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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사망 두달, 어느 인민반장의 하루
북한RT 2012-03-05 07:03:19 원문보기 관리자 957 2012-03-08 18:55:26

  김정일 사망 후 두 달이 지났다. 그의 죽음은 주민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북한 내부 소식통들과 대북매체들을 통해 전해지는 김정은 시대 주민들의 생활 모습을 한 도시에 사는 가상의 주부 장 씨의 생활을 통해 재구성해본다.

 

  인민반장인 장 씨는 아침부터 돈을 걷기 위해 반내 40여 세대를 돌고 왔다. 각 반별로 영생탑 건설에 디젤유 5리터씩 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디젤유 5리터는 요즘 2만5000원 정도. 각 가정마다 600원씩 걷으면 된다.

 

  아침에 도는 것은 낮에는 빈집이 많고 저녁에는 아무리 불러야 자는 척 내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인민반 회의를 소집해 할당하면 됐지만 이제는 회의에 아예 나오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장 씨가 돌아다닌다.
 

  장 씨도 다른 반장들과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이 인민반장을 한다. 먼 옛날엔 인민반장을 하면 활동비도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반장 감투를 개도 물어가지 않는다. 너도나도 기피하다보니 돌아가면서 맡는다.
 

  인민반장은 위에서 내라는 것들을 집집마다 돌면서 걷는 것이 주요 임무다. 반장을 해서 좋은 점은 자기는 내지 않아도 되고 또 내란 성화를 받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남을 재촉해 돈을 받아내는 스트레스보단 차라리 내는 것이 나은 듯 싶다.
 

  1월 12일 전국에 김정일 ‘영생탑’과 벽화인 ‘태양상’을 건설한다는 중앙당 ‘특별지시’가 발표됐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아무 것도 없는데 건설한다는 것은 결국 주민들의 호주머니를 짜내겠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이를 의식한 듯 중앙에선 절대 주민들에게 돈을 부담시켜 건설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장 씨는 위에서 과연 아래 실정을 알긴 아는지 의심스럽다. 국가 창고가 텅텅 비어있어 어떤 건설이든 주민들을 쥐어짜지 않으면 할 수 없다. 그런데 건설은 하라면서 주민들에게선 걷지 말라는 말은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말인 것이다.
 

  건설 하지 못하면 간부들의 목이 날아난다. 돈을 걷었다고 해서 목이 날아가는 법은 없다. 그러니 간부들이 어느 길을 택할지는 뻔한 일이다.
 

  북에서 살면서 주민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가렴잡세다. 특히 충성심에 걸고 내리먹이는 잡세는 사상을 걸고 들기 때문에 정말 무섭다.
  

 무슨 건설을 한다고 하면 내라는 것이 오만가지다. 차량 디젤유는 수십 가지 명목 중 하나에 불과하다. 작업 인력 숙소 건설비, 식사비, 장갑, 공구로부터 시작해 자갈, 시멘트, 마대, 철근, 페인트, 동 등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걷는 방법으로 해결한다.
  

 지시는 "1인당 자갈 50㎏ 내시오" "고철 5㎏내시오" "구리 600그램 내시오"하는 식으로 떨어진다. 혹시 상부에서 돈을 걷었냐며 추궁이 떨어지면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가정집에 이런 자재가 다 있을 리 만무하다. 결국 돈을 걷어 그냥 내던가 아니면 장마당에서 사서 내는 경우가 많다.
 

  영생탑처럼 새로 할당된 과제뿐만 아니라, 예년과 마찬가지로 비료를 내라, 비닐박막을 내라, 군인 지원을 하라 등 각종 연례 과제도 여전히 내려온다. 걷어내는 통로도 각 조직별로 이중 삼중이다. 인민반에 할당된 내용과 똑같은 지시가 각 직장마다 떨어진다.

 

 

  장 씨 남편은 보안서(경찰) 동 담당 주재원이다. 보안서에서도 돈을 걷었다. 중학교에 다니는 장 씨의 둘째 아들 역시 학교에서 돈을 갖고 오라고 해서 가져갔다.
 

