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엔 한숨과 눈물도 하얗게 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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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2008-01-16 09:40 두만강은 백두산 자락의 작은 옹달샘에서 발원한다. 백두산 북파(北坡)에서 약 28km 떨어진 곳. 원시 자연의 한 귀퉁이에서 시작된 이 작은 물줄기는 한반도의 북쪽 끝을 향해 달리고, 또 남으로 방향을 틀어 한반도를 감싸면서 중국과 러시아까지 적신다. 수천 년간 한민족 역사와 함께해온 두만강의 유래에 대해선 다양한 전설이 전한다. 그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 백두산 천지 물이 흘러넘쳐 홍수가 되고 사람들이 다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천지용왕의 셋째 아들이 용궁을 도망쳐 나와 지하의 물줄기를 몰래 터놓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 ‘도망강’이 어원이라고 한다. 또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 위에서 콩타작을 하면 강 전체에 콩이 누렇게 덮였다 하여 ‘두만강(豆滿江)’이 됐다는 전설도 있다.(‘두만강 압록강 류역 지명전설’ 중에서, 연변인민출판사, 2006) ‘주간동아’ 취재진은 지난해 12월13일부터 사흘간 두만강을 따라 북한과 중국 국경지대를 탐사했다. 있는 듯 없는 듯한 국경, 사람 발길조차 끊긴 겨울의 두만강.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굶어죽은 북한 주민들의 시체가 떠내려오고 도강(渡江)한 꽃제비들이 줄을 잇던 두만강변의 요즘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12월14일,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의 중심도시인 옌지를 출발한 취재진은 두만강 발원지를 향해 출발했다.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된 룽징(龍井)과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 현장이 내려다보이는 화룽(和龍)을 거쳐 두만강변의 난핑(南坪), 충산(崇善) 등을 따라 내려가는 약 200km의 여정이었다. ‘선구자’ 살던 해란강은 겨우 흔적만 룽징에서 화룽으로 이어지는 길은 우리 민족의 고단한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가곡 ‘선구자’의 무대가 된 일송정, 일제강점기 만주로 이주한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터를 잡았다는 해란강이 먼저 취재진을 반겼다. 중국 정부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개발에 나선 룽징 인근의 발해·고구려 유적지도 이 해란강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선구자’가 살았다는 해란강은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강 상류에 댐이 만들어지면서 유량이 줄어 겨우 강의 형태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룽징에서 만난 한 60대 조선족은 수십 년 전의 해란강을 이렇게 회상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해란강은 강폭이 아주 넓고 물이 맑았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해란강에서 빨래를 하고 물도 길어다 먹었다. 홍범도 김좌진 장군도 모두 이곳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했다고 들었다.” 해란강 인근 역사유적 개발예정지 주변엔 도시 미관을 이유로 중국 정부가 만들어놓은 똑같은 모양의 조선족 민가들이 전시하듯 줄지어 있어 씁쓸함을 더했다. 취재진이 두만강을 만난 곳은 북한과 국경을 맞댄 중국 난핑. 두만강변을 중심으로 한 조-중 무역의 중국 측 핵심 포스트로 알려진 곳이다. 함경북도 무산에서 채굴된 철광석은 모두 이곳을 통해 중국으로 반입된다. 철광석의 이동경로를 따라 두만강변엔 난핑, 충산 등 무역 거점(세관)들이 하나 둘 문을 열었고, 지금은 그 수가 10여 곳을 넘는다. 아직 비포장 상태인 화룽-난핑길은 1990년대 후반 굶주린 탈북자들의 중국행 교통로가 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만난 한 조선족의 설명이다. “1998년부터 북한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집단 탈북하기 시작했다. 당시 하루 수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왔는데, 그들 대부분은 회령을 거쳐 룽징으로 들어오거나 무산을 거쳐 난핑, 충산 쪽으로 들어왔다. 당시 룽징에서 화룽으로 가는 이 도로는 탈북자들로 새까맣게 덮였을 정도였다.” 난핑에서 충산에 이르는 약 20km의 길은 탈북자들의 주요 교통로이자 조-중 사무역(밀수)의 주요 거점이라고 취재진을 안내한 조선족 안내원은 귀띔했다. 그 얘기를 입증이라도 하듯 이 지역의 두만강변엔 ‘밀수를 금지한다’는 내용의 푯말이 곳곳에 설치돼 있었다. 특히 함북 무산이 바라다보이는 중국 측 강변에 수십 개의 돌푯말이 집중적으로 세워져 있어 긴장감을 더했다. 돌푯말에는‘변경지역에서의 밀수를 금지한다’‘국경지역에서의 밀매, 환불을 금지한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곳곳에 밀수 금지 푯말 설치 실제 북한에서 기근이 시작된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이곳에선 조-중 국경을 넘나드는 밀수가 극성을 부렸다. 당시 중국과 북한 간에 행해진 주요 밀수 품목은 자동차, 목재, 쌀, 산짐승 등이었다. 