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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헤어져 50여 년의 긴 세월(2) - 최정화
동지회 23 8704 2005-10-26 11:23:48
나의 인생 6 헤어져 50여 년의 긴 세월

최정화(함경북도 회령시 가정부인)

불안한 나날들

1974년 8월 공장 근처인 평양시 동대원구역 랭천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한 번 이사를 하려면 국가에서 집을 주기 전에는 쉬운 일이 아닌데 마침 우리가 다니는 공장에 다니다가 지방으로 추방간 집이 하나 있어 생각 외로 쉽게 이사를 했다.

류현중학교에 다니던 맏딸 영희는 이사할 당시 고등중학교 졸업반이었다.
고생 속에서도 구김살 없이 다른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고 자라준 자식들이 정말 대견하고 고마웠다.
영희는 공부를 열심히 하여 학교 단 위원, 사로청 위원을 하였고 노래도 참 잘 불렀다.
그런걸 보면 구성진 목소리로 노래를 잘 부르는 제 아버지의 성대를 닮았다.
둘째 영실이는 육상과 배구에서 손꼽히는 체육선수로 평양시 체육경기에서 이름을 날리며 국가체육선수가 될 것을 꿈꾸며 자랐다.
셋째 영숙이도 분단위원장을 하며 남달리 고운 목소리로 구역독창경연 대회에서 여러 번 1등에 당선되어 가수가 될 꿈을 키웠다.
맏아들 정학이 역시 어릴 때부터 장난도 유달리 심했지만 분단위원장으로 학교를 대표하는 수학경연들에 참가하여 높은 실력으로 선생님들의 기대와 칭찬을 받았으며 막내 딸 영순이는 예쁘장한 모습으로 유치원에서 무용을 잘하여 학생소년궁전에 다니며 춤을 추었고, 배고픔 때문에 울음 그칠 새 없이 엄마의 젖가슴을 허비며 자란 막내아들 정수도 탁아소에서 남달리 영리하여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남편과 나는 이런 자식들을 바라보며 그 모진 상처들을 하나하나 삭히고 희망을 안고 살아갈 수 있었다.
남달리 마음도 체격도 성숙했던 영희는 오빠가 군사동원부에 있는 담임선생의 관심 속에 군대에 뽑혔다.
북한에서 여학생들이 군대에 입대하는 것은 대학에 가는 것 못지 않게 인기 있었다.
영희는 처음 해군으로 선발되었으나 가정 성분이 문제가 되어 탈락되고 말았다.
우리 부부는 자식들의 앞날에까지 성분문제로 영향이 미치는 것이 가슴 아팠고 또 설사 만기복무를 마친다 해도 입당을 못하고 올 것은 강 건너 불 보듯 뻔한 일인데 그때 딸애가 고충을 겪을 것이 걱정되어 군에 가도록 내버려둬서는 안될 것 같아 포기하라고 권하였으나 부모들의 착잡한 심정을 알길 없는 영희는 기어이 가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더 이상 말리지 못하고 다시 담임선생에게 부탁하여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병훈련을 마치고 간 곳이 다행히 노래를 잘 해서 2군단 “선전대”로 들어갔다.
잘 있으니 걱정 말라고 편지도 오곤 하던 딸에게서 언제인가부터 편지도 오지 않고 소식이 없었다.
온갖 걱정을 하고 있던 어느 날 딸에게서 많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가 날아왔다.
이게 웬일이냐고 놀란 우리 부부는 보약이며 여러 가지를 싸들고 군인병원으로 찾아갔다.
그런 우리를 맞아주는 딸애의 얼굴은 반쪽이 되어있었고 다리를 절룩거리며 겨우 걷고 있었다.

“영희야, 너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야? 말 좀 하라. 응" "어머니, 나 관절염이 심하고 거기다가 방광염까지 겸했대요. 나 속상해 죽겠어요. 어머니.”하며 울먹였다.

나는 그만 기가 막혀 말은 않고 영희를 꼭 껴안았다.
순간 딸애가 희망을 잃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말라. 치료하면 돼.” 말은 했지만 마음이 너무 쓰리고 아팠다.

우리 부부는 영희의 지휘관들을 만났다.

그들은 “영희 동무가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제대해야 될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하는 것이었다.
주저 없이 “그렇게 해야죠.”하고 동의했다.
그리하여 딸은 군에 입대한지 약 3년 만에 감정제대(의무제대)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안정을 느끼며 살아가던 어느 날, 뜻밖에 동 분주소(파출소) 소장이 찾아와 남편이 퇴근하면 분주소에 보내라는 말을 하고 갔다.
분주소장이 돌아간 후, 나는 교도소에 있는 동생에게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니면 숨겼던 우리 집 내막이 탈로 났는지, 그것도 아니면 남편에게 또 무슨 누명이라도 씌워졌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으로 가슴이 불안하여 진정할 수가 없었다.

저녁에 집에 들어온 남편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혹시 잘못한 것 없어요.” 했더니
“난 걸릴 일이 아무 것도 없는데...”하며 머리를 젖고는 분주소를 향해 집을 나섰다.

몇 시간 후, 다녀 온 남편은 안절부절못하며 담배만 피웠다.
웬일인가 고 물었더니 “분주소장이 김히락이가 간첩인 것 같다고 날더러 감시를 하고 김히락의 말과 행동을 보고하라고 하는데 이 일을 어쩌면 좋지.”하며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김히락이로 말하자면 남편과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남조선 출신이고 우리와는 이웃에서 형제처럼 아주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었다.
분주소에서는 남편에게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다고 매일 독촉이었다.
그 일로 밤잠을 못 자고 고민하던 남편은 어느 날 절대 생사람잡이 할 수 없다며 지난날 내가 간첩누명을 썼던 일을 생각하면 분하고 소름이 끼친다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구역 당에 찾아가 김히락이는 몇 년간 지내보아도 간첩이라고 의심할 근거가 없으며 분주소장의 사업작풍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분주소와 보위부에서는 은근히 압력이 가해졌다.
어느 때 어떤 일이 생길지 마음이 항상 초조하고 불안하였다.