  김정일이 죽은 뒤 직장, 학교, 노동당, 근로단체, 인민반 등 각 조직별로 저저마다 충성 경쟁이다. 아니 충성경쟁이라기 보단 사실 간부들의 눈물겨운 ‘생존전투’이다. 충성심 같은 감정은 떠난 지 오래다. 다만 남들만큼 하지 못하면 능력이 없다거나 충성심이 없다는 낙인이 찍혀 물러나는 것이 두려울 따름이다. 권력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다.
 

  장 씨는 자기가 소속된 여맹에 내야하고, 남편 직장에 내야하고, 학교에 내야하고, 인민반에 내야 한다. 이중 우선순위는 학교이고 두 번째는 남편 직장이다. 아들이 학교에서 풀이 죽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은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다. 둘째네 학교는 내라는 것을 낼 수 없는 아이들은 아예 학교를 그만 둔다. 그 수가 재학생의 30% 가깝다.
 

  인민반을 통해서 걷는 것이 제일 어렵다. 장 씨도 할당받은 양을 다 내본 일이 거의 없다. 하는 껏 하다 안 되면 만다. 이번 디젤유 5리터도 평소 같으면 1리터를 살 돈도 걷기 힘들지만 이번에는 김정일 사망 직후라 사람들이 눈치를 많이 보고 있어 어쩌면 이번은 괜찮게 걷힐 지도 모른다.
 

  장 씨 남편의 보안서에선 돌격대가 조직됐다. 김정일 영생탑을 건설하기 위한 충성의 당원돌격대라고 한다. 돌격대는 당 비서가 찍으면 그냥 가야 한다. 안가겠다고 할 수도 없고 무슨 구실을 둘러대면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비판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보안서라고 해도 건설장에서 고생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다행히 남편은 당 비서와 평소 ‘사업’을 잘해두었기 때문에 뽑히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 사람 관리가 중요한 법이다. 사람 관리란 다른 게 없다. 평소 뇌물을 잘 갖다 바치면 된다.
 

  장 씨 남편은 또 평소 관내 장사꾼을 비롯해 이러저런 불법 행위를 하는 사람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산다. 지금 세상에 불법행위를 하나도 하지 않는 집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뇌물로 장 씨 집은 괜찮은 생활수준을 유지한다.
 

  그런데 김정일 사망 후엔 남편의 표정이 좋지 못하다. 늘 불평불만이다. 보안서 위세가 갑자기 보위부에 크게 눌렸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에도 보위부가 보안서보다 위에 있긴 했지만 보위부원이 같은 정복을 입고 있는 보안원의 체면을 고려해 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김정일 사망 이후 보위부가 갑자기 달라졌다. 김정은이 김정일에게서 보위부부터 넘겨받았고 지금도 보위부에 의지하려 하다 보니 보위부원들의 위세가 하늘을 찌른다.
 

  장 씨 남편도 얼마 전 부임된 새파란 동 담당 보위부원이 자기를 하인 대하듯 해도 찍소리도 내지 못한다. 그뿐이 아니다. 과거에는 보안원의 밥줄인 장사꾼들의 뒷조사도 지금은 보위부원이 직접 한다.
 

  명색은 장군님 100일 애도 기간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라 하지만 이를 계기로 결국 관내 돈줄을 자기가 틀어쥐겠다는 속셈이 뻔하다. 눈치 삼단인 장사꾼들은 급히 보위부원에게 줄을 서기 시작했다. 장 씨 남편의 말은 먹히지 않는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지금 같은 시기엔 보위부원의 말 한마디에 목숨이 달린 터라 장 씨 남편도 그에게 아첨해야 하는 때다. 그래봤자 몇 년 만 참으면 될 듯 하다.
 

  김일성이 사망했을 땐 반대로 보안서가 갑자기 권력을 틀어쥐었다. 심화조 사건이니 뭐니 마구 사건을 만들어 2만5000명 넘게 숙청했다. 그러나 보안서의 힘이 너무 커지자 김정일은 몇 년 뒤 군 보위사령부를 내세워 보안서를 숙청했다. 토사구팽당한 셈이다. 그리고 다시 몇 년 뒤 원응희 사령관을 비롯한 보위사령부 고위 간부들도 역시 숙청됐다.
 

