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되면 고향서 인술 펼치고 싶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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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고시 합격 탈북자 박우철·김성수씨의 포부 “방학 때마다 재시험을 봐야 할 정도로 어렵게 공부했습니다. 의사가 되면 통일된 고향에 병원을 지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싶습니다.” 27일 서울 양천구의 한 식당에서 만난 박우철(34·가명)씨는 약간 수줍은 듯하면서도 당찬 모습으로 포부를 밝혔다. 박씨는 북한에서 의대에 다니다 1998년 탈북해 2002년 한국으로 들어온 새터민이다. 그는 2004년 특별전형으로 가톨릭의대 3학년에 편입했고, 올해 의사국가시험에 합격했다. 북한에서 박씨는 출신 성분으로 늘 좌절했다. 할아버지가 6·25전쟁 때 미군 측 치안대에서 활동했다. 이 탓에 박씨는 북한의 대학입학시험에서 1등을 하고서도 원하던 평양의대가 아닌 지방 의대로 배정됐다. 박씨는 “출신성분은 북한에서 맨 바닥권이었다. 의대에 진학한 것만도 기적이었다”면서 “하지만 아무리 공부를 잘해봐야 탄광으로 배치될 게 뻔한 상황에서 더 남아 있을 수 없었다”고 탈북 이유를 설명했다. 중국에서 미국 선교사 등의 도움으로 잠시 체류한 박씨는 “미국으로 가자”는 제안을 뿌리치고 한국행을 택했다. 이후 미얀마로 건너간 박씨는 현지 경찰에 붙잡혀 4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한국대사관에 편지를 보내 마침내 서울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박씨는 “고생이 많았지만 미얀마 감옥에선 쌀이 남아 버려지기에 ‘감옥이 북한보다 낫다’고 생각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북한에서 박씨의 지도교수는 죽도 못 먹고 나와 “오늘은 서 있을 힘도 없다”면서 앉아서 강의를 했다. 교수는 아파트 부엌 한쪽에서 돼지를 키워 팔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 박씨와 함께 이번 의사시험에 합격한 김성수(40·가명)씨는 “북한에서도 의사 월급이 정해져 있긴 하지만 몇 년 전부터 나오지 않아 환자들이 가져다주는 담배 등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면서 “병원 장비도 부족해 의사들이 목화밭을 만들어 직접 치료용 솜을 만든다”고 설명했다. 그는 북한에서 외과 의사로 11년 일하다 2007년 탈북했다. 같은 의대지만 한국 시스템에 적응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의학용어부터 생소했다. 북한은 한자식 용어나 라틴어로 된 교재를 쓰지만 남한은 한글 교재와 영어 원서로 공부한다. 박씨는 방학 때도 쉬지 못하고 재시험을 반복하면서 어렵게 과정을 수료했다. 동료 학생들과 이질감도 있었다. 박씨가 “북한에선 주로 옥수수 밥을 먹었다”고 하면 “맛있는 것 먹었네”라고 하는 식의 대꾸가 돌아왔다고 그는 소개했다. 그는 “이제 남한 학생들을 이해시키려 하지 않는다”면서 “직접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를 못 한다”고 웃었다. 앞만 보고 달려온 박씨에게 든든한 후원자들이 생겨났다. 박씨의 편입을 받아준 가톨릭대 전 사무국장 이경상 신부는 그를 ‘내 아들’이라 부르며 보살핀다. 양천구에서 치과병원을 하는 김연수씨는 얼굴도 모르는 그에게 매달 10만원을 보내준다. 박씨는 “처음 왔을 때 매일 따라다니며 생활하는 법을 가르쳐준 양천경찰서 형사들부터 모든 분께 말할 수 없는 감사를 느낀다”면서 “반드시 은혜를 더 크게 갚는 진짜 의사가 되겠다”고 말했다. 나기천 기자 n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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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노력하는 박선생을 보니같은동료로써 얼마나 기쁜지모르겠어요
통일된 조선에서 병원을 차려가지고 병든북조선사람을 치료해주면 얼마나기쁜일이겠어요 하루빨리 통일이되였으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