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 탈북자들의 편지모음집 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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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북녘 고향 살구꽃은 피는데… 北 가족에 보내는 피맺힌 사연 썼지만 부칠 수 없는 얘기들 겉봉에 주소를 써도 부칠 수 없는 편지, 우표를 붙여도 배달되지 않는 편지. 지금 이 순간 우리나라에는 혈육이 받아볼 수 없는 편지를 눈물로 쓰는 사람들이 있다. 북한이탈주민 혹은 탈북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억압과 주림을 피해 자유와 풍요의 나라 한국을 택한 탈북자가 1만명이 된 지도 벌써 3년이 지났다. 탈북자 수는 지난 6월 말 현재 1만6000여명으로 2만명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같은 하늘 밑에 사는 그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이해하고 있을까. 그들은 그토록 갈망했던 한국에 와서 과연 행복해진 걸까. 탈북자들은 주민증을 발급 받고 신분상으로 어엿한 한국인이지만 사회 일각에서는 여전히 이들에 대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탈북자들 대부분은 혈육을 남겨두고 고향을 떠나 온 사람들이어서 이산(離散)의 한을 가슴에 품고 산다. 지난 6월 말 발간된 ‘고향마을 살구꽃은 피는데…’는 탈북자들의 편지 모음집이다. ‘떠나 온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새조위(새롭고하나된조국을위한모임)’가 탈북자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고자 기획한 책이다. 새조위는 1988년 홍사덕(洪思德) 의원이 설립한 단체다. 홍 의원은 2008년까지 새조위 대표를 맡아왔다. 새조위(대표 신미녀)는 2004년부터 탈북자를 대상으로 매년 편지 공모전을 개최해 당선작들을 모아 편지모음집을 발간해왔다. 이번에 나온 ‘고향마을 살구꽃은 피는데…’는 이제까지 나온 5권에 실린 편지 242편 중에서 40편을 엄선해 수록한 것이다. 모음집은 자식들이 북녘의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9편), 부모가 북한 땅의 자녀에게 보내는 편지(10편), 고향의 혈육에게 보내는 편지(12편), 그리운 벗에게 보내는 편지(9편)로 구성되어 있다. 신미녀 새조위 대표는 편지모음집을 펴낸 것과 관련해 “처음에는 (그들의) 사무치는 마음을 엿보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어 망설였고, 그들의 아린 가슴을 드러내게 하는 게 두렵기도 했다”고 말했다. 신 대표는 “하지만 편지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뉘우침과 다짐, 그리고 이들에게 뭔가 길이 없을까, 길을 만들어줄 방법이 없을까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신 대표는 “편지를 통해 북한이탈주민을 이해하고 북한동포를 알아가는 기회가 되어 남북한 주민이 화합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북한은 올해 들어 단·중·장거리 미사일 18발을 쏘는 데 약 3억5300만달러, 2차 핵실험을 하는 데 3억~4억달러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용은 미국이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2008년까지 북한에 식량 약 226만t을 지원하는 데 들어간 돈 7억675만달러에 육박한다. 핵 실험 한 번에 소요되는 3억달러는 북한의 심각한 식량난을 1년 동안 해결할 수 있는 액수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고향마을 살구꽃은 피는데’에 나오는 편지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식량난이 극심했던 1990년대 중반 이후 굶주림에 지쳐 북한을 떠나 천신만고 끝에 한국에 온 사람들이다. 