  정복만 30년 가까이 입고 있는 장 씨 남편은 몇 년 뒤 칼이 다시 어디로 넘어갈지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 살아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장 씨의 첫째 아들은 군에 갔다가 3년 만에 집에 돌아왔다. 2년 전 일이다. 뇌물을 써서 뽑아 낸 것이다. 강원도에 주둔하던 장 씨 아들 중대엔 정원 120여 명 중 현재 50명이 각종 이유로 집에 가 있다.

 

이중 30명 정도는 영양실조에 걸려 집에 치료 받으러 갔고, 다른 20명쯤은 부모가 힘이 있는 덕분에 영양실조나 후방사업을 핑계를 내걸고 집에 갔다. 물론 중대 명단엔 120명 모두 복무하고 있다고 돼 있다. 다른 중대들도 사정은 비슷하니 누가 누구를 나무랄 형편이 못된다.
 

  아들은 현역 군인 신분이지만 1년 전부터 장마당에서 장사를 한다. 아버지가 뒤를 봐주고 있어 어렵진 않다. 이렇게 번 돈 중에 일부를 중대에 보낸다. 군관들은 ‘후방사업’을 핑계로 집에 간 군인들이 보내주는 돈으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한다. 또 비록 쥐꼬리긴 하지만 집에 간 병사들의 식량은 그대로 내려오니 힘없어 남은 병사들도 밥그릇이 조금 높아진다.
 

  군인들의 생활은 척박한 강원도가 가장 어렵다. 영양실조 환자도 제일 많다. 그러나 밀수꾼을 등쳐 먹을 수 있는 국경경비대와 같은 물 좋은 부대엔 중대 이탈자가 10명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아들은 몇 년 뒤 대학 추천받을 연한이 되면 부대에 돌아갈 예정이었다. 몇 달 복무하는 척 하다가 뇌물을 써서 대학 추천서를 받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정일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급히 부대로 돌아갔다. 이럴 때 자칫 잘못하면 평생 꼬리표가 달리기 십상이다. 장 씨는 100일 애도기간만 끝나면 다시 아들을 불러 올 계획이었다. 어차피 부대 식량 사정이 달라질 것도 없으니 다시 불러오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전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정은이 파견한 검열대가 부대마다 돌면서 생활형편을 요해한단다. 앞으로 군인 식량공급이 많이 나아질 것 같으니 이러다간 집에 가지 못하는 것 아닌가 불안해한다. 남편은 "살다보니 목을 떼지 않는 검열도 있네"하면서 의아해 하지만 장 씨는 집에서 잘 먹고 살던 아들이 갑자기 부실한 중대밥을 먹고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을지 걱정이 태산이다.
 

  그래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요즘은 어느 기관이라 할 것 없이 ‘충성의 돌격대’라는 것이 만들어져 할 일 없어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달달 볶는다. 주민들도 지금과 같은 때 잘못 행동했다가는 평소보다 몇 배로 처벌을 받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척 한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가 전국적으로 주패(포커)판이 확 사라진 것이다. 예전 같으면 전깃불 없이 어둠 속에서 보내는 긴긴 밤 사람들은 등잔 아래 모여 주패를 놀곤 했다. 춥고 밤이 긴 겨울엔 더욱 그러했다. 몇 시간 놀아 순위가 결정되면 진 사람이 술과 안주를 낸다. 이렇게 마련된 술판은 북한 주민들의 유일한 여가활동이요, 유흥이었다.
 

  장 씨 남편도 그랬었지만 지금은 혼자서 가만히 술을 마신다. 김정일 사망 이후 열흘간의 애도기간엔 술을 마시거나 주패를 놀면 정치범이 됐다. 지금은 그렇게 까진 처벌하지 않지만 3월 말까지 100일 애도기간이라니 눈치를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더구나 보위부원이 실적을 올리기 위해 삽살개처럼 주민 동향을 탐문하면서 돌아친다.
 

  장 씨 집안은 김정은이 올라선 뒤로 누구라 할 것 없이 더 고통스러워졌다. 애도기간이 지나가면 조금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은 있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대다수가 심정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북한이란 사회에선 원래 그렇게 사는 법인 줄 생각하고 모두가 묵묵히 체념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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