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춘아지매의 탈북일기 - 리수희 |
---|
내 마음에 흐르는 눈물의 강 젊은 여성은 팔려가고, 어린이는 굶고 - 자강도 출생(1931) - 남편 사망(1970) - 외아들과 함께 탈북, 아들은 행방불명(1996) - 현재 선교단체의 도움으로 중국 장춘 거주 저의 글은 대중들 앞에 내놓을 만한 것이 못 됩니다. 한 여인이 지나온 인생길의 한 부분에 불과할 뿐 교양가치도 없고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될 만한 내용도 없습니다. 그저 지난날 내 자신이 겪어 온 인생길을 다시 되새겨 보는 회상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저의 이야기를 통해 북조선의 현실이 있는 그대로 알려지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부끄러운 글을 남조선 대중들 앞에 내놓습니다.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넌 후 삼 년 째 되던 해에 중국의 000이란 마을에서 살던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너 어디가니?” “나 북조선 사람 보러가!” 그날은 일요일이어서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나는 ‘북조선’이란 말에 흠칫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한참이나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앞선 여인들은 7~8명쯤 되었는데 손에 무엇인가 음식을 조금씩 싸들고 있었고 그 뒤에는 4~5명이 줄을 지어 갔습니다. 이곳은 중국땅입니다. 이곳의 조선족들은 북조선보다 특수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민족에 대한 애착심과 동포애적 정신이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날도 조선족 집에 잔치가 있어서 모였다가 북한 여자가 중국 사람에게 팔려와서 산다는 말을 듣고 모두들 그집으로 찾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산설고 물설은 이국땅에 와서 말도 통하지 않는 생활에 고생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 여성은 임신한 몸에 결핵까지 걸렸다고 했습니다. 그 여성이 하는 말이 자신은 중국 돈 4천원(한화 약 80만원)에 팔려왔고 같이 탈북한 동무 셋은 처음에는 식당으로 데리고 간다고 했으나, 한 여자는 중국 돈 8천원에 절름발이 남자에게 팔려가고 두 여자는 5천원씩 또 다른 남자의 집으로 팔려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북조선 사람’이라는 말만 들어도 불쌍하고 불쌍합니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으며 얼마나 굶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묵묵히 집까지 왔습니다. 가지가지 피눈물 나는 나의 과거가 떠올랐습니다. 창문가로 먼 산을 바라보면서 좀처럼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김정일씨는 지금 나라의 장군으로서 조금이라도 자기 백성들의 희생을 가슴 아파해본 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곳의 평범한 여인들도 자기 민족이라며 북조선 사람들을 동정하는데, 과연 김정일씨가 조선의 역사에서 빚어 놓은 비극과 상처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지금 북조선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는 천진난만한 어린애들입니다. 걸음마도 떼지 못하는 어린 것들이 “아버지 대원수님 어디 계셔요?” 하면서 기저귀를 차고 총총 걸음으로 고사리 같은 두손을 높이 들고 바람벽에 달아 놓은 김일성씨, 김정일씨 사진을 쳐다보는데, 그 어린 것들이 오늘날에 와서는 뼈에 가죽만 씌워놓은 모양으로 굶어 죽어갔습니다. 어린 것들이 '꽃제비'란 칭호를 받고 방랑생활을 하고 엄동설한에 옷도 변변히 못입고 맨발에 역전 대합실마다 여행객에게 얻어 먹기 위해서 줄을 섭니다. 행여나 떨어진 음식이라도 주워먹고 밥알이 한 알이라도 떨어지면 닭이 모이 쫒듯이 주워 먹습니다. 중국에 나오기 전에 마지막 기차를 탈 때 일이었습니다. 저는 역전 대합실에 웅크리고 있던 오누이를 불러 먹다 남은 떡 조각을 쥐어 줬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애들아, 아무쪼록 죽지 말고 살아서 먼 훗날에 이때의 고생을 이야기하면서 행복하게 살아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오누이는 내말을 알아듣기나 했는지 연신 “고맙습니다”며 수 십 번도 더 허리를 구부렸습니다. 두만강을 건너와 고개를 들어 북조선 땅을 쳐다봤을 때, 내 가슴속에 두만강보다 더 큰 눈물의 강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탁아소에도 갈 수 없었던 첫 손자 두만강을 함께 건너와 중국에서 떠돌다가 하나뿐인 아들과 헤어진 10년이 가까워 옵니다. 어디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를 모르는 아들의 얼굴만 생각하면 가슴이 콱 막혀 울다가 기도하다가 또 웁니다. 북조선에서 홀로 두 손자를 키우고 있는 우리 며느리를 생각하면 가슴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 같습니다. 내가 홀 여인의 몸으로 자식을 키워봤기 때문에 우리 며느리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있을까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승인 없이 손자를 보러 간 '죄' 86년에 며느리가 첫 손자를 낳았을 때는 어찌나 기쁘고 반갑던지 하루 종일 미친 사람처럼 웃고 다녔습니다. 당시에 아들네는 여섯 정거장 떨어진 곳에 살았는데 “아들을 낳았다”고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빨리 아들네로 가야 하겠는데 나 같은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한평생 ‘월남가족의 딸’이라는 출신성분이 뒤따라 다녔기 때문에 증명서를 해 줄리 만무했습니다. 며느리가 아이를 낳으면 먹이려고 안 먹고 매달 조금씩 모아둔 입쌀이 6kg정도 됐습니다. 2kg은 애기 옷과 포단과 미역으로 바꾸고 4kg의 쌀까지 한 봇짐을 꾸리고 작업반 세포비서를 찾아갔습니다. 역시나 세포비서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손자 얼굴이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을 짜냈습니다. 밤일을 하고 교대를 바꿀 때면 옹근 하루 정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먼 길을 새벽부터 걷기 시작해서 어찌나 빨리 걸었는지 오전에 도착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할머니가 되었다는 생각에 참 기뻤습니다. 죽은 나무에 꽃이 피는 것 같았습니다. 하루만이라도 손자와 함께 있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아들네 집에 두 시간쯤 있다가 인차 또 떠나왔습니다. 공장에 돌아오니 이것이 또 ‘죄’가 되었습니다. 공장의 직맹(직업총동맹) 책임자 여자가 나를 데리러 왔습니다. 회의실에 가라고 하기에 올라갔습니다. 이상한 회의라는 것을 감지했으나 나는 알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저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는 판에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안전원과 보위지도원도 그 자리에 참가했습니다. 사람들 잡아가는 회의였습니다. 듣자하니 공장에서 물건을 훔친 놈, 경사스러운 김일성 장군님 생신날 술 먹고 싸운 놈, 나는 증명서 없이 타군(他君)에 다녀 왔다는 것이 죄였습니다. 모두 이름을 불러서 앞에 세웠습니다. 군중들 가운데서 “저 어머니는 걸어서 갔다 왔는데 그게 무슨 죄람?”하는 말이 나왔습니다. 군중들 앞에서 잘못했다고 자아비판을 하고 다시는 승인 없이 돌아다니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손자는 탁아소에 받아줄 수 없다" 몇 해가 흘러 며느리가 둘째 손녀를 낳았다는 편지가 왔습니다. 나는 원래 아들 하나만 키우며 살아와서 본래 딸이 그리웠습니다. 며느리는 손녀를 낳고 몸조리를 잘 못해서 자리에 일어나지 못한다고 소식이 왔습니다. 하는 수 없이 큰 손자를 내가 키우지 않으면 안되는 형국이었습니다. 내가 공장 탁아소에 맡길 생각으로 손자를 데려왔습니다. 손자를 업고 탁아소 소장에게 탁아소 수속을 하려고 하니 승인이 안 떨어졌습니다. 탁아소 규정은 직접 노동 여성들이 낳은 자식들만 맡기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따졌습니다. “그렇다면 00작업반장은 왜 손녀를 받아 주는가?” 미운 풀 죽이려다 고운 풀도 죽이는 판이었습니다. 00작업반장도 손주를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말할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손자를 데리고 일을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돈이 없고 식량 배급도 끊기는 판이니 참 난감했습니다. 아침에 손자를 업고 가서 작업장에 놓고 일을 했습니다. 그때 나는 건설 작업을 했기 때문에 아이가 할머니 일하는데 지장이 되는 것은 없었습니다. 손주는 혼자서 수걱수걱 참 잘 놀았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때 우리 손자가 정말 고맙습니다. 말을 잘 못해도 어린 것이 눈치를 아는지 할머니가 놀이감도 주워다 주고 노는 장소에 깔개도 깔아주고 어디 가지 말고 꼭 여기서 놀라고 하면 머리를 끄덕끄덕 하면서 혼자서 참 잘 놀았습니다. 이렇게 며칠은 마음 놓고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내 생활은 참 즐거웠습니다. 건설작업은 힘겨웠으나 하루 일이 끝나면 저녘에는 손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린 아이를 홀로 집에 두고 며칠 후에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절룩발이 작업반장이 현장에서 큰소리로 야단 법석을 떨었습니다. “누가 아이를 데리고 작업현장에서 일하는가? 