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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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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향해, 배움을 향해 - 최진이
동지회 22 4614 2004-11-18 00:25:20
나는 평양에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시문학분과 시인으로 활동하다 1998년 7월 탈북하였고 한국에는 1999년 11월에 입국하였다.

16개월간의 중국 은거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떠나기 하루 전날 밤 나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탈북자로서 한국에 정착한다는게 무척 어렵다는데 잘 해낼 수 있을까, 목숨걸고 데려온 아이를 내 손으로 끝까지 길러낼 수 있을까 이렇게 고민하다 마침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나는 대접을 받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닥치는대로 벌이를 하여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다면 내가 시종일관 꿈꿔왔던 문학공부를 혼신의 힘을 다해 하리라

입국 후 「하나원」교육을 마치고 대전에 첫 발을 내디뎠으나 중국에서의 결심은 온데간데 없고, 불투명한 나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두 달 동안 머리가 뻐개질 정도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나는 당면한 문제에 대한 내 나름의 생각을 정리했다.

먼저 나의 진로 문제였다.

다섯살배기 아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내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공부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이 마흔고개를 넘긴 여자가 어린아이 하나를 거느리고 일정한 수입도 없이 문학공부를 한다는게 허영이 아닐까? 머리가 너무도 복잡했다.

그러나 나는 결심했다. 돈은 어느 때나 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먹고 입을 만큼의 돈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은 내가 도전해 보고 싶은 인격의 목표가 아니던가. 그래, 지금 이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은 공부를 하는 것이야!

공부하면서 생활하는데 드는 돈이 문제였으나 공부하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해결책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러과정을 거쳐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 입학면담을 하게 되었을 때 女 교수님이 "공부하려면 돈이 많이 드는데 그런 돈을 댈 만한 여력이 있나요?" 라고 묻자 나는 정색해서 대답했다.

"제가 오늘과 같은 좋은 앞길이 열려있다고 미리 약속되어서 한국에 온 것이 아닙니다. 걸음걸음 헤쳐 나오다보니 오늘에 이르렀을 뿐입니다. 어쨌든 공부는 해야겠고, 돈 문제는 맞부딪히면서 해결해 보렵니다". 여성학과에서는 나의 이 결심을 돈 몇 천 만원보다 더 값진 것으로 받아들였고, 나를 이의없이 입학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등록금도 걱정하지 않고 공부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다음은 육아문제였다.

동네 어린이 집에 경제적으로 큰 부담없이 아이를 맡길 수 있게 되어 큰 문제 하나는 해결했다 싶었는데 아이는 나에게 여전히 많은 근심거리를 가져다 주었다. 정서가 불안하고 이 땅에서 쭉 자라 온 아이들에 비해 자기 표현력이나 지적능력이 훨씬 뒤떨어져 있었다. 나는 그 근본 원인이 아이에 대한 나의 관심부족임을 깨닫고, 바쁜 가운데서도 의식적으로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을 늘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네도 함께 타주고, 자전거도 밀어주고, 잘 하는 일이 있으면 한껏 격려해 주고, 저녁마다 동화 한편씩을 읽어주고, 매일 아침 30분씩 영어도 가르쳤다. 그러자 아이는 조금씩 안정감을 찾아갔고 자기 표현력도 많이 향상됐으며 요즈음은 어린이 집 아이들 중 자기가 영어를 제일 잘한다고 스스로 자신있게 말하기도 한다.

셋째로 신앙문제였다,

중국에서 숨어 지낼 때 내 삶을 지탱해준 신앙생활을 어떤 식으로 계속할 지에 대해 나는 생각했다. 나는 우선 교회와의 자매결연을 통한 신앙생활은 사양했다. 교회의 덕을 입은 사람은 자율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리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어떤 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자율성의 박탈이 가장 두려웠다. 대신 나는 「하나원」강목사님으로부터 소개받은 대전의 모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목사님의 성실함과 설교에 감복해서 먼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예배에 참가했으며 교회생활에 정이 들게까지 되었다. 서울로 이사와서는 대학원 공부 따라가느라 정신없는 가운데서도 새로이 다니게 된 교회의 일요일 예배만큼은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돈을 어떻게 쓸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나는 돈 씀씀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했다. 근검절약을 다짐했고 그리고 실천했다. 일단 살림과 건강을 위한 최소한의 돈은 투자하되 그 외에는 철저히 절약했다. 전기와 난방은 사람있는 방에만 켜놓고, 세탁기에서 나온 물, 그릇 씻은 물, 손 씻은 물은 용변을 내리는 데 사용하고, 전기제품도 사용 후에는 꼭 전기코드를 뽑아놓아 유실되는 전기가 없게 하고, 휴대폰과 승용차 구입은 그에 어울리는 직업을 구할 때까지 미루고, 옷은 재학 중에는 사지 않기로 하였다. 내가 이렇게 악착같이 절약을 하는 이유는 한국에서의 근검절약 습성을 몸에 베이게 함으로서 앞으로 있을 수 있는 어떤 불우한 환경으로부터도 자신과 가정을 보호하게 하려는데 있다.

나는 대학원 진학관계로 올해 초 대전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그동안 독서, 영어공부, 컴퓨터학습에 힘쓰는 한편 교회 예배참석과 아이교육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북한과 중국에서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질병(중이염, 무좀, 골다공증, 두통, 치아 등)치료를 통한 건강회복에 힘썻다. 어떻게 보면 건강이 최고의 재산이 아니던가?

나는 지금의 학업을 마치고 나면 북한여성문제와 관련된 분야에서 일을 하고 싶다. 물론 나의 근원적 소망인 문학창작-특히 북한 시인에서 남한 소설가로의 변신-에 대한 열망은 변함이 없다,

이 글을 통해 탈북자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사람은 자신이 자기를 돕지 않으면 타인도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정착에서 가장 핵심적 요인은 첫째도 둘째도 우리들 자신이다. 우리는 통일과정에서 북한인들을 시장경제체제에 이끌어 들이기 위한 모델들이다. 우리가 시장경제체제 정착의 충분한 경험과 좋은 방법들을 체득해 놓아야 통일을 전후한 과정에서 그들의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음은 물론 오늘날 우리의 한국 행이 올바른 선택이었음을 그들에게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선을 넘어서면서 한국에 들어선 탈북자 여러분들의 선택이 진정 올바른 것이었음을 훗날 증명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는 것을 부탁드린다.

2001년 7월 최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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