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탈북루트 그 현장을 가다/<2>옥죄는 감시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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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두만강 따라 500m마다 초소 …국경수비대 감시피해 ‘죽음의 渡江’ ▲ 북한은 급증하는 탈북행렬을 막기위해 두만강과 압록강 주변에 군 병력을 증강, 국경경비를 강화하고 있으며 강변에는 500m 간격으로 감시초소를 세워 탈북자를 감시하고 있다. 식량이 부족한 국경수비대는 부대 인근 농지에서 감자와 옥수수 등을 재배해 식량을 조달하고 있다. 두만강 건너편인 함경북도 온성군 삼봉리 부근 마을에서 작업을 끝낸 북한 군인들이 삽과 괭이 등 연장을 들고 부대로 복귀하고 있다.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을 타고 흐르는 두만강과 압록강. 옛적부터 수많은 이들이 전쟁과 도강 등으로 강물 빛을 핏빛으로 물들였던 곳이다. 오늘날엔 탈북자들이 강가에 어둠이 내리면 국방수비대의 감시를 피해 생명을 건 도강에 나서고 있다. 두만강과 압록강의 수량이 크게 줄면서 어른은 물론 아이들도 수영를 못해도 쉽게 넘을 수 있을 정도로 강폭이 좁고 수위가 낮았다. 하지만 철통같은 국경감시를 위해 CCTV와 순찰대 등이 강가를 따라 곳곳에 배치, 예전보다 도하를 위해 지불해야할 대가는 더욱 커졌다는 게 현지인들의 전언이다. 탈북지원단체 등에 따르면 탈북자들의 수는 지난 1996년부터 급증하다가 북·중 양국의 국경 경계 강화로 2002년을 정점으로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 두만강 인접 도로에서 트럭을 타고 이동하는 북한 주민들. ▲ 급증하는 탈북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두만강 강변에 설치된 감시초소. #북한은 지난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이후 2000년까지 6년여 동안 ‘고난의 행군’과 자연재해로 인해 흉년 등이 겹치면서 북한주민들이 기아 등으로 300만여명이 굶어 죽는 등 전대미문의 식량난을 겪으면서 북한이탈이 속출했다. 중국대륙 등지에 신유랑민처럼 떠돌아 다니는 적게는 10만명에서 30여만명 안팎으로 추산되는 탈북자들의 상당수가 이 시기에 국경을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탈북자들 상당수가 자유보다는, 즉 아사(餓死)를 면하기 위해 체제 이탈을 감행한 것이다. 이후 북한은 식량사정이 차츰 호전되면서 과거의 끔찍했던 상황에서 벗어나 탈북자 수가 일부 줄어들고 있다. 현재까지도 북한주민들은 생활에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궁핍한 경제상황이 완전히 종료된 것은 아니다. 또 북·중 양국의 국경 경계강화로 탈북감행에 따른 위험성도 더욱 높아졌다. 북한 당국의 단속의 힘이 미치지 않았던 두만강과 압록강 곳곳에 설치된 북한의 감시초소 배치와 중국의 국방경비대의 순찰강화는 이 같은 국경상황의 변화를 방증하고 있다. 두만강과 압록강을 따라 중국과 북한의 국경을 차량으로 이틀에 걸쳐 둘러본 결과, 국경경비가 강화돼 500m 간격으로 위장해 놓은 초소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게다가 일부 탈북자들이 탈출경로로 자주 이용하는 지역의 산의 울창한 숲 등을 민둥산화해 탈북자 이동 감시를 용이케 하는 등 체제 이탈에 강력 대처하고 있었다. 이와함께 중국 당국이 탈북자 문제가 국제 정치이슈로 떠오르면서 국경을 넘어 중국 연길 등지로 불법입국하는 탈북자들에 대한 단속을 강화한 것도 큰 이유다. 이 때문에 연길 조선족을 포함한 변경지역의 주민들이 탈북자들을 도와주거나 보살펴줬을 때 가혹한 조사와 엄청나게 많은 벌금을 부과하는 등 여건이 예전과 크게 달라져 탈북자들이 도움을 받을 수 없다. 현재 교회나 단체 등에서 탈북자들을 돌봐줬을때는 벌금으로 중국돈 5천원, 개인이나 민가에서 식사를 한 끼 제공하거나 돌봐줬을 때에도 벌금을 3천원을 부과하고 있다. 중국에 사는 친척들도 한두번은 북한에서 찾아온 친척을 도와줬으나 생활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인 이들이 지속적으로 도와주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일부 탈북자들이 사람을 살해하는 등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국경에서의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지 않아, 일부 조선족들도 더 이상 탈북자를 같은 동포로 여겨 도와줄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됐고, 중국정부가 언론을 이용해 이런 사건들을 대대적으로 보도해 위화감을 조성한 것도 한몫하고 있다. 특히 북한 당국이 지난 2002년부터 북한서 중국으로 가족방문 등의 목적으로 국경을 넘어갔다가 되돌아올 수 있도록 공식 허가하는 도강증 발급을 2004년부터 대폭 늘려 합법화한 점도 탈북자 수 감소의 한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북한에 친인척이 있어 가끔 다녀온다는 렌터카 운전기사 L씨(46)는 “탈북자들에 대한 북한·중국 당국의 국경경비 강화 등의 엄정한 대처로 탈북자가 줄어든 건 사실”이라며 “대다수의 북한주민들은 도강증을 받아 나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안전한 길을 선택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인터뷰/ 도강증 받은 北주민 장기순씨 “각종 재해로 고난의 행군 체류기간 만료땐 北 갈터” “중국 단동에서 한달 먹는 돈이면 북에서 1년은 살 수 있고, 한국에서 3개월 생활비면 여기에서 1년은 살 수 있다는데…” 중국 단동시에 지난 1월께 친척방문으로 도강증을 받고 나와 머물고 있는 북한주민 장기순 아줌마(가명·60)는 북한으로 되돌아갈 거냐는 질문에 대해 “체류기간이 만료되면 다시 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단호하게 밝혔다. 그녀는 현지 생활에 대해 “중국에서 가장 서러웠던 것은 아팠을 때였고 퇴원후 나올 때 그 치료비가 무지하게 비쌌다”며 “북한은 옛날 1990년 초반만 해도 의료서비스는 무상으로 치료를 받았을 때 생각이 겹치면서 생돈이 나가는 것만 같아 너무 아까웠다”고 털어놨다. 장 아줌마는 그러나 “수령님이 돌아가신 뒤 각종 자연재해는 겹치고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살기가 어려워지며 전깃불 소중하고 쌀밥 귀한줄 알게되는 등 상황이 급변했다”고 설명했다. 최근 신의주 상황에 대해 장씨 아줌마는 “신의주는 평양 다음으로 잘 사는 동네인데다 최근 개인이 장사를 할 수 있게 부분적으로 북한당국이 허용하면서 ‘신의주가 기회의 장’으로 변모, 실제로 일부 주민들은 큰 돈을 벌고 있다”며 “하지만 장사 경험이 일천해 이문을 남기는 것은 아직까지는 하늘의 별따기”라고 전했다. 장 아줌마는 도강증 발급에 대해 “중국이 북조선보다 생활수준이 높아서 사상이 변질될까 봐 그런지 나같이 나이가 든 사람은 몰라도 젊은 사람들에게는 비자를 쉽게 내주지 않는다”며 여전히 엄격한 체제통제가 수반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경기일보 2007-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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