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미래’ 준비 ‘NK지식인연대’가 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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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NK 2008-10-19 17:53 [김흥광 대표 인터뷰-上] 24일 출범…“재정지원 도와주세요” ‘탈북지식인’들이 한데 뭉치기로 결정했다. 북한체제가 붕괴의 길로 들어선 것은 확실한데, 예나 지금이나 김정일 정권이 개혁개방으로 나갈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김정일이 핵무기를 포기할 것으로 믿는 사람들은 어리석다. 이런 상황에서 두고 온 2300만 북한 가족들의 삶은 여전히 처참하다. ‘고난의 행군’ 10년이 넘어도 먹고 살 길은 막막하다. 장마당에 나가 무엇이라도 팔아야 산다. 하지만 장사도 마음 놓고 할 수 없다. 온 북한사회의 인심이 팍팍하다. 강냉이 1kg 훔쳤다고 어이없게 총살당한 지 벌써 10년도 넘었는데, 또 공개총살 총성이 울리고 있다고 한다. 10년이 넘는 절망의 터널을 지나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 온 북한 사회에 도대체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김정일의 와병설이 등장했다. 지금 김정일의 후계는 불안한 상황이다. 이대로 가면 북한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 누구도 북한의 앞날을 예측하기 어렵다. 그래서 북한에서 교수, 연구원, 의사, 기자, 방송인, 작가, 교원, 문화예술인 등등을 지낸 탈북 인텔리들이 하나 둘씩 모여 “혼자 보다는 함께 상부상조하는 것이 더 빨리 정착하는 길” “우리도 이젠 통일과 북한의 미래 개발을 위해 무엇인가 시작해야 되지 않겠나?” 라는 의견을 모으기 시작한 지 2년. 드디어 결실을 보았다. ‘NK지식인연대’. 탈북 인텔리들이 한데 뭉쳐 오는 24일 창립기념 학술심포지엄을 곁들여 정식 창립선포식을 갖는다. 이미 통일부의 사단법인 승인까지 받았다. 영문 명칭인 ‘NK Intellectuals Solidarity(NKIS)’에서 NK는 North Korea(북한)의 약자. 북한 출신 지식인들이 모여 북한의 미래를 놓고 진지하게 토론을 벌인다. 학술심포지엄 주제는 ‘북한의 3대 권력세습과 급변사태 전망’. 이날 오후 2시부터 서울 삼청동 소재 북한대학원 대학교 대회의장에서 열린다. 현재 한국에 와 있는 탈북자는 대략 1만5천 명 정도. 이중 북한에서 4년제 이상 대학을 졸업하고 전문직에 종사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600여 명. 한국 입국 탈북자 1만5천여 명의 3~4%에 해당한다. 앞으로 더 늘어나겠지만 이중 100여 명이 먼저 문제의식을 갖고 ‘NK지식인연대’를 출범시킨다. 2년간 준비과정 끝에 24일 정식출범을 앞둔 이 단체는 김흥광 교수가 이끌고 있다. 그는 “남한사회에서 북한에 대해 올바른 실체를 알리고 북한의 민주주의 실현과 바람직한 통일을 위한 학술연구, 선진사회로 개발하기 위한 비전을 만들기 위해 ‘NK지식인연대’를 출범시킨다”며 단체 결성 목적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지식인’이란 표현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면서 “‘지식인 연대’라는 표현은 우리의 활동성격이 지식을 갖고 활동하는 단체라는 점을 표명하기 위한 명칭일 뿐이며, 활동내용이 학술 및 연구 활동이란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다른 오해가 없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북한 공산대학(당 학교) 교수로 재직했던 김 대표는 식량난 시기를 거치면서 북한체제에 큰 회의감을 갖고 2003년 탈북했다. 그는 “90년대 식량난 시기 제일 많이 굶어죽은 사람들이 ‘3비’였는데, 선비, 꽃제비, 청제비(젊은 아가씨)였다”고 말했다. ‘선비(학자)’는 고지식했고, 젊은 아가씨는 부끄러워서 제때 남에게 손을 벌리지 못해 굶어죽은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은 사회주의 사회라고 볼 수 없고, 지금 북한에 공산주의자는 한 명도 없다”며 “또 사회주의가 인간의 본성과 맞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김흥광 대표와의 대담을 2회로 나누어 게재한다. [NK지식인연대 김흥광 대표와의 대담 전문] -단체 출범을 축하한다. ‘NK지식인연대’는 어떤 단체인가? 발기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난 6월 27일 경기도 포천 산정호수 한화콘도에서 결성식을 가졌다. 공식 출범선언은 10월 24일 ‘제1회 탈북 지식인 학술심포지엄’ 개최를 계기로 가질 예정이다. 이날 심포지엄은 북한의 세습권력에 대한 탈북 지식인의 입장, 급변사태에 대비한 북한체제 내구력 진단 등이 큰 주제다. NK지식인연대 결성 목적은 첫째, 북한정권과 북한사회에 대한 실체를 남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둘째, 바람직한 통일에 대한 연구와 북한사회의 민주주의 실현, 그리고 미래 북한사회에 대한 개발 비전을 지금부터 준비하자는 것이다. -‘지식인 연대’라는 이름을 달았는데, 단체의 회원 자격은 어떻게 되나? 4년제 이상 대학을 졸업한 고학력자, 각 전문분야에서 종사했던 탈북자가 회원이 된다. 