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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가 여덟인데 왜 베개는 두 개뿐인가?
REPUBLIC OF KOREA 관리자 1211 2007-11-27 18:24:43
자유북한방송 2007-11-27

서울서 평양까지 다시 평양서 서울까지, 의용군 출신의 탈북자 박순자(65)씨가 북한에서 겪었던 피눈물 나는 체험담을 인터뷰로 들어본다

진행자: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이 시간에는 2003년 남한에 입국하신 박순자 어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박순자 -안녕하십니까.

진행자 : 참 듣건대 어머니께서는 한국에서 태어나셨고 또 6.25전쟁의 1.4후퇴시기 북한군에 의해 의용군으로 강제로 북한으로 끌려가셔서 갖은 고생을 다 하셨다고 들었는데 간단한 경위를 말씀해 주십시오.

박순자 : 지금 많은 세월이 지나 생각은 잘 안 나지만 그때 동대문 쪽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더라고요. 그래서 이게 무슨 사이렌이나 하고 듣고 보니까 전쟁이 일어났다고 했어요. 그때 국방군들이 다 외출했댔어요. 색시들 데리고 외출도 하구 한강에서 보트도 타구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니까 차를 타고 왱왱 정신없이 다니더라고요.

그때야 나도 전쟁이 일어난 사실을 알고 큰일 났다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때 우리 집은 엄마하고 여동생, 남동생, 나하고 네 식구가 살았는데 갑자기 인민군대가 나타났어요. 세상에 거지꼴을 하구요. 그 지하족은 헝겊으로 만든 것을 신고 모자도 일본말로 하면 센또모인데 그런 모자를 쓰고 허줄하게 입고 사렬 종대를 서서 저 청량리 쪽으로 해서 동대문으로 오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거지군대를 보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무슨 군대가 저렇게 거지야 하고 물어봤어요. 그러니까 옆에 사람이 이건 거지 군대가 아니라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이라고 말하더군요. 나는 그때까지 살아도 국방군이 평상시 모자를 쓰고 넥타이를 매고 모직 와이샤쓰에다 가죽구두만 신은 것만 보았지 그런 지하족은 처음 보았어요.

진행자: 그럼 그때 당시까지만 해도 전쟁이 일어 난 줄은 모르셨던 거군요?

박순자 :예 전쟁이 일어날 줄도 모르고 갑자기 사이렌이 나더란 말 이예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전쟁이 일어났다고 그러더군요. 그런데 1950년 6월28일이 되니까 서울이 점령됐다고 그래요.

전쟁은 1950년6월 25일 일어났거든요. 그런데 사훌 만에 서울을 점령했어요. 서울에 있는 사람들은 피난가고 우리는 피난을 가지 않았었는데 갑자기 인민군대 군관하고 하사관 두 명이 총을 메 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때가 7월이었어요. 그 군관이 하는 말이 “이 간나새끼들 피난도 안가고 집에서 뭘 하고 있어?”라며 “날 따라와” 하더니 안 따라오면 죽인다고 위협하여 우리를 서울 풍운 중학교에 데리고 가더라고요.

풍운 중학교에 며칠 있다가 나를 명동거리 뾰쪽당 있는데 데려가 군복을 주면서 동생과 함께 병원청소도 하고 환자들에게 밥을 날라다 주라고 했어요. 나중에는 내가 그래도 지식이 좀 있다고 간호원을 시키더군요. 그래서 간호원을 하면서 약도 타다주고 생활하는데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까 동생이 없어져 물어보니 새벽에 대전 전투에 나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다음날 나는 야전병원이 이동하는데 따라 좇아갔는데 큰 다리를 건너가더니 이게 북반부라고 하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남반부에서 북반부로 오게 되였고 가지도 오지도 못하고 그때가 아마 9월 달인 것 같아요. 나중에 얼마쯤 가더니 후퇴라고 말하더군요.

