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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없는 땅을 뒤로하고 - 정미옥
REPUBLIC OF KOREA 관리자 6 11072 2007-07-30 11:56:44
나는 온성군 산성노동자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산성인민학교와 산성고등중학교를 거쳐 라남 탄광기계공장에서 일하다가 1989년에 결혼하였다. 어머님은 고혈압이 있으시고 신장이 나빠서 일을 하지 않으셨고 사회보장 환자셨다. 아버지는 의용군으로 북에 오셔서 탄광에서 일하시다가 1997년 7월 24일 살기가 제일 힘들 때 굶주림으로 돌아가셨다.

끝없는 굶주림과 고단한 생활

굶다가 돌아가신 아버지, 나는 풍인구로 시집을 가있던 때라 어머니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걸 알리지 않아 후에 알게 되었다. 나에게 남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불구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열흘 후 남동생 또한 굶어 죽었다. 이렇게 우리 가족 5명 중 남자만 2명이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후에 어머니가 나에게 말씀하시길,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나를 많이 찾으셨고 돌아가실 때 감자 3kg만 먹었으면 소원이 없다고 말씀하셨다는 소릴 듣고, 그 후 3년 동안 아버지 생각만 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메어서 죽을 뻔 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프다.

97년도 여름으로 기억하는데, 하루는 아버지께서 내가 사는 곳에 오셨다. 당시 나는 재봉질을 했기 때문에 돈이 있어 아버지에게 대접을 했는데, ‘너는 좋은 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감자와 다시마를 함께 넣고 끓여 아버지 드시라고 남편에게 일러놓은 다음, 쌀을 구입하러 나갔다. 쌀을 가지고 들어와 보니, 감자국이 내 몫으로 한 사발 있었다. 그 때 아들이 어렸을 때인데, 내가 감자국 먹는 것을 아들이 계속 쳐다보고 있기에 먹고 싶어 그러는가 싶어 먹으라고 하니 먹지 않았다. 내가 다 먹는 걸 지켜보신 후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셨다. 그 때 아들이 엄마 나쁘다면서 할아버지는 감자국을 드시지 못하였다고 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남편이 다 먹고, 아버지에게는 맹물만 드렸다고 했다. 아버지는 감자국을 드시지 않고 나 먹으라고 한 사발 남겨 놓으신 거였다. 정말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도 우리 집에 계시기가 불편하였는지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시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살아계시라는 말과 함께 쌀 1kg를 싸서 드렸다. 그것이 아버지와 마지막 만남이었다.

살기가 점점 곤란해지자 어머니가 우리 집에 잠깐 오셨는데 나는 어머니 편으로 술 원액을 보냈다. 그 원액을 희석해 술을 팔면 한 동안 굶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협잡꾼이 ‘내게 그 원액을 주면 잘 팔아서 큰돈을 가져다주겠다’는 말에 그만 넘어가 그 원액을 협잡꾼에게 다 넘겨주고 말았다. 그 때 어머니가 협잡만 당하지 않았더라도 아버지와 동생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에 내가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죽였다면서 못할 말을 했다. 그러면서 왜 힘들면 나에게 알리지 않았는가 물어보니 너도 살기가 힘든 것을 아는데 차마 더 이상 도움을 달라고 할 수 없었다고 하셨다..

내가 아들을 출산할 당시가 90년도 이었는데 그때부터 배급이 끊기기 시작해 김일성이 죽은 94년도부터는 더욱 먹고 살기가 많이 곤란해졌다. 결혼 초부터 남편은 술주정과 폭력을 일삼아 왔고, 사는 것이 힘들어지면서 날로 횡포가 심해졌다. 남편은 탄광에서 일했는데 로임은 물론 배급조차도 없었다. 남편은 계속 술만 마시고 구타하고 술을 마실 돈이 없으면 집에 있는 세간을 팔아 술을 마셨다. 마지막에는 유일한 생계 수단인 재봉틀을 가져다 팔려는 것을 들키자 나에게 집에 안 있고 어디를 돌아 당기냐면서 마구 구타했다. 더 이상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이 들어 못살겠다고 하고 내가 아들을 책임지겠다고 한 다음, 동포구의 어머니의 집으로 가자 남편이 따라와 다시는 안 그러겠다며 빌어 다시 돌아가 살았지만, 남편의 술버릇과 폭력은 없어지지 않고 계속되어 97년 가을부터는 어머니 집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어머니와 함께 술을 고와 술장사를 했다. 한 동안은 장사가 잘 되었는데, 98년도 어느 날부터 술을 담가도 계속 술이 물로 변하는 정말로 신기한 현상이 벌어지면서 점점 사는 것이 힘들어 졌다. 먹을 것이 없어 3일을 물만 먹고 견딘 날도 있었다. 나는 그래도 참을 수 있었지만 어린 내 아들은 더 맥이 없어 그대로 두면 죽을 것 같았다.