처음에는 4년제라는 것이 제한요소가 많다고 생각해 2년제로 할까 토론도 많이 했지만, 2년제가 될 경우 학술연구활동 능력상 한계가 있음을 감안해 지금 단계에서는 4년제 이상을 회원 자격으로 했다. -북한에서는 ‘인텔리’라는 표현도 많이 쓰는데, ‘인텔리’라는 용어는 과거 볼셰비키 혁명 시기 ‘인텔리겐챠’의 준말로 알고 있다. 북에서는 ‘인텔리’의 계급 규정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북에서는 인텔리와 지식인이라는 표현을 혼용해서 쓴다. 2003년, 2007년 열린 ‘전국지식인대회’에서 ‘지식인’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말로 할 때는 ‘인텔리’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 당의 인텔리 정책’이란 표현도 쓰고, 김정일 어록에도 ‘인텔리’라는 용어를 쓴다. 북한에서 ‘인텔리’라고 할 때는 대체로 ‘고등교육을 받은 학문적 지식을 갖고 사회활동과 노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인텔리라는 표현이 연구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뉘앙스도 있지만, 대학 졸업 후 주로 ‘학문적 지식을 갖고 그러한 지식의 창조, 활용, 전달을 통한 사회활동을 하는 전문가 계층’을 의미한다. 대표적 직업으로는 대학교수, 연구사, 의사, 언론인, 문화예술인, 교사 등등이 포괄된다. 지식의 면에서 그리고 활동의 중요성에서 본다면 실제로 국가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만, 그렇다고 당이나 정권 기관의 간부는 아니다. 남한과 비교해서 설명하면, 남한에서는 대학교수라고 하면 엘리트 계층으로 확실한 '화이트 칼라' 그룹에 속한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다르다. 쉽게 말해 ‘지식 노동자’라고 보면 된다. -현재 NK지식인연대 회원은 얼마나 되나? 현재 등록 회원은 100여 명 수준이다.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1만 5천명 중 인텔리로 볼 수 있는 4년제 대학 졸업자가 현재 500~600명 정도인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다함께 뜻을 모아 같은 목표로 일을 하고 싶다. 시작은 미약한 수준이지만, 앞으로 이들을 포함해서 더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체 창립 시기부터 공감할 수 있는 목표를 세워야 되겠고, 적극적인 활동을 해야 할 것이다. 참여의식이 높아져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 가겠다. 우리가 조직결성을 하면서 중요하게 내세우고 있는 원칙이 있다. ‘존중 협동 창조’라는 원칙에는, 첫째로 민주주의적 방법으로 조직을 구성, 발전시키고, 둘째로 자율적 참여와 서로의 협력을 극대화하여 목표달성을 실현하며, 셋째로 높은 정열과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통일과 '미래 북한 개발'을 위해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 내겠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본인 소개를 부탁한다. 김책공업종합대학(1998년 ‘김책공업대학’이 종합대로 승격)을 졸업했고, 연구원(한국의 석사과정) 과정,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가학위(국가박사)를 취득했다. 이후 지방에 있는 컴퓨터기술대학에서 11년간 교수로 활동했다. 1993년부터 2003년까지 9년간 공산대학(당 학교)에서 컴퓨터 강좌 교수로 일했다. 북에서 내가 한 전공은 컴퓨터 운영체제 쪽인데, 그 부분에서 연구사업과 대학교수로 활동했다. 2003년 북한에서 나와 2004년 한국으로 왔다. 지금은 경기대 (일반)대학원 정보보호학 석박사과정 겸임교수로 일하고 있고, 북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른 탈북자 단체도 많이 있는데, 또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공식적으로는 올해 6월 27일 결성식을 했지만, 준비는 2년 전부터 해왔다. 당시 ‘북한이탈주민후원회’ 정착지원 업무를 하면서 남한 내 탈북 지식인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보고 몇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었다. 어떤 탈북 지식인은 능력도 있고 의욕도 높은데 현실적으로 북에서 하던 전공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는 적었다. 북에서 연구사를 한 어느 여성 과학자가 사회복지관에서 노인들을 돌보는 단순 도우미로 활동하는 모습도 봤고, 북에서 대학교수였던 사람이 주유소에서 기름 넣는 일을 하고 있다. 물론 그런 현상을 ‘탈북자를 차별시한다’는 배타성의 각도에서 보려는 것은 아니다. 