이들의 편지를 읽다 보면 편지 갈피갈피마다 알알이 박혀 있는 피맺힌 사연으로 인해 한국에 태어나 배고픔을 잊은 채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죄책감이 들 정도다. ‘고향마을 살구꽃은 피는데’ 중에서 생이별한 혈육을 그리워하는 편지 다섯 편을 소개한다. 사랑하는 내 딸 윤옥아 굳세게 살아다오! 아빠를 용서해다오! 예쁜 옷, 맛있는 음식을 볼 때마다 너를 그리워하며 아픈 마음 달랜다 이윤철 (전략) 네가 열 살 나는 해가 바로 1996년이었다. 정말이지 1996년은 죽음의 해였단다. 북한 땅은 가는 곳마다 굶어 죽은 시체가 수도 없이 많았으며 거리의 골목 골목마다에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강도가 욱실거렸고 배고픔에 시달리던 어린 아이들은 시장에 몰려다니면서 도적으로 변해 버렸단다. 그래 우리 집안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단다. 이 아빠는 너를 지켜야 했으며 할아버지와 할머니 우리 네 식구를 살려야 했단다. 집안에 먹을 것이라곤 옥수수쌀 1㎏이 전부였고 아빠는 당장 식량 구하러 나갈 수밖에 없었단다. 그해 11월 5일 새벽 1시에 온성에서 출발하여 평양까지 가는 ‘온성~평양’ 열차에 몸을 실었단다. 출발을 알리는 신호와 함께 덜커덩 소리를 내더니 열차는 떠났지. 그 당시 내가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은 손목시계 모란봉과 결혼식 날 입었던 양복 한 벌이 전부였단다. 손목시계와 양복을 주고 식량을 구한다고 해도 옥수수쌀 10㎏ 정도밖에는 안 됐단다. 기차는 느리게 출발하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사랑하는 딸과 부모님을 배불리 대접하고 먹일 수 있는 그날을 고대하면서 마음 한구석이 뿌듯했단다. 비좁은 열차 안에서도 순간이나마 아니 꿈속에서나마 행복했었는데 시끌벅적한 소리에 깨어 보니 “사람이 죽었다”라는 고함소리가 들려오더구나. 사연인즉 나처럼 식량을 구하러 다니던 웬 아주머니가 열차의 연결 짬에 두 다리가 잘려져 있었고 끊임없이 피를 흘리고 있었단다. 사랑하는 내 딸 윤옥아! 나는 지금 그때 일을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식은땀이 나고 분노와 슬픔과 억울함이 교차된단다. 8살이나 되었을까? 분명 사망한 아주머니의 딸이었단다. 얼마나 배가 고프고 굶주렸으면 어머니한테 그렇게 졸라댔을까, 죽은 엄마를 부여안고 절망에 가까운 소리로 울부짖더구나. “엄마, 다시는 배고프다 하지 않을게, 엄마 죽지마! 내가 다 잘못했어.” 나는 그 애의 얼굴에서 북한 정책의 잘못을 보았으며 기울어져가는 사회주의 모습과 사랑하는 내 딸 윤옥이의 얼굴을 보았단다. 아빠는 목격자이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오직 북한 땅에서 태어난 것이 분통하고 억울할 뿐이었지. 그래도 아빠는 참아야 했단다. 고향집에 너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이지. 이 아빠는 가슴속에 피눈물을 삼키면서 너의 큰 할아버지가 사시는 함경북도 어랑군에 찾아갔단다. 이 아빠는 손목시계와 양복을 품에 안고 산골마을을 돌고 돌아 옥수수쌀 아니 황금쌀이라고 해야 할까 10㎏을 바꾸어 가지고 어랑 역전으로 나왔단다. 역전에 나와보니 열차는 연착이 아니라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단다. 고생 끝에 내가 집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열흘 후인 11월 15일이었지. 나는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 아빠를 반겨준 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었단다. 집안은 썰렁했으며 사랑하는 내 딸 윤옥이는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로 누워 있었고 할아버지는 이미 숨을 거뒀었지. 