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들의 삶에도 봄은 오는가? - 김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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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춘몽 매서운 칼바람이 불던 어느 겨울 밤, 나는 꿈에도 그리던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너무 흥분한 탓인지 새벽녘까지 잠들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방송시작을 알리는 대한민국 애국가의 장중한 선율이 들려왔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가슴이 뭉클하였다. ‘우리나라’라는 음절에서는 심장이 터질 듯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노래를 듣고 전율을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성취감에 겨워 조용히 눈을 감는 순간 아름다운 그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강의실에 꽉 들어선 수강생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는 모습,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 위해 연구원들과 함께 컴퓨터 앞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열정적으로 토의하는 벤처회사 사장이 된 모습, 북한관련 연구소의 세미나에서 연구 논문에 대해 발표하는 선임 연구원이 된 모습도 보이고… ‘북한에서 18년간 컴퓨터 과학을 연구하고, 대학 교단에 섰던 교수인 나를 외면하지는 않겠지, 내가 꿈꾸는 직업을 마련해 주고 후한 대접을 해 줄 거야! 내가 주체사상이나 사회주의 경제학이 아닌 과학을 전공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야.’ 이런 꿈에 부푼 기대는 하나원 생활 내내 나를 들뜨게 해주었다. 꿈과 현실의 괴리 하나원 수료 후에도 한동안 그런 허황된 꿈과 기대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시간은 점차 흘러 애타게 기다렸건만 나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왜 이럴까? 내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는건 아닌가’라며 나약해지는 마음을 달래기도 하였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앉아서 대접받기만을 기다리는 나를 찾아주는 사람은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공상에서 깨어나 제 정신이 돌아왔다. 문뜩 ‘모든 것을 외웠는가? 그러면 따라하면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외우지 못하였는가? 그러면 창조하게 될 것이다.’라는 아인슈타인의 명언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렇다! 나는 일체의 경쟁을 거부하고, 땀을 흘리지 않고도 남보다 잘 살 수 있는 사회에서 오랫동안 살다보니 무임승차를 바랬던 것이다. 경쟁을 생리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땅에서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려면 지금껏 내가 가지고 있던 세계관과 가치관을 모두 버려야 한다. 창조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기존의 사유방식은 나의 사고와 선택에 방해만을 주었다. 그야말로 ‘識字憂患’인 셈이었다. 냉정한 판단력으로 하나하나 따져보았다. 나는 몸만 한국 땅에 있을 뿐 사고방식은 여전히 북한식이었다. 다시 학생으로 어제는 북한 컴퓨터기술대학의 쟁쟁한 교수였지만 적자생존의 무한경쟁에 뛰어든 오늘, 나는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교수요 박사요 하는 모든 허울을 벗어버렸다. 세계최강의 IT강국인 한국이다 보니 18년간 북한에서 IT공학자로 나름대로 실력은 쌓았다고는 하나 이곳에서 나를 돋보일 수 있는 길은 전혀 없었다. 세계적인 IT시장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수요인 디지털 하드웨어 설계, 모바일, 온라인, 웹, 시스템 보안 솔류션 파트는 북한이 지금까지 크게 뒤쳐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이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다시 학생이 되어 부족한 첨단 기술을 새롭게 배워야 했다. 현실을 인정하기에는 너무도 쓰디쓴 고배를 마셔야 했지만 나는 모든 것을 ‘영’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하였다. 과거의 영화와 명예, 기득권 등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 강남에 있는 한국정보보호교육센터에서 첨단기술인 보안 솔류션 과정부터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에서는 가질 수 없었던 웹기반 프로그램 작성과 시스템 보안과 같은 최고의 기술력을 갖출 수 있다는 판단아래 시작한 공부였지만 결코 만만치 않았다. 강의실에 들어선 첫날, 명문대를 막 졸업한 20대의 젊은이들은 40대 중반인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들과 한께 열띤 토론을 하며 프로젝트를 수행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공부만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서울말을 익히고, 기존의 영국식 영어발음들을 미국식 발음으로 정정하느라 엄청 고생스러웠다. 정말이지 너무 힘이 들어 그만두려고 한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어떤 때는 강의하는 교수님의 모습에서 지난날 교단에 섰던 내 모습이 연상돼 나이 40이 지나서도 학생 신분으로 공부하는 나 자신이 처량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할 수 있었기에 돈이 없어 점심을 먹으러 가는 일행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오는 것도 서럽지 않았다. 수 백 만원이나 드는 수강료를 마련하느라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사정하는 일도 힘들지 않았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끝내 나는 네트웍 보안 솔류션 프로그래머가 갖추어야 할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습득할 수 있게 되었다. 북한 출신의 첫 IT 기술자 탄생 개인이 가진 모든 기술은 철저히 국가가 인정하는 공인 자격증에 의해 인정된다. 북한에도 여러 가지 자격증이 있기는 하지만 자격증보다는 당의 신임과 정치적 배경, 출신 성분이 신분상승의 디딤돌이 된다. 때문에 대학을 졸업할 때 받는 자격증을 귀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자격검정과 관련된 신청절차를 인터넷을 통해 검색하면서 면밀히 계획을 세웠다. 