정이 강했기 때문에 중국인 대원들보다 훨씬 용감할 뿐 아니라 좀처럼 도주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상부의 방침이니 할 수 없이 부대를 따로 편성하려던 위중민이나 왕덕태로써는 쌍수를 들어 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사실상 조선인민혁명군 부대가 완전히 조직될 수 있었으나 김일성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면 왜 그때 김일성이 그렇게 나온 것인가? 여기서 김일성의 약아빠진 정치적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따로 나오든, 그대로 있든 동북항일연군의 테두리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과 중국공산당의 지시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들을 연결해 보면 차라리 그대로 있는 것으로 위중민이나 왕덕태의 신임을 얻으려는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그의 타산은 정확하였다. 위중민과 왕덕태가 그의 의견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김일성은 계획에도 없던 사장직에 임명된 것이다.

그가 새로 맡게 된 사는 항일련군 제2군에서 보면 3사이고 제1로군에서 보면 6사이다. 때문에 이후 그를 6사 사장이라고도 하였고 3사 사장이라고도 한 것이다. 정치위원에는 김일환을 민생단으로 몰아 죽이고 화룡현 현위서기가 되었던 조아범이 임명되었고 참모장은 연길중심 현위서기였던 림수산이 되었다. 김재범은 이때 7연대 정치위원에 임명되었다.




민생단 문서보따리

북한 역사위정자들은 반민생단 투쟁 말기에 김일성이 불질렀다는 민생단 문서보따리에 아주 큰 비중을 둔다. 민생단 문서보따리를 불태우고 백여 명의 민생단 혐의자들을 대오에 받아들임으로써 광폭정치의 막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김일성이 이때 위중민으로부터 뜻밖의 사장자리를 받아 안았으나 데리고 싸울 대원이 없었다. 그럭저럭 싸움할만한 사람은 4사 정치주임이었던 조아범이 모조리 데리고 화전쪽에 나가있었다. 명색이 사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원래 계획에도 없던 일이었기에 경위대원 15명이 수하대원 전부였다. 이것이 문서보따리에 불을 지를 수밖에 없었던 조건의 하나이다.

다음으로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때는 이미 국제당으로부터 반민생단 투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엄격히 지적된 후이다. 또 이 방침을 전달받고 온 위중민이 남호두회의에서 다시는 반민생단 투쟁을 들먹이지 않을 데 대해 강하게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때 김일성이 민생단 문서보따리에 불을 지르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닌가. 물론 이 사건의 배경과 전후관계를 알 수 없었던 당시 민생단 혐의자로 지목되었던 사람들로써는 감격할 만도 하였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때 민생단 혐의자로 몰렸다가 풀려난 사람들이 이후 끝까지 충실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최현, 김달경, 강위룡, 박영순, 박록금, 등.... 김일성은 이렇게 긁어모은 대원들을 이끌고 이해 5월 동강으로 나갔다.




조국광복회 창립

북한 역사위정자들은 이른바 역사적인 남호두회의 이후 김일성이 장백으로 진출하면서 조국광복의 대업을 현실로 펼치기 위해 ‘조국광복회’를 내올 것을 구상하고 불철주야의 심혈을 기울였다고 선전한다.

남호두로부터 동강에로 나오는 그 어려운 싸움길에서 조국광복회 창립선언문도 작성하고 10대 강령도 집필하였다고 한다. 그에 기초하여 1936년 5월 5일 역사적인 동강회의를 소집하고 조선인민의 전 인민적 반일조직인 조국광복회 창립을 내외에 널리 선포하였다고 한다. 얼마나 찬란한 혁명역사인가?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되었을까? 묻혀진 역사의 자료들을 뒤져내서라도 진실을 알아보자.

앞에서 이야기되었지만 남호두회의에서는 코민테른의 지시에 의해 반제통일전선을 이룩하면서 조선인민혁명군을 따로 내올 데 대한 문제가 거론되었다.

이때 남호두회의를 주최한 중공당 만주성위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을 따로 내오는 문제와 함께 조선국내에까지 반일투쟁강화를 위해 강력한 반일통일전선조직을 내올 데 대해 토의가 있었다. 그러니 그 당시까지는 그 조직의 이름을 조국광복회라고 하자고는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면 조국광복회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이해 6월말 위중민은 한 개의 경위중대를 이끌고 금천에 가서 1군 군장이었던 양정우를 만났다. 여기에서 항일연군 제1군, 제2군 군정간부회의가 있었는데 1군과 2군을 합쳐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을 편성할 데 대한 문제가 토의되었다.

