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공동변소 문짝에는 왜 철판을 달았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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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따뜻한 봄이 왔다. 겨울이 지났다는 것은 이 블로그 오른쪽 사진에서 보는 그런 꽃제비들도 가장 엄혹한 계절을 이겨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을 자는 죽고 산 자는 겨울을 보냈던 보금자리를 떠나 다시 산으로 들로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진다. 꽃제비들에게 가장 훌륭한 잠자리의 하나는 석탄재 속이다. 북한은 도시에서 석탄을 주로 땐다. 평양을 비롯해 무연탄이 많이 생산되는 앞쪽 지역에서는 구멍탄을 위주로 때고, 갈탄이 많이 생산되는 북쪽에선 갈탄 그대로 땐다. 이렇게 집집마다 석탄을 때다보니 석탄재 처리도 큰 문제이다. 그래서 몇 개 인민반에 하나씩 석탄재를 버리는 곳이 지정돼 있다. 석탄재는 땅에다 그대로 버리는 것이 아니다. 벽돌로 약 3m 정도 간격을 두고 평행이 되게 벽을 쌓은 뒤 그 벽을 기둥삼아 석탄재를 버리는 큰 통을 공중에 설치한다. 통 아래에는 여닫을 수 있는 개폐장치가 있는데 석탄재가 통에 가득 차면 나중에 자동차가 와서 그 통 아래에 적재함을 들이대고 석탄재를 한꺼번에 실어간다. 물론 쓰레기 버리는 자동차도 국가에서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인민반에서 돈과 뇌물을 걷어서 자체로 구입해야 한다. 사람들은 석탄재를 버리기 위해 벽에 설치된 계단으로 올라가 통에 석탄재를 쏟아 붓는다. 방금 퍼낸 석탄재는 따뜻하다. 그래서 꽃제비들, 특히 어린 꽃제비들은 겨울에 석탄재를 파고 그 속에서 자는 경우가 많다. 석탄재 위에는 겉바람을 막기 위해 비닐박막을 덮는다. 이렇게 살다보니 꽃제비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말 그대로 재속에서 자다보니 온 몸이 새까맣고 눈알만 반짝거리는데, 세수나 빨래 같은 것은 꿈도 못 꾸다보니 온 겨울을 그 몰골로 난다.
꽃제비들에게는 동네 석탄재 버리는 곳보다는 공장에서 석탄재를 버리는 곳이 더 좋은 장소이다. 왜냐면 공장에서 버리는 것은 양도 많고 버리는 횟수도 많아서 동네보단 더 따듯한 경우도 많다. 하지만 간혹 석탄재 속에 살아있던 불꽃이 밤에 자는 꽃제비의 옷에 옮겨 붙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 화상을 입는데, 화상치료를 받을 곳도 없으니 얼고 덴 상처에서 고름과 진물이 질질 나기도 한다. 이런 꽃제비는 얼마 오래 살지 못한다. 꽃제비들에게는 석탄재 속의 잠자리도 공짜가 아니다. 그 마을 주민들이 어떻게 하나 내쫓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동정해서 뭘 주어도 모자랄 판에 기를 쓰고 내쫒는 이유는 꽃제비 무리가 자기 마을에 진을 치고 있으면 무엇인가 도둑 맞힐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말 친구네 동네에 갔더니 꽃제비의 가장 큰 폐해가 화장실에서 나타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북한 도시의 아파트에는 집집마다 화장실이 있지만 단층집들이 몰려있는 곳에는 화장실이 집에 없고 공동화장실이 있다. 아니, 화장실이 아니라 변소라고 묘사해야 어울리는 그런 곳이다. 아침이면 화장실 앞에 사람들이 슬슬 몰려드는데 문제는 화장실 문짝이 자꾸 없어진다는 것이다. 꽃제비들이 밤이면 뜯어가 불을 때기 때문이다. 문짝도 없는 화장실에 들어가 볼일을 본다고 생각해보라. 더구나 밖에선 사람들이 기다리는데...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없으면 마구 불쑥 들어와 사람이 있나 없나 확인하는데 이것 역시 곤욕스럽다. 그래서 문짝이 없어지면 인민반에서 급히 돈을 걷어서 문짝을 설치하는데 이것도 몇 번해보니 지칠 수밖에 없다. 화장실 문짝을 위해 경비를 설 수도 없고 밤에 와서 뜯어가는 데야 방법이 없다. 그래서 철판으로 화장실 문짝을 만들기 시작했다. 각목으로 테두리를 만든 뒤 그 위에 철판을 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각목도 욕심내 또 뜯어간다. 그래서 테두리고 뭐고 그냥 철판 한 장만 달아놓았다. 그랬더니 오래간다는 것이다. 주민들 입장에선 화가 치밀 노릇이지만 석탄재 속에서 자는 꽃제비 입장에서 생사가 달린 문제이다. 이들이야 말로 누구 처지를 헤아릴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 안타까운 일은 이렇게 필사적으로 살면서도 외부에 뛰쳐나올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빌어먹어도 잠을 자도 중국이 훨씬 나을 것인데 그러지 않는다. 더구나 꽃제비는 중국서 체포돼 북송돼도 처벌을 거의 하지 않는다. 몰골도 험하고 갈 곳이 없는 사정 때문에 취조하는 보안원들도 어떻게 처벌할 엄두가 안난다.
그래서 9.27상무라고 하는 꽃제비 수용소에 보내기도 하는데 이곳도 배고파 얼마 못 버티고 또 도망쳐 나온다. 중국의 맛을 본 꽃제비는 꼭 중국으로 다시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중국으로 뛰쳐나오는 이런 꽃제비는 많지 않다. 물론 이 역시 적은 숫자가 아니다. 얼마 전에도 북한에서 꽃제비였지만 한국에 와서 로스쿨까지 들어간 청년의 이야기가 신문에 나오기도 했다. 인생 역전한 경우다. 그러나 북한 땅을 방황하는 꽃제비는 중국에 나온 꽃제비보다 훨씬 더 많다. 그렇게 파리 목숨처럼 죽어가면서도 강을 넘어 도망칠 생각을 못한다. 참 안타깝다. 몇 년 전에 연변에 들어가 찍어온 TV를 보고 기가 막혔다. 중국에 와서 빌어먹는 북한의 꽃제비들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더니 “우리 아버지 장군님 고맙습니다” 어쩌고저쩌고 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바깥세상을 엄격하게 차단한 북한의 지독한 세뇌가 사람들을 가축화한 결과다. 마치 사육되는 소나 돼지처럼, 북한에서 빌어먹고 사는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꽃제비들조차 김정일이 통치하는 북한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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