그러다 사고 나면 아이도 아이려니와 내 목도 날아간다. 내 입장도 좀 생각해 줘야 하지 않는가?”하고 추궁했습니다. 말도 변변히 못하는 이 어린 철부지도 눈치를 차리고 할머니 곁에 와서 내 손을 꼭 붙들고는 할머니 얼굴을 올려보고 고개를 떨굽니다. 하는 수 없이 손자를 업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살아갈 일은 걱정스러워도 손자를 데리고 생활하는 하루하루는 참 즐거웠습니다. 목욕을 시키고 방안에 앉혀 놓으면 이 할머니를 쳐다보며 뱀욱뱀욱 웃습니다. 도끼 대가리에 쭉 째진 눈, 큼직한 입, 내 손자만큼 잘난 아이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이튿날 하는 수 없이 잠든 손자의 머리맡에 밥 한릇, 소변기, 물그릇을 놓고 집을 나서려고 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몇 발자국 가다 되돌아 와서 창문을 들여다보면 손자는 그냥 자고 있었습니다. 몇 걸음을 가다 또 깨지 않았나 해서 와보니 그래도 자고 있었습니다. 세 번 만에 크게 마음먹고 공장으로 갔습니다. 지각이었습니다. 저녘 총화에는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지각을 하거나 저녘 총화에 참가하지 않는 것이 세 번이면 하루치 배급이 깍입니다. 그래도 정신 없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집까지 달려오니 동네사람들이 무슨 사고가 났는가 하고 나를 쳐다 보았습니다. 집마당에 들어오자 손자 이름을 부르며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가니 신발 한 짝은 미쳐 벗겨지지도 않아 방안까지 따라 들어왔습니다. 손자가 혼자 조용히 앉아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을 확인하니 눈물이 왈칵 솟았습니다. 공장 혁명 소조에 들통나 다음날 공장에 나서는 길에는 손자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매달렸습니다. 하는 수 없이 업고 출근했습니다. 그래도 할미 마음은 빈집에 혼자 놔두고 온 것보다 한결 가벼웠습니다. 공장 울타리 나무 아래다 몰래 숨겨 놓고 주섬주섬 돌과 놀이감을 주워다 주니 신이 나서 잘 놀았습니다. 그래도 멀리서 손자를 바라보며 일을 하니 안심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3일 동안 누구도 모르게 그 장소에 갖다 놓으니 제법 제 놀이터라고 웃으면서 할머니는 어서 가라고 말도 못하는 것이 손짓을 했습니다. 절대 밖으로는 나오지 않아 그 안에 아이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일이 안되려고 했는지 공장 혁명 소조가 공장 구내를 문화적으로 꾸린답시고 울타리 주변을 둘러보다 아이를 발견하곤 큰일이 난 것처럼 “누구네 아이인가?”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나는 손자를 등에 업고 당비서에게 불려갔습니다. 당비서는 “어떻게 할 작정인가? 내 목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야 정신을 차리겠는가?”하고 따져 물었습니다. ‘혹시나 어린 것이 사고나 나면 내 가슴이나 터지고 우리 아들 며느리가 원통할 노릇이지, 저야 성분 좋은 당일꾼인데 무슨 큰일이 있겠는가? 제 형이 중앙당 간부라며 무슨 일이 있다고 큰소리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집에 손주를 떼어 놓고 공장에 나가는 가슴 졸이는 생활이 했습니다. 다행이도 반년이 넘도록 손자는 아무 사고 없이 쑥쑥 잘 컸고, 며느리가 간신히 몸을 추스리자 다시 되돌려 보냈습니다. 제 애비의 손을 잡고 제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할미에게 손을 흔들며 강아지 마냥 깡총깡총 뛰어갔습니다. 세끼 쌀밥은 '눈물밥' 나는 이곳에 와서 매끼니 거르지 않고 쌀밥을 마주합니다. 밥상을 볼 때 마다,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와 손녀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목이 메여 밥이 너머 가지 않습니다. 북조선에서 처녀시절에 전쟁도 겪어보고, 남편 죽고 혼자 아들을 키우며 ‘월남자 딸’이라는 출신성분에 시달리며 모진 고생을 다 했습니다.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낙심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북조선에서는 배불리 쌀밥 먹는 것이 한평생 소원인 사람도 많인데 나는 쌀밥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 같습니다. 소리 내서 엉엉 울다가 그 이튿날 그 밥을 버릴 수가 없어서 물에 말아서 다시 먹고 있습니다. 6.25 전쟁과 김봉철 교무주임 다 늙은 꼬부랑 노인네가 되어서도 해마다 6월이 되면 꿈자리에 나타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김봉철 교무주임. 50년이 지나도록 그 사람과의 나의 악연(惡緣)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전쟁통에 먼저 죽어간 그이에 대해 속죄할 길도 원망할 길도 없기 때문입니다. 전사 통지서 압록강까지 후퇴했던 인민군대가 중국의 도움으로 다시 38선까지 내려가자 각급 교육기관에서는 대열을 정비하고 교원들에 대한 정치학습을 조직했습니다. 전쟁 직전부터 교원생활을 시작했던 나도 정치학습에 참가했습니다. 당시 전쟁중에는 여자 교원들이 몇 명이 안되어서 평양에서 여자 교원들이 양강도까지 파견됐습니다. 평양에서 문학선생님이 한 분 오셔서 나와 함께 숙소를 사용했었는데, 어느 날 무슨 사연인지 종이 쪽지를 한 손에 들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문학선생님의 말이 “내 동생이 이곳 학교 교무주임으로 있을 때 어느 여선생님과의 관계로 정신이상 된 것을 적십자 병원에서 고쳤다”며 “그런데 동생이 강원도 전선에서 죽었다는 전사통지서를 받았다”며 서럽게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아, 전사했구나!’ 지난날 그에게 빚졌던 사실들이 가지가지 떠올랐습니다. 한참이 지나도록 입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왜 그때 전선으로 나가는 김선생님에게 위로의 말도 하지 못했는지 후회가 되었습니다. 생각 할수록 그의 가슴에 상처 주고 못을 박은 내 자신이 괴로웠습니다. 문학선생님은 나에게 그 여선생이 누구냐고 물어왔습니다. 혹시 이번 정치학습에 그 여선생이 참석했는가 물어왔습니다. 나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설설 끓는 물을 내 머리에 콱 들어붓는 심정이었습니다. 나는 입을 열었습니다. “제가 그 여선생입니다!” 눈치 빠른 문학선생님은 재빨리 사태를 파악했습니다. 내 동생이 잘못되었어도 부디 선생님은 행복해지기 바란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또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나도 문학선생님을 끌어 안고 함께 울었습니다. 짝사랑 6.25 전쟁이 터지던 그 해 봄에 나는 양강도 산골의 어느 학교에 신입교원으로 배치되었습니다. 당시 우리학교에는 교장이 없어서 교무주임이 밤낮으로 학생들의 식사를 운반하며 학교일에 열중하다 ‘말라리아’에 걸려 앓아 눕게 되었습니다. 학교 숙직실에 사람이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보니 교무주임이 방바닥에서 뒹굴고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윗사람이란 생각이 들어 방으로 들어가 이불과 베개를 내려 바르게 눕혀주니 교무주임이 희미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혹시 누가 이 광경을 볼 까봐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 나왔습니다. 그리고 한 여학생에게 교무주임에게 찬물수건으로 머리를 식혀드리라고 했습니다. 이 일이 학교내에 소문이 퍼져 주위 교원들이 교무주임과 나를 중매하려고 달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군사학 선생은 빈 교실로 나를 부르더니 백지 한 장과 연필 하나를 책상 위에 놓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처녀 때는 수줍어서 말을 못 할 수도 있으니 교무주임이 마음에 들면 동그라미를 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승표(엑스표)를 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나는 큼직한 승표(엑스표)를 똑바로 치고는 책상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하루는 조용한 기회가 있어서 교무주임을 찾아가 우선 내 자신은 월남자의 딸이며 아직은 어린 나이기 때문에 부모도 없이 출가할 수 없음을 이해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부터 교무주임은 정신이 이상해져서 대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미친 사람처럼 학교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괴성을 지르는 바람에 남학생들이 달려들어 밧줄로 묶어서 사택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다음날부터 나는 학교와 온 마을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여자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이렇게 아까운 사람을 희생시키는가 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며칠 후 군(君)정치보위부까지 나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독방에 가두어 놓고 48시간 동안 재우지도 않으면서 심문했습니다. 때리지는 않았으나 매질 못지않게 고통스러웠습니다. 별의별 질문을 다 했습니다. 산보는 몇 번이나 했는가? 교무주임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편지는 몇 번이나 했는가?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악이 오르고 독이 올랐습니다. 