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부산 정착 새터민 강유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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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2007-09-17 11:54 "북 동생들이 부모님 제사 잘 지내는지 걱정" 추석을 앞두고 있다. 민족 최대의 명절인 만큼 고향 찾는 귀성객들의 발길로 '민족대이동'의 파노라마가 곧 이 땅에 다시 펼쳐질 터이다. 두고 온 고향, 하지만 되돌아갈 수 없는 신세인 우리의 이웃들. 탈북하여 남한 땅에 뿌리를 내린 새터민들에게는 터박고 있는 이 땅이 얼마나 '다른 삶, 다른 현장'인지 절절하게 다가오는 무렵일 것이다."제가 탈북한 뒤 어머니가 중국으로 저를 찾아오시다 붙잡혀 천진직결소로 끌려가 사망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묘소가 어디인지도 모르지요. 아버지 묘는 함경남도 홍원에 있습니다. 남향인 데다 바다 쪽으로 아주 묘를 잘 썼지요. 그런데 묘를 쓴 지 얼마 안돼 철수시키라는 명이 내려왔습니다. 도로 쪽에서 볼 때 산에 묘가 너무 많아 미관상 좋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지요. 아버지 살이 아직 내려앉지도 않았을 텐데 싶어 동생들과 의논해 이장하지 않고 소나무 네 개를 주위에 심고는 봉분 없이 평묘(平墓)를 했지요. 북에 있는 동생들이 명절 때 묘를 찾아 제사나 지내는지 그게 제일 가슴 아픕니다." 새터민 강유(64·부산 북구 덕천동)씨는 추석 이야기가 나오자 이내 눈이 붉어지고 목이 메어왔다. 그는 지난 1998년 10월에 탈북했다. 홀홀단신 중국에 들어갔다. 4년을 헤이룽장성 등에서 기회를 엿보다 아내와 세 딸을 다시 데리고 나왔다. 중국에서 몽골 국경을 넘은 것이 2004년 초였고 한 달여 만에 한국에 들어왔다. 부산에 정착한 것이 그해 8월부터였으니 부산에서의 타향살이도 이러구러 3년을 넘겼다. "북한에서의 추석이요? 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식량난이 발생하면서 명절 흥도 안 나고, 또 가무를 금지시켜 웃지도 못했습니다. 김일성 생전에는 추석에 술도 공급해주고 기업소에서 돼지라도 잡으면 나줘 주고 수산물과 과일도 공급했지만 사후에는 명절 분위기가 거의 없었지요. " 그의 탈북도 북한의 경제난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중국 투먼에서 태어난 그는 지린성 옌지시 침구사맨발(赤足)의사 양성반을 졸업했고,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학업을 계속하려는 목적으로 74년 북한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약사인 동의학조제사를 하다 3년제인 함경남도보건간부학교를 나와 한의사인 동의사 자격을 얻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고향인 홍원에서 진료소장을 맡아 뿌리를 내렸다. "96년부터 쌀과 노임 등 일체의 배급이 끊겨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속출했지요. 제가 진료소장을 맡고 있는 구역에서만 한 달에 180명이 죽어나갔습니다. 그래서 97년에 중국에 있는 외가와 처가로부터 중국 돈 3만위안을 지원받아 북한 돈으로 바꾸니 8만원이었는데, 2만원으로 옥수수를 사다 진료소 직원들에게 나눠 주고 6만원으로는 가자미 잡는 돛배 6척을 구입해서 거기에서 나오는 돈으로 먹고살았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받아온 돈을 보위부에서 안기부 간첩자금으로 몰아갔지요. 98년에 잡혀들어가 인간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악독한 고문을 받다가 병보석으로 나왔는데, 몸이 좀 회복되자 다시 잡아들이려고 해서 탈북했습니다. 사람이 굶어 죽어 나가고 탈북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홍원에서는 제가 의술이 좀 있고 해서 다들 나를 잘 아니까 다른 사람들 겁주려고 시범케이스로 잡아들인 거지요." 이런 과정을 밟아 부산에 새 터를 잡아 새터민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부산에 정착한 것은 할아버지와 숙부들이 광복되던 45년 월남했는데, 셋째 삼촌이 거제도에서 포로 관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삼촌을 찾으려고, 막연히 거제도가 부산에서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부산에 뿌리내리게 되었지요." '새 터' 부산에서 '새터민' 부산시민으로서의 그의 삶은 애초엔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 북한과 중국에서 받은 한의사 자격이 이곳에서는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통일부 보건복지부 관계자를 만나 탄원했고 헌법소원까지 냈지만 의사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헌법에 북한 영토도 대한민국 땅이고 북한 주민도 대한민국 국민이라 나와 있는데 왜 안 되느냐고 따졌지만 법이 마련되지 않았으니 기다리라는 회신이었죠. 아니면 다시 공부를 하라고 하는데 이 나이에 대학에 들어갈 수도 없고…". 그래서 의료자원봉사에 그는 새 삶의 희망을 걸었다. 지난 1월부터는 '민중의술 살리기 국민운동 부산·경남연합' 회장직을 아예 맡았다. 일주일에 5일간 오전 9시부터 낮 12시까지 동래구 수안동에 있는 민중의술 살리기 사무실에서 의료자원봉사에 나선다. 오후에는 자신이 거주하는 북구 덕천시장 인근에 3평짜리 공간을 얻어 동네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에 나선다. "돈 없어 병원 못 가는 이들은 누가 책임집니까. 북한체제를 그나마 떠맡쳐주는 두 개의 기둥이 무상의료 무상교육입니다. 그만큼 의료가 중요한 것이지요. 우리 국민들은 너무 건강상식 위생상식이 없어요. 수술받지 않을 것도 수술하려 하니깐요. 또 의료사고가 나면 환자들이 사고를 규명해야 하는데, 의료지식이 없는 환자들에게 맡긴다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지요. 북한에서는 의료사고가 나면 철저하게 의사를 조사해서 그 책임을 강하게 묻고 있습니다." 돈 한푼 받지 않고 자신의 의료기술로 자원봉사에 나설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새터민 강유씨. 생활비로는 기초생활수급권자로 정부에서 받는 돈만으로도 전혀 불편이 없다며 호방한 웃음을 짓는다. 고향이 그립지만 거듭 생각해봐도 남한에 오기를 잘했다고 말한다. "한 10년 전에만 왔더라도 마음껏 돈 벌고 사회공헌도 했을 겁니다. 탈북자들이 새 터에 정착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너무 안타까워요. 과거의 묵은 때와 편견을 갖고서는 이곳에서 못 삽니다. 새롭게 시작해야지요. 저는 남은 시간 병이 있어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제 기술을 다바쳐 자원봉사에 나서려 합니다. " 임성원기자 forest@busanilbo.com 사진=정대현기자 j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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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고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