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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도 인간이다.(9) - 김혁
동지회 13 11052 2006-05-17 10:58:23
김혁 전거리교화소 경험자 2001년 9월 입국

하지만 사람들이란 누구나 다를 바가 전혀 없다. 먹지 못해 배 가죽이 등에 가 붙을 정도까지 이르면 누구나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먹게 되어 있고 한치 앞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는다. 즉 미래나 희망 같은 것은 거의 그들의 머리 속에서 떠났고 당장 굶어 죽지 않으면 내일이다. 오늘은 살아 났지만 내일이나 모래는 죽을지도 모르는 생활이 교화소 생활이다. 풀이 뾰족뾰족 내밀기가 무섭게 뜯어 먹는다. 그것이 잔디풀이던 민들레이던 무슨 풀이던지 뜯어 먹는다. 조금이라도 마음과 육신에 희망의 여유가 있다면 먹을 수 있는 풀만 골라 먹겠지만 허약자들은 그런 것이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쓴 풀이던 시크러운 풀이던지 매운 풀이던지 손에 잡히는 대로 뜯어 먹는다.

믿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나 역시도 풀 잔디나 박새라는 독풀까지도 먹었다. 그래서 먹은 것을 토하고 얼굴이 부어 오르기도 했고 병반에까지 들어가 볼뻔했다. 이러다 죽지나 않을까 작게 나온 풀이라 독이 없겠지 하고 생각하며 먹었지만 미처 박새풀이라는 것을 생각할 새도 없이 먹어버렸다. 그것이 결국은 큰 죽음을 맞이 하게 할 뻔했다. 3형제라는 토끼 풀도 뾰쪽 내밀 때부터 뜯어 먹으며 산나물이 자라나기를 기대했다. 진달래 꽃을 뜯어 먹기도 하고 도마뱀 작은 도룡뇽(도마뱀과 비슷함)도 잡아 구워먹기도 했다.

풀이 나오기 시작하자 교화소 내부에서는 풀 중독자들이 많이 발생했다. 얼굴이 부어 오르고 다리가 부어 오르고 심지어 눈이 가리워 보지 못할 정도까지 심한 환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부정이 너무도 오르다 보니 죽어가는 사람은 물론 죽는 사람도 많았다. 부정이 올랐다가 갑작스레 내리면 그 사람은 죽는 것이다. 갑자기 오줌발이 서면서 하루에도 몇 십번씩 소변을 보면 구축같이 부어 올랐던 몸이 순식간에 뼈만 남을 정도로 내려 버린다. 그러면 영낙 없이 죽는 것이다.

초시기 부정이 오르기 시작할 때는 물을 많이 찾게 된다. 물을 많이 먹으면 몸이 순식간에 부어 오르고 걷기가 힘들 정도까지 이르고 순식간에 내리면 죽는 것이다. 조절을 잘하지 못하면 목숨이란 한갖 의미도 없는 시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너무나도 배고픈 까닭에 찜찔한 소금국물이라도 많이 많이 마시면 부정이 오는 몸에 더 부정이 오르고 만다. 퉁퉁 부은 다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보면 피기 없이 퍼런 다리 뼈가지 손가락이 대일 정도이다. 푹 들어간 손가락 자리를 보면 너무나도 한스러운 교화소 세상을 끝없이 끝없이 저주하게 된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하지만 꿈틀 거릴 수가 없는 곳이 조선의 교화소이고 지금 조선 사회의 현실이었다.

상처에서는 거먼 골은 덩어리들이 흘러 나왔고 움푹 패인 상처 속에는 보기 역겨울 정도의 살 썩은 온갖 패물들이 들어 박혀 있었다. 그것이 조금 더 심해지면 뼈가 들여다 보이고 조금 더 심해지면 골수염이 와서 다리를 끊지 않으면 안 되는 비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또한 옴병이 많다 보니 몸에서는 진물이 흐르고 온 몸에는 헤져 움직이지 못하는 형편도 많이 있었다. 겨드랑이 살이 맞대이는 곳에는 항상 진물이 흘렀고 자고 일어나면 옷에 붙어 옷이 온통 진물 투성이가 되었다. 몸에서 옷을 떼려고 해도 너무 아파 떼기도 힘들었고 손과 발은 온통 보기 흉한 상처 투성이 진물 투성이가 되었다. 약을 류황과 돼지기름을 섞어 만든 것이라 하지만 워낙 병이 전염되는 병이라 그런 제조약도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