모든 것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는 교무주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내 모든 것을 인정하겠으니 그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종이에 썼습니다. 그제서야 보위부에서 풀려 났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발걸음 마다 억울하고 분통터져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또 울었습니다. 교무주임은 보위부에 불려간 자리에서 “리선생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고, 그저 나 혼자 짝사랑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의 누명은 벗겨졌습니다. 하지만 이후로 교무주임은 완전히 미쳐서 밤이고 낮이고 맨발로 온 마을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 마저 나에게 “리선생님, 김 미치광이가 찾아왔습니다!”하며 놀려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대형사고가 터졌습니다. 어느 야심한 밤에 뒷문 변소에 갔던 우리 언니가 사람 살리라며 소리를 질러 온 마을 사람들을 다 깨우게 된 것입니다. 교무주임은 우리 집 모퉁이에 칼을 들고 숨어 있다가 내가 나오면 나도 죽이고 저도 죽으려고 하다가 언니를 나로 잘못 알고 칼부림을 했던 것입니다. 언니는 다행히 손에 상처만 입고 무사했습니다. 교무주임은 평양에서 친척들이 올라와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훗날 교무주임은 나에게 미안하다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나는 편지를 읽자마자 아궁이 불 속에 던져 버렸습니다. 재회 교무주임 소동이 잠잠해지자 6.25전쟁이 터졌습니다. 모든 여자 교원들은 인민군대에 나가는 청년들에 대한 환송행사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만 교무주임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너무나 당황해서 교무주임이 내 손을 잡는 것도 모른 채 멍청히 서 있었습니다. 그는 집결소로 뛰어가면서 고래고래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잘 있으라 말했습니다. 옆에 있던 마을 사람들은 저 선생이 이 여자 때문에 미치광이가 됐다가 병을 다 고친 모양이라며 소근거렸습니다. 나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 숨고 싶었습니다. 환송식에 나간 것을 가슴을 치며 후회했습니다. 낙동강까지 진격했던 인민군대가 패배를 거듭하면서 물러서자 학교도 문을 닫게 되었고 나는 고중학생들로 구성된 선전대를 인솔하게 되었습니다. 함경북도 어느 마을에서 어느 부대를 마주치게 되었는데 우리를 보더니 위문공연을 보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우리 선전대의 임무이기에 먼저 합창으로 공연을 시작했는데 이 자리에서 또 교무주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몸도 많이 좋아 지고 소대장이 되어서 옷차림도 군관복이었습니다. 사람이 몰래 도망치다 들킨 것처럼 민망스럽고 쑥스럽고 부끄러운 일은 없습니다. 나는 그저 가슴만 두근거리고 얼굴만 화끈화끈 달아올라 빨개진 얼굴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 전선으로 나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편지하면 꼭 회답해달라는 것, 자기를 꼭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말이 많았습니다. 내 손을 붙잡더니 꼭 기다려 달라고 재차 다짐을 했습니다. 나는 “당신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아는가?”라고 반박하며 매정하게 그를 외면했습니다. 둘의 말다툼에 주위의 군인들이 곁눈질로 우리를 훔쳐보았습니다. “소대장 동지, 행군준비 끝났습니다!” 이 말에 체념한 듯이 그는 군화를 무겁게 끌며 머리를 푹 숙이고 벌판 길을 등지고 맥없이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가 개미 알만 해질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며 원망과 부끄러움에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전쟁이 남긴 恨 그의 누이였던 문학선생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교무주임의 성장과정을 듣게 되었습니다. 위로 누님만 셋이었던 그는 어릴 적에 일제의 징용에 끌려가 소식이 끊긴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와 누님들의 기대 속에 상업고등학교까지 마쳤고, 일제가 물러나자 후배들을 가르치겠다며 양강도 산간 마을의 학교에서 교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너무도 쑥맥이었던 그는 볼품없는 월남자의 딸에게 마음을 뺏겨, 피어보지 못한 청춘의 한을 품고 전선에서 죽어갔던 것 입니다. 6.25 전쟁은 수백만의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제 손으로 제 눈깔 찌른다는 말이 있듯이 김일성씨가 제 나라와 조선민족 앞에 빚어 놓은 비극이었습니다. 죽어 저 세상에 가면 김봉철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살아있는 한 그 전쟁의 상처는 아물지 못할 것 같습니다. 중국사람들도 김정일은 지겹답니다 "당 비서들, 인민들 고통 알아야" 내 한평생 살아온 북한 땅을 등지고 중국에 나와 살면서 중국사람들에게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했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만나는 중국사람들마다 “어째서 너희 나라는 항상 굶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가?”라고 물어오면 대꾸도 하기도 싫었습니다. “왜 너희 나라 공안(公安)들은 중국에 있는 북한 사람들을 강제로 잡아가는가? 그렇게 죄지은 사람들이 많은가?” 하고 물어오면 그 자리를 도망치고 싶습니다. 부끄러움 모르는 북한 권력자들 몇 년 전, 제가 장춘(長春)에 와서 이곳 교회의 도움으로 살 곳을 마련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옆집에 글도 잘 읽고 말도 잘하고 똑똑한 중국 아저씨가 살았는데, 어느 날 제게 하는 말이 북한 대표단이 북경을 방문했다고 중국 신문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북한대표단은 “우리는 사회주의 굳건히 세우고 위대한 장군님의 영도 아래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답니다. 그러면서 중국대표들에게 “우리나라에 한번 방문해 주십시요”라고 요청했답니다. 그러니까 중국대표들은 그저 “감사합니다”라고 짧게 대답만 하고 더 이상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옆집의 중국 아저씨는 “북한에 가면 제일 볼 만한 것이 무엇인가?” 라며 물어왔습니다. 막상 대꾸를 하려고 하니 말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과연 우리나라에 자랑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나한테 북한 이야기 하지 마쇼!”하고 돌아 앉아 버렸습니다. 외국 대표들에게 우리나라에 방문해달라니, 과연 보여줄 것이 무엇이 있다고 그런 말을 했을까? 황폐되고 망가진 공장과 농장마을, 뼈에 가죽만 씌운 참혹한 모습, 산과 들은 다 벌거숭이가 되고 압록강만 건너봐도 공동묘지 같은 북한에서 무엇을 보여주겠다고 외국대표를 초청하는가? 인민들의 고통을 모르는 당 간부들 하기야 북한에서 간부라는 사람들이야 먹고 살기 힘든 인민들의 고초를 알지도 못하며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입으로만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는 일에는 세계에서 최고가는 사람들입니다. 94년부터 자강도 산골의 군수공장 유치원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공장 당비서는 노동자들의 생활과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95년부터 국가에서는 먹는 문제를 기업소 자체로 마련하라며 배급을 중단했습니다. 공장은 생산과의 전투가 아니라 먹고 사는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당시 우리공장의 지배인은 노동자들의 먹을 것을 구하려고 파철(고철)을 싣고 신의주에 나가서 중국과 쌀을 교환해 오고,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산에 가서 칡뿌리를 캐다 가공해서 그들을 먹이려고 가진 애를 다 썼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배인은 노동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쌀에서 조금씩 아껴서 김일성 현지 교시 사적관도 잘 꾸려서 자강도 단위에서 시범견학이 조직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공장의 당비서라는 작자는 견학 손님을 맞이한다며 돼지까지 잡으면서 큰 만찬을 차렸습니다. 도처에서 인민들은 무더기로 굶어 죽어 나가는데 당비서란 자는 제 한몸 출세를 위해 공장의 재산을 가지고 만찬을 꾸리고, 조선노동당의 당증을 목에 걸고 있는 견학단들은 저마다 입술이 번질번질해서 식당문을 나섰습니다. 그날 밤 견학단의 총화회의에서는 “사적지를 참 잘 꾸렸다. 그런데 음식을 너무 잘 차린것 아니야?” 하며 칭찬인지 비판인지 구분도 안 되는 말들이 오고 갔습니다. 어쨌든 잘 먹었으니 싫다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자기들이 먹은 음식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묻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번은 이 당비서가 자기 식모에게 “요즘 우리공장 노동자들이 죽을 써 먹는다는데 우리도 죽을 한번 먹어보지” 하고 지시를 했습니다. 식모가 팥을 삶아 껍질을 벗겨 쌀과 함께 잘 쒀서 올리니, 당비서가 하는 말이 “이거 죽도 좋구만! 거, 노동자들이 꽤 먹겠는데?” 하고 한 그릇을 다 비웠답니다. 이 소리를 들은 노동자 아주머니들은 너무도 화가 나서 “그 놈의 당비서에게 바칠 음식이면 겨죽을 먹였어야지, 쌀 팥죽은 고급 특식인데 그걸 먹고 우리 생활을 알기나 하나?”