1로군의 총사령관으로는 양정우, 부사령에는 왕덕태, 정치위원으로는 위중민이 임명되었다. 이 회의는 남만쪽에서는 송철암, 이동광, 손영치, 한인화, 전광이 참가하였고 2군, 즉 동만쪽에서는 위중민, 왕덕태, 주수동, 왕윤성이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서 조선인 반일투쟁을 강화시킬 데 대한 문제가 토의되면서 조국광복회라는 말이 수차 거론되었다.

회의 결정과도 같은 라는 자료를 보면 2항의 마지막 부문에 극비리에 조선인 대중속에서 조국광복회를 조직하도록 하여 중화민족과 반일통일전선을 결성할 것이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고 보면 이 회의의 참가자들에 대해 다시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 여기에는 남만에서 온 전광, 즉 오성륜이라는 조선인이 참가하였다. 전광, 즉 오성륜으로 말하면 1898년 함북 온성에서 출생하여 조선독립을 위해 실제로 불철주야 달린 사람이다. 이 사람은 8세 때 중국으로 이주하였는데 이후 소련 국경수비대에도 복무하였고 1922년에는 조선의열단에 입대하여 상해에서 다나까 기이찌 일본육군대장 암살에도 개입하였다. 그러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감옥생활도 하였고 이후에는 이름난 황포군관학교 러시아어 교원까지 하였다. 또 1927년에는 중국공산당이 조직한 광주무장폭동에도 참가하였다.

이런 화려한 경력을 가졌기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일제의 만주침략이 시작되자 그를 동북에 파견하였던 것이다. 그는 동북에 와서도 반석중심 현위서기를 비롯하여 항일연군 제1군을 결성하는데 실로 거대한 공헌을 하였다. 바로 그런 전광이 회의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들이 조직하려는 조선인 반일지하조직의 이름은 당연히 조국광복회가 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1936년 6월 10일자로 된 두 개의 문서가 있는데 과 이다. 발기인은 물론 전광(오성륜), 엄수명(엄필순), 이상준(이동광)이다. 여기에 동만측, 즉 제2군 내의 조선인들이 추가되었을 수 있겠지만 자료에는 이들의 이름은 없다.

이들이 내놓은 10대 강령 제1조를 보자.

이다.

그런데 김일성이 내놓았다는 조국광복회 10대강령도 같다.



그러고 보면 조국광복회 창립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여 발족하게 되었는지는 너무나 명백하다. 조국광복회가 김일성에 의해 발기된 것도, 창립된 것도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히 해둔다.




보천보 전투

북한 위정자들은 소위 김일성의 항일업적을 극구 찬양하기 위한 선전에서 ‘보천보 전투’를 제1진에 놓고 있다. 김일성이 보천보전투를 통해 “조선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한다”를 세상에 밝혔고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는 것이 그들이 특별히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를 위해 1980년대에 보천보전투를 형상한 예술영화 ‘백두산’을 새로 만들고 미술작품들도 수없이 창작하였다. 양강도 혜산에는 김일성을 주인공으로 한 보천보전투 승리 기념탑이 시내 중심가에 위엄 있게 솟아있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6월 4일 소위 ‘보천보전투기념일’이 오면 전국도처에서 보천보전투를 기념하는 횃불모임을 가진다. 모임에서는 김일성이 보천보전투를 지휘한 역사를 작전계획 작성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전투의 역사적 의의에 이르기까지 장황하게 풀어 나간다. 북한에서 사는 사람 치고 보천보전투를 모르는 사람은 말 그대로 ‘간첩’이다. 김일성이 지휘했다는 보천보전투는 김일성왕조를 정당화하기 위한 우상화선전에서 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그러면 역사 속의 보천보전투는 북한 위정자들이 선전하는 것처럼 김일성이 주체적 혁명노선에 기초해서 독자적으로 계획하고 혁혁한 승리를 거둔 전투였을까. 그 진상을 풀어보자.

보천보전투 계획은 1937년 3월에 있은 서강 양목정자회의에서 논의되었다. 만주성당 특위 서기었던 위중민의 사회 밑에 진행된 회의에서는 김일성의 ‘주체적 노선’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중민이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 참가했다가 가지고 온 행동결정에 근거해서 조선국내진공 작전이 논의되었다. 당시 회의에는 항일연군 제2사 사장 조아범, 제4사 사장 주수동, 그리고 새로 조직된 제6사 사장 김일성이 참가하였다. 조선국내진출문제를 토의하는 이 회의에 참가한 사장급 지휘관으로서 조선사람은 김일성 한 명밖에 없었다. 그러니 김일성 부대가 당연히 국내진공작전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회의에서는 김일성의 제6사가 보천보를 공격하도록 결정하고 제4사는 무산으로, 제2사는 장백으로 진출하여 6사의 국내진공을 협공하도록 결정되었다.