거기에다 종처라는 외상병이 돌아 온몸은 물론 엉덩이에까지 나서 앉기 힘들 정도였다. 앉기만 하면 진물이 흘러나와 옷에 달라 붙었고 옷은 진물에 절어 꾿꾿해졌다. 그것도 제대로 앉지 못하고 종처가 없는 쪽으로 앉아야 했다. 정 그렇게까지 하기 힘들면 모로 누워야 했다. 하지만 모로 눕게 하여야 마음이라도 편하련만 모로 눕지도 못하게 했고 앉아 있게 만했다.

점심시간은 9시 반이었다. 아침에 6시에 기상해서 6시 반에 세면도 하고 감방청소도 하고 정돈 다 하고 나면 7시 10분∼30분까지 가게 된다. 7시 20분 경에 면식을 타 먹으러 면식자만 나가고 나머지는 식사시간이 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일명 면식자라면 면회 왔던 사람들이 펑펑이 가루를 20∼30kg식 가져다 주는데 그 면식 가루를 면식 칸에 보관했고 면식가루가 있는 사람만이 아침 식사 전에 나가서 500g씩 타서 먹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면식가루가 떨어졌거나 면회도 없는 사람들은 밥이나 먹고 면식자가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행여나 하는 생각에 면식가루를 이겨 먹던 통에서 훑어 먹을 것이라도 없나 하는 생각에서 였다. 이런 일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속셈이었고 밥 먹고 나면 의례 기다리게 되는 몸도 마음도 허약한 사람들이었다. 불쌍한 인간들.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그들이 들어오면 반 숟가락도 채 되지 않는 것을 겨우 끌어 모아 먹는다. 그 통을 놓고도 내가 먹는다 니가 먹는다 하며 말다툼까지 한다.

온종일 허약한 몸으로 일에 시달리고 나면 온몸이 땅에 잦아드는 기분이었다. 지방질이 작아질 대로 작아진 허약한 몸둥이라 추위에 쉽게 떨렸고 병에 쉽게 걸렸다. 그렇게 온종일 일하고 저녁에 6시경에서부터 7시경가지 감방에 들어오면 그대로 자기 자리에 가서 쓰러진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게 일하고 들어와서 몸을 조금 눕히려고 해도 욕사발은 물론 매까지 들어왔다.

7시부터 30분까지 하루 총화를 하고 밥을 먹고 난후 8시 경부터 학습을 하는데 학습이란 생활 준칙과 10대 원칙 교화반 준칙을 외워야 했고 교화신문독보를 해야 했다. 잘하지 못해서 9시 10분 경부터 시작하는 선생님의 검열에 걸리면 온 교화반이 학습을 다시 해서 선생한테 검열 받아야 했고 선생한테 걸린 사람은 난폭한 놈들한테 매까지 맞고 교화반에서 구박까지 받아야 했다. 어떤 때는 저녁 감시 때 시간이 더 늘어지기까지 했다.

일단 9시 30분부터 점검 준비를 하고 점검이 끝나면 바로 자게 되는데 도주자를 막기 위해 4명씩 하루 밤에 감시를 서야 했다 2시간에 한명씩 교대하고 자는데 감시를 잘못 서서 선생의 순위하는데 걸리면 3일 동안 4시간씩 감시를 서야 했다. 몸이 약해지면 졸음이 많이 오는데 그 졸음을 이겨내며 감시를 선다는 것은 그야말로 피타는 고통이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몸이 나른해져 움직이기가 정말로 싫었다. 밤이면 꿈을 많이 꾸기도 했다.