8.18 판문점사건과 추방

그러던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터졌다.
그 당시 북한의 정세는 전쟁전야를 방불케 하는 무시무시한 분위기였다.
김일성이 최고사령관 명령을 내리고 당장 전쟁을 일으켜 남조선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며 조선 인민군 육해공군과 전 인민들에게 만단의 전투태세를 갖출 것을 지시했다.
대낮에 탱크와 장갑차들이 평양시 거리를 진동하며 질주하여 전쟁분위기를 한층 더 해주며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고 밤이면 사방에서 귀청을 째는 듯이 공습경보 사이렌 소리로 평양시는 불빛 한 점 없는 암흑세계로 변했고 공포에 질려 터뜨리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공장과 학교들에서는 생산과 수업을 중단하고 전쟁에 대처한 중대강연과 방송을 청취하였다. 의사들이 학교로 나와 형식적인 신체검사를 하여 대학생들은 물론이고 고등중학교 학생들까지도 불구가 아닌 이상 무조건 군대로 뽑아갔다.
또한 주요기관들은 모두 지방으로 소개시켰고 거리에는 매일 소개 짐을 실어 나르는 차량들로 길을 메웠으며 철도에서도 모든 일반운행을 중단하고 소개물자들을 우선적으로 실어 날랐다.
1차적으로는 유사시 국가적 손실을 막기 위한 목적에서 소개사업이 진행되었고, 2차로는 최고사령관 명령의 명칭을 달고 소위 인민들의 인명피해를 없앤다는 명분 아닌 명분아래 성분이 가장 나쁜 가족들을 추려서는 강제 추방시켰다.
1976년 9월 22일.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온 남편의 얼굴에는 몹시 침울한 빛이 가득했다.
“영희 아버지, 도대체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누구한테 실은 소리라도 들은 거예요.”하고 안 좋은 심기를 더 불편하게 할 것 같아 조용히 물어보았다.
남편이 한숨을 내쉬고 나서 입을 뗐다.

“그런 게 아니오. 실은 지방으로 소개명령을 받았소.”

나는 그 순간 가슴이 덜컹 무너지는 것 같아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나와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남편은 공장에서 언제나 근면했고 창의고안도 많이 하여 기술자로, 작업반장으로 신망도 높았다.
퇴근 시간에 초급당 비서가(공장에서 가장 상급당 비서) 찾아서 갔더니 소개자 명단을 보여주며 “공장 초급당에서는 6세대로 명단을 올려보냈는데 결재되어 내려온 문건에 어떻게 되어 7명으로 김경호라는 이름이 찍혀졌는지 정말 나도 모르겠소”라고 하였다고 한다.
남편과 우리 온 식구들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꼬박 날을 새웠다.
나는 평양에서 살아온 날들을 더듬어 보며 죄 없이 산 설고 낯 설은 타지방으로 쫓겨가게 됐으니 너무나도 기가 막히고 억울하였다.
무슨 말을 시작하게 되면 그 억울함을 다 하소하고 울분을 토할 것 같아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다음 날 밤, 김히락이 우리 집에 찾아 와 하는 말이 낮에 구역 당에 찾아가 김경호 가족이 소개되는 것이 애매하다고 하소연하자

“김경호는 가정성분이 걸려 추방되는 거요. 정 시끄럽게 말이 많으면 재미없어요. 그렇게 가슴 아프면 같이 가겠소?”하고 짜증을 내며 거만하게 협박하더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추방명단에 있는 7가족 중 3가족이 남조선 출신들이었다.
한 가족은 함북도 새별군으로, 또 한 가족은 함북도 무산군으로 추방되었다.
우리 가족은 함북도 회령으로 가게 되었다. 공장의 한 간부가 회령으로 가게된 남편을 보고하는 말이
“그래도 그 가정은 제2 만경대로 가게 됐으니 다른 사람들보다는 낫지 않소.”하는 것이었다. 하나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제2 만경대라고 하는 것의 의미는 김일성의 생가가 있는 곳이 제1만경대이고 김정일의 모 김정숙의 생가가 있는 회령은 제2 만경대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저희들 좋을 대로 가져다 붙이기 나름이다.
떠나기 전에 함께 일하던 사람들과 인사도 할 겸 직장에 나갔더니 그들 역시 모르고 있는 듯, 어찌된 일이냐고 못내 안타까워했다.
억울한 말을 하고 싶어도 이미 때도 늦었거니와 최고 사령관의 명령이라는 명칭을 달고 진행되는 어마어마한 사업이고 잘못 도전하다가는 더 큰 화를 당할 형편이어서 감히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때 전시 안전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대대적으로 벌린 주민소개(강제 추방이주)야말로 독재정권을 순한 양의 탈로 가리우고 독재유지를 하는데 있어서 말도 안 되는 그 어떤 기준을 만들어놓고 그에 어긋나는 사람들 즉 성분이 걸리는 사람들을 혁명의 투쟁대상으로 하여 쳐버리면서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치를 한다는 북한독재자들의 거짓으로 빚어진 위선정치의 일면을 보여준 인권유린 행위의 산물이었다.
나는 순간 전쟁 때 월남자 가족들을 총살하던 그 살벌한 분위기를 다시 떠올리며 우리 가족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름이 쫙 끼쳤다.
자식들은 많은데 지방에 내려가면 부족 되는 것이 많을 것 같아 신발, 양말, 내의, 비누, 간식 등의 물건들을 사들였다.
당시 1976년까지만 하여도 상점에서 상품카드로 식구에 한해서 모든 상품들을 판매하였다. 직장친구들과 이웃들의 도움이 컸다.
우리가 추방되는데 대해 같이 가슴아파하고 위로해 주며 자기 집 상품카드를 선뜻 내주고 물건들도 사다 주었다.
이삿짐은 남편 작업반 사람들이 다 포장해서 역으로 실어다 주고 기차표도 끊어다 주었다.
9월 24일, 우리 가족은 서운한 마음을 금치 못하는 이웃들과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버스를 타고 서평양 역으로 갔다.
그곳에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과 배웅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부모, 자식, 형제 그리고 친척과 친지 등 떠나는 사람들, 바래주는 사람들로 붐비고 누구나 없이 곡소리만 안 날뿐 눈물어린 억울하고 슬픈 표정들이었다.
우리 가족 주위에는 가까운 친척이 없다보니 함께 일하던 공장 사람들의 뿐이었다.
그들 중에는 남편처럼 고향이 남조선인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서로 끌어안고 “어디에 가든지 꼭 살아서 고향에 가자구. 힘을 잃지 말고 꼭 살아야 돼. 알았지”하며 위안했다.
그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같은 남한출신들이어서 서로 위하는 마음도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기차가 떠나는 시간이 되어 추방 가는 사람들은 모두 기차에 올랐고 출발신호가 울리자 역구내는 순식간에 울음바다로 변했다.
서서히 움직이는 차창 밖으로 손을 잡고 놓지 못하는 사람들, 실신하여 쓰러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떠나는 차안에서 쓰러진 어머니를 부르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울던 젊은 여인의 모습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였다.
우리 가족은 그처럼 애간장을 태우며 배웅해 주는 사람들은 없어도 서러운 정, 아픈 정 다 담고 살던 곳이고 내가 태어나서 자랐고 부모님들의 소중한 추억의 모습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곳이라는 미련에, 다시는 동생과 만나기 힘든 이별의 길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지쳐버린 사람들은 몇 시간이 지나도록 달리는 열차에 운명을 맡긴 채 제나름대로의 생각에 잠겨 침묵을 하였다.
가뜩이나 울적한 기분에 높고 험한 산맥들은 가도가도 끝이 없었고 낯선 농어촌들의 풍경만이 스쳐지나갔다.
즐거운 여행길이었다면 평양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자연의 풍경에 도취되어 마냥 행복했으련만 이 열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목적이유로는 모든 것이 눈에 안 들어오고 오히려 마음만 더 어둡게 하였다.
얼마나 길고 지루하게 왔는지 다리가 퉁퉁 부어 오르고 엉덩이가 배겨났다.
더구나 증기기관차 연기로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슥거리는 것이 심한 멀미가 났다.
25일 저녁 8시, 평양을 떠나 만 24시간만에 함경북도 회령역에 도착하였다.
캄캄한 기차역 마당에서 어떡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우리들을 단층 건물로 돼있는 초라한 회령역전 여관으로 인솔했다.
여관에서 이틀을 지낸 우리 가족은 낡은 아파트 남의 집 윗방으로 동거를 하게 되었다.
60세난 두 노인 내외와 갓 결혼한 아들 내외, 15살 난 딸이 사는 주인집 사람들은 마음씨 착한 사람들이었다.
첩첩이 높은 산으로 둘러막힌 회령은 산천도 사람들도 말씨도 풍습도 모두 낯설었다.
정들이고 싶은 곳이 한 곳도 없었고 꼭 남의 땅에 온 것만 같았다.
포장되지 않은 도로 길에 나서면 눈을 뜰 수 없게 먼지 바람이 불어댔고 골목마다 집짐승 똥들이 지저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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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 7