나는 아버님께 미음 한 숟가락도 대접하지 못한 불효자가 되어 영원히 씻지 못할 죄를 지었단다. 사랑하는 내 딸아, 아빠를 용서해다오. 아빠는 가정을 사랑했으며 부모에게도 효도하고 싶었단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북한의 현실 아니겠니? 옥이야 굳세게 살아다오! 아빠는 예쁜 옷이나 맛있는 음식을 볼 때마다 너를 그리워하며 아픈 마음을 달래고 있단다. 윤옥아, 너와 헤어지던 날이 바로 할아버지 제사 다음날이었지? 아빠는 가슴속의 아픔을 술로 달래 보려고 취기에 올라 있었지…. 아빠가 하염없이 울다가 마음속의 한마디를 던져 버렸단다. “이렇게 굶어 죽고 얼어 죽는 것이 우리식 사회주의냐? 그 누가 이놈의 사회주의를 지키겠느냐?”라고 말이다. 그 말 한마디에 아빠는 보위부에 체포되었다가 우연한 기회에 탈출에 성공했단다. 아빠가 보위부에 체포되어 잘못되게 되면 내 딸 옥이는 반역자의 딸로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아빠는 혼자만의 희생으로 가족을 살리고 싶었단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헤어진 사실을 너는 알고 있어야겠기에 우연한 기회가 생겨 이렇게 글로 전한다. 윤옥아! 내가 너에게 교훈될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하련다. “북한에서는 입이란 식사 시간을 제외하곤 해로운 것이다.” 아빠가 보낸다 아들에게 보낼 수 없는 편지 한 장 두 장 쌓아두면 언젠가는 회오리바람에 실려 너에게로 달려가 너를 싣고 다시 이 어미에게 돌아오겠지 명금옥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들아, 보내지 못하는 편지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오늘 엄마는 저린 가슴을 부둥켜안고 한 자 두 자 이 글을 쓰고 있구나. 바람 세찬 동북 땅에서 철쇄에 묶여 중국 공안에 잡혀가는 너의 마지막 모습을 본 지도 이제는 어언 5년, 짧지 않은 이 기간 엄마는 독재의 발굽 밑에 시들어 갈 너를 가슴에 묻고 눈물과 한숨 속에 애간장을 졸이며 죽지 못해 살아왔구나. 눈만 감으면 삼삼 떠오르는 뼈밖에 안 남은 너의 모습. 품에 안고 있을 땐 죽물을 우려 먹어도 매일 매 시각 네 얼굴을 볼 수 있어 그것이 그대로 웃음이 되고 삶의 희열이 되어 사는 것이 행복이던 엄마였다. 다 큰 녀석이 밖에 나갔다가 빵 한 개라도 생기면 그걸 먹지 않고 주머니에 넣고 와서는 “자, 어머니, 인간답게 한번 먹어봅시다” 하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이 어미의 입에 넣어 줄 때 난 그 한순간에 만시름 다 잊어버리고 행복에 겨워 빵이 아니라 사랑을 씹었단다. 엄마에게 바치는 너의 사랑은 폐허 속에서도 변함이 없었고 그 같은 아들을 품에 안고 있는 엄마의 가슴에는 늘 행복만이 가득 찼었지.(중략) 아, 영이야, 사랑하는 내 아들아, 자유의 터전 한복판에서 한가득 쌓인 풍요한 삶을 향유하고 살면서도 사탕 한 알 너의 입에 넣어주지 못하는 이 엄마를 제발 용서해다오. 먹는 밥이 모래알 같고 잠자리가 바늘방석 같아 안절부절 맴돌아치는 이 엄마의 생은 말 그대로 한과 절규의 연속인 것만 같구나. 엄마는 오늘 하도 네가 그리워 정부에서 준 돈 100만원을 품에 안고 여기 통일의 다리가 있는 임진각으로 나왔다. 이산의 한을 품고는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없기에 두 눈을 부릅뜬 채 사랑하는 혈육의 영혼을 찾고 부르는 불우한 운명들의 한이 맺힌 이곳 통일의 다리에서 이 어미도 가슴에 묻은 사랑하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러본다. 영이야! 너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는 100만원의 그 돈을 원한 싣고 흐르는 임진강 물결 위에 두 손 모아 뿌려본다. 아무리 그런들 이 엄마의 가슴에 맺힌 한이야 어찌 풀리겠냐만 아들을 향한 엄마의 간절한 소원을 담아 향한 짓이니…. 아들아! 