진행자 : 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북한으로 끌려오셨군요. 그럼 북한에 오셔가지고 어떤 직위와 직책에서 근무하셨습니까.

박순자: 후퇴해서 우리 부대는 북한 자강도 만포에 다 모여서 재편성하더니 저더러 내무성중앙병원에 배치하더군요.

진행자 : 내무성중앙병원은 어떤 곳입니까?

박순자 : 내무성병원은 안전원들의 병원입니다. 56년도에 내무성이 사회 안전성으로 개칭했어요. 내무성병원은 중앙당사람들 그다음 호위국사람들, 항일투사들, 그런 사람들이 와서 치료 받는 곳이에요. 거기는 일반사민들과 인민군대는 치료를 받고 싶어도 못 오는 곳이에요.

진행자 : 그럼 북한에서의 생활은 어떠셨나요? 결혼하셔서 남편 되시는 분이 북한에서 간부로 있었다지요?

박순자 : 예 내가 북한에 있을 때 고향에가 결혼 하겠다고 맘먹고 28살까지 결혼도 안하고 있었는데 다들 어린애들도 가는데 나도 나이는 먹어가고 할 수 없이 평남도 사람과 결혼을 했어요. 1호위국에서 근무하는 상좌였어요. 남편과 함께 생활할 때는 정말 그리운 것 없이 잘살았어요. 그래서 아이도 많이 낳고 살았는데 어느 날 나는 남편과 일찌감치 출근을 같이 했어요. 그런데 병원에서 전화가 오더군요.

갑자기 남편이 일하는 안전성에서 나한테 전화가 왔는데 남편이 전사했으니 빨리 오라는 내용 이였어요. 나는 깜짝 놀랐어요. 남편이 사망한곳으로 가니 백포에 묻은 핏자국을 보니 억이 막히더군요.

아침에 성성한 사람이 나갔는데 왜 죽었는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국가 비밀이라고 하더군요. 정신없이 울다 시체를 따라 산에 따라가니 악사들이 와서 추도곡을 하고 혁명가라고 총을 쏘고. 친구들이 울고 불며 했어요. 나 역시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더군요. 이남에서 와 살붙이라고는 그 사람 하나뿐 이였는데 ... 나는 산소에서 그냥 울다가 이유도 묻지 못한 채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 왔어요.

그 후 남편이 죽으니까 보잘것없더군요. 내가 또 남반부 출신이다 보니 항상 우리 남편도 평상시 내가 남반부 출신어서 자기가 그런 위치에서 일할 수 없는데 혹시 제대되지는 않을까 하며 속으로 많이 걱정했어요. 남편은 늘 “내가 촌으로 쫓겨 가면 당신 쫓아올래?” 하며 농담처럼 묻곤 했어요.

진행자 : 남편이 사망한 후에는 어떻게 사셨습니까?

박순자 : 남편이 있을 때면 아마 평양에서 그냥 살았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남편이 죽으니까 반년도 못되어 앞뒤가 산이고 옆에도 산인 그런 심심산골에다 우리 가족을 보냈어요. 세상에, 난 그런 산골은 가보지도 못했어요. 그냥 도외지에서만 살았지 이런 산골은 못가 봤는데.

진행자 : 그때 당시 산골로 갈 때 추방이라는 생각은 안하셨나요?

박순자 : 그때는 내가 병원에 있을 때인데 추방이라고 안 그러고 전사자 가족이 돼서 피난 시켜 주는 줄만 알았어요. 그해에 도끼사건이 일어나 정세가 복잡했거든요. 추방이란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그런데 산골에 가서 살다보니 “남반부 출신이 되서 추방 왔구나” 며 사람들이 모두 알려주더라구요. 그래서 그때야 알았어요. 처음에는 몰라서 고맙게 생각했어요.