초상화 분실사건과 누명

엄격한 조직생활과 통제, 그리고 서로를 감시하고 경계하는 속에서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는 불신이 어둡게 드리워 있는 곳이 북한이다.
하지만 그 숨막히게 옥죄이는 더러운 수령독재체제를 무너뜨리려 정체를 숨긴 채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김일성, 김정일을 욕하는 낙서, 정치적인 행사장에 전기선을 끊기도 하고 김일성의 초상화를 없애버리기도 하고 또 쿠데타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 덕에 우리는 누명을 쓰고 온 가족이 쥐도 새도 모르게 잘못될 가봐 불안에 떨며 “어떤 놈이 그런 짓을 해놓고 남에게 피해를 주냐”고 욕설도 퍼부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그들은 대단한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다.
북한의 우상숭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다.
우상숭배에서 기본인 초상화를 지키기 위해 활활 불타는 집에 뛰어들어 꺼내오기도 한다.
가장 소중한 자녀까지 잃으면서 말이다.
사고로 군 병실에 수류탄이 떨어졌을 때에도 그 초상화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쳐 가며 수류탄을 몸으로 막는 사람들이 바로 북한 사람들이다.
한국 사람들은 ‘세상에 말도 안 돼, 그게 가능하냐, 그건 미친 짓’ 이라고 경악하거나 웃을지 몰라도 우리말도 배우기 전 어린 나이부터 우상숭배를 먼저 배웠기에 그런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으며 1년에 한 번씩 주는 사탕, 과자 한 봉지에 감격해서 고맙습니다 하고 눈물짓고 수령이 있어야 나라도 인민도 있다고 생각하는 북한 사람들로서는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생각지 않고 ‘충성’이라고 여기고 거기서 자긍심을 느낀다.
모든 외부세상과의 소식을 차단하고 있는 북한 땅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은 진정한 민주주의사회를 경험하기 전에는 북한이 전형적인 수령독재사회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남편은 회령 크라프트지공장으로 직장을 옮겼다.
두꺼운 종이와 포장지를 생산하는 공장인데 그곳에서 운수작업반 반장으로 일을 하였다.
직장에서 퇴근한 남편은 “우리 공장 어느 작업반에서 수령님 초상화가 분실 돼서 요즘 공장분위기가 굉장히 날카롭게 돌아가고 사람들 얼굴이 다 굳어지고 말이 아니오. 어디 가서 함부로 이런 일을 발설하지 마오. 정치적으로 큰 손실이라 소문나면 절대 안 되니까 말이오” 라고 하였다.
그 말에 “아니 도대체 누가 그런 일을 저질렀대요. 잡히면 어떡하려고, 그 사람은 이제 발각되면 죽겠구만요” 하고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글쎄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초상화 사건 혐의가 남편에게 돌아올 줄은 꿈에도 상상해 보지 못했다.
어느 날 남자 두 명이 우리 집에 찾아와 초상화 보위사업정형(초상화 관리 상태를 말하는데 북한에서는 가끔씩 가정집으로 초상화청소 정형에 대한 검열을 나오곤 한다)을 검열하려 다닌다며 초상화를 어디서 수여 받았는가, 본래 천연색이었는가 고 이것저것 꼬치고치 캐물었다.
그들이 왔다간 다음 날 같은 인민반에 사는 가까운 이웃인 조정옥과 이순실이 와서는 “언니, 보위부에서 우리한데 찾아왔는데 이 집에 있는 초상화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내막을 잘 알아내라고 했어요.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어쩐지 그들의 말이 심상치 않아요” 하고 알려주었다.
너무 기막히고 소름끼치도록 끔찍한 일이었다.
우리들 마음은 청백하지만 있는 죄, 없는 죄 다 뒤집어 씌어 죄 없는 ‘죄인’으로 만들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만드는, 사람의 목숨을 파리목숨만도 여기지 않는 험악한 이 세상에서 누명을 쓴다는 것은 언제 어떻게 정치범수용소로 갈지 모르는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런 세상에서 생떼 같은 동생을 잃고 삼촌도, 이모도 잃은 데다 남편이 말도 안 되는 간첩누명을 쓰기도 하고 또 여기저기 쫓겨다니며 온갖 고생 다해가며 살아온 우리들이기에 항상 색안경을 끼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눈에 든 가시처럼 주시하는 북한의 독재정치를 너무도 잘 알고 당해온 터이라 떨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보위부에서는 동네 사람들 외에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드는 홍씨를 밀정으로 우리 집에 보내어 초상화에 대한 내막을 다시 알아보게끔 하였다.
그 여자는 우리 집에 들어와서는 놀러온 행세를 하며 초상화에 대해 이것저것 캐물었다. 나는 그런 그가 얄밉고 화가 치밀어 빙빙 돌리지 말고 확실히 내놓고 말하라, 보위부에서 보내서 오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그리고는 “남의 눈에서 눈물나게 하면 제 눈에서는 피눈물이 날 때가 있으니 함부로 성한 사람잡이를 하는 것이 아네요”하고 쏘아 붙였다.
홍씨는 얼굴이 벌개져서 당황해하며 자기는 보위부에서 시켜서 마지못해 한 짓이라고 변명했다.