첫 탈북과 지옥 같았던 노동단련대

그 때 중국 바람이 불었는데 중국가면 사탕가루와 여러 가지 식량을 준다는 소문이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 돌았다. 나도 살길이 깜깜하여 언니와 얘기한 끝에 먼저 도강한 경험이 있는 여자 동무와 경비대의 인솔 하에 98년 5월 말 도강했다. 저녁 8시에 탈북하여 9시쯤 중국에 도착했는데 그 때 간곳이 백령 촌이었다. 중국에 들어가면 사람 피를 뽑아간다는 얘기를 들어 좋은 집 쪽으로는 쳐다보지도 않고 초가집 주위에서 서서 집 안을 들여다보는데 주인아줌마가 보시고는 조선에서 왔냐고 물어보았다. 일주일 그 집에서 있으면서 차양 모 뽑기를 시키는 데 북한 사람이라고 임금은 주지 않았다. 잡히면 처벌받기 때문에, 결국 임금은 받지 못하고 강냉이와 헌옷을 짊어지고 그곳을 나왔다. 그것들을 등에 지고 북으로 가면서 나라가 못사니 그 국민들도 천대받는 것에 서러웠다.

다시 북으로 돌아가려고 강가로 갔으나 도강을 시켜주는 사람에게서 신호를 받지 못하여 친구와 함께 그냥 건너가다 친구는 먼저 건너갔고 나는 물에 빠져 경비대에서 붙들렸다. 경비대에 가지고 온 물건을 다 뺏기는 것은 물론 옷을 벗기고 검사하고 이틀 감금 뒤 온성 보위부로 보내져 열흘 정도 그곳에 있었다. 돈 가져왔는지 어디다 감추었는지 알아보려고 옷 벗겨서 2번 검사하고 손을 위로하고 뽐뿌질을 100번 정도 시켰다. 조사를 하면서 주로 물어보는 것들이 중국에서 뭐했나? 뭐를 가져왔나? 무슨 텔레비 봤나? 라는 질문을 했다. 나는 아들과 먹고 살기가 힘들어 돈 벌려고 중국에 갔었다고 하였다. 몇 번을 더 조사한 뒤 노동단련대에 보내져 2달 정도 있었다. 98년 99년에는 사람이 무리로 죽어나갔다. 단련이 많이 심했는데, 도주자가 생기면 온 밤 추운데 세워두고 사정없이 때렸다. 남자들은 죽기 직전까지 맞는 경우가 허다했다. 끼니는 소금물에 강냉이 송치가 섞이고 겨 껍데기가 둥둥 뜬 죽을 주었다. 자살해 죽자고 마음먹었는데 언니가 매일같이 면회와 아들이 기다리니 자살하지 말라고 하였다.

보통 중국에서 직접 붙들려온 사람들은 무조건 6개월은 노동 단련대에서 일을 시키는데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내가 직접 목격한 것만 해도 열 명은 죽었다. 그 안에서 6월 경 총살을 목격했다. 죄목은 인신매매였는데 맨 앞에 세우고 기둥에 묶어서 머리, 배, 무릎 쪽으로 3발씩 쏘았다. 4명이었는데 다 남자고 남양사람들이었다.