며 이를 갈며 격분해 했습니다. 장군님에 대한 충성만 강요 당시 공장 노동자들은 배급소에서 하루 종일 줄을 서야 된장 두 숟가락도 얻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것도 공급이 떨어지면 그냥 빈 그릇 가지고 집으로 와야 했습니다. 어느 기관에서 당에 아첨하느라고 연구했다는 간장을 나누어 주기도 했는데, 그것이 벼뿌리를 캐서 씻은 다음 삶아서 우러나는 누런 소 오줌 같은 것이어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누런 물에 소금을 타면 간장이 된다며 노동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소여물 냄새가 난다며 죄다 버렸습니다. 이렇게 인민들이 식량난으로 아우성을 쳐도 당과 국가에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습니다. 당 지도원에게 의견을 말하면 고난한 문제는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어떻게 해야 당과 수령님께 충성을 다하겠는가 하는 충성심만 말하라며 핀잔만 돌아옵니다. 아직도 북한의 권세가들은 지금 제 나라의 꼴이 얼마나 부끄럽고 망신스러운지 모르고 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 존함을 높이는 일이라면 그 무엇도 아쉽고 아까운 것이 없이 다 바치면서도 인민들이 굶어 죽어 나가는 지 벌써 십 년 입니다. 외국에서 쌀과 옥수수를 얻어다 먹는 주제에 쌀을 실어와도 배 깃발을 '공화국 깃발'을 띄우라며 이러쿵 저러쿵 큰소리만 치고 있습니다. 그저 김정일 위신이 납작해질까봐 김일성 주체사상탑을 하늘 높이높이 세워 놨으니 그것이 무너질까봐 간이 콩알만 해서 텔레비전 방송도 다 줄을 끊고 일체 외국의 냄새와 콧김도 못 맡게 하고 있습니다. 불쌍하고 불쌍한 북한 인민들이 그 어둠의 죄악 세상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참사랑 품안에서 행복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 드립니다. 암호명 '목화', 보위부 강요로 첩자노릇 직장동료도 이웃도 믿지 못할 北 감시체제 내 나이 70이 넘어 하느님 앞에 불려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의 죄를 물으신다면 보위부의 첩자가 돼서 무고한 사람들을 핍박받게 한 죄를 실토해야 할 것입니다. 월남자 가족의 딸이라는 이유로 평생 동안 북한에서 마음 놓고 앉을 자리,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어디를 가던지 짐짝의 꼬리표처럼 ‘월남자의 딸’이라는 딱지가 따라다녔습니다. 언제나 나는 감시 대상이었습니다. 직장 동료들에 대한 동태파악 강요 30여년 전, 자강도 00군 경공업 공장에서 일하던 때 였습니다. 정치보위부 담당지도원이 난데없이 저를 찾았습니다. 항상 감시 대상으로, 주목 대상으로 몇 십 년을 살아온 저로써는 죄 지은 것이 없어도 가슴이 쿵쿵 떨렸습니다. 보위부에서 나를 찾는다는 것은 필시 좋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혹시 나의 발언에서 잘 못 된 것이 없는가 긴장되었습니다. 담당지도원실로 찾아가니 지도원이 하는 말이 앞으로 나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월남자의 딸이기 때문에 특별히 국가에 충성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며 협박 반, 설득 반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말만 잘 들으면 응당한 보상이 차려질 것이라는 유혹도 있었습니다. 애당초 이런 일은 내 양심이 허용되지는 않으나, 항상 출신성분 때문에 설움을 겪어 왔던 저는 거절 할 수 가 없었습니다. 담당지도원이 준 임무는 공장 내 동요대상들에 대한 동태를 파악해서 보고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어떤 일이 있어서도 이 일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손가락 도장도 찍었습니다. 내 암호는 ‘목화(木花)’였습니다. 처음 임무수행은 간단하고 쉬운 일이 많았습니다. 공장의 작업반 사람들의 근무태도, 언행, 작업반장의 행적을 기록했다가 한 달에 두 번씩 지도원에게 보고하는 일이었습니다. 보고서를 잘 쓴다며 좋은 평가도 받았습니다. 매월 쌀 구입 전표도 받고 선물도 받았습니다. 생활에 보탬도 되고 내 자신이 감시대상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할 수록 후회가 막심합니다. 그때 내가 왜 그런 파렴치한 짓을 했을까? 지도원의 강요를 뿌리치지 못했다면, 겉으로 건성건성 입장이나 지켰으면 될 것이지 과업을 준다고 전심전력을 다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보위부에서는 높은 기능을 소유한 능란한 일꾼이란 찬사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1년도 되지 않아 저는 파렴치한 나의 모습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해 겨울에 저에게 커다란 양심의 가책을 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밀고 때문에 파탄 난 윤씨네 가정 같은 동네에 살던 윤씨는 황해도 지주의 딸로 자라 남편과 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사망하고 나자, 부양 연령이 안 되어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윤씨는 하는 수 없이 세대주가 되어 연령이 될 때까지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공장 당에서는 이 노친의 뒤를 파기 시작했다. 지주의 딸이었고 생활에 불만도 많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윤씨의 뒤를 담당한 당 지도원이 윤씨의 간단한 이력자료를 적은 학습장을 집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당지도원 아들이 이 학습장을 가지고 윤씨네 집 아들과 공부하려다 윤씨에게 발견되어 큰 싸움이 일었습니다. 윤씨는 당 지도원에게 격하게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보위부에서는 그 당지도원이 실패한 대상을 나에게 맡겼습니다. 나는 작업반도 옮기고 그녀와 같이 일에 배치되었습니다. 나를 그녀의 옆에 접근 시킨 것이었습니다. 나는 양심에 자책감을 가지면서도 내 살기가 너무도 고통스러워 울며 겨자 먹는 격으로 그녀의 행적을 수집하여 비밀 지점에 가명 수표로 연락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두 달 후에 윤씨는 도 정치보위부에 체포 되었습니다. 공장 당과 당 지도원에 대한 불만들을 내가 모조리 지도원에게 고해 바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윤씨가 끌려가고 나자 나는 더는 이런 노릇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공장 작업반 사람들에게 윤씨가 끌려간 것은 나 때문이라고 비밀을 노출 시켰습니다. 비밀을 노출 시킨 것을 알게된 보위부지도원은 나를 불러다 놓고 가진 쌍욕을 퍼부었습니다. “이 쌍년아, 자본주의 사회 같으면 네 년은 총살감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떨리지도 않고 그저 생명만 남겨 주시오 하는 식으로 버텼습니다. 결국 그 후에 저는 그 공장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 후 이 지도원은 우수한 사업 평가를 받아 공장 정치보위부 비서로 올라갔습니다. 전 주민들을 첩자와 죄인으로 내모는 사회 저는 양심의 가책에 견딜 수가 없어서 윤씨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윤씨의 어린것들은 저를 보자 반가워서 내 손을 꼭 잡았습니다. 제 엄마 생각이 나서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자기 엄마와 같이 한 작업반에서 일했다며 그들은 내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 때의 내 가슴은 찢어졌습니다. 이 어린 것들에게 불행을 던져준, 도저히 용납 못할 나의 죄. 그들을 달래며 작은 것은 신발을 사주고 큰 것은 학습장을 사서 쥐어주고 헤어졌습니다. 압록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하면서 헤어진 아들 생각이 날 때마다 윤씨네 어린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내가 남의 자식들에게 몹쓸 짓을 한 죄로, 나도 내 아들과 헤어져 생사도 모르는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북한 땅은 모든 주민들이 첩자가 될 수도 있고 모든 주민들이 언제라도 죄인이 될 수 있는 그런 곳 입니다. 이웃도 직장 동료도 심지어는 제 피붙이도 서로 믿지 못하게 하여 서로서로 감시하고 트집을 잡아 인간의 양심과 도덕을 빼앗고 있습니다. 탈북, 그리고 '내 마음의 풍금' 미움과 원망 버리고 교회로 함께 압록강을 건너왔던 아들과 헤어진 후 저는 2달간 중국의 농촌을 떠돌았습니다. 조선족 동포들의 집을 발견하면 염치 불구하고 거기서 몇 끼니씩 얻어먹으며 정처 없이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처음으로 만난 교회가 A교회였습니다. A교회는 한국에서 오신 마음씨 좋은 집사님께서 관리하고 계셨는데, 오갈 곳 없는 저에게 생활할 곳을 만들어주시고 참다운 신앙의 길로 인도해주셨습니다. 한국 집사님 도움으로 교회 정착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없이 생활하며 주님의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꿈같던 시간도 잠시, 반 년만에 A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늘 집사님과 성도들의 보살핌만을 받아왔던 저는 너무나 고맙고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겨울철이 되자 저는 주일 아침에 예배를 위해 난로불을 맡겠다고 자진했습니다. 