그러면 왜 보천보가 조선국내진공작전의 목표로 선정되었는가. 그것은 보천보의 지리적 유리성 때문이었다. 보천보는 압록강으로 흘러 들어오는 가림천가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시골로써 조선의 내륙으로 통하는 중요한 철도분기점인 혜산진과 만주 장백현의 중심인 장백부를 가까이 접해있는 ‘비상벨’이라고 불릴 만큼 예민한 요지였다. 항일연군이 이곳을 습격하면 그 소식은 삽시에 조선국내로 퍼져 나가게 되어있었다. 최소의 비용을 들이면서도 최대의 심리적 효과를 노리는 빨치산 전술에 적합하다는 것이 보천보를 작전지로 선택한 이유의 하나였다.

항일연군이 보천보를 선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시골에 일본군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보천보에는 조선인이 280여 가호에 1,323명, 중국인이 2개 가호에 10명, 일본인이 26가호에 50명, 도합 308가호에 1,383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무장인원으로는 경찰 5명이 상주해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전혀 대적할 적이 없었다. 이것 역시 희생을 적게 내면서도 적을 놀래우는 유격전의 전술에 합당하였다.

김일성은 보천보전투를 위해 5월말 장백현 20도구 산중에서 박달, 박금철을 만나서 현지지도구입과 정찰을 비롯한 협력을 요구하였다.

1937년 6월 초 김일성은 90명으로 구성된 국내원정부대를 이끌고 압록강이 지척인 지양개 마을에 들어갔다. 일년 내내 압록강을 밀도강하는 몇몇 사람들 외에는 외지인을 전혀 볼 수 없었던 궁벽한 산골인 지양개 마을은 허름한 군복차림에 총까지 멘 90여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오는 바람에 법석 끓었다. 압록강을 건너기 위해 여기에 잠시 머물렀던 김일성은 떠나기 전에 혹시라도 마을 주민들 속에서 어느 누가 빨치산의 움직임을 일경에게 밀고할까봐 두려워서 마을의 매 가호에서 인질들을 한 사람씩 끌어내어 데리고 출발하였다가 압록강을 건너기에 앞서 산중에 보초까지 세워 잡아 두고 국내로 들어갔다. 이 한가지 사실만 보아도 김일성이 초기혁명활동시기부터 탔다는 ‘인민행열차’가 어떤 것이고 당시 유격대의 지위가 어떠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6월 2일 밤 박금철이 보낸 조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구시물동을 건너 곤장덕에 오른 원정대는 이곳에서 하룻밤 숙영하며 만단의 습격준비를 갖추었다. 다음날은 보천보의 장날이었는데 김일성은 마동희, 김학실을 현지에 직접 들여보내어 박달, 박금철의 갑산조직에서 보낸 정찰자료를 확인하였다.

6월 4일 밤 보천보전투에 앞서 김일성은 부대를 주재소습격대, 농사시험장습격대, 방위대, 물품탈취대, 검열대 등 6개 조로 나누었다. 그리고는 “적들이 저항을 할 것이니 용감하게 싸우라. 반항하는 자는 사살하라”고 일장 훈시(정치사업)를 하였다고 한다.

밤 10시. 김일성의 권총사격신호로 보천보습격이 시작되었다. 우선 전화선을 절단한 후 주재소부터 공격하였는데 먼 거리에서부터 기관총사격을 가하며 들어가는 바람에 보천보의 5명 경찰관 중에 단 한사람도 죽지 않고 모두 피신하였다. 다만 그 근처에서 엄마의 등뒤로 피하였던 어느 경찰의 딸애가 기총탄알에 맞아서 숨졌다. 기타 농사시험장, 삼림보호구, 소방대, 면사무소, 우편소는 습격이 아니라 방화였다. 사실 습격할 대상도 없었다. 그 때 원정대가 돌아가며 불을 놓는 바람에 인근의 보통학교까지 불에 탔다고 한다.

한편 물품탈취를 맡은 습격조는 보천보 거리의 점포, 요리점들에 모조리 침입하여 현금과 물자를 탈취하였는데 그 대의명분이 “우리는 만주에서 온 항일연군대원들인데 조선독립을 위해 분투하니 군자금을 내라”였다. 이 과정에 요리점을 경영하던 일본민간인이 잘 응하지 않는 바람에 거실에서 피살되었다. 결국 이 전투에서 살상했다는 ‘적’은 어느 경찰관의 딸애와 일본민간인뿐이었다.