그 문제로 우리 부부에게만 감시를 붙이고 조사한 것이 아니었다.
학교에 갔다 오후가 되어 집에 돌아온 작은딸이 얼굴에 불안감이 잔뜩 실려 가지고 말했다.
“어머니, 오늘 학교에 어떤 남자 세 사람이 날 찾아왔었어요.” 그 말에 그만 놀라 정신이 번쩍 들어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따져 물었다.
사연인즉, 학교에서 한창 공부를 하고 있는데 교무부장이 불러내서 교무부장실로 갔더니 거기에는 허우대가 큰 남자 셋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책상에 걸터앉은 사람이 이제부터 묻는 말에 솔직히 말해야 용서받을 수 있다며 아버지가 초상화를 언제 가지고 왔느냐, 언제부터 집에 천연색초상화가 있었느냐 하고 따지고 책상을 치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화가 날대로 나서 다음 날 공장 담당 책임 보위지도원을 만났다. “ 왜 내게 그런 당치도 않은 누명을 씌우는 거요. 마른일 궂은일 가리지 않고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는데 왜 나를 정치적으로 매장하려는 목적이 무엇이요. 나는 떳떳하기 때문에 군당에라도 찾아가서 해명을 하고야 말 것이요”고 들이대고 따져 물었다.
앉아서 항의하는 남편을 쳐다보고 있던 보위지도원은 낯빛하나 변하지 않고 ‘김동무네 집에 갔던 사람들은 대학을 갓 졸업한 사람들이어서 잘 몰라 한 일이니 이해하라’고 하였다.
사람 목숨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조롱하고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너무도 태연한 자세였다.
집으로 돌아온 그이는 “어느 때는 간첩이라 하더니 인제는 또 반동으로 몰아 사람을 잡으려 한다니, 내가 이런 일 당하자고 16살에 의용군에 입대하여(북한에서는 의용군에 징집되었어도 징집되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총을 잡았나, 억울하고 분해서 못살겠다”며 나지막한 소리로 분통을 터뜨리며 가슴을 쳤다. 식구들 모두가 같은 심정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보위부임무를 받고 우리를 감시하던 사람들에게도 대단히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보위부의 입과 눈 노릇을 하는 그들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보위부에서 시키는 일이라 안 하겠다고 하면 안 한다고 딴 지를 걸어 저희들 가정에 피해를 주게 될 것 같아 감시하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마지못해 했을 것이다.
이웃끼리 정을 나누고 가까이 지내면서도 고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서로 감시하고 그로 인해 서로 미워해야 하는,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무색케 하는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 이것이 바로 북한의 현실이다. 그러나 알면서도 참고 현실을 직시하는 수밖에 없다.
북한에는 이런 명언이 있다.
“착취 받고 압박 받는 곳에는 반항이 있기 마련이다”. 이 말은 남한 자본주의 사회를 놓고 만들어진 말이지만 도리어 북한의 독재자들에게, 인민들에게 좋은 교훈이 되는 명언이다.
그 후 남편은 그 공장에 더 있고 싶지 않다며 회령 편의협동조합 기계수리공으로 직업을 옮겼다. 딸들 셋은 혼기가 차 맏딸은 강원도 원산으로, 둘째는 함경북도 나진으로, 셋째는 회령에 시집을 보냈다. 고생 속에 자란 딸들이었지만 부족 되는 것이 너무 많은 어려운 살림이어서 첫날 옷(한복) 한 벌 제대로 해 입히지 못하고 혼수도 변변히 갖추어 보내지 못했다.
우리 부부는 딸들을 시집보낼 때마다 남들처럼 해 보내지 못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려 한숨만 내쉬었다.
그보다 더 마음 아픈 건 배후자를 선택할 때도 가정성분을 우선한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노동자들이라도 가정성분이 좋거나 집안에 간부가 있으면 당연히 약혼대상자 성분에 대해 시안전부나 보위부를 통해 사전에 요해한다.
만약에 모르고 결혼했어도 자기 집안 발전에 지장이 된다고 이혼을 시키거나 당사자 서로가 헤어지기 싫어서 이혼을 하지 않으면 직위에서 해임시키거나 심하게는 농촌이나 탄광, 광산으로 추방을 보낸 실례도 있다.
북한 밖에 없는 이런 특위의 혼인조건 때문에 딸들도 외면 당하고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다. 딸들도 힘들었겠지만 지켜보는 우리 부부도 가슴이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기에 우리 같은 사람들은 결혼이라고 하면, 결혼 그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먼저 성분 때문에 상대방에게서 순간에 외면 당하는 것에 대한 고통이다. 성분이 안 좋은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결혼을 한다. 어찌 보면 같은 처지여서 서로 상처를 주지 않기 때문에 더 감싸주고 이해해주고 편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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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 8