목사님과 성도들이 말렸지만 저는 혼자 몸이니까 가정의 부담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먹고, 자고, 입는 것을 신세지는 것이 양심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교회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을까 하는 자격지심 때문에 육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늘 자진해 나서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주일 아침예배가 있는 날이면 컴컴한 새벽 6시에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날 아침은 눈이 많이 와서 눈길을 헤치고 교회에 들어가서 난로불을 피우고 연기도 뽑고 간단히 청소도 했습니다. 그날은 한국에서 목사님 한 분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각별한 마음을 갖고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성전 위의 십자가에 거미줄과 먼지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꼭 내가 십자가를 더럽힌 것 같아서 급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둘러봐도 걸레가 없길래 부엌의 행주를 가져다가 십자가를 깨끗이 성의껏 잘 닦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집사님 한 분이 행주로 십자가를 닦는 저를 보시고는 큰 소리로 노발대발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부엌 행주로 십자가를 닦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리고 누가 맘대로 그 강대상(목사가 예배를 주관하는 연단)에 올라가라고 했습니까?” 그때 나는 내 머리 위에 대형 폭탄이라도 터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저 가슴만 울렁거리며 내가 큰일을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에 손에 들고 있던 행주를 얼른 빨기 위해 부엌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집사님이 따라 오시더니 “당장 밖에 가서 빨아요” 하며 핀잔을 주었습니다. 저는 얼른 빨래 그릇을 들고 바깥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추운 겨울날 아침에 밖에서 찬물에 그 행주를 빨려고 하니 손끝이 얼어오고 행주는 얼어서 물에 헹굴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할수록 서러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혹 다른 성도들이 볼까봐 얼른 변소에 가서 한참 동안 눈물을 참아야 했습니다. 만약 그때 나 혼자 어디론가 자유롭게 갈 수만 있다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실컷 울다 오고 싶은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럭저럭 그날 하루 예배가 다 끝나고 저는 조용한 틈을 타서 한국에서 오신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그럼요, 무슨 일이십니까?” “성전 강대상에 청소하러 올라가면 안됩니까?” “그런 것을 왜 물으십니까?” “그저 저는 교회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든 것이 다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강대상은 주님을 뵙는 장소이지, 주님께서 계시는 곳은 아닙니다. 깨끗이 청소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야 마음이 풀리고 가벼워졌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저는 교회 일에 절대로 앞장서서 나서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교회의 풍금 반주자가 되어 A교회에는 풍금이 있었는데 마땅한 반주자가 없어서 예배 때마다 반주 없이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배시간에 제가 너무 일찍 나가서 혼자서 교회에 앉아있게 되었습니다. 성전 구석에 놓여있는 풍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처녀시절 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하며 풍금을 타던 생각이 나서 잠깐 풍금에 올라 앉아 보았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시간이 퍽이나 지났는지 풍금 타는 것을 성도들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왜 풍금을 잘 타시면서 지금까지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성도들이 모두 놀라 야단 법석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주일예배 시간에 풍금을 타기 시작했고 주일예배 시간의 분위기도 달라졌습니다. 세례까지 받고 나자 진정으로 주님의 딸이 되었다는 영예와 긍지감도 생기고 교회생활에 자신감도 커졌습니다. 그전 같으면 주일 예배시간에도 제일 뒷자리에 앉아서 ‘우리 아들이 어디 길거리에서 쓰러져 죽지는 않았을까’ ‘누가 나를 고발하지는 않을까’라는 부질없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집에 돌아가서야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마쳤구나’ 하고 안심하는 데 만족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나는 주일예배의 구경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나의 풍금 반주에 맞추어 성도들이 신나게 부르는 찬송 소리에 내자신도 흥겹고 즐거웠습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신앙생활도 정차 성숙되어 가고 마음속으로 더욱 더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기쁘고 좋았으나 이런 행복한 생활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조선족 집사님과의 갈등 본래 A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집사님께서 한국으로 돌아가시면서 조선족 여자 집사님께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이유 없이 저를 박대했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집사님이 떠나자, 갑자기 제가 행주로 십자가를 닦았던 일을 다시 들먹이며 저를 교회의 웃음꺼리, 비방꺼리로 앞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성도들에게 “저 조선 아주머니는 교회 책임자인 나는 배척하고 다른 집사님들에게만 고분고분하다”며 비판을 가했습니다. 물론 그녀는 대중 앞에 나서서 교회를 이끌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저에 대한 비판은 정당한 일이며 시비 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봐도 내가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자기보다 나은 것 같고 많이 배운 것 같아서 질투하는 것인가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북한에서 평생 월남자(越南者)의 딸이라는 이유로 무수한 차별과 냉대를 받아왔던 저는 그녀의 태도가 못 마땅 했습니다. 주위의 친한 성도들이 그녀에게 한번 찾아가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고 충고도 해주었지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가 조선을 떠난 것도 저런 이유 없는 박해와 차별 때문인데, 무엇 때문에 남의 나라에 와서까지 고개를 숙이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금요기도회가 있던 어느 날, 저는 평소와 같이 앞자리에 나가 앉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조선족 여자 집사님이 저에게 “앞으로 앞에 앉지 말고 뒤에 앉아요. 풍금반주도 그만 하세요” 라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 자리에 모여있던 성도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저 자매님이 무슨 잘못을 하셨길래 저렇게 야박하게 말하는가?” 하고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녀가 시키는대로 제일 뒷자리로 가서 앉았습니다. 뒷자리에 앉고 보니 그 자리도 괜찮았습니다. 저는 늘 풍금 반주만 했기 때문에 찬송가의 곡만 알았지, 가사내용은 잘 몰랐는데 뒷자리에 앉아 찬송가를 부르는데 열중해보니 찬송내용도 은혜 되고 기쁜 마음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찬송가 395장 '너 시험을 당해'는 부르고 불러도 자꾸만 부르고 싶은 저의 찬송가였습니다. 교회를 떠나... 일주일 후 주일예배 시간에 교회 대문을 들어서는데 여자 집사님이 싸늘한 눈초리로 저를 보며 한국에서 온 목사님에게 무언가 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니 저는 도저히 가슴이 쿵쿵거리고 불안해서 교회 안으로 들어갈 자신이 없어서 대문 밖으로 나와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교회에 들어가는 자매님들이 “왜 밖으로 나와요? 예배시간 다 되었는데? 어서 들어갑시다” 하며 손을 잡아 끌자 할 수 없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 마냥 자매님들의 뒤를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 집사님이 앉으라는 맨 뒷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재판장 앞에 끌려온 죄수가 된 기분에 무슨 말로 기도를 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믿음이 약하고 늘 신변상의 불안감이 컸기 때문에 자신감이 없고 흔들릴 때가 많았습니다. ‘내가 여기에 왜 앉아 있는가’ 하는 생각부터 ‘집사님이란 분이 이토록 나를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생각까지 그저 시간 가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억울하고 서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조선족 여자 집사님이 너무나 미웠습니다. 