부디 건강하고 언젠가는 이루어질 통일의 그날 이 어미 앞에 나타나 찢겨질 대로 찢겨진 엄마의 가슴을 너의 따뜻한 손으로 쓸어다오. 오늘도 내일도 계속될 엄마의 편지, 민족분단의 비극적 현실 속에서 보낼 수 없는 편지를 한 장 두 장 쌓아두면 이제 그것이 산을 이루고 언젠가는 폭풍처럼 터질 회오리바람에 실려 그립고 보고 싶은 내 아들에게로 달려가 너를 싣고 다시 이 어미에게로 돌아오겠지. 그때 내 한 생에 쌓인 피눈물을 임진강 푸른 물에 훌훌 씻어버리고 너와 함께 자유민주의 넓은 품에서 세상 행복을 만끽하리라, 그리고 너와 함께 세상에 대고 소리 치리라… 다시는 갈라지지 말자고… 다시는 이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자고… 그날을 눈물 속에 그려본다. 꿈속에 펼쳐본다.(하략) 너를 사랑하는 엄마로부터, 2006년 8월 15일 씀 꿈결에도 보고 싶은 어머님께 드립니다 중국에 간다는 말조차 남기지 못하고 시집에 잠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떠나온 그 땅 이 딸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늙으셨을 어머니… 김철옥 오늘 이 새벽도 남새 배낭을 이고 지시고 허름한 옷차림으로 장마당에 ‘출근’하셨을 늙으신 주름 깊은 어머님의 모습을 그려 보며 불효막심한 이 딸은 머리 숙여 인사를 드립니다. 말 없이 소문 없이 떠나온 이 딸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며 더 늙으셨을 어머님께 죄송한 마음 안고 이 글을 드립니다. 중국에 간다는 말조차 남기지 못하고 시집에 잠깐 다녀오겠다는 이야기만 하고 떠나온 그 땅, 벌써 떠나온 지 2년이 되어옵니다. (중략) 온 나라가 ‘고난의 행군’을 하던 1990년대 초·중반, 흰쌀밥 구경도 제대로 못하시다 아버님을 먼저 잃고 살아갈 길이 막막해 서투른 장삿길에 몸을 던지셨던 어머님과 형제들의 햇볕에 그을리고 땀에 젖은 그 모습, 제가 대학시절 그렇게 강인하셨던 어머님의 모습이 아니라 벌써 허리 굽어진 할머니인 어머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이 땅의 어머니와 할머니들의 밝은 모습을 볼 때마다, 할머니들끼리 쇼핑도 하고 등산도 하며 행복하고 건강하게 장수하는 모습 속에서 다 큰 자식들의 주린 창자를 채워주려고, 장마당의 한쪽에 자리하시고 ‘파 사세요. 한 단에 40원입니다’라고 하실 그 모습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팔리지 않는 날이면 푹 풀어진 강낭국수 한 그릇 값도 아까워 점심끼니를 거르시고, 한 끼나 겨우 먹을 강낭국수 한 토리를 다 꿰진 배낭에 넣어 지시고 맥없는 두 다리를 끌며 20리길을 걸어 집에 가셨을 우리 어머님… 고등중학교 시절 소조공부 마치고 밤늦게 집에 돌아갈 때 무서움에 떨라 걱정하시며 학교까지 찾아나셨던 어머님. 우리 자식들 대학공부 뒷바라지 하시며 대학생을 키운 것이 우리 가족의 자산이라고 늘 기뻐하시고 미래의 민족간부로 당당히 자라라고 대바르게 키우신 우리 어머님, 대학을 졸업하였을 때에는 누구보다 기뻐하시며 집이 아닌 배치지로 떠나 보내시고 명절날 남들이 온가족 모여 앉아 웃는 행복한 모습을 보실 때는 부러워하시며 언제면 우리 가족도 한자리에 모여 즐겁게 보낼 수 있을까 늘 말씀하시던 나의 어머님. 갑작스런 이 딸의 이별로 하여 통일될 때까지는 한가족이 한자리를 이룰 수 없을 아니, 어머님의 그 소원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는 죄책감으로 이 딸은 항상 고뇌 속에 죄책하며 살아갑니다. 보고 싶은 우리 어머님, 떠나던 날 역도에서 눈물 흘리시며 가는 길 고생스럽겠는데 오랫동안 있지 말고 인차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며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 저어 주시던 어머님과, 누이의 속내를 알 수 없는 동생이 함께 차를 타고 배웅해 주던 그 모습… 13년 만에 제대한 막내 동생의 얼굴도 못보고 떠나온 누이, 이 딸의 심정을 뭐라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의 어머님의 고생은 단지 저의 어머님 한 분만이 아닌 저 북녘 땅의 모든 어머니들의 고통과 불행이며 분단의 아픈 상처입니다. 