탈북자들이 함께 노력해서 부족한 점이 있으면 능력을 더 높이고 정보·노력·목표를 함께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러면서 우리 스스로 남한의 학계와 공공분야에서 북한의 실상을 정말 제대로 알리는 과업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공계 출신 종사자들이 모였다. 한국과학기술정책연구원, 한국과학기술정보원 등의 단체와 함께 한 공동학술세미나를 개최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지식인 연대’를 만드는 첫 계기가 됐다. 그런 경험을 하면서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목적과 입장을 실천하기 위한 ‘조직’이 필요하다는 데 여러 지식인들이 공감했다. 그래서 초기에는 1년에 3~4차례씩 워크샵, 발표회 등에 참가해 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조직 창립의 동기, 구체적 준비 사업들을 조금씩 전개했다. 그래서 올해 4월 초 발기인 모임을 갖고 이·공계뿐 아니라 인문·사회 전문 분야 종사자들과 같이 6월 27일 결성식을 가졌다. -단체를 운영하려면 먼저 재정 문제가 해결돼야 할텐데… 처음 시작할 때 재원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돈이 많이 들지 않아도 되는 게 있었다. NK지식인연대 안에 있는 ‘북한개혁방송’(대북민간 라디오방송)을 지원하는 문제나 우리 회원들 사이의 정보공유, 친목도모, 이곳(남한)의 학회라든지 협회 등의 초청을 받아 학술활동에 참여하는 일 등이었다. 활동이 점차 진행되면서부터 재정 문제가 절실하게 됐다. 또, 단체의 기관지를 만들자는 의견, 홈페이지를 제대로 구축하자는 의견, 뉴스레터를 만들자는 의견 등이 있어 상당한 재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느꼈다. 우리에겐 돈이 없다. 지식인이 무슨 돈이 있겠는가? 그래서 지금 각계의 도움이 많이 필요한 상황이다. 우선 정부 각 부처나 출연기관의 북한․통일관련 학술연구용역에 지원하려고 한다. 이러한 용역을 할 수 있는 질적인 수준이 충분치는 않으나 준비는 되어있다. 남한의 각 급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은 분들과 현재 대학원을 수료 중에 있는 분들이 도합 50여명을 웃돈다. 그리고 탈북 선배님이신 이북 5도청의 실향민들과 우리 활동에 힘을 보태 줄 독지가들의 도움도 필요하다. 앞으로 많은 분들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다. 해외지원에도 많은 관심을 돌리려고 한다. 그리고 단체 활동에 필요한 초기 재원이 만들어지면 그 재원을 바탕으로 우리가 활동비용을 자생산(自生産)할 수 있는 일도 적극적으로 찾아보려 한다. -단체를 만들다 보면 의견 충돌이 많이 있는데, NK지식인연대를 준비하면서 그런 충돌은 없었나? 처음 사람들을 모아 놓고 보니 몇 가지 문제에서 다양한 의견이 존재했다. 북한에서는 노동당 비서가 한번 중심발언을 하고나면 모두 그대로 따라간다. 다른 의견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남한에 와서 우리에게 상대의 의견을 더 존중해주는 마음이 더 생기게 되었다. 여러 의견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불안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다양한 의견이 있다는 것이 안정되게 느껴진다. 7가지 색깔이 모여야 무지개가 되듯이 말이다. 회원들 간 의견 충돌에서 제일 컸던 것은 한국사회의 첨예한 이념갈등과 대립을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이른바 진보·보수문제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할 것이냐는 문제가 매우 혼돈스러웠다. 그런 문제에 우리가 어떤 입장과 어느 정도의 톤(tone)으로 대할 것인가에 의견이 상충됐는데, 처음에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좌파에 대해 잘잘못을 분명하게 평가해주고, 우파의 너무 강경한 입장에 대해서도 지적할 것은 지적하고 넘어가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회원들 간의 최종 의견일치는 우리는 좌우의 이념에 편중되지 말고, 현재 북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우리가 체험했던 북한의 사실을 그대로 여과 없이 전달하자는 것이었다. 북한의 모습을 특정인의 입맛에 맞게 각색할 것 없이 그대로 전달하자는 것이다. 좌파나 우파 어느 집단이 됐든 북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참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보았다. -김정일의 건강이상설이 나오면서 북한의 장래에 대해 여러 시나리오들도 나오고 있는데, 김정일 정권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으로 보는가? 건강이상설에 대해 우리도 언론보도를 통하여 알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특별한 팩트(fact)는 제시할 수 없다. 우리에게 플러스 알파가 있다면 우리가 북한에서 살 때 목격했던 것을 연결시킬 수 있다고 본다. 김정일의 건강이상은 사실이라고 본다. 