초상화 분실사건과 누명

엄격한 조직생활과 통제, 그리고 서로를 감시하고 경계하는 속에서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는 불신이 어둡게 드리워 있는 곳이 북한이다.
하지만 그 숨막히게 옥죄이는 더러운 수령독재체제를 무너뜨리려 정체를 숨긴 채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김일성, 김정일을 욕하는 낙서, 정치적인 행사장에 전기선을 끊기도 하고 김일성의 초상화를 없애버리기도 하고 또 쿠데타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 덕에 우리는 누명을 쓰고 온 가족이 쥐도 새도 모르게 잘못될 가봐 불안에 떨며 “어떤 놈이 그런 짓을 해놓고 남에게 피해를 주냐”고 욕설도 퍼부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그들은 대단한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다.
북한의 우상숭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다.
우상숭배에서 기본인 초상화를 지키기 위해 활활 불타는 집에 뛰어들어 꺼내오기도 한다.
가장 소중한 자녀까지 잃으면서 말이다.
사고로 군 병실에 수류탄이 떨어졌을 때에도 그 초상화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쳐 가며 수류탄을 몸으로 막는 사람들이 바로 북한 사람들이다.
한국 사람들은 ‘세상에 말도 안 돼, 그게 가능하냐, 그건 미친 짓’ 이라고 경악하거나 웃을지 몰라도 우리말도 배우기 전 어린 나이부터 우상숭배를 먼저 배웠기에 그런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으며 1년에 한 번씩 주는 사탕, 과자 한 봉지에 감격해서 고맙습니다 하고 눈물짓고 수령이 있어야 나라도 인민도 있다고 생각하는 북한 사람들로서는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생각지 않고 ‘충성’이라고 여기고 거기서 자긍심을 느낀다.
모든 외부세상과의 소식을 차단하고 있는 북한 땅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은 진정한 민주주의사회를 경험하기 전에는 북한이 전형적인 수령독재사회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남편은 회령 크라프트지공장으로 직장을 옮겼다. 두꺼운 종이와 포장지를 생산하는 공장인데 그곳에서 운수작업반 반장으로 일을 하였다.
직장에서 퇴근한 남편은 “우리 공장 어느 작업반에서 수령님 초상화가 분실 돼서 요즘 공장분위기가 굉장히 날카롭게 돌아가고 사람들 얼굴이 다 굳어지고 말이 아니오. 어디 가서 함부로 이런 일을 발설하지 마오. 정치적으로 큰 손실이라 소문나면 절대 안 되니까 말이오” 라고 하였다.
그 말에 “아니 도대체 누가 그런 일을 저질렀대요.
잡히면 어떡하려고, 그 사람은 이제 발각되면 죽겠구만요” 하고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글쎄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초상화 사건 혐의가 남편에게 돌아올 줄은 꿈에도 상상해 보지 못했다.
어느 날 남자 두 명이 우리 집에 찾아와 초상화 보위사업정형(초상화 관리 상태를 말하는데 북한에서는 가끔씩 가정집으로 초상화청소 정형에 대한 검열을 나오곤 한다)을 검열하려 다닌다며 초상화를 어디서 수여 받았는가, 본래 천연색이었는가 고 이것저것 꼬치고치 캐물었다.
그들이 왔다간 다음 날 같은 인민반에 사는 가까운 이웃인 조정옥과 이순실이 와서는 “언니, 보위부에서 우리한데 찾아왔는데 이 집에 있는 초상화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내막을 잘 알아내라고 했어요.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어쩐지 그들의 말이 심상치 않아요” 하고 알려주었다.
너무 기막히고 소름끼치도록 끔찍한 일이었다.
우리들 마음은 청백하지만 있는 죄, 없는 죄 다 뒤집어 씌어 죄 없는 ‘죄인’으로 만들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만드는, 사람의 목숨을 파리목숨만도 여기지 않는 험악한 이 세상에서 누명을 쓴다는 것은 언제 어떻게 정치범수용소로 갈지 모르는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런 세상에서 생떼 같은 동생을 잃고 삼촌도, 이모도 잃은 데다 남편이 말도 안 되는 간첩누명을 쓰기도 하고 또 여기저기 쫓겨다니며 온갖 고생 다해가며 살아온 우리들이기에 항상 색안경을 끼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눈에 든 가시처럼 주시하는 북한의 독재정치를 너무도 잘 알고 당해온 터이라 떨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보위부에서는 동네 사람들 외에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드는 홍씨를 밀정으로 우리 집에 보내어 초상화에 대한 내막을 다시 알아보게끔 하였다.
그 여자는 우리 집에 들어와서는 놀러온 행세를 하며 초상화에 대해 이것저것 캐물었다.
나는 그런 그가 얄밉고 화가 치밀어 빙빙 돌리지 말고 확실히 내놓고 말하라, 보위부에서 보내서 오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그리고는 “남의 눈에서 눈물나게 하면 제 눈에서는 피눈물이 날 때가 있으니 함부로 성한 사람잡이를 하는 것이 아네요”하고 쏘아 붙였다.
홍씨는 얼굴이 벌개져서 당황해하며 자기는 보위부에서 시켜서 마지못해 한 짓이라고 변명했다.
그 문제로 우리 부부에게만 감시를 붙이고 조사한 것이 아니었다.
학교에 갔다 오후가 되어 집에 돌아온 작은딸이 얼굴에 불안감이 잔뜩 실려 가지고 말했다. “어머니, 오늘 학교에 어떤 남자 세 사람이 날 찾아왔었어요.” 그 말에 그만 놀라 정신이 번쩍 들어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따져 물었다.
사연인즉, 학교에서 한창 공부를 하고 있는데 교무부장이 불러내서 교무부장실로 갔더니 거기에는 허우대가 큰 남자 셋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책상에 걸터앉은 사람이 이제부터 묻는 말에 솔직히 말해야 용서받을 수 있다며 아버지가 초상화를 언제 가지고 왔느냐, 언제부터 집에 천연색초상화가 있었느냐 하고 따지고 책상을 치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화가 날대로 나서 다음 날 공장 담당 책임 보위지도원을 만났다.
“ 왜 내게 그런 당치도 않은 누명을 씌우는 거요. 마른일 궂은일 가리지 않고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는데 왜 나를 정치적으로 매장하려는 목적이 무엇이요. 나는 떳떳하기 때문에 군당에라도 찾아가서 해명을 하고야 말 것이요”고 들이대고 따져 물었다.
앉아서 항의하는 남편을 쳐다보고 있던 보위지도원은 낯빛하나 변하지 않고 ‘김동무네 집에 갔던 사람들은 대학을 갓 졸업한 사람들이어서 잘 몰라 한 일이니 이해하라’고 하였다.
사람 목숨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조롱하고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너무도 태연한 자세였다.
집으로 돌아온 그이는 “어느 때는 간첩이라 하더니 인제는 또 반동으로 몰아 사람을 잡으려 한다니, 내가 이런 일 당하자고 16살에 의용군에 입대하여(북한에서는 의용군에 징집되었어도 징집되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총을 잡았나, 억울하고 분해서 못살겠다”며 나지막한 소리로 분통을 터뜨리며 가슴을 쳤다.
식구들 모두가 같은 심정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보위부임무를 받고 우리를 감시하던 사람들에게도 대단히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보위부의 입과 눈 노릇을 하는 그들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보위부에서 시키는 일이라 안 하겠다고 하면 안 한다고 딴 지를 걸어 저희들 가정에 피해를 주게 될 것 같아 감시하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마지못해 했을 것이다.
이웃끼리 정을 나누고 가까이 지내면서도 고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서로 감시하고 그로 인해 서로 미워해야 하는,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무색케 하는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 이것이 바로 북한의 현실이다. 그러나 알면서도 참고 현실을 직시하는 수밖에 없다.
북한에는 이런 명언이 있다.
“착취 받고 압박 받는 곳에는 반항이 있기 마련이다”. 이 말은 남한 자본주의 사회를 놓고 만들어진 말이지만 도리어 북한의 독재자들에게, 인민들에게 좋은 교훈이 되는 명언이다.
그 후 남편은 그 공장에 더 있고 싶지 않다며 회령 편의협동조합 기계수리공으로 직업을 옮겼다.
딸들 셋은 혼기가 차 맏딸은 강원도 원산으로, 둘째는 함경북도 나진으로, 셋째는 회령에 시집을 보냈다.
고생 속에 자란 딸들이었지만 부족 되는 것이 너무 많은 어려운 살림이어서 첫날 옷(한복) 한 벌 제대로 해 입히지 못하고 혼수도 변변히 갖추어 보내지 못했다.
우리 부부는 딸들을 시집보낼 때마다 남들처럼 해 보내지 못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려 한숨만 내쉬었다.
그보다 더 마음 아픈 건 배후자를 선택할 때도 가정성분을 우선한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노동자들이라도 가정성분이 좋거나 집안에 간부가 있으면 당연히 약혼대상자 성분에 대해 시안전부나 보위부를 통해 사전에 요해한다.
만약에 모르고 결혼했어도 자기 집안 발전에 지장이 된다고 이혼을 시키거나 당사자 서로가 헤어지기 싫어서 이혼을 하지 않으면 직위에서 해임시키거나 심하게는 농촌이나 탄광, 광산으로 추방을 보낸 실례도 있다.
북한 밖에 없는 이런 특위의 혼인조건 때문에 딸들도 외면 당하고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다. 딸들도 힘들었겠지만 지켜보는 우리 부부도 가슴이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기에 우리 같은 사람들은 결혼이라고 하면, 결혼 그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먼저 성분 때문에 상대방에게서 순간에 외면 당하는 것에 대한 고통이다.
성분이 안 좋은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결혼을 한다.
어찌 보면 같은 처지여서 서로 상처를 주지 않기 때문에 더 감싸주고 이해해주고 편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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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 9