사랑하는 어머님, 이 딸은 어릴 적 듣던 어머님의 사랑스런 목소리를 그리며 가끔씩 불러봅니다. (하략) 2004년 8월 서울에서 둘째딸 올림 어머니, 그립습니다 “너희들이라도 거기 가서 잘 살아라” 흔연히 보내신 어머니, 그 아픔 그 고통의 백분의 일, 천분의 일도 안 되는 제 외로움과 슬픔이 부끄럽습니다 김성진 (전략) 어머니 기억나세요? 떠나기 전 제가 “어머니 앞날을 기약 못하겠기에 입빠르게 장담 같은 건 하지 않겠습니다. 절 믿으시죠? 지금 힘들더라도 참고 믿고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라고 했던 것 말입니다. 저 지금 여기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중국과 동남아를 거치는 15개월의 긴 여정 끝에 한국행에는 성공했지만 도착하자마자 그렇게 믿었던 아내와 이혼하고 집도 없이 여기저기 떠돌며 식당일과 아르바이트로 연명했습니다. 배신감과 증오, 분노와 고독과 절망감 때문에 모진 마음도 먹어보았습니다. 눈물도 참 많이 흘렸습니다. 하늘도 무심하다며 헛된 욕도 해보았습니다. 아무런 기술도 없고, 저학력이라서 언어나 문화적 차이 때문에 차별도 받아 보았습니다. 그렇게 소망했던 대학 입학시험에서 여러 차례 고배도 마셨습니다. 혈혈단신 이 땅에 와서 저나 다른 분들이 겪은 몸 고생, 마음 고생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때마다 북한에 계신 부모님과 동생들을 생각했고 어머니와의 약속을 상기했습니다. 물론 제 운명이 소중했음을 두말할 것 없었고요. (중략) 홀연히 처가 식구들과 사라져버린 저 때문에 보위부의 조사와 감시, 시달림을 받아 몇 년은 더 늙으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혼자 울었습니다. 몸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그런 아픔을 느끼시면서도 굳이 붙잡지 않고 “그래, 너희들이라도 거기 가서 잘 살아라” 하시며 흔연히 떠나 보내신 어머니… 그리고는 그 아픔 그 고통의 백분의 일, 천분의 일도 안 되는 제 외로움과 어려움과 슬픔이 부끄러워지는 건 그 때문입니다. 북한에 있을 땐 먼 다른 세계의 이야기, 남의 일이던 이산가족의 슬픔과 고통이 이제는 우리 가족의 것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하고… 온 가족이 저 때문에 그곳에서 항상 불안 속에 떨게 만든 이 아들, 엎드려 용서를 빕니다. 무슨 말로 사죄드리고 무엇으로 다 보상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부모 형제들에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지은 이 몸, 여기서 정말 열심히 살아 조금이라도 그 죄를 씻고 싶습니다. 모르고서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이 사회에서 어떻게라도 배움의 꿈을 이루어보려고 전문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꼭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렵니다. 헌신적 사랑과 희생 위에 오늘이 존재함을 항상 명심하렵니다. 명예와 부, 화려한 성공의 금자탑을 당장 쌓아올리지 못해도 항상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사는 모습으로 이 사회 정착의 기초를 닦고 당당한 일원이 되겠습니다. (중략) 통일의 그날 부모 형제들 앞에 떳떳이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다시 만나는 날 어머니 무릎에 지치고 힘든 이 몸 기대어 어린 날의 자장가도 듣고 젊은 시절의 솜씨로 만들어 주신 음식도 먹고 싶습니다. (하략) 2008년 3월 10일, 서울에서 아들이 올림 사랑하는 아빠에게 올 겨울 동복이 있는지, 건강은 더 나빠지진 않았는지… 제가 얼마나 아빠를 불러보고 싶은지 아세요? 