나는 생활을 잘해서 6월 8일부터 8월 8일 까지 있어야 하는데 8월 8일 전에 나왔다. 보통 노동단련대 퇴소식이 굉장하다. 퇴소식때 말을 잘못하면 연장시키기도 하는데 나는 퇴소식 없이 퇴소했다. 담당 보안원이 이제 또 중국가면 감옥 가니깐, 가지 말라고 했다. 노동 단련대에서 나오는 길로 파라티푸스에 걸렸다.

온 몸에 맥이 없고 한발 한발 옮겨 겨우 집에 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져서 고열로 시달렸다.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었으나 언니가 나를 살리자고 강냉이 10킬로와 돼지고기 4킬로, 사과 3알을 사왔다. 아들을 앞에 두고 내 목으로 그 음식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언니 몰래 아들에게 고기와 사과를 먹였다. 그래도 약 한 번 안 먹고 파라티푸스를 이겨냈지만 그 후, 여름바람에도 춥고 살이 돋아나고 밤에도 옷을 입지 않으면 잠을 못 잤다. 정신을 차리고 집을 둘러봤는데 먹을 것도 먹고 살 것도 없었다. 그래서 북에서는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시 중국으로 갈 결심을 하면서 쌍둥이 언니와 상의했다.

중국에서의 은둔 생활

언니는 중국으로 가면 내가 어디서 살고 있는지는 알아야겠다며 아주바이(언니 남편)와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라고 했다. 파라티푸스를 앓고 한 달이 지난 다음 아주바이와 함께 소암 양수장을 건너서 백령촌에 들어섰다. 시집을 가야겠는데 줄이 없어서 보름을 기다리기로 하고 아주바이가 다시 조선으로 들어갔다. 보름을 기다리는데, 그곳에는 돈 벌이를 하러온 북조선 남자들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마지막 날이라고 송아지를 잡고 실컷 놀게 해놓고는 경찰을 불렀다. 춤추며 놀다가 변방 부대가 에워싸니깐 도망치면 누구라도 살게 되니깐 이제부터 뛰자고 하였다. 3명은 뛰고 7명은 붙들렸다. 공안이 전기 방망이를 들고 때려서 병신이 된 사람도 있었다. 나는 붙잡힐까 무서워 벼를 놓아두는 곳에 숨어있었다. 그때부터 중국 공안에 잡힐까봐 두려워 산속에 숨어있기도 하면서 가슴조이는 날을 보냈다.

아주바이는 약속된 날짜에 들어왔고 나와 함께 걸어서 도문에 도착하였다. 춘양진의 목강동집에서 일하는 최동학이란 사람이 전화 후 마중나왔다. 그 사람은 우리를 데리고 춘양에 들어가 남자를 소개하는데 소개하는 사람 둘이 500원씩은 가져가야 된다고 얘기하기에, 나는 8살 먹은 아들이 있고 동복도 없고 신발도 없고 먹을 것도 없지만 아이는 책임져야 하니 나도 돈을 받아야겠다고 했다. 그러자 소개하는 사람이 나를 2500원에 팔아야겠다고 하였다. 나를 택한 남자가 모자라고 맘에 들진 않았지만 모두가 살아야 했고 아주바이가 중국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곤란해지기 때문에 그 남자에게 가기로 했다. 그 다음날로 아주바이에게 1500원과 아들 옷가지와 과자 등을 사서 같이 보냈다.