꿈같은 부모님의 소식

1992년 3월 6일. 그 날은 남편의 생일이자 셋째 손녀 봄이의 첫 돌잔칫날이었다.
그런데 그 날 생전에 뵐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아버지, 어머니의 소식이 전해져 우리 일가의 인생행로에 새로운 시점이 마련된 날이 될 줄은 몰랐다.
생일잔치 차릴 준비를 하느라고 분주히 오가는데 담당 보위지도원이 찾아왔다.
나는 보위지도원이 나타난 것을 보고 또 무슨 불길한 일이 생기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에 속이 끔찍했다. 보위지도원은 얼굴을 잔뜩 쳐들고는 나를 보더니 “아버지, 어머니가 지금 어디 살고 있소?”하고 묻는 것이었다.
“난 어려서 부모님들과 헤어졌기 때문에 어디서 사는지 몰라요” 했더니 보위지도원은 "모르긴 왜 모르는가 달아나지 않았는가"고 말꼬리를 물었다.
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러는 나를 보며 그는 “부모님들이 해외에 살고 있는데 3월 말경에 딸을 찾아 회령으로 오실 예정이니 준비 잘 하고 기다리고 있으시오” 하고는 해외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말도 않은 채 나가 버렸다.
나는 내가 지금 꿈을 꾸고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얼굴을 꼬집어보았다.
수 십 년 세월 온갖 세상 풍파를 다 겪으며 눈물 속에 기도할 때마다 살아서 한 번만이라도 부모님들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 하였지만 이렇게 정말로 평생소원이 이루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지난 세월 남편도 자식들도 모르게 문을 걸어놓고 기도를 하며 애타게 바라온 소원이 정녕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니 현실이 아닌 꿈만 같아 이것이 꿈이라면 제발 깨어지지 말고 꼭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고 또 하였다.
그렇게 피를 말리며 기다려온 부모님들이었으나 정작에 만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불쌍한 동생의 모습이 생생히 안겨왔다.
“철이야, 아버지, 어머니 소식이 왔다. 너는 도대체 어데 있는 거냐. 이 기쁜 소식을 함께 들었으면 얼마나 기뻐하랴. 나 혼자서 부모님 만나서 어떻게 해. 너에 대해 물으면 무어라고 대답 드릴까.”
나는 그만 온 얼굴에 눈물범벅이 되어 보위부에 붙잡혀 정치범수용소에 들어가고 두 번 면회한 뒤로는 소식조차 모르는 동생을 울며불며 소리내어 불렀다.
“철이야 철이야......” 기쁨보다는 슬픔이 몇 갑절 더 컸다. 그 날 밤 우리 식구들만이 나와 슬픔을 함께 하며 격동의 눈물 속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헤어진 지 46여년이 되어서 인제는 많이 늙으셨을 텐데 어떤 모습일까.' 부모님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려하였으나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고 어린 내 모습만을 기억하실 부모님들이 과연 너무도 변해버린 나를 보시면 알아 보실까 걱정스러워 처녀 때 나의 모습을 담은 결혼사진을 펼쳐보며 부모님께 보여드리리라 생각했다.
부모님들이 해외 어디에 살고 있을까, 일본일까 남조선일까 생각하던 끝에 나는 다음 날 인민반장을 찾아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보위지도원이 그러던데 어머니넨 재미교포래요. 얼마 있으면 방문단으로 나온다던 데요”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에 더욱 놀랐다.
지금까지 살면서 왜곡된 선전만을 들어왔기에 왜 부모님들이 한국 땅에서 못사시고 미국이란 나라로 가셨는지, 살인강도들이 살 판친다는 미국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시는지 도리어 걱정스러웠다.
형언할 수 없는 심정을 안고 매일 매 시각 부모님들이 오실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3월이 지나고 7월이 되어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더 이상 기다릴 마음의 여유를 잃고 회령시 행정경제위원회 해외동포 영접부와 담당 보위지도원을 찾아가 우리 부모님들이 언제 오시며 편지라도 할 수 있게 주소를 알려달라고 사정했지만 서로 모른다는 말뿐이었다.
생각던 끈에 평양에 있는 해외동포 영접부를 찾아가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당장 평양에 가려고 보니 여행증 내는 것이 문제였다.
빈손에 가서 사정이 통할 것 같지 않아 집에 있던 텔레비전을 팔아 돈을 장만해 술, 담배, 쌀을 사주고 여행증을 냈다.
8월 1일 셋째 영숙이와 손자와 손녀를 데리고 다음날인 2일에 평양에 도착하여 쉴새없이 해외동포 영접부를 찾아갔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찾아간 날이 평양 비파동에 있던 영접부 사무실을 모란봉구역 개선동에 있는 새 건물로 이사하는 날이었다.
하는 수없이 다시 발길을 돌려 이사간 곳으로 찾아가니 마당에 가득한 짐들을 나르느라고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을 붙잡고 회령에서 찾아 오게된 사연을 이야기하며 좀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내 말을 다 듣고 나서 3월에 온다고 했다가 못 온 사람이면 무슨 문제가 있어 오지 못한 것이나 오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에 있는 교포문제는 6국(영접부 내 부서)에서 보는데 자기는 중국을 담당한 7국 부서며 지금 형편에서 찾을 수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평양 영접부에 찾아가면 부모님들의 주소라도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서신거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먼 천리길을 찾아갔던 나는 실망하여 온 몸의 힘이 순간에 땅 속으로 잦아드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도 모른다니 어디에 가서 알아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심란한 마음을 안고 평양 룡성구역에 사는 5촌 고모네 집으로 갔다가 강서구역 청산리에 사는 외가 편에 가면 부모님들의 소식을 알 수 있다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평양에서 청산리까지는 80리 정도 되었다.
그곳에 가려면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증명서에는 여행 목적지가 평양시로 밝혀져 다른 곳으로는 함부로 갈 수가 없고 중요 도로마다 세워져 있는 보위부 10호 초소 검열에 단속이 되면 시끄러워지기 때문에 부득이 걸어가야만 했다.
그야말로 강행군이다.
담배갑을 흔들어 보이며 지나가는 자동차를 세워 좀 타고 가기도 하고 걷기도 하고, 어쩌다 먼길을 걸어서 발바닥에는 온통 물집이 생겨 발을 옮겨 디딜 때마다 굵은 가시에 찔리듯이 아팠다.
그러나 죽어도 부모님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걷고 또 걸어 이모가 살던 고장에 이르렀다.
