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영웅 정춘실도 탈북했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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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당국이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심과 인민에 대한 헌신적 복무정신의 귀감으로 내세운 북한의 국민영웅, 자강도 전천군 상업관리소 소장 정춘실(63)씨가 최근 탈북해 3국으로의 망명길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19일 태국을 경유해 국내에 입국한 한 탈북자는 이민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정춘실이 중국을 경유해 태국에 도착했고 현재 외국으로의 망명을 위해 모처에서 대기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며 정춘실씨의 탈북소식을 전했다. 당일 오후 정춘실씨의 탈북소식을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수소문하던 기자는 중국에서 정춘실씨를 직접 태국으로 넘겨보냈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전화통화를 하게 되었다. 그는 중국에서 탈북자 지원활동을 펼치고 있는 인권단체 관계자였는데 “정춘실의 탈북이 사실이냐”는 질문에 “맞다. 그러나 무슨 이유 때문에 탈북 했는지는 말해 줄 수 없다. 우리가 그의 망명에 도움을 주었다”라고 대답했다. 진위를 더 파악하려는 기자의 질문에는 “왜 구체적으로 물어보느냐? 신문에라도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며 통화를 끊었다. 다음날인 20일 이 관계자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하려 했으나 그는 “보안관계상 더 이상의 대답은 곤란하다”면서도 “그(정춘실)가 현재 태국에서 일반탈북자들과 함께 취급되고 있지는 않다”고 말해 정춘실이 이미 해당기관의 수중에서 보호를 받고 있음을 암시했다. 북한에서 전 국민이 따라 배워야 할 귀감으로,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받던 정춘실씨의 탈북이 사실이라면 북한체제와 주민들에게 주는 영향이 상당히 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정춘실은 누구인가? 정춘실이라는 인물을 알려면 먼저 북한에서 북한전역을 뜨겁게 달구었던 “정춘실 따라배우기 운동”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정춘실 따라배우기 운동”은 1991년 10월 31일 김정일이 자강도 전천군 상업관리소 소장인 정춘실(여. 63)이 상업부문에서 보인 충성심과 헌신적 복무정신을 「모범」으로 내세워 『정춘실의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심과 인민에 대한 헌신적 복무정신을 모든 일군들과 상업부문 종사자들이 따라 배울 것』을 지시함으로써 시작된 전 국민적 운동이다. 정춘실은 30여 년간 전천군 상업관리소 소장으로 일하면서 "우리 가정수첩"이라는 가구별 장부를 만들어 주민들의 일상사를 꼼꼼히 챙기는가 하면 부족한 생필품 공급을 위해 직접 인분지게를 지고 야산을 개간해 식료품을 마련하는 열성을 보여 김일성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특히 "우리 가정수첩"은 김일성으로부터 "공산주의상업의 싹이며, 아주 좋은 사회주의 상품공급 방법"이라는 칭찬을 듣기도 했는데 이 수첩에는 주민들의 복장 치수와 신발 문수, 결혼·회갑 날짜, 집안 대소사 등이 적혀 있어 그때그때 필요한 상품을 공급해줄 수 있었다고 소개되고 있다. 북한은 정춘실운동의 확산을 위해 "정춘실운동 모범단위" 칭호를 제정해 우수 기관, 공장·기업소에 수여하는 한편 94년 12월에는 평양에서 상업부문 종사자 3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정춘실운동 선구자대회"를 개최해 이 운동의 대중화를 촉구했다. 또 당기관지 노동신문을 비롯한 선전매체들은 "혁명전사가 어떻게 살며 투쟁해야 하는가를 보여준 빛나는 귀감"이라며 정춘실의 모범적인 근무자세와 희생정신을 추켜세웠으며, 그를 주제로 "효녀"라는 2부작 예술영화를 제작해 배포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정춘실운동"의 실존 주인공인 정춘실은 제6기(77.12)부터 10기(현재)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연임하고 북한 최고의 훈장인 "김일성훈장"과 "노력영웅" 칭호(2차례)를 수상했으며, 김정일로부터 "친필서한"을 받는 등 유명인사로 부상했다. 정춘실은 공개석상에서도 김일성의 양녀임을 자처하고, 김정일을 오라버니로 부르는 등 김부자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아 온 여성이었다. 그러나 정춘실은 끊임없이 부정축재와 비리 의혹에 휘말리면서 정춘실 운동의 의미도 상당히 퇴색되었었다. 특히 김일성이 사망하고, 식량난으로 자강도 주민들이 떼죽음을 당했을 때 정춘실은 저축해 놓은 식량을 내놓지 않아 주위의 비난을 받기도 했었다. 당시 자강도당 책임비서 연형묵은 전천군 상업관리소장 정춘실에게 예비로 비축해놓은 비상미를 풀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김일성을 아버지로 김정일을 오라버니로 부르며 양딸을 자처하던 정춘실은 자강도 전체 주민보다 자기 군(郡)만을 챙기면서 도당책임비서인 연형묵의 지시를 거부했다. 화가 난 연형묵은 김정일에게 ‘군수공장 노동자들이 죽어가는데 저 여자는 건사해놓은 식량을 내놓지 않는다’ 고 보고했다. 평소 주제넘게 ‘오라버니’로 부르는 정춘실에게 김정일은 ‘동무는 당의 배려를 많이 받아 교만해졌다’고 비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춘실에 대한 일화는 또 있다. 1992년 정춘실이 강원도에서 2대의 트럭에 생선을 싣고 자강도로 가던 중 강원도 통천-고성고속도로와 평양-원산 고속도로, 그리고 평양-전천 구간을 지나는 도로에서 연속 3번씩이나 군인들의 습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생선은 물론 냉동 탑차의 예비 타이어까지 뜯기고 전천에 텅빈 트럭을 끌고 도착한 정춘실은 노동당 중앙위원회에 정식으로 신소하였다. "어떻게 우리 장군님의 군대가...우리 인민군대가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말이다. 당시 이 사건으로 지휘관을 포함한 군인 10여명이 군사규율, 군민관계훼손행위 등으로 처형 및 불명예제대 등의 처벌을 받았다고 탈북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한편 이 사건에 대한 정춘실의 보고를 받은 김정일이 “나에게는 그런 군대가 없습니다”라는 대답으로 정춘실에 대한 불신을 표했다는 소문도 나 돌았다. 그러나 2007년 9월 2일 자강도를 방문한 김정일은 전천시 상업관리소에 들려 정춘실을 만나 그동안의 업적을 치하하고 기념촬영을 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전해 정춘실은 건재함을 자랑하기도 했다. 당시 김정일은 “수령님(김일성)의 각별한 믿음과 사랑 속에 정춘실은 온 나라가 다 알고 인민이 사랑하는 ‘김일성훈장’수훈자로, 2중 노력영웅으로 자라났다”며 “인민의 충복으로 한생을 살기를 바라던 수령님(김일성)의 뜻을 영원히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고 정춘실에 대한 각별한 신임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성 기자 lstar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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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평화가 그리웠을지도 모른다.
진짜로 탈북했다면 정춘실님의 과감한 탈북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자유대한 만세.
이름이 같으면 다 정춘실이고 김정일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