언니와 간신히 연락이 되어 내 아들을 보내달라고 했더니 1999년 4월 22일 장마철이 아닌데도 비가 너무 많이 와 강이 물이 넘쳐나 건너기가 힘든 상황에서도 언니가 내 아들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넜다. 물이 머리 위까지 넘쳐나고 물살이 세서 도저히 건널 수가 없게 되자 언니는 양수장 사람한테 가서 동생에게 받아서 100원을 줄 테니 건너달라고 부탁하니 그 사람이 도움을 주었다. 언니와 아들을 만나니 너무 반가웠다. 언니는 나에게 너는 돈을 왜 안 보냈냐면서 남편이 때려서 3일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고 하였다. 옷, 신발, 과자를 다 보냈는데 일절 전해주지 않은 것이었다. 아들을 데려다 준 언니는 그 길로 다시 북으로 돌아가 남편에게 동생에게서 받은 돈이 어디 있냐고 보채자 그제서 쓰고 남은 900원을 주었다. 아주바이는 그 동안 몰래 인신매매를 많이 해서 북조선에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 되어서 99년 12월에 안 가겠다는 언니와 어머니를 데리고 도강을 했다. 그때 내 중국인 남편이 언니식솔들 셋집과 일자리를 얻어주어서 따로 살았다. 또한 남편 형이 공안국에 힘써서 아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산창에서 일했는데 계속 마작을 해서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그 당시 나는 파라티푸스를 앓고 난 다음이라 일할 형편도 되지 못했다. 남편은 아들을 많이 미워했다. 나는 남편에게 나는 못 먹어도 괜찮은데 애 먹는 거 가지고 왜 그러느냐, 애를 왜 계속 구박하느냐고 그랬다. 또 당신은 애도 못 키워봤으니 남의 새끼 고울 리 없다며 이해한다고 그랬다. 하지만 아들은 내 가장 큰 재산인데 당신이 싫다고 하니 어떻게 같이 살수 있겠냐며 갈라지자고 하니 남편은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했다. 하지만 한 달도 못가 다시 아들을 구박하기 시작했다. 합의를 보고 2002년 3월에 갈라섰다. 그 해 가을까지 언니네에서 아들을 데리고 있었다. 당시 언니는 산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나무를 접착하고 문짝을 붙이는 일을 했다. 나도 일하러 갔는데 약이 너무 독해 비염이 심해져 일하기가 너무 힘들어 그만 뒀다. 언니와 엄마도 일하지 말라 하였다. 언니가 9월에는 산에서 내려와 잣 따는 일을 하였는데 거기서 알게 된 사람이 자기에게 동생이 있다고 소개하여 그 사람과 만나서 살게 되었다.

이번에 만난 사람은 똑똑하고 착했다. 그쪽에서 마음이 있다고 하고 하여 나도 괜찮은데 아들만 구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니 그 사람은 신경 쓰지 않게 잘 해주겠다고 했다. 그 사람이 빚이 있다고는 했으나 아들에게 잘해준다고 하여 나도 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길림성 춘양진 양강촌에서 살게 되었는데 남편은 농사를 지었다. 아들이 똑똑하고 공부도 잘해서 선생님도 중대장을 시키고 동네나 학교에서도 이름이 높았다. 남편도 흐뭇해하면서 학비는 돈이 없어도 어디서 구해 와서 내주었다. 나는 남편에게 빚도 갚고 재밌게 살자고 하며 청도에 나가서 돈벌이를 해야겠다고 했다. 청도에서 사발 닦는 일로 한 달에 800원을 벌었는데 두 달 동안 벌은 1600을 고스란히 남편에게 부치니 남편도 좋아하였다. 하지만 아들 걱정이 되어 두 달 후에 다시 돌아와서 농사일을 도왔다.

그 해 12월 경 아들이 한족 애와 싸우게 되어 그 애 이빨을 부러뜨렸는데 고소하겠다고 난리도 아니었다. 난 사정을 얘기하면서 천천히 라도 벌어서 병원비랑 좀 더 보태서 물어주겠다고 하니 고소는 하지 않았다. 아들도 속이 상해서 어머니 나는 못 먹어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조선 땅에 살고 싶다 하였다. 그 달 어머니는 내가 사는 곳에 놀러 와서 풍을 일으켜서 쓰러지셨다. 항상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던 차라 500원의 비상금은 챙기고 있었는데 그 돈을 어머니 고치는 데 썼다. 노력을 다해 어머니가 좀 좋아지셨다. 하루는 아들이 배가 아파 병원으로 데려가는 사이에 당신 때문에 딸이 고생하고 손자가 아프다고 생각하셨는지 혈압 내려가는 약을 다 드셨다. 집에 와보니 눈이 돌아가시고 혀가 말려가고 있었다. 2003년 2월 13일 돌아가셨는데 남편이 어머니 장례식도 잘 챙겨주어서 그 남편에게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다. 68세까지 사셨는데 중국에 와서 잘 드셨어도 산으로 도망을 많이 다니셨던 지라 마음고생이 심하셨다.