우리 가족이 추방 간 곳은 옛날 양반들이 정배살이 하던 함경북도 무산 오봉산골짜기였어요. 감자만 심어서 먹고사는 동네입니다. 그래서나는 간첩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데 보낼 수 있는가 하고 원망도 많았습니다. “왜 내가 남반부에서 왔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이 산골에서 살아야하는가” 하구 당에도 찾아갔지만 “당원이 아무 곳에 가든지 당에서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는거지, 무슨 좋고 나쁜 것을 가리냐”며 한바탕 욕만 얻어먹었습니다.

진행자 : 참 가슴이 아프네요. 그러면 그곳에서의 생활은 어떠하였습니까.

박순자 : 기가 막혀요. 입쌀은 하나도 없고 감자만 먹고 살았습니다. 거기다 어찌나 추운지 큰 아들은 일하다 귀가 다 얼었습니다. 맨손으로 그곳에 간 우리에게 뭐가 있겠어요. 아무것도 없지. 사람들이 동화(冬靴)를 신고 일하는데 없어 여름신발 신고 일하다 발이 얼고 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정치보위원이 저를 오라고 그러더군요. 보위원실에 가니까 정치보위원이 “식구가 여덟인데 집에는 베개가 왜 두 개 밖에 없는가?”고 물었어요. 그래서 내가 그렇지 않다고 하자 노동지도원을 파견해 가지고 우리 집을 수색하더라고요. 생활을 꾸리지 않고 건성건성 살다가 달아나지 않나 의심을 한거죠. 참 아이들을 두고 내가 어디를 도망을 해요.

진행자 : 참 말도 안 되는 일이네요. 참 그때 당시도 생활이 힘들었을텐데

박순자 : 네 배급을 못주니까 사람들이 맥이 없어 출근을 못합니다. 출근을 못하면 위에 있는 간부들이 와서 나오라고 소리칩니다. 그래서 굶어서 맥이 없어 나가지 못하겠다고 대답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그 짐승들이 사람을 막 때려요. 그리고 결근했다고 강제노동단련대나 집결소에 보내니까 사람들이 무서워서 벌벌 기여서라도 출근해야 합니다. 일 못해도 나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죽지 않으려고 발악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먹다가버린 그 사과속도 흙을 털어버리고 너무 배고프니까 막 씹어 먹고 아이들은 역전에서 다 자고 있어요. 그걸 꽃제비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배고파서 장마당에서 먹을 것을 사먹으려면 어른이구 아이고 할 것 없이 도적질해서 훔쳐가요.

하여튼 그때 당시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농민들은 산에 나물만 없으면 다 굶어죽었을 거예요. 나중에 신문에 이런 게 났어요, 벼 뿌리를 캐서 말리워 가루내서 먹으면 영양분이 있다, 그래서 신문에 난대로 해서 먹으니 뒤가 메서 인민들이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 몰라요,

그리고 또 강냉이 대를 벗겨서 그 속의 물렁물렁한걸, 가루내서 먹으라고 해 그것을 먹고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몰라요. 그리고 영양실조로 사람이 길에서 죽으면, 옷을 다 벗겨가요. 신발과 배낭이고 뭐고, 그 죽은 사람을 홀딱 벗겨내요.

우리 동네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중국에서 부채마(약초)를 가지고 오면 밀가루와 바꾸어준다고 해서 동네청년이 죽을 사발에 담아가지고 산에 갔는데 옆집 사람이 죽을 뺏어먹기 위해서 그 청년을 때려 죽였어요. 그리고는 죽을 빼앗아 먹고는 자기가 죽이지 않은 것처럼 업고 산을 내려 왔어요. 그런데 그게 누군가하면, 참 놀랍게도 작업반 세포비서였어요. 그 사람이 안전부에 잡혀서 죽 한 그릇 뺏어먹으려고 때려죽였다고 실토를 했습니다. 그 세포비서네 딸아이는 8살인데 영양실조에 걸려서 4살배기 어린애보다 더 작았어요.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깐들 깐들 하다가 겨우 일어나“오빠야, 오빠야, 내 배가 얼마나 고픈지 몰라” 그러다가 굶어 죽었어요... 얼마나 불쌍한지 몰라요.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어 가는지 몰라요. 버섯 철에는 버섯을 뜯어먹는데 웬 독이 그리 많은지 ,그 버섯을 먹고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진행자: 참 이것은 한 부모의 책임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이죠. 그런 고통을 겪다가 탈북을 하시게 된 거군요.