우선 한국산업인력공단에 자격검정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고맙게도 정부에서는 북한출신의 자격검정 신청자들에게 일부 과목을 면제해 주고 있다. 한국산업인력공단 본부에서 진행된 최종 구술시험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구술시험장에 쭉 둘러앉아 머리가 희끗한 노교수들 앞에서 쏟아지는 질문에 손에 땀을 쥐고 답할 때 문뜩 내 머리에는 북한에서 학위논문 심사를 받는 답변자를 향해 까다로운 질문을 퍼붓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북한을 떠나 대한민국에 온 탈북자 엘리트들 가운데서 일부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한다. “대한민국은 자율경쟁을 통해 보다 나은 사회로 발전하고 개인 또한 경쟁을 통해 성공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쟁은 공정하게 진행해야 되지 않는가? 탈북자들은 이 사회에서 경쟁력이 없다고 어떤 이들은 말한다. 부모를 잘 만나 남보다 좋은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들과 자신들이 동일 출발선에 나란히 서서 경쟁한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하지만 이 사회는 그러한 점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우리를 경쟁력이 없다고 치부하지 않는가?” 한 마디로 말해 초기조건에 대한 불만이다. 나도 이 같은 견해에 기본적으로는 찬성한다. 그렇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현실을 탓하기 전에 남보다 열 배, 백 배 노력하여 자기능력을 끊임없이 계발해야 한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있던 어느 날 정부출연의 한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연구소의 선임연구원에게서 현재 진행 중인 연구 사업에 대한 자문을 부탁하는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처음으로 찾아온 기회를 나는 소중하게 생각했다. 나에게 맡겨진 두 건의 논문에 대해서도 몇 번씩 수정을 반복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 북한에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 자료에 기초하여 쓴 글이라 그런지 아니면 그 글에 녹아든 나의 정성이 엿보여서인지 북한학계의 많은 연구자들이 나의 논문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었다. 그 결과 나의 논문은 학계의 입소문을 타 여러 연구소에서 협동연구를 제의해 왔다. 서울에 온 지 10개월이 되는 2005년 5월에는 서울에 있는 한 북한관련 연구소에서 나를 연구위원으로 위촉하였다. 정말 분에 넘치는 일이었고 전혀 상상도 못했던 고마운 손길이었다. 장장 수 십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연구소의 위촉장을 받는 순간, 그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뿌듯하였다. 또 그때부터 연구소 간행물에 실린 내 논문은 학계의 관심을 조금씩 받기 시작하였다. 그 후로 한국 인터넷학회, 한국 사이버테러전연구학회, 한국 표준과학학회 등 유수의 학회로부터 세미나에 초청을 받았다. 나는 초청을 받을 때마다 초심을 잃지 않고 학자의 자세에서 발표논문을 검토하고 또 검토하는 등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북한출신의 엘리트들 중에는 학계에서 부탁한 글을 대충대충 써서 보내는 분들도 없지 않아 있다. 이런 글들을 보면 북한식의 띄어쓰기와 술어, 표현들을 극복하지 못하였거니와 거기에 오자까지 생기면 학계의 평가는 완전 F다. 내가 지금껏 학계에 발표한 여섯 건의 논문 역시 아직은 논문 전개상 문제점들이 수두룩하지만 그래도 나는 다 쓴 글을 최소한 3번 이상은 검토해보았다. 다시 대학 교단에 선 기쁨 희망을 안고 힘들게 찾아온 한국에서 꽃을 피우고자 한다면 초심을 잃지 않고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 그렇게 열심히 살다보니 2005년 9월에 내가 그렇게 원하던 작은 소원을 성취하였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나를 외래교수로 초빙하였다. 대학의 교수평의회에서 최종적인 검토를 받은 후에 결정된 이 꿈만 같은 교수초빙은 내가 마음속에서 늘 바라던 바였고 그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다. 드디어 나는 대학 교단에 다시 서게 되었다. 2년만에 다시 선 대학교단이지만 수 십 년만에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첫 강의를 하던 날, 이따금씩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함경도 사투리 때문에 학생들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속으로 ‘힘내! 파이팅’을 몇 번씩 외치고, 강의 내용을 녹음했다. 녹음한 강의 내용을 다시 들으며 문제점을 하나하나 찾아내기를 수십 번 반복하였다. 이러한 나의 노력 덕분인지 얼마 전에는 또 다른 대학에서 컴퓨터 학부 전공과목을 강의해 달라고 요청이 들어왔다. 참으로 행복하다. 나의 피나는 노력과 열정이 꼭 열매를 맺어 통일이 된 그날 고향에 돌아가 스승들과 동료교수들을 만나 이 땅에서만 가능했던 나의 원숙한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다. 이야기가 길어진 것 같아 여기서 글을 끝맺으려고 하는데 혹시 북한을 떠나온 우리 탈북 형제들에게 한 가지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서두에 물었던 “우리 탈북자들의 삶에도 봄이 오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봄! 봄을 제일 먼저 기다리는 사람은 겨우내 쉬지 않고 거름을 내고 알알이 종자를 키워온 농민이 아닐까? 봄을 맞으려고 그렇게 아낌없는 땀방울을 흘려온 농민들에겐 봄이 제일 먼저 찾아와 꽃을 피우고 곡식을 키워 풍성한 열매를 맺는 가을을 선사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2006년 1월 김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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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와보니 초등학교학생보다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콤퓨터를 다루어 보았어야지요.
그래서 청소부한다는 심정으로 돌아가야한다고 생각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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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글에 공감과 찬사를 전적으로 보냅니다.
통일조국을 위한 교수 박사로 거듭나기를 기원드립니다.
남북통일도 민주주의 통일 해주시구요. 탈북자들께서 사기를 많이 당한다는데 꼭 유념하시구요. 건강하세요.
장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