끔찍했던 보위부

3월 7일 다시 청도로 돈 벌러 나갈 준비를 하던 중 남편의 조카 한명과 그 부인인 북한여성과 같이 갔다. 기차간에서 차표검열을 하는데 나는 중국말을 잘해 무사히 통과했지만 같이 간 여자가 머뭇거리는 바람에 조선 사람인 게 들통이 나서 나까지 붙잡히게 되었다. 끌려가면서 외사과 직원에게 중국 변방대에서도 돈을 뺏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렇다고 하면서 잠시 자리를 비워주길래 가지고 있던 300원을 자궁에다가 숨겼다. 중국 변방대에 가니 옷을 다 벗기고 빨간 죄수복을 입혔다. 거기서는 고문하지 않았고 언제 들어왔냐는 등의 조서만 받아냈다. 변방감옥은 으리으리한 게 호텔 같았다 조선에서 지어줬다는데 지은 지 1년 정도 됐다고 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대우를 잘 해줬다. 하루만에 3월 9일 조선으로 보내어 지고 송환되어 온성보위부로 보내어졌다. 옷을 다 벗기고 모조리 검사한 다음 죄수복으로 갈아입혀지자 이름은 없어지고 번호로 불렸다. 조사할 때 알몸으로 뽐뿌질 100번을 했다. 그때는 맞지는 않았다. 보위부에는 400명 정도가 있었는데 1호 감방은 여자 감방 이였고 2호와 3호는 남자 감방이었는데 3호는 한국행을 시도 한사람들을 수용했다. 3평 남짓 크기에 감방에 보통 30명 정도를 수용하는데 사람이 많아 엉덩이를 붙이고 다리를 구부리게 하여 겹치게 앉아 있어야 했고 그런 자세로 잠을 자야만했다. 감방 안에 사람이 꽉 차고 숨쉬기가 힘드니 심장마비가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은 빼고 다시 감방 밖에 있는 사람으로 채워 넣었다. 옆에 사람과는 얘기도 할 수 없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게 하여 앉아있게 하였다. 특히 남자 감방에서 곁눈질이라도 하면 머리를 벽에다 부딪치게 하면서 소리가 약하거나 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킨다.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정도였다.

앉아있기 불편해서 좀 움직이면 손가락을 내놔 하면서 구둣발이나 쇠파이프 같은 걸로 손톱을 찍어나가고 손가락이 뭉그러질 정도로 때린다. 여자들이 보다 못해 비명을 지르면 동정할 가치가 없는 것을 동정한다고 해서 사정없이 때린다. 감방은 시멘트 바닥으로 장판도 깔아있지 않고 먼지 가득한 담요 같은 것도 깔게 하는데 사람이 콩나물시루처럼 있으니 답답하여 나중에는 그것도 걷어내게 되었다. 나는 보위부에서 20일 정도 있었는데, 한국 텔레비를 봤는가 기독교를 아는가 물어보는데 나는 농촌에서 텔레비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 있었다고 얘기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약하여 묻는 것을 답하다가 영영 못나오는 데를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보위부에 있는 동안 바깥구경은 아예 못했다. 끼니는 국수를 풀어지게 하여 맑은 죽 같은 것을 준다. 화장실은 감방 구석이 있는데 물이 나오지 않아 냄새가 심하게 났다. 화장실을 갈려고 하면 큰소리로 선생님 몇 호 감방 몇 번 누구누구 소변 볼 수 있습니까 하고 물어보고 대답을 하면 그제야 소변을 볼 수 있었다. 수도 물이 안 나와서 물통을 놔두는 데 먼저 세수 하는 게 임자라서 세수도 잘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의견이란 게 있을 수 없었다. 감방에 있는 동안 3번 불려 나갔는데 거기서 언니 남편이 인신매매와 연관이 되었다고 말을 들었으니 자백을 하라는데 나는 아무 관련도 없었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얘기했다.

그 중에는 왕청에서 중국 조선족과 애를 낳고 살다가 잡혀온 여자가 있었는데 옷이 보기에도 좋아 보였다.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다가 그 여자가 남편이 돈을 잘 벌어서 이 옷이 다 중국 돈 1000원이 