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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교편을 잡기까지 - 천정순
동지회 19 6546 2004-11-18 00:25:34
1965년 11월 3일 양강도 혜산에서 1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나 부모님과 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학창시절엔 제법 공부를 잘했다. 특히 수학에 소질이 있던 나는 자연스럽게 대학 전공도 수학을 선택해 김정숙 사범대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봉흥고등중학교에 배치되어 이후 11년간 줄곧 수학교원으로 종사했다. 그동안 좋은 제자들도 많이 배출했고 나름대로 보람도 있었다. 지금 한국에 와서도 수학선생님을 하리라고는 정말 당시에는 꿈에도 생각했겠는가.

94년 11월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여 95년 9월에 첫 아이를 출산했다. 어느날 아이가 아파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애 아빠는 병원에 잘 들르지도 않아 섭섭한 맘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시댁에서는 이미 나 몰래 탈북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가 조금 차도가 있자 퇴원해서 나는 친정 집으로 일단 가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남편이 중국에 시할머니가 와 계시니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이제 겨우 몸을 추스린 아이를 데리고 어딜 가자고 하는 것인지 ... 3일이면 된다는 시어머니와 남편의 설득에 병석에 계시던 친정 어머니께는 금방 돌아 올테니 마음 놓고 계시라는 말만 남기고 떠나왔는데 벌써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북한을 떠나 3국에 체류하는 동안 바깥구경도 못하고 숨을 죽이고 숨어 살며 발자국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탈북자 단속으로 급할 때는 아이와 옷장 속에 숨어야 했던 적도 있었고 한 밤중에 이사를 가야할 때도 있었다. 고달픈 타국에서의 도피생활이었다. 그후 어렵게 한국에 입국하긴 했지만 과연 한국사람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줄까 하는 우려도 많이 했다.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복잡한 도시를 보면서 혈육하나 없는 이곳에서 잘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앞길이 막막했다.

새로운 생활방식과 사회환경에 적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지만 우리 가족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부모님들에 대한 죄책감이다. 자식으로서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지는 못할망정 저만 잘 살겠다고 남편을 따라 왔으니 어찌 자식된 도리를 다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항상 자나깨나 우리 부모님들도 나하고 같이 한국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 고통의 땅에서 얼마나 고생하실까. 이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여지게 아프다. 또 남한사회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부족, 문화의 이질성, 언어소통의 문제, 대인관계의 어려움 등이 늘 스트레스로 와 닿는다. 특히 언어의 차이로 인해 곤혹스러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외래어, 한자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당황스럽고 북한말투로 인해 오해받거나 웃음 감이 된 적도 있어 난감할 때도 참 많았다.

그렇지만 늘 어려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점 혈육도 없는 외로운 생활일 것이라 생각했던 이곳에서 그간 생사도 몰랐던 외할머니와 작은 외할아버지, 이모 두 분과 고모 할머니를 상봉하는 기쁨도 누렸다. 비록 평생 이산의 고통에 힘들어 하셨던 북에 계신 어머님께 외할머니 소식을 직접 전해드리지 못하는 아픔이 있긴 하지만 외로웠던 우리가족에겐 커다란 의지와 기쁨이 되었다.

남편이 직장을 다녔지만 계약직 봉급만으론 도저히 생활이 될 것 같지가 않아 나도 식당 일을 목표로 요리학원을 다니면서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따내기도 하고 어렵다는 보험 일을 해보기도 했지만 대인관계가 중요한 일에 한점 혈육도 없는 내가 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도움을 주시던 주위 분들조차 오히려 나를 피하는 현상까지 생겨 내가 이일을 꼭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보험 일은 6개월 여만에 그만두었다.

어느 날 우리가족을 담당하시는 선생님께서 부르시더니 북한에서의 전공을 살려 교사생활을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하시고는 서울에 있는 한 대안학교를 소개시켜 주셨다. 며칠 후 간단한 이력서를 들고 성지중학교 김한태 교장선생님을 만나 뵈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쾌히 일해 볼 것을 허락하셔서 금년 3월부터 한국학생들을 대상으로 교단에 서게 되었다. 성지중고등학교는 학력인정 학교이면서도 평생교육시설인데 경제적 사정으로 제때에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했던 성인들에게 학업의 기회를 주고자 마련된 성인반과 정규학교에서 자퇴하였거나 한때 실수로 정규학교에서 공부하기 힘든 학생들 위주로 편성된 학생반이 함께 구성된 대안학교이다.

학생들이 혹 나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면 어떡하나 걱정도 많았고 첫 수업시간에는 어찌나 떨리던지 내가 북한에서 10여년을 교사생활을 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학생들이야 북한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용기를 가지고 기대감에 부풀어 교실 문을 들어섰다. 그러나 막상 수업에 들어가서는 놀라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업에 참가한 학생들의 수업태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선생님의 말이라면 아직은 절대 복종하고 획일화된 북한의 학교분위기와 너무도 달랐다. 머리에 알록달록한 염색을 한 학생, 짙은 화장을 하고 온 여학생, 모자를 쓰고 앉아 있는 학생, 수업도중 핸드폰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학생 등 도무지 북한 교실과는 너무도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런 것들을 나 스스로 자유로운 분위기로 이해하는데는 많은 시간과 인내를 필요로 했다.

나는 성인반 4개 학급과 학생반 한 학급을 가르치는데 성인반은 다행히 학생반과 달리 배우려는 열의가 정말 대단해서 수업 분위기도 진지하고 가르치는 보람도 그만큼 크다. 처음에는 수업 도중에 북한식 사투리가 툭툭 튀어나와 당황하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사투리와 북한식 수학용어는 따로 설명도 곁들여 주면서 수업을 하니 학생들 반응도 훨씬 재미가 있다고 한다.

성지학교에서 교편을 잡은지 3개월이 지났다. 힘든 시간도 많았지만 무엇보다는 내가 원하던 일을 하게 된 것이 보람되고 행복하다. 내가 비록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고 있기는 하지만 어쩌면 내가 그들로부터 남한을 배워 나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서투르고 어색한 점도 많았지만 아무런 내색도 없이 한국 선생님과 똑같이 대해주고 스스럼없이 오랜동안 함께 생활한 스승과 제자사이 처럼 다정하게 대해준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앞으로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더 공부해 자격을 취득한 후 당당하게 교단에 서서 한국 선생님들과 실력을 겨뤄보고 싶다.

언제나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며 맡은 바 소임을 다할 것이며 좀 여유가 생긴다면 어려운 이웃들도 도와가며 살고 싶다. 지금 남한에 와있는 탈북자가 천여명이 넘는다는데 나를 포함한 그들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노력없이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차츰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나도 여전히 노력해야 할 부분이 많지만 지켜봐 주시는 국민 여러분들도 조금만 더 인내심과 애정을 가지고 이해해 준다면 우리가 성숙한 한민족으로 거듭나는 커다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2001년 6월 천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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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하세요 2007-12-22 15:30:48
    선생님 너무 장하세요...
    앞으로도 잘 해주시고 혹시라도 우리애들이 공부를 시장하게 되면 더 잘 배워주세ㅛ.... 앓지마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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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셉 2009-11-11 20:51:55
    힘내시고 열심히 사세요..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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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러운 과거사 ip1 2016-07-06 21:07:53
    천정순씨께서 현재 다른 대안학교 수학교사로 일하신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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