하늘이 통일의 문을 열어주는 날 맨 앞에서 아빠 찾아 달려갈게요 남송연 보고 싶은 아빠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아빠랑 함께 하지 못한 날들은 어느덧 겁도 없이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네요. 12살 꼬마로 탈북하게 되어 아빠가 집에 없는 동안 엄마를 따라 소문도 없이 편지 한 개 남길 생각도 못한 채 멀리로 사라져버린 절 용서해 주실 거죠? 아빠는 절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요. 사실 전 기억이 잘 안 나기도 해요. 그냥 엄마가 없으면 못살 것만 같아서 엄마를 무작정 따라 나서게 됐던 거죠. 사실 그때 엄마가 중국으로 누나를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우린 죽었을지도 모르잖아요. 아빠, 옛날처럼 지내신다면 아빠의 고생을 알겠네요. 우리는 집을 떠나 중국으로 가서 중국 여기저기 산에 지어져 있는 초막과 비닐하우스 같은 데서도 자면서 약초도 캐서 팔고 봄에 나는 나물도 뜯어서 팔며 처음에는 조금씩 돈을 모아 살았어요. 그런데 연변 쪽이라 공안대가 너무 살벌하여 중국 안쪽에 있는 하얼빈이랑 청도로 옮겨 살게 되었어요. 누나는 한국 사람의 옷가게에서, 엄마는 한국 사람의 파출부로 일하고…. 하늘이 찌뿌드드 하고 비가 오는 날이면 누나랑 만나 가끔 아빠 얘기를 해요. 누나도 마음이 아프고 나도 마음이 아파서 하다가 말고… 말이 끊길 때가 많아요. 전에 모르겠던 마음들이 점점 생겨요. 아빠가 지금 뭐 드시고 계실지, 올 겨울에는 입을 동복이 있는지, 건강은 더 나빠지진 않았는지, 머리에는 흰머리가 좀 났는지… 이것저것들이 제 마음을 아프게 해요. 아빠, 저는 공원과 운동장에서 가끔 아이들이 축구 하는 걸 보면 평소에 아무렇지 않던 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곤 해요. 학교 갔다 돌아오는 길에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피자집에 아이들이랑 엄마랑 아빠랑 모여서 뭐라고 떠들썩 얘기하며 앉아 있는 것도 제 마음을 아프게 해요.(중략) 아이들이 처음엔 저한테 “억양이 이상하다. 너 혹시 지방에서 왔어?” 이러면 저는 “그런 거 왜 물어봐? 나 강원도에서 왔다 왜.” 했어요. 처음 보는 사람들과, 또 아직은 제게 어색한 한국 문화에 애써 적응하려고 하지만 익숙해지지 않아 힘들어요.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든 건 우리 가족이 이산가족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에요. 김정일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게 다 거짓말이라는 게 얼마나 한심하고 괘씸한지 모르겠어요.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 다 뻥이에요!! 아빠는 그것도 모르고 오늘도 장군님이라 그러겠죠…하루빨리 내 친구들 성혁이랑 은심이랑 광혁이한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어요. 그리고 우리 친척 일가분들께도 이 사실을 어서 빨리 알리고 싶어요. (중략) 아빠에게 어서 빨리 축구하는 모습이랑 농구하는 모습이랑 1등한 탁구 모습이랑 다 보여드리고 싶어요. 어서 빨리 만나서 맛있는 거 같이 앉아서 먹고 오늘을 옛말 하면서 살고 싶어요. 피자집에 가서 가족끼리 주문해 놓고 다같이 수다 떨면서 크게 웃어보고 싶어요. 아빠의 초라한 얼굴이 자꾸 생각나 가끔 밥을 먹다가도 아빠 생각에 소스라쳐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중략) 아빠, 제가 얼마나 아빠란 말을 하고 싶은지 아세요? 얼마나 속으로라도 불러보고 싶은지 아세요? 하늘이 통일의 문을 열어주는 날 맨 앞에서 아빠를 찾으며 달려갈게요. 그동안만 참고 견디며 고향을 지켜주세요. 보고 싶어요. 너무 많이 보고 싶어요. 사랑해요, 아빠. 아빠가 보고 싶은 아들 송연 올림 / 조성관 편집위원 mapl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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