제 나라도 없이 떠 돌아다니며 괄시받는 제 신세가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결국 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A교회를 떠나기로 작정했습니다. 이삿짐을 싸서 남의 집 창고에 맡기고 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믿음이 가는 전도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전도사님은 제가 찾아온 사연을 다 듣고 난 뒤, 지금 그 집사님의 태도로 봐서는 도리어 자매님이 어려울 수 있다고 걱정하며, 다른 교회의 목사님을 소개해 드릴 터이니 그곳으로 찾아가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제가 지금 머물고 있는 장춘(長春) 변두리의 작은 교회입니다. 4년 만에 다시 찾은 A교회 재작년 여름 저는 A교회를 다시 찾아갔습니다. 그래도 낯 설고 물 설은 중국 땅에 와서 처음으로 배불리 먹으며 주님의 은혜를 받았던 곳이기에 꼭 한번 다시 가보고 싶었습니다. 차에서 내려 A교회에 들어서니 그 동네 아주머니들이 저를 보고 “어디 갔다가 이제 나타났는가? 북한으로 잡혀간 줄 알고 걱정했다”며 손을 붙들고 반가워 했습니다. 4년 만에 다시 만난 이웃들은 그 동안 A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행주로 십자가를 닦았다고 야단쳤던 집사님은 2년 전에 뇌출혈이 생겨 자식들이 대소변을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A교회 근방에 살고 있다는 그 집사님을 찾아가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습니까?”하고 인사를 건네니 말씀은 못하시고 고개만 끄떡거리셨습니다. 조선족 여자 집사님은 더욱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의 동생집에 살고 있었는데 추운 겨울 빙판 길에 미끄러져 머리를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큰 병원에서 머리 수술까지 받았지만 후유증이 심해서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녀를 찾아갔을 때 나를 보자 마자 함박 웃음을 짓긴 했지만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잘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기억력도 가물가물해져서 밖에 혼자 내보낼 수 없다고 동생분은 말했습니다. 환갑도 되기 전에 이렇게 불구자가 된 것이 너무나 불쌍하고, 그녀를 원망하며 살았던 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A교회에 도착한 지 이튿날이 마침 주일이었습니다. 정식 주일예배가 다 끝나자 성도님들이 함께 복음성가를 연습하자며 간절히 요구했습니다. 오랜만에 풍금소리에 맞춰 찬송가를 부르는 성도들은 시간이 늦도록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제가 떠난 후 처음으로 A교회에 풍금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제게 명하신 길이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옹졸하게 다른 사람들을 질투하고 원망하고 미워하는 죄를 지으며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원망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지었던 죄를 씻기 위해 오늘도 주님께 간절히 기도 드리고 있습니다. 에메찡 주사 5대, 내 인생 흘러흘러 부모는 南으로...언니는 굶어죽고 우리민족이 일제강점으로부터 해방되던 해에 저는 중학생이었습니다. 부모형제들은 다 남한으로 내려가고 언니만 결혼해서 자강도 산골에 살고 있었습니다. 언니도 살림 형편이 좋지 못해서 나를 도와 줄 힘이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신의주 방직공장의 직조공으로 일했습니다. 학비를 벌어서 공부를 더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교복을 입은 채로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당시 저는 너무나 키가 작아서 바닥에 큰 널판자를 놓고 그 위에서 천을 짰던 기억이 납니다. 주경야독, 열심히 살았습니다 저는 신의주에 있는 야간 학교에 입학을 해서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어린 몸이 너무도 지쳐서 건성늑막염에 걸려 공장에서 노동력 상실자로 판정받게 되었습니다. 보름 동안은 공장 병원에서 치료해 주었는데 그 다음에는 집으로 돌아가라며 더 이상 일을 시켜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공장 부지배인을 찾아가 내 가정실정을 다 말하고 공부가 더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공장부지배인은 옷과 이불, 기숙사비는 보내 줄 터이니 학비, 학용품 값은 자체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되어 저는 근근이 학업을 계속 할 수 있었고, 당시 우리 학교에서는 사범과가 생겨서 그 반을 졸업하여 교원자격증을 땄습니다. 기숙사비와 교복은 공장에서 부담해 주었지만 학용품과 학비는 자체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에는 우리학교 근방에 있는 개인직물공장에 나가서 돈 벌이를 했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학교에서 키우는 돼지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는 일도 했습니다. 저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사범과 교원자격증을 받아 교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학급을 많이 맡으면 그만큼 보수가 높았습니다. 오전은 유치원, 오후에는 소학교 2학년, 밤에는 한글학교에서 문맹자들에 한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월급날에 내 봉투는 항상 두툼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차츰 내 생활의 기초도 마련되었습니다. 지금 한평생을 되돌아보면 그때 처음 교원생활을 시작했던 시절이 제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강도 산골 교원으로 행복했던 시절도 잠시, 언니가 살던 산골 동네의 교장선생님이 학교로 찾아와 “우리 학교로 발령이 났으니 나를 따라가자”며 날벼락 같은 말을 던졌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산골에 살고 있던 언니가 “다 큰 처녀가 객지에 나가서 부모도 없이 혼자 생활하고 있다”며 자기네 동네 교장 선생님에게 저를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교원이 부족했던 산골 학교 교장선생님은 얼씨구나 하고 손을 써서 제 발령장을 이미 다 만들어 왔습니다. 저는 정말 언니가 괘씸했습니다. ‘이제 내가 교원 월급이라도 받게 되니 나를 찾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창시절 언니를 찾아갔을 때는 학비를 도와줄 형편이 안 된다고 야박하게 거절해서 울면서 되돌아 왔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신발이 닳아질까봐 벗어서 손에 들고 신의주 방직공장으로 찾아가 일을 시켜달라고 애원했던 일, 엄동설한에 손등이 툭툭 터져서 피가 나는 손으로 돼지 죽 끓이던 생각들이 스쳐 지났습니다. 남한으로 갔다는 아버지와 엄마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저는 언니가 너무 미워서 선뜻 언니네 집으로 갈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을 찾아서 남한으로 내려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어렵게 얻은 교원자격증을 남한에서도 인정해줄지 걱정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내 나이 스무 살이 된 큰 처녀가 혼자 생활하는 것도 조심스러웠습니다. 골똘히 생각 끝에 할 수 없이 언니네 집으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서둘러 학급 인계사업을 끝내고 아침 일찍 그 교장선생님을 따라 길을 떠났습니다. 그때는 차도 없었습니다. 큰 고개를 두 개나 넘어 첩첩산중 길을 걸었습니다. 미운 언니 밑에서 눈치 밥을 먹어야 할 생각에 기분이 좋을 리 없었습니다. 언니집에서 거처하며 새 학교에서 교원생활을 계속하던 중 전쟁이 터졌습니다. 언니는 전쟁 난리통에 둘째 아이를 해산하다가 몸조리를 잘 못해서 ‘아메바적리’(원충증: 급성 고열, 복통, 설사, 호흡기 장애를 일으키는 병-편집자)라는 중병에 걸렸습니다. 산사람도 막 죽어 나가는 전쟁통에 그런 병을 고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언니의 생명을 구하기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형부도 전쟁에 나가 소식이 없던 때라 저 혼자 죽어가는 언니를 지켜봐야 했습니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언니 부모형제는 다 월남하고 이제 한 분 남은 언니마저 세상을 뜬다고 생각하자 나는 외롭고 서러웠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심청이 아버지처럼 조카를 안고 젖을 얻어 먹이고 나서 학교로 출근했습니다. 어느 날 출근길에 살아날 희망이 없는 언니를 생각하니 기가 막혀서 밤나무 아래에 주저앉아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목 놓아 울었습니다. 너무도 가슴 아픈 설움에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런데 곁에 누가 와있다는 것도 모르고 한참을 울다 보니 어떤 낯선 인민군 군관이 서 있었습니다. “저는 이 고개 넘어 부대에 있는 군관입니다. 동무가 하도 서럽게 울길래 무슨 사연인가 하고 동무의 울음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죽어가는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모조리 털어놨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은 군관은 자기를 따라 부대로 함께 가자고 권했습니다. 