박순자 :딸이 거기서 고생을 하다가 중국에 들어갔는데 소식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딸 소식을 알고 싶지 않는가?”고 물었어요. 이게 뭔 소리인가해서 말해보라고 하니까 “딸이 중국에 있는데 아파서 엄마를 꼭 한번 봤으면 해요” 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중국에 갈 수 있나 하니 자기만 따라오라더군요. 그래서 두만강을 넘어갔는데 딸은 없고 그 남자가 전화를 걸더니 딸과 바꾸어주었어요. 딸이 하는 말이 그 사람이 하라는 대로 하면 날 만날 수 있으니까 그대로 하시라고, 엄마도 고향에 오고 싶지 않은가... 그래서 그 남자를 따라서 베이징한국영사관에 갔고 거기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 국정원에서 한두 달 정도 있다가 하나원을 졸업하고 나오니 집을 주더라고요.

그때가 10월 달에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생활하는데 그리운 게 없고 먹을 것도 그렇고 정말 과실을 먹으려 해도 배가 불러 더 먹지를 못하겠어요. 정말 이런 걸 먹을 때면 북조선 아이들이 생각나요. 지금 나는 형제들도 만났고 그리고 동사무소에서 나에게 “할머니 생활이 어때요” 하고 물어보면 “나는 대부자요” 하고 늘 그렇게 말해요.

동사무소에서 생계비를 주지, 정착금을 주지, 늘 북조선 생각을 하면서 저축하며 살아가요.

진행자 : 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최현미 기자 choiyenmi33@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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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국의여인 2007-11-27 18:51:51
    휴~ 정말 할머니 말씀이 맞아요. 북한그대로 이야기 하신것 같아요

    할머니 이젠 이렇게 고향땅에 오셨으니 좋은 생각만 하시고 남은 여생을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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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복 2007-11-27 19:14:20
    한국에 오신것을 축하드려요.
    건강하시고, 항상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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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첨과끝 2007-11-27 22:57:35
    저러고도 북한괴뢰도당 벌 안 받을까!!!!!!
    썩어빠진 양아치 개정일패거리!!!
    ㅉㅉㅉㅉㅉㅉㅉㅉ
    남한땅 오신것 축하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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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랭이 2007-11-27 22:58:50
    이글은 카랭이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07-11-27 23: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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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서리 2007-11-28 09:36:42
    고향으로 오신 할머니 환영합니다. 잘오셨습니다. 저의 어머님도 함으로 추방가시여 죽을 고생을 다하고 계십답니다. 다 함계 살아스면 얼마나 좋으려만 너무도 안탁값습니다. 할머니 김정일이 뒤지고독재가 망하는 꼴 꼭보시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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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민복 2007-11-28 11:29:22
    참 훌륭한 인텨뷰입니다.
    긍정적인 분이시니 고난이 축복임을 증명하시네요.
    부디 건강 장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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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현정 2007-11-28 15:04:10
    가슴아픈 사연입니다. 북한 주민 누구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가슴아프고 추억하기 싫은 그 일을 언제나 잊지 말고 건강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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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의기쁨 2007-11-29 17:42:15
    할머니의 인터뷰를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첨부터 끝까지 거짓 하나없는 진실이니까요..
    할머니뿐아니라 북한 모든 백성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피눈물속에 죽지못해 살았습니다..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 아무 근심걱정 없이 행복한 삶을 살고있지만 고향땅에 두고온 부모형제들과 지금도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고 계시는 우리 고향분들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쏟아집니다
    고생속에서 살아오신 할머님께서 늦게나마 고향땅에서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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