보천보습격전투에서 원정대는 경기관총 1정, 소총 6자루, 권총 2정, 탄약 수백발을 노획하였다. 그러니 전투의 규모는 뻔하였다. 원정대는 밤 11시경에 철수하였다. 철수에 앞서 삐라를 살포하였는데 그 내용은 50장, 이 수십 장, 수십 장, 포고문 6장이었다. 삐라들에는 하나같이 ‘북조선파견대’라고 씌어져 있었다고 한다.

북한 위정자들은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시에 활활 타오르는 불더미 옆의 달구지 위에서 환영 나온 보천보의 수백명 인민들 앞에서 기막힌 연설을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그 연설을 들은 사람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김일성과 관련된 것이라면 심심산속의 구호나무도 기어코 찾아내는 사람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조리 떨쳐 나와서 들었다는 김일성 연설에 대한 산증인은 왜 못 찾아내는지... 그러니 김일성은 보천보전투시에 그 어떤 연설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어째든 보천보전투는 김일성이 경찰 5명을 상대로 ‘성공리’에 치른 무혈전투였다. 이런 방화에 가까운 보천보전투를 놓고 북한 위정자들은 별의별 업적을 다 주어다 붙이고 있다.



이것이 그들의 어마어마한 선전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분식하든지 오늘까지도 중국 압록강변의 지양개 인민들은 보천보전투에 관해서는 몰라도 김일성이 마을 사람들을 인질로 끌고 다닌 사실만은 명백히 기억하고 있다.

보천보전투의 진실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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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제나늘 2007-03-11 14:07:15
    잘 읽었습니다. 그럼 보천부전투 이후 습격군을 추적하는 일본군 중대를 전멸시키고 이어 연대병력에까지 타격을 입혔다는 김일성 전적은 어느 정도 사실인지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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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라생각 2007-03-11 16:28:27
    그건 뻥뻥뻥 입니당 ㅋㅋ겁쟁이 장군이 어찌 연대병력을 소멸해요 ㅋㅋ
    웃기네
    그리고 뒤질까바요 바로 로씨야로 도주했어요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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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꽃지기 2007-03-11 18:03:22
    나름대로의 근거들에 기초한 자료들 감사히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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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극철새 2007-03-11 18:16:52
    북극철새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2007-03-11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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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07-03-11 19:02:48
    옳다는 근거도 없고 아니라는 근거도 명확히 없다. 지금은 누구의 말도 진실의 기준이 없다.
    쪽발이 들한테 총부리를 댄것만도 평가는 조금이라도 받아야 되는것 아닌가. 과거에 일본군에서 복무하던 사람들이 참모총장도 하고 대통령까지 한 사람들도 있는데....그에 비하면 .././
    평가는 공정히 해야 한다. 죄는 지은대로 덕은 쌓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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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3-12 13:55:37
    결국 김일성이 졸병이던 장군이던 빨치산 투쟁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네요. 그리고 쟁쟁한 선배들을 밑에 둔 능력 자체도 인정해야 할 것 같네요. 정치적 능력이든 작전능력이든 암튼 졸개로 맴돌지 않고 중요 회의에 참가해 사장 자리에 올랐다는 것도 여럿 중에 용맹했던지, 인품이 있던지, 능력이 있던지 해야 하겠으니깐요.
    민족통신의 주장도 증거가 없기는 마찬가지 아닐까요. 증인 한명도 없어 오히려 김일성보다 더 신빙성이 약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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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ㄹㄹㄹ 2007-03-12 16:07:31
    빨치산투쟁은 사실이지만 ..한마디로 엄청 부풀려 뻥을 쳤다는것입니다
    한개분견대(분대)의 왜넘과 싸운것을 연대급으로 뻥을 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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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무 2007-03-12 23:50:31
    김일성이는 보천보 전투 당시 직책이 소대장이었습니다. 따라서 소대원 몇명 이끌고 중대를 전멸시키느니 연대병력에 타격을 줬다느니 하는게 과장된 소설이죠. 그리고 보천보 전투는 리단위 전투였고 남들 자고 있는 오밤중에 덮쳐서 타격 주는게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당시 빨갱이들 주특기가 새벽에 덮치기죠. 6.25도 마찬가지...

    <a href=http://blog.naver.com/maum8888?Redirect=Log&logNo=60012850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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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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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ㅎㅎ 2007-03-16 11:49:51
    허무님 정말 몰라도 너무모르시네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 당시 소대장이라니 세상이 다웃습니다 그러면 우리보고 너무 과장해서 헐뜬는다고 할건데 ㅎㅎ 허무님 허무하게 헐뜬지 마세여ㅎㅎ 그러다가 우리 보고 사이비라고 할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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