30년 만에 와보니 본래 있던 마을모습은 간데 없고 온통 과수밭으로 변해있었고 산기슭 외진 곳에 2층으로 된 농촌주택들이 들어서 있었다.
나는 오가는 사람들에게 몇 번을 물어서야 이모의 집을 찾을 수가 있었다.
젊었을 때 이쁜 이모의 모습은 어디 가고 너무 늙으신 데다 허리도 구부러지다 못해 ‘ㄱ’자가 되었다.
이모는 나를 대뜸 알아보지 못하고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어디서 오신 손님이예요.” “이모, 저 모르시겠어요. 저 정화예요.” 그제서야 이모는 나를 끌어안고 “어디 갔다가 이제야 찾아왔니”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한동안 그러시던 이모는 “1987년도부터 너의 부모님들의 소식을 알고 편지와 사진들이 오갔단다. 네가 어디에 사는지 알 수 없어서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몰라.” 이모는 2천여 리를 달려온 내 앞에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편지를 내놓으셨다.
나는 너무 가슴이 쿵당쿵당 방망이질을 하고 흥분되어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떨리는 손을 슬며시 내밀어 편지와 사진을 쥐었다.
흐르는 눈물 때문에 편지와 사진을 볼 수 없었다.
정말 이 사진 속의 두 분이 내가 그렇게도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내 어머니, 아버지란 말인가. 너무도 많이 변하여 내가 어릴 적에 기억으로 그리던 새신랑, 새색시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아버님이 쓰신 편지에는 40여 년 전 북에 두고 온 딸과 아들을 찾아달라는 간절한 부탁과 전쟁 전 우리가 살던 곳의 약도가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물론 그 약도를 가지고는 많이 변해버린 옛 고장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을 테지만 남겨 두고 떠난 어린 자식들 때문에 평생 한이 맺히시어 심혈을 기울여 편지에 그려 놓으셨을 부모님의 뜨거운 손길을 잡은 것만 같아 나는 “아버지, 엄마” 소리치며 참아오던 오열을 터뜨렸다.
부모님들에게서 처음 편지가 오게 된 사연은 미국 뉴욕에서 함께 사는 외가 먼 친척 되시는 분이 이북에 있는 누님을 만나기 위해 북한방문을 가시는 편에 첫 편지를 보내셨다.
친척 분이 찾으신 누님의 댁은 마침 강서 이모 댁과 한 아파트에서 사셨다.
그 후 5년만에 먼 친척이 다시 두 번째로 북한방문을 하면서 부모님 편지를 가지고 왔던 것이다.
이모는 나에게 평양시 평천구역에 가면 미국에서 오셨던 그분의 조카딸 되는 사람(나에게는 아지미가 된다)이 살고 있는데 그 사람이 해외동포 영접부에 잘 아는 사람이 있으니 가서 만나 잘 의논하여 방도를 찾아보라고 하셨다.
나는 이모의 댁에서 하룻밤 자고 30년만에 왔다가 그렇게 급히 가겠느냐고 섭섭해하며 만류하는 이모의 따뜻한 마음을 미안하다는 말로 뒤로한 채 다시 평양으로 들어갔다.
들어갈 때는 평양 여행증이 있어 차를 타고 갈 수 있어 한결 쉽게 갔다.
그 길로 평천구역에 사는 아지미를 찾아갔다.
서로 처음 만난 친척이지만 왜 이제야 왔느냐고 미국에서 자기 외삼촌이 나를 찾지 못해 얼마나 속상해 하셨는지 모른다며 서운한 마음을 안고 며칠 전에 미국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지미에게 부모님을 빨리 만나볼 방도가 없겠는가고 성급히 물었다.
아지미는 아무리 노력을 한다해도 늦은 것 같다며 다음 해에 1차로 오실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해 보겠으니 올해는 마음을 진정하고 노력해 보자고 위로했다.
그 해는 만날 수 없다는 말에 실망되고 안타까웠지만 대양을 건너 멀고 먼 이국 땅에 계시는 부모님들과의 46여 년만의 만남이 어찌 쉬울 수 있으랴 는 생각으로 가까스로 마음을 달래보았다. 떠나실 때에는 그리도 쉽게 가신 길이 돌아오시는 길은 왜 그리도 멀고 힘들어져 부모와 자식간에 얼굴조차 보기 어렵단 말인가.
다음날 나는 평양에서 내 사진과 함께 첫 편지를 써서 미국으로 보냈다.
그 후 1992년 10월 20일경에 부모님으로부터 편지와 사진이 회령 집으로 왔다.
편지의 내용은 처음부터 내가 걱정했던 대로 낯선 나의 사진과 편지를 받으신 부모님들의 놀라움과 의문이 뒤섞인 글이었다.
46여 년 긴긴 세월 서로 그리워하며 한시도 잊지 않고 기억을 더듬으며 만날 날을 기다려온 부모님이고 자식이었건만 알아볼 수 없이 낯설어진 서로의 모습은 우리 민족사가 낳은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부모님의 의문을 풀어드리기 위해 어머님이 떠나시기 전 나에게 가르쳐 주셨던 노래가사를 편지에 적어 넣고 풍파 속에 떠돌면서도 언제나 가슴에 품고 다녔던 아버지의 젊은 시절의 색 바랜 낡은 독사진과 어머니의 사진, 동생 철이의 백날 사진, 그리고 나의 20살 때의 결혼사진을 편지 속에 넣어 보냈다.
내가 보낸 사진들과 편지를 받으시고 나서 온 회답편지가 왔다.
“..... 이유야 어떻든지 간에 엄마, 아빠가 어린 너희들을 두고 떠나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느냐. 긴긴 세월 아버지도 엄마도 어느 한시도 너희들을 잊은 날이 없었다. 자다가도 몸서리치며 일어나 하늘의 별과 달을 바라보며 헤아릴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살아왔다. 그것이 한이 되어 마음의 병이 되고 육신의 병이 됐다. 이제라도 엄마 아빠를 용서해 줄 수 있겠니.....”
수 십 년 동안 흘린 피눈물에 젖은 글줄이었다.
편지에는 동생 철이가 전쟁 때 죽었다는데 믿어지질 않는다고 구체적인 사연을 적어 보내라고 하셨다.
나는 편지에 동생의 기막힌 일을 그대로 말씀드릴 수가 없어 전쟁 중 비행기 폭격에 잘못되었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부모님 앞에 거짓을 고하지 않는 것이 자식의 도리이지만 진실을 진실이라 말할 수 없는 북한 독재정권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들에 대한 소문이 한 입 두 입 동네에 퍼져 사람마다 나를 보면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고 내가 살아온 역사를 들으며 어쩌면 소설책에서나 볼 수 있는 기구한 운명인가 하고 함께 눈물도 흘렸다. 모두들 나를 보고 고생 끝에 복 받았다고 부러워들 했다.
나는 이렇게 부모님들과의 소식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내 인생에 큰 전환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은 부모님과 헤어져 살수도 더러운 독재에 발 밑에서 짓밟혀 언제까지나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수도 없다는 강한 충동을 일으켰다.
그래서 결국에는 죽음을 각오한 탈북을 결심한 끝에 ‘가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슴에 피멍만을 가져다준 이 저주스러운 소굴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뿐이 아닌 내 자식과 그 자식들만은 나와 남편과 같은 삶을 살게 하지 말자, 좋은 세상을 살게 해야한다’는 생각으로 1996년 10월26일 대 가족과 함께 진정한 자유를 향한, 사람답게 살수 있는 세상을 향한 대 탈출을 시작했다.

