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국보 악기 ‘소해금’ 연주자 박성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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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경향 2009-01-16 17:11 박성진은 2006년에 들어온 새터민이다. 그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평양예술학교에서 소해금을 전공한 음악가다. 그의 아버지는 경상도 출신이다. 남쪽이 고향인 아버지 때문에 학교를 졸업해도 출신 성분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예술단에 제대로 배치가 되지 않았다. 희망을 잃은 그는 탈북을 결심했다. 아득한 몽골 사막을 건너서 박성진(38)을 만난 것은 지난 12월. 연말이 되니 여기저기 그를 찾는 곳이 많다. 인터뷰를 하는 날도 군 관련 단체 송년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그가 연주하는 소해금에서는 애절하면서도 힘이 있는 소리가 난다. 그는 평양예술학교에서 소해금이라는 악기를 전공했다. “소해금은 1960년대 북한이 복고주의를 없애자는 운동에서 만들어진 악기예요. 해금을 개량한 것으로 민족적 소리를 가지면서도 바이올린 소리와 유사한 음색을 내죠.” 북한에서는 국보로 지정하기도 했다. 해금과 바이올린의 중간 소리를 내며 다른 악기와도 융합이 잘 된다. 특히 마이크와 상성이 좋아서 스튜디오 녹음 작업에 자주 이용된다. “남한에서는 재즈와 국악의 퓨전 공연이 많잖아요. 그래서인지 재즈 뮤지션들이 합주해보자고 꽤 제의를 해와요.” 그가 북한을 탈북한 계기 중 하나도 음악이었다. 남쪽이 고향인 아버지 탓에 명문 음악학교를 졸업해도 예술단에 들어가지 못했다. 북한의 ‘출신 성분’이란 사회 전반에 흐르는, 벗어나기 힘든 엄격한 신분 제도와 같다. “아버지가 경상도 출신이라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어요. 부모님, 삼촌, 누이 세 명과 2005년에 중국으로 탈북했죠. 몽골을 통해 2006년에 한국으로 들어왔어요.” 브로커들의 말만 듣고 몽골 사막을 횡단해야 했다. 이정표도, 불빛도 보이지 않는 아득한 사막이었다. “남자 보통 걸음으로 1시간 가다가 90도로 꺾어 또 30분 동안 직진하면 몽골 국경이 나온다는 거예요. 말이 쉽지, 사막 한가운데서 곧바로 직진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아요. 게다가 보통 걸음으로 1시간 걷는다는 게 너무 막연한 표현이잖아요.” 결국 길을 잃은 그는 밤 9시에 출발했지만 다음날 아침 7시가 돼도 도착지를 알리는 이정표는 보이지 않았다. 식량도 물도 없는 상황이었다. 함께 간 사람들 사이에서 ‘이쪽이다. 저쪽이다’ 의견이 분분했다.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하면 이대로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희미한 불빛이 눈앞에 보이더군요. 국경 초소인지 민간인의 집인지 모르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서 아버지와 제가 들어갔어요. 하늘이 도왔는지 사막 양치기의 집이더군요. 그 사람은 일 년에 한 번 그곳에 오는데 바로 그날이었던 거죠.” 양치기의 도움으로 무사히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실제로 몽골 사막을 통해 탈북하는 사람들 중에는 물과 식량이 없어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는 사람들이 많단다. 가수의 꿈 그리고 결혼 한국에 온 박성진에게 북한과 가장 큰 차이점을 물었더니 대중가요의 자유로운 노랫말을 꼽았다. 생활하는 것에 질적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비슷하단다. “대중음악은 생활상을 반영하는 수단이잖아요. 한국은 노래 주제가 다양해요. 반면 북한은 노래 주제가 정해져 있어요. 수령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죠. 차이는 그 정도예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어디나 결국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에게 가장 많이 묻는 것 중 하나가 북한에도 연애가 가능하느냐는 질문이다. 북한도 나름의 범위에서 하고 싶은 건 다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자유 연애는 물론 이혼조차 가능하단다. 우리는 북한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고 무지했던 것이 아닐까. “저도 북한에 있을 때는 남한에 대해 오해가 많았어요. 남한은 자본주의니까 막연히 돈을 위해서는 뭐든 다 하는 곳인 줄 알았어요. 막상 와보니 발달된 복지정책에 많이 놀랐어요. 개인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불우한 이웃이나 독거노인을 위해 연탄도 나르고 봉사도 하더군요. 그는 남북한이 서로 오해하고 있는 부분과 반 세기 동안 벌어진 틈을 조금이나마 좁히는 일을 하고 싶다. “제가 정기적으로 판문점에서 공연을 해요. 판문점 관광객을 위해 30분 정도 연주를 하고 북한에 대한 이야기도 해요. 저는 민족의 분단이라는 현실과 아픔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입장이잖아요. 뿌듯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이루고 싶은 소망은 북한에서 못다 이룬 꿈을 한국에서 이루는 일이다. 그는 트로트 가수 장윤정의 ‘첫사랑’이란 노래를 소해금으로 연주해주면서 가수에 대한 꿈을 키웠다. 기획사를 통해 음반 준비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 북한의 미사일 실험 뉴스가 터지면서 남북관계가 냉각되기 시작했다. 자연히 박성진의 앨범 작업이 무기한 미뤄지고 말았다. “이미 곡은 다 받아놓은 상태예요. 남북한 정세에 따라 영향이 많더라고요. 기회를 기다리고 있어요. 운이 따라주면 하는 거고, 아니면 부담없이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려 해요.” 박성진은 자신이 무사히 한국에 도착한 데는 하늘의 뜻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는 국내 유일한 소해금 연주자다. 새해에는 한국의 전통 악기와 소해금과 결합하는 작업도 생각하고 있다. “1월부터 장윤정씨가 일본 투어를 간대요. 함께 참여해야 할 것 같고요. 기회가 되면 국악하는 분과 함께 어울려보고 싶어요.” 혼기가 꽉 찬 나이니 결혼도 해야겠다. 그는 현재 교제 중인 여자친구가 있다. “결혼해야죠. 2009년 화창한 날을 하루 잡아서 할 겁니다. 결혼은 둘이 만드는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긴 해요. 부모님도 벌써 일흔이신데 외아들이 빨리 손자들 안겨드려야죠.” 그는 앞으로도 남북간의 문화적 이질감과 거리감을 좁히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단다. 소해금 연주도 중요하지만 가수로서 자신의 노랫소리도 들려주고 싶다. 3년 차 새터민 박성진의 새해 소망이다. 글 이유진 기자, 사진 이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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