하지만 조금 다른 해석도 나온다. 북한에 있을 때 만수무강연구소에서 일하는 친구들 얘기를 들었는데, 김정일의 주치의는 50~70여 명이고 전문의들이 각각의 생체 조직·장기별로 수시로 체크한다고 했다. 김정일이 뇌졸중이라는 진단을 하는데, 뇌졸중은 김정일처럼 만수무강연구소에서 체크, 관리만 돼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뇌졸중 과정이 짧은 시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돼서 조금씩 조금씩 막혀 나타는 것이다. 때문에 김정일의 건강이상은 그것보다 더욱 심각한 질병이라고 본다. 혹시 건강이상이 아니라고 할 경우, 9․9절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 북한의 ‘꼼수’일 수도 있다. 노동당 통일전선부는 여러 가지 계산을 했을 것이다. 남한 매스컴의 반응, 방향 등을 모두 타산했을 것이다. 그래서 북한매체가 김정일이 축구관람을 했다고 보도한 것은 김정일이 죽었다든지, 부재한다든지 하는 여론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 -만약 김정일의 건강에 이상이 없다면, 앞으로 북한은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김정일은 다시 한번 (북한을 일으키는 일을) 해보고 싶어 하는 욕심이 있는 것 같다. 북한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열심히 노력하면 공산주의가 앞에 있을 줄 알았는데, 이미 지나가 버렸다’는 게 있다. 북한사회가 그나마 좋았던 1960~70년대를 두고 하는 말인데, 앞으로 60~70년대보다 세상이 더 좋아지는 것은 어렵다는 뜻이다. 북한사람들이 그나마 좋았다고 하는 그 시기는 김일성이 통치했던 시대다. 그래서 김정일도 자기 시대에 내 백성들 한번쯤은 배불리 먹이고는 싶을 것이다. 또 백성들에게 박수를 치라고 해서 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장군님 만세’를 부르도록 만들고 싶어 하는 통치자로서의 정치적 욕망은 있을 거라고 본다. 그래서 김정일은 북한의 계획화 시스템(계획경제)이 실패하지 않았고 아직도 더 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계획화 시스템은 과소비, 과잉생산을 억제하고 자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해서 활용하자는 것인데, 거기에서 지난 시기에 없던 컴퓨터 시스템 같은 발전된 계획, 배분, 공급 시스템을 잘 꾸려 가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재원인데, 따라서 재원이 마련되고 여기에 계획화 시스템을 도입하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계획시스템을 주축으로 하면서 시장경제를 가미한 경제를 운영하고 싶어 하는 게 김정일이 생각하는 시나리오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다. 이런 말은 인민경제대학에 시장경제연구소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우리 대학(공산대학) 교수도 가 있어 그들을 통해서 들은 것이다. 그들은 북한경제가 완전히 실패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뻔히 안 되는 것에 희망을 걸자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일과 인민경제대학 사람들이 그렇게 착각하고 있다고 치고,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것인가? 지금 북한은 핵무기를 가지고 도박해서 6자회담 내 5자로부터 보상을 받아내려 하고 있다. 북한이 일본과의 협상에서는 한발씩 양보하는 이유가 100억 달러 이상의 보상을 받아내기 위해서라고 보면 된다. 지난 10년간 한국을 어루만져서 많을 것을 얻었듯이 일본으로부터도 그렇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북한은 회담과 협상에서는 능수능란하게 자신들이 정말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협상만큼은 북한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협상이 잘 돼서 많은 재원을 마련한다면 그 다음에 계획화 시스템을 해보고 나서 그것마저 가능성이 없으면 최후로 중국이나 베트남식의 부분적인 개혁을 하려고 획책하고 있다. -그동안 ‘계획’을 축으로 하는 북한경제 회복에 대한 김정일의 어떤 발언이나 실제 행동들이 있었는가? 북한은 지시전달 시스템을 통해 (김정일 지시가)하달되는데, 그것을 보면 “대안의 사업체계를 거부하거나, 약화시키는 어떤 경제이론에 대해서도 우리는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후에는 경제실리주의가 나왔고 경제지도 일꾼의 능력주의도 나왔다. 능력이 없으면 경제를 운영할 수 없다는 얘기다. 김정일은 21세기에 자신과 같이 혁명할 사람들은 3가지를 무조건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외국어, 컴퓨터, 차를 몰 줄 아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차를 몰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은 여러가지 현대적 상식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김 대표가 볼 때, 김정일이 정말로 경제를 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김정일은 (경제를) 모른다. 