그를 따라 갔더니 중국지원군 연합부대에서 중국 의사에게 부탁해서 에메찡 주사 5대를 받아줬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제 알사탕이며 여러 간식까지 건네 줬습니다. 저는 사양할 염치도 모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할 생각도 못하고 주사약만 손에 쥔 채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 왔습니다. 언니의 모습은 참혹하였습니다. 우선 주사를 한 대 놔 주었습니다. 조금 후에 신음하던 언니는 약 기운에 잠이 들었습니다. 저는 물수건으로 언니의 몸을 구석구석 닦아주며 언니의 안색을 살폈습니다. 언니는 세 시간 정도 편안한 얼굴로 깊게 잠을 자더니 이윽고 “물 좀 달라”하며 눈을 떴습니다. 이렇게 해서 언니는 생명의 위급한 순간을 벗어났습니다. 병에서 회복된 언니는 이 주사약에 대한 사연을 듣고 그 군관에게 너무나 고마워 했습니다. 하루는 그 군관이 언니의 병문안 겸 교장 사택으로 인사하러 왔습니다. 언니는 자기 생명의 은인이라며 자기 머리카락을 잘라 신발을 삼아 드려도 그 은혜는 갚을 수 없다며 고마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에메찡 주사 5대’ 때문에 제 일생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에메찡 주사 준 군관과 결혼 언니는 완전히 이 군관에게 용해되었습니다. 이 군관은 차츰 우리 집 문턱을 드나들게 되었고 언니와 자기 가정문제까지 토론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동부전선의 전쟁상황이 아주 치열했던 전시였습니다. 하루는 학교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일곱 살짜리 큰조카가 뛰어 나오며 “오늘 밤에 이모 잔치한다. 지금 엄마가 맛있는 것을 만들고 있어!”라며 제 손을 잡아 끌었습니다. 집에 들어서 언니에게 무슨 일인가 하고 물으니 오늘 밤에 그 군관과 간이 약혼식을 올리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언니는 내 얼굴은 살피지도 않고 시간이 다 됐으니 얼른 세수를 해라, 자기 치마저고리를 꺼내 입으라며 부산을 떨었습니다. 언니의 속셈을 알아차린 저는 너무도 당황스럽고 너무도 서러웠습니다. ‘이제 전쟁에서 승리해서 통일되고 부모를 찾은 다음에 시집을 가도 될 것을, 무엇이 바빠서 이 난리통에 시집을 가라고 성화인가? 이제 나를 데리고 있기가 싫증이 난 것인가?’ 저에게는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통에 소련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저는 그 사람 이야기를 꺼내며 약혼식을 하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하지만 언니의 태도는 확고했습니다. 언니는 “너같이 성분 나쁜 사람을 6년이나 기다려 줄 것 같은가? 어떤 남자가 외국 유학생이 되어 돌아와서 나이 삼십이 다 된 늙은 처녀랑 결혼하겠는가? 그래도 저 군관은 너의 출신성분은 시비삼지 않는다!”며 노발대발 소리를 질렀습니다. 96년 언니도 굶어죽고... 꼼꼼히 생각할 필요도 없이 언니의 말은 맞는 말이었습니다. ‘이 전쟁 통에 행복하면 또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내 무슨 낯으로 좋은 혼처를 바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냥 될대로 되라는 식이었습니다. 이 군관은 전에 결혼을 한 적도 있었고, 연령도 많고, 볼품은 없었으나 마음만은 진실했습니다. 나같은 성분 나쁜 월남자의 딸을 결혼 대상으로 삼아 준 것이 고맙긴 고마웠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 군관과 약혼식을 올리게 되었고, 2달만에 결혼식은 생략한 채 신혼살림을 시작했습니다. 전시여서 임시로 남의 집의 방 한 칸을 빌려 신혼살림을 시작했습니다. 남편의 부대는 퍽이나 먼 곳에 있었으나 매주 토요일 오후에 집에 와서 일요일 밤에 부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래도 남편이라고 있으니 마음에 의지가 되었고 정도 들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삼 년간의 가열찬 전쟁은 휴전이 되었습니다. 남녀노소가 길가에 차고 넘쳤습니다. 울고 웃으며 모두들 깃발을 들고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삼 년간의 고통 속에서 생명만은 건졌으니, 죽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폐허가 된 잿더미 위에서도 좋아라 춤을 췄습니다. 그러나 가족들과 헤어지거나 전선에서 자식들을 잃은 부모들은 대성통곡이었습니다. ‘제 손으로 제 눈깔 찌른다’는 말처럼 김일성씨가 제 나라와 조선민족 앞에 빚어 놓은 비극이었습니다. 조선전쟁은 아무런 전과도 없었습니다. 다만 아까운 젊은 청년들과 조선인민들만 피 흘리게 하고 알거지로 만들었습니다. 휴전이 되고나니 군대들은 군복을 입은 채 전후 복구 건설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때 우리 남편도 '동평양건설여단'으로 부대를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남편을 따라 평양에 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남편은 전시에 폭격을 맞아 척추에 파편이 박힌 것 때문에 척추 결핵이 생겨 팔 년 동안을 병원 생활을 하다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세대주’가 되어 기업소 유치원에서 일하며 아들을 키우고 살게 된 것입니다. 한평생 자강도 산골에서 살던 우리 언니는 96년 여름에 죽었습니다. 95년부터 시작된 굶주림의 시절에 언니도 먹을 것을 얻지 못해 죽어갔습니다. 처녀시절에는 에메찡 주사 5대로 언니를 살려 낼 수 있었지만,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던 시절에 언니를 도와 줄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평생 미웠던 언니지만 평생 불쌍하게만 살다 갔습니다. 지금이라도 주님의 나라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기를 기도합니다. ‘월남자’ 꼬리표와 ‘탈북자’ 꼬리표 하루는 우리 옆집에 젊은 A씨가 두 딸을 데리고 이사를 왔습니다. 그런데 A씨는 한 달이 되도록 늘 고민에 잠겨서 동네 사람들과 일절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다 못해 제가 먼저 A씨에게 무슨 고민이 있는가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양녀로 보낸 막내딸 때문에 재혼을 못했던 A씨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혼자서 두 딸을 키워오던 이 여성은 몇 달 전 한 남자를 알게 되었고, 착하고 성실한 인품에 반해 재혼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군(郡) 공민등록과에 재혼신고를 하려고 찾아갔는데 “막내딸의 행적을 입증하기 전에는 절대로 재혼을 허용할 수 없다. 막내딸을 어떻게 했는가? 죽였는가? 팔아먹었는가?”라는 청천벽력 같은 대답만 듣게 된 것입니다. A씨는 이미 재혼하기로 약속한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십여 년 전, A씨는 셋째 딸을 낳기 위해 병원에 입원 했는데, 그때 그만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나은지 하루 만에 남편의 장례까지 치루어야 했던 A씨는 남편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앞으로 세 아이를 혼자 키워야 한다는 막막함에 사로잡혀 한 달 동안 밥 숟가락도 들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고 했습니다. 보다 못한 동네 사람들이 “간난아이는 형편이 좋은 집에 양녀로 보내자”고 A씨를 설득을 했고, A씨는 ‘내가 데리고 있어 봐야 하루 세끼 밥이라도 배불리 먹일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에 막내딸을 다른 집 양녀로 보내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A씨가 재혼 신고를 하려고 군(郡) 공민등록과를 찾아가서 막내딸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자 공민등록과는 마치 전쟁이라도 일어난 듯 야단 법석이 났습니다. 공민으로 기록되어 있는 아이가 실제로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어디 사는지 조차 파악할 수 없으니 공민등록과의 지도원부터 노발대발 날뛰게 되었고, ‘너 때문에 내 목이 날아가게 되었다’며 A씨를 향해 온갖 쌍소리과 모욕을 퍼부었다고 했습니다. 양녀로 떠나 보낸 막내 딸에 대한 죄책감, 두 딸에 미안함, 그리고 뱃속에 있는 새 생명에 대한 고민 때문에 A씨는 눈물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A씨는 “좋은 자리에 새로 시집가겠다고 10년 전에 내 손으로 버린 자식을 다시 찾아간다면 세상사람들과 그 아이가 나에게 뭐라고 하겠는가?”며 “이제는 정말 죽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 했습니다. 저는 세대주 없이 여자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겪어본 형편이라, A씨의 사정을 알게 되자 모른 체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딱한 사정을 외면 할 수 없어 자진해서 길을 떠나 저는 A씨로부터 막내딸을 양녀로 소개해준 아주머니가 옆 마을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아주머니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 아주머니 말이 “그 아이를 데리고 간 부부가 지금 어디 사는지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남자는 군관이라고 했고 군용차를 타고 와서 아이를 데리고 갔으니, 이 근방의 군부대를 돌아다녀 보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일단 군(郡) 공민등록과의 지도원을 찾아가서 “내가 아이를 찾아 볼 테니 아이를 찾아오면 A씨의 재혼 서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지도원은 “우리도 한 달 동안 여러 사람을 동원해서 찾아 보았으나 아직 해결을 못해서 걱정이니, 아주머니라도 저희들의 사업을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고 깎듯이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A씨를 도와주자고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아이를 찾자고 하니 방법이 막막했습니다. 