연재를 이번 호를 끝으로 마칩니다.
글을 보내주신 최정화 회원께 감사드립니다.

탈북자동지회 2003년 12월 회보[탈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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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녹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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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철 2005-11-03 18:38:18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2007-01-16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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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의 딸 2005-11-21 13:09:15
    양철님. 어떤 근거로 진실이 없어보인다고 하는지요.
    저는 <헤어져 50여 년의 긴세월> 저자의 딸입니다.
    이 글은 저의 어머니가 수십년간의 세월동안 겪어 온 산전수전을 진실되게 적은 것입니다. 진실한 눈으로, 마음으로 읽는 사람만이 이 글이 한 여인의 고달픈 삶을 담은 진실된 글임을 알 것입니다. 너무 장문이여서 다 기재를 하지 못하고 절반정도 분량만을 올렸습니다. "탈북자들"에 기재된 이 글을 읽은 한 실향민으로 부터 "수기를 잘 읽고 있었는데 왜 끊겼는가"하는 문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진실된 글 앞에서 진실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진실을 논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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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변남자 2005-11-26 16:38:48
    가슴아픈 사연임다..
    북한은 중국의 문화혁명시기랑 꼭 같아요..
    다르다면 중국은 10년이지만 북한사람들은 몇십년을 그런 체제에서 산다는거에요..
    호상 감시속에서 말한디만 잘못해도 억울하게 당하는 나라..
    글로만 봐도 숨막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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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물이 나요. 2005-12-11 00:53:32
    정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고 살았겠군요...
    읽으면서 어찌나 눈물이 나오는 지...

    지금은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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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수유 2005-12-30 02:32:51
    뒷 이야기가 아쉽습니다.
    행복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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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의 딸 2006-01-24 11:23:24
    글을 읽어주시고 또 격려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탈북자들의 수기에서 북한의 현실을 보시고 그 속에서 고된 삶을 살고 있을 북한동포들에 대해 항상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생각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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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길 2006-07-30 13:14:40
    저자의 딸님. 그래서 탈출에 성공하였나요. 후속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잘되었으면 좋으련만.........................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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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훈 2006-11-22 18:13:11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2007-01-16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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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포시민 2007-01-03 00:14:06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라는 속담대로, 큰 행복을 꼭 받으시길 바랍니다.

    따님의 말씀대로, 절반 분량의 글이 너무 아쉽네요.
    이처럼 흥미진진한 드라마가 또 있을까 싶네요.

    대가족이 나오셨다면,, 자제분들 모두가 나오신 거네요.
    한편으론 다행입니다만, 그러나 또 다른 이산가족이 되셨음을 생각하니 한편으론 안탑깝기도 하군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축하와 격려의 마음, 가득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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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의 딸 2007-01-16 16:22:34
    목포시민님 격려의 글 감사합니다.
    걱정까지 해주셨군요. 다행히도 어머니는 자녀들과(모두) 함께 탈북하셔서 지금은 건강이 조금 안 좋은 것 말고는 행복하십니다.

    목포시민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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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즈에 2008-01-18 21:55:18
    수기처음의 북쪽의 상황을 자세히 적어주어서,감사합니다,어릴적 친구의 기도따라 한 기도가 이루어진것을 감사드립니다,,동생분이 함깨 지낼수있도록 하늘의 도움을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큰 하늘의 복이 있기을 기도합니다 일본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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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umtek ip1 2012-02-11 22:00:59
    너무나감동적이며 눈물나는사연의글임니다 이제연세가 저와비슷하겠네요
    여기댓글에 사이버공간이라중국 일본 미국할것없이온세계에서다보고있기때문에그리고북한에서도봄니다칼럼에보면 완전골수분자빨갱이가 탈북자들욕을하며 빨지산혁명가를로린사람도있어며 특히조심해야할일은 이메일주소를 이공간에올리지말고 전화로연락하세요좋지않는조선족 중국인들 이북사람들이 소수들어오는것같슴니다 행복한여생을보네세요 고생하셨음니다 특히핸드폰은조심하세요 스마트폰을분실했는대몇일후 위치추적을해본결과몽골작은도시네거리상점에있다고하네요 핸드폰이나 스마트폰은 외국에팔려나가찾지못함니다 감사합니다건강하시고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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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애틀에서 ip2 2014-02-14 16:05:31
    정말 한편의 대하드라마를 보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곳 씨애틀에서 의사생활을 하시는 지인의 부모님께서도 평양출신이신데,
    그렇게도 고향을 그리워하셨으나 끝내 다시 가보지 못한 채 소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한반도가 하루빨리 통일되었으면 좋겠네요 - 반드시 평화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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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궁금증 ip3 2014-07-20 20:25:23
    부모님과 상봉은 하셨는지요?
    하셨다면 후의 이야기를 꼭 실어주시기 바랍니다.
    너무도 많은 아픔과 고통으로 살아오신 저자분께 위로의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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