김정일이 경제학부 출신이지만, 일단 지시사항만 봐도 전부 정치, 문화예술, 사회, 기관에 관한 것이지 경제 분야는 없다. 물론 경제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잘됐다’든지 ‘못됐다’는 발언을 삼갈 수도 있겠지만, 경제에 대해 김정일은 문외한이다. 경제정책에서는 보좌관들과 비서들, 서기실 서기들을 두고 있다. IT(정보통신)쪽은 김책공대 김용남 교수가 보좌했고, 경제는 류시현 총장이라든지 그런 전문가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의 수가 엄청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김용남 교수는 김책공대 컴퓨터공학부 강좌장(교수박사)을 하다가 김정일 IT 서기로 발탁이 되었는데, 김 교수는 최근 세계 IT 발전현황에 대하여 김정일에게 자료를 제보하고 국가의 IT 발전정책에 대해서 조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과학 서기들은 각 분야별로 한 명씩 중앙당 조직지도부에 소속되어 있다. -북한 주민들은 김정일의 사생활과 그의 자식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김정일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북한 주민들은 전혀 모른다. 나 같은 경우는 외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알고 있었다. 김정일의 자식에 대해서는 일정 수준에서 알고 있다. 김정남은 알고, 김정일에게 딸이 있다는 것도 안다. 현지지도 영화, 북한에서는 ‘문헌영화’라고 하는데 김정일의 현지지도를 영화에 수록한 것이다. 문헌영화에서 김정일과 동행하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있는데, 김정일의 딸이라고 얘기하더라. 나는 김정남을 직접 본 적이 있는데 1991년 삼촌을 만나기 위해 평양 고려호텔 커피숍에 갔다. 그 곳에 김정남이 왔다. 김정남이 오기 전에 커피숍 관계자가 그곳에 앉은 몇몇 사람들 자리를 정리시키더라. 김정남 들어 올 때 커피숍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났다. 그때 저 사람이 ‘장군님 아들 김정남’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당시에 김정일의 아들이 3명인지는 몰랐다. 이후 1999년에 중앙당 조직지도부에는 ‘김정철 동지의 사업체계를 세우자’는 표어가 붙었다고 한다. 1999년부터 시작해서 2000년 후반까지 김정철에 대한 얘기가 있었다. 중앙당에서부터 도(道) 당, 내가 있던 공산대학에까지 그랬다. 그리고 김정일의 부인 고영희에 대해 알려주기 시작했다. ‘평양의 어머니’라고 했다. 고영희라는 이름을 직접 쓰지는 않고, 그냥 그렇게 지칭했다. -고영희가 죽었으니, 고영희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김정철의 후계는 어렵지 않은가? 권력 후계자를 둘러싸고 이러저러한 말들이 많은데, 김정일이 보았을 때 세상 문물에 쪄든 김정남도 좋겠지만, 현재 중앙당 조직지도부에 앉혀 놓은 김정철이 후계자가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1999년 이후 후계자 문제로 너무 말들이 많아지니까 김정일은 표어도 내리게 했고, 그 다음에는 후계자 공식논의도 그만 두라고 지시했다. 또 다시 후계자 문제를 입 밖에 꺼냈을 때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다. 또, 김정일 여비서 격인 김옥이 그동안 김정철과 김정운을 후원하지 않았으면 고영희의 미움을 받았을 게 분명하기 때문에 김정일의 측근으로 남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김정일 요리사’ 책을 쓴 일본인 후지모토도 김옥이 고영희와 아주 가까이에서 친근하게 지냈다고 하는데, 김옥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가까이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1998년도에는 ‘친애하는 (김)경희 동지’라는 표어가 있었다. 1997, 1998년은 북한이 가장 어려울 때인데, 그런 표어가 김정일의 호위총국에 예술대에서도 나왔다. 그 예술대 아이들이 ‘친애하는 경희 동지’ 노래를 부르고, 시로 낭독하는 장면이 테이프로 나돌았다.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를 그렇게 칭송한다는 것은 남편 장성택을 밀어준다는 것인데, 1999년도부터는 아예 싹 사라졌다.(下편에 계속) 대담·손광주 편집국장 / 정리·김소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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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의대 졸업생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