이런 지루한 교화소 생활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년씩 해야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앞이 캄캄해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할지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한번 앉았다가 일어나면 눈앞이 캄캄하게 가리워 앞이 보이질 않았고 머리가 띵해졌다. 캄캄한 시각 안에서는 별찌가 일었고 술먹은 사람같이 몸이 비틀어지기도 했다. 겨우 벽에 의지하여 일어서고 2분 정도가 지나면 시력을 다시 찾기는 하지만 이것은 매일 3번 4번씩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괴롭기만한 하루하루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고통과 슬픔을 연결하는 세월이었다. 너무나도 이겨내기 힘든 고통들이 매일 마음을 괴롭혔고 그로 인해 오는 부담이란 날로 더 커만 갔다. 보통 그 교화소에서 육개월만 지나면 지옥눈이 조금씩 트이는데 아무리 트인다 하더라도 모든 고통을 즉 매맞을 고통 구박 받을 고통을 이겨 낼 각오가 없으면 그저 허무하게 죽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설사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하여도 이겨내지 못하면 차라리 일찍이 죽고 싶을 때 죽는 것보다도 더 못했다.

사람이란 항상 죽음이라는 두려움과 압박감 속에서 헤매야 하는가. 사람은 항상 얽매인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가. 그가 저지른 죄가 어떻든 지간에 어떠한 현실과 생활 속에서 짓게 된 범죄인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물론 죄과에 의하여 형기는 받아야 하겠지만 그 형기를 다 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정에 따라 작게 주어야 할 것이다. 차라리 발전되지 못한 뇌를 가진 짐승으로 태어나기보다 못한 것이다. 피해자는 증오에 이르겠지만 그 증오가 차라리 사랑으로 변하여 그들을 용서해 준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자신의 죄에 대하여 후회하고 뉘우치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언제면 교화소 정문을 나설는지 하는 생각은 항상 내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교화소에 처음 들어올 때를 생각하면 정문을 멍청히 바라보기도 했다. 언제면 저 죽음의 문을 나설는지 하지만 살아나간다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때로는 뼈만 앙상한 몸을 내려다보며 나도 인제는 죽을 날이 멀지 않구나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절대로 2년만 있으면 살아나가겠구나라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힘든 것이었다. 그렇게 생활력이 강하고 면식 있는 사람도 마구 죽어 나가는 판에 면회도 없고 힘이 되어줄 사람도 없는 나에게 있어서 그리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에 항상 죽음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나였기 때문이다. 파리는 그래도 날개가 있어 날아서라도 다니련만 날개도 힘도 없는 우리에게는 날수도 뛸 수도 없는 파리보다도 못한 목숨을 가지고 있었다. 숱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지만 교화소 내에서는 아무 거리낌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죽어가는 책임이 조금 두렵거나 조금이라도 살려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담당 선생들이었다.

한번은 선생이 약 보름동안 출장을 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른 늙은 선생이 우리를 담당했다. 그 선생의 구호는 일하지 않는 놈은 먹을 것을 더 주지 말라. 일하지 못하겠으면 죽으라는 것이 그 선생의 구호였다. 오랫동안 죄수를 다루어온 그 선생의 사고력이란 우리가 놀랄 정도였다. 매일 저녁 하루 생활 총화를 짖고 힘센 놈이 허약자를 구박해도 당연하다라는 정도였다. 이렇게 보면 살 놈은 살고 죽을 놈은 죽으라는 뜻이다.

이 선생이 운영했던 교화반의 내력을 보면 50명 되는 그 교화반 인구에서 29명이라는 사람이 죽어나갔고 이 선생은 교화반을 그만 두게 되었다. 너무나도 많은 죽음을 냈으니 교화반을 맡을 자격이 중지 당한 것이었다. 이렇게 죽음을 냈지만 그 선생의 마음은 전혀 다른 놀라운 것이었다. 누구나 이런 선생의 내력을 듣고는 치를 떨지만 치를 떨게 하면서라도 살려 내보내려는 것이 선생의 마음이었다. 교화소에서는 마음을 악하게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사회에서처럼 순진하게 놀았다가는 한 달도 넘기기가 힘들다. 이런 심리를 선생은 알았기에 어떻게 해서나 악을 키워주려고 하는 것이었다. 일하러 나가는 사람들에게 가루를 가져 다가 죽이라도 쑤어 먹이고는 교화반에 힘들어 못하겠다는 사람에게 죽을 먹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때로는 교화반이 일하고 들어와서는 남았던 사람들에게 얘기하면 그들은 반발심을 갖게 된다. 그 먹고 싶은 생각에 말이다.