당시는 김일성씨가 죽은 지 몇 달 지나지 않은 때라 국내정세가 대단히 복잡하고, 남북간의 정세도 극도로 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디든 함부로 돌아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통행증도 없었고 수중에 돈도 없으니 길을 떠나자면 우선 먹는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약국에서 ‘령심환’ 5백 알을 사서 조그만 주머니에 넣어 집을 떠났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간 사람들이 군용차를 탔다고 하니 군대 가족은 틀림없는데 군대는 동쪽에도 있고, 서쪽에도 있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물론 차를 탈 수는 없었습니다. 통행증도 없고 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어차피 군대는 산골에 있으니, 산골 길을 따라 걷자’는 것이었습니다. 이틀 동안 산골을 헤메다 보니 내 행색이 초라해지고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사람으로 보일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장사꾼이라면 등에 짐 보따리라도 있을 텐데 손에 조그만 약통 하나 들고 아이를 찾고 다닌다니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한번은 어느 산골의 농촌길을 걷다가 그 동네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나를 보고 “간첩이 아닌가?”하고 의심을 하는 바람에 끌려가서 속옷까지 다 벗어 보이는 소동도 있었습니다. 제가 초급 당비서에게 “당비서 동지 저는 군(郡) 공민과의 사업을 방조하려 길을 나선 사람입니다. 저의 지도원동지에게 전화를 해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을 하니, 전화확인을 하고 나서야 모든 것이 해명되었습니다. 끼니 때가 되면 산골의 집들을 찾아가 “내게 령심환이 몇 알 있는데 혹시 필요합니까? 밥 한 그릇만 주시면 약을 드리겠습니다”며 밥을 얻어먹으며 걷고 또 걸었습니다. 집을 떠나 3일째가 되어 ‘이제는 나도 어쩔 수 없구나!’하는 실망감에 산마루에 올라 앉아 낙심하고 있을 때 멀리서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순간 ‘기차역이 가까이 있겠구나, 기차역에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혹시 소문을 알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지막으로 기차역까지 가보기로 결심하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나이는 같은데 생일과 고향이 틀려 산골기차역은 크지 않았습니다. 역에 들어서서 밤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혹시 십 년 전에 여자 아이를 데려다 키우는 집이 없습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한 남자가 “우리 동네에 그런 사람이 있다”며 자기네 동네 가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밤차를 타고 떠나자 저 혼자 역에서 쪼그리고 쪽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길을 떠났습니다. 마을 입구에서 한 아주머니를 만나 십 년 전에 여자 아이를 데려다 키운 집을 물어보니 곧장 그 집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나이는 동갑이었으나 생일도 틀리고, 데려온 고장도 틀렸습니다. 저는 지치고 지쳐서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집에서 가지고 나온 령심환도 다 떨어져서 밥 얻어 먹을 곳도 없고, 전날 기차역에 쪽 잠을 자서 그런지 온몸이 쑤시고 힘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상의할 사람도 없고 혼자 자문자답하길 반나절, 그 동네에서 6km정도 떨어진 곳에 큰 군부대가 있다는 말을 듣고 마지막으로 그곳을 들려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 군부대를 향해 걸으면서 또 여러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친 엄마가 아니니 모유를 먹었을 리 없고, 아기가 모유를 먹지 못했으면 앓기를 잘하니 병원으로 찾아가보는 것이 좋겠다!’ 군부대 사택마을에 도착하자, 저는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곧장 병원 소아과를 찾았습니다. 조용히 소아과 의사선생님을 만나서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니, 웃으면서 아이의 집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절대로 병원에서 알려주었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기적과 같이 아이를 찾아 아이 집을 찾고 보니 역시나 군인가족이었습니다. 그 핏덩이가 인민학교 3학년이 되어서 학급반장까지 하는 똑똑한 아이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저는 우선 그 집 가족들을 안심시켜야겠다고 생각해서 “아이를 데리고 가려는 것이 아니고, 아이가 이곳에 살고 있는 것만 확인하면 된다”며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절대 안심하고 잘 키워서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시라고 당부하고 다음날 떠나왔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군(郡) 공민등록과에 들려서 아이를 찾았다고 하니 모든 사람들이 대환영이었습니다. 등록과 성원들이 모두 모여서 저를 집중하며 마치 동물원 호랑이 구경이나 하는 듯이 쳐다 보았습니다. 처음 출발할 때부터 경과보고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지도원은 “아주머니는 정말 영웅입니다. 앞으로 출판사 기자도 만나셔서 이번 일을 세세히 알려주십시요”라며 칭송을 늘어놨습니다. 아이를 찾은 일로 공민등록과 지도원은 국가의 표창도 받고, 승승장구 출세도 했지만, 정작 제게는 엉뚱한 핍박과 감시가 돌아왔습니다. 지도원이 저를 상부에 추천해준다며 제 가족관계와 과거 행적을 조사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군 당위원회에서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다 늙은 여자가 평범치 않다” “저렇게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은 배후에 뭔가 있는 것이다” “알고 보니 월남자 가족의 딸이었다” 등등 온갖 소문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출신성분이 나쁘면 좋은 일을 해도 ‘감시대상’ 막내딸을 찾은 A씨는 그 남자와 정식으로 결혼해서 웃으며 마을을 떠났지만, 제게는 ‘월남자 가족의 딸’이라거나 ‘배후가 수상한 여자’라는 감투가 씌어지게 되었습니다. 별안간 군당위원회의 ‘감시대상’이 된 것입니다. 기가 막히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몸이 부숴져라 일을 했고, 국가에서 시키는 일은 모두 다 해왔습니다. 그러나 끝끝내 ‘월남자 가족의 딸’이라는 출신성분의 꼬리표를 떼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눈물을 흘리며 압록강을 넘은 이유는 내 조국이 싫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반세기 동안 저를 괴롭히고 괴롭혔던 출신성분이라는 꼬리표를 떼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욕심이었나 봅니다. 이제는 ‘탈북자’라는 꼬리표가 저를 따라 다닙니다. 중국공안이 무서워 내나라 말도 마음데로 못하고, 내나라 글씨도 마음데로 쓸 수 없습니다. 마음 속으로 부르는 찬송가를 통해서 제 고통과 제 마음을 표현할 뿐입니다. 나의 맘에 수심구름 가득하게 덮이고 슬픈 눈물 속절없이 흐를 때 인자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부르사 나를 위로할 이 누가 있을까 무거운 짐 등에 지고 인생길을 가는 자 힘이 없어 쓰러지려 할 때에 능력 있는 팔을 펴서 나의 손을 붙들어 나를 구해줄 이 누가 있을까 지은 죄를 돌아보니 부끄럽고 괴로와 자나 깨나 마음에 화평 없을 때 추한 죄인 용납하여 품에 안아주시고 깨끗한 마음 주실 이가 누굴까 요단강을 건너가서 시온성을 향할 때 나와 항상 통행할 이 누굴까 두려움의 검은 구름 모두 헤쳐버리고 나의 갈 길 인도할 이 누굴까 주예수 주예수 주예수 밖에 누가 있으랴 슬퍼 낙심 될 때에 내 친구되시는 구주예수밖에 다시 없도다 -찬송가 83장 - 2005년 5월 장춘에서 리수희 씀 자료제공 : 데일리NK
신고 0명
게시물신고
|
이렇게 말씀해 주심이 귀하지요, 절대 평범한 여성의 하챦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 저희 부모님 세대 역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매일 밥상에서 엄마가 월남한 얘기, 전쟁 때 피난간 얘기, 공산당 만행 얘기 들으며 자랐어요. 그러나 저희 세대 여성들은 천양지차의 축복된 삶을 살아왔지요. 정말 부끄럽습니다. 선생님, 진정 존경합니다.
저는 중국 산동성 청도시에서 살고있는 탈북여성입니다
이 글을 통해 자신의 과거생활을 또 한번 돌이켜 보게 되여 정말 가슴이 미여집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더 나은 삶을 위해 힘을 내여 살아갑시다
정말 힘이 되는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 고향이 자강도 인지라 한 고향 사람을 만난 기분이네여
아무쪽록 건강하시고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