특히 유럽 홍콩 등에서 생산, 유통된 자동차의 경우 북한을 통해 족히 수만 대는 들어왔을 것이라는 게 이 지역 사정에 정통한 인사들의 설명이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조선족 김인수(가명·36) 씨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 군인들이 총을 쏘면서까지 밀수를 막았지만 중국으로 들어오는 엄청난 양의 밀수품을 막지는 못했다. 북한과 중국 정부는 두만강을 넘어 자행되는 밀수를 막기 위해 강 중간중간에 콘크리트 말뚝까지 박아놓았을 정도다. 하지만 밀수는 근절되지 않았다. 밀수에 가담한 북한과 중국의 조직들도 총으로 무장하고 군인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수십명의 밀수꾼과 군인이 희생됐다.” 김씨에 따르면 2000년대 초만 해도 옌볜지역엔 이렇게 들여온 외제차가 넘쳤다. 처음 자동차 밀수가 시작될 당시엔 주로 중고차가 들어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벤츠, 아우디, BMW 같은 고급 외제차량이 출고 당시 모습 그대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밀수된 자동차 대수는 2000년대 초반까지 꾸준히 증가했다. 당시 밀수에 간여했다는 또 다른 조선족 박성철(가명·34) 씨는 “아우디 같은 차량은 차종에 따라 대당 중국 인민폐로 1만5000위안(약 200만원)을 벌 수 있었다. 옌지에서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의 월급이 보통 2000~3000위안이니 아주 큰돈을 번 셈이다. 밀수가 한창 잘될 때는 옌볜과 무산에 돈이 넘쳐났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한동안 한국의 기아자동차 차량이 많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엔 북한의 식량난으로 현금거래보다 현물거래가 더 일반적이었다”고 덧붙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물물교환 비율은 자동차 한 대당 쌀 4~5t. 밀수량이 많았을 때는 자동차 2대당 쌀 4t까지 떨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자동차 밀수를 막은 것은 중국 군인도 북한도 아니었다고 이들은 입을 모았다. “북한의 경제 사정이 좋아지자 밀수가 자연스레 사라졌다”는 것이다. 2003~2004년을 전후해 자동차 밀수는 완전히 없어졌다. 하지만 상당량의 중국산 생필품(옷, 비누, 신발 등)과 식량은 지금도 북한에 밀반입되고 있다. ‘평화와 안정’ 개발 바람 솔솔 수백km에 이르는 두만강변의 국경에는 ‘국경’이 없었다.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북한지역에 발을 들이밀어도 이를 제지하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군데군데 북한의 경계초소가 있었지만 추운 날씨 탓인지 인적은 없었다. 허술한 경비 탓일까. ‘고난의 행군’은 끝났지만 탈북자들의 행렬은 요즘도 드문드문 이어지고 있다. 조선족 안내원은 “운이 좋으면 두만강을 넘어오는 북한 주민을 직접 목격할 수 있다”며 자랑하듯 말했다. 충산은 북한의 목재와 수산물 등이 주로 수입되는 관문으로 유명하다. 하루에도 수백 대 넘는 차량이 목재를 싣고 이곳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온다. 중국 측에서는 주로 쌀과 공산품 등이 북한으로 넘어간다. 수산물이 넘어오는 곳이다 보니, 산간 오지인 이곳에 황태 덕장도 곳곳에 펼쳐져 있어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두만강 빛은 무산을 중심으로 확연히 달라진다. 무산에서 충산, 백두산 쪽으로 이어지는 상류엔 지금도 1급수의 물이 흐른다. 주변에 늘어선 북한과 중국의 민가들이 두만강 물을 그대로 식수로 쓸 정도다. 그러나 무산 철광을 거친 두만강은 죽음의 강으로 바뀐다. 정화장치 하나 없이 탄광 오폐수가 두만강으로 흘러들어 생긴 현상이다. 높은 지대에서 내려다보면 무산을 지나면서 바뀌는 물빛을 한눈에 볼 수 있을 만큼 이 지역의 오염문제는 심각했다. 충산에서 비포장도로를 따라 2시간가량 두만강변을 달리자 일명 ‘김일성 낚시터’라 불리는 ‘조어대’가 눈에 들어왔다. 고(故) 김일성 주석이 1930년대 독립운동을 할 당시 종종 찾아와 낚시를 즐겼다는 이 작은 계곡엔 지금도 산천어가 넘쳐난다. 두만강 발원지는 낚시터에서 약 12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꽁꽁 얼어붙은 작은 옹달샘인 이곳에 다다르자 조-중 국경은 사라졌다. “두만강을 국경으로 한다”는 ‘조-중 국경조약’ 문구도 여기선 무용지물이다. 산기슭 언저리에 박혀 있는 작은 국경 경계비만이 여기가 국경임을 말해줄 뿐. 강이 끊어진 곳에서 국경이 사라진 것이다. 평소 옹달샘 주변에서 관광객들에게 담배와 돈을 달라며 손을 내민다는 북한 군인들도 이날은 추위 탓인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취재진과 동행한 조선족은 조-중 국경의 모습이 몇 년 사이 많이 변했다고 전했다. 밀수와 탈북이 줄어들면서 ‘평화와 안정’이 깃든 사이, 두만강을 따라가는 개발 바람이 솔솔 불고 있다는 것이다. 덩그러니 놓인 나무다리가 전부인 ‘조어대’나 두만강 발원지 등에도 개발을 알리는 입간판이 들어서 있었다. 조선족 안내원은 “이 모든 것이 중국 정부가 추진 중인 ‘백두산 공정’의 흔적”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옌볜=한상진 기자 greenfis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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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으로 시비걸자는게 아니고... 기자라고 이름 건 사람이 이렇게 생각없이 상투적인 표현에 안주하면 안돼요. 보세요. 사람이 굶어죽을때 꼭 강물에 빠집니까? 대개는 집에서나 들에서 굶어죽지 않나요? 강물에 떠 내려온 시체는 [물에 빠져 죽은] 혹은 [익사한] 사람이지 굶어 죽은 사람 아니예요. 물론 익사자를 건져보니 매우 영양 상태가 안좋더라.. 이렇게는 말할수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