결국 그 반발심이 터져 일하기 힘든 몸이지만 나가려고 하고 일을 하다 보면 교화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요령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형식으로 악을 키워주려고 일어서게 하려고 해도 때로는 나쁜점이 더 많을 때도 있었다. 그 반발심으로 인해 자신을 저주하고 그런 군침 도는 말과 구박에 이겨내지 못하고 흥분된 나머지 죽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 선생이 들어와서 보름이라는 짧은 기간에 무려 7여명이 병반에 입원하거나 죽었다.

한번은 전거리역전에 정관 실으러 여러 개 교화반이 함께 나갔었다. 이때도 역시 본소에서 나누어준 통강낭이 3kg과 교화반에서 모은 펑펑이 가루를 5kg정도 되게 가지고 나갔다. 정광이 생산되는 성광장에서 내려온 정광가루를 기차에 싣는 일이란 너무나 힘들었다. 차빵통 높이는 대략 3m정도 였고 옆문을 열면 우리 가슴까지 올라왔다.

그런 높이에 삽으로 그 정광가루를 올려 던지기란 그리 헐한 일은 아니었다. 한 교화반이 보통 30여명 가량씩 왔는데 매 교화반마다 80t짜리 기차 적재함을 한 개씩 받았다. 너무나도 아름찬 일이었다. 기차 견인기가 없어 우리가 달라붙어 적재함을 밀어내고 붙이고 세우고 했다. 맨 처음은 조금씩 축이 나는 것 같더니 30분도 못되어 삽에 정광가루가 절반도 채 되지 못하게 담겨지기 시작했다. 너무나 힘에 부친 일이라 온 오전을 삽질하면 절반 밖에 담지 못했다.

선생은 가끔씩 아무 의미도 없는 차 적재함을 밀라고 했다. 담배 꽁초가 많은 쪽에 가서는 하고 소리 친다. 그러면 우리는 그곳으로 밀려갔다. 가면서도 그저 가는 것이 아니었다. 담배꽁초가 있나 하고 두리번거리며 가는데 그런 움직임이란 교화소생의 서로 간에나 또는 사람을 많이 다루어본 선생들에게는 누구도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모두가 능숙하게 움직였고 꽁초를 발견하기만 하면 새 잡는 새 매보다도 더 빨리 움직였다.

그리고는 선생이 있는 적재함에 도착한다. 차 적재함을 밀어내고는 다시 돌아오면서도 담배꽁초를 줍는다. 선생은 이쪽 오라 저쪽 오라 하며 담배꽁초를 줍게 했다. 하지만 절대로 주우라는 표정은 짓지 않는다. 만약 자기 눈에 걸리면 욕을 하지만 눈에 안 걸리게끔 행동하면 모른 체 한다. 결국 우리는 그 어떤 모양의 표현이자 말의 표현보다도 마음으로 서로 뜻을 주고 받으며 행동하는 것이었다.

간혹 한가지 의문점이 있을 수도 있다. 담배 꽁초를 주울 수 있게끔 인도한다면서 왜 눈이 마주치면 욕질도 하고 때리기까지 하는가 하는 의문점도 있을 수 있다. 마음이 그러하다면 선생이 직접 주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데서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말하거나 너무 드러나게 표현을 한다면 그야말로 교화생들에게 약점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했다면 담배꽁초를 주은 이가 들키기라도 해서 선생을 다 고발해 버린다면 선생은 별까지 떼울 수 있는 위험성이 많았던 것이다. 결국 죄수들을 생각해서 한 노릇이 자신에게 큰 후과를 가져오게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2006년 5월 김혁

자료제공 : 북한인권시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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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게뭔지 고담녹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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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7-21 00:20:57
    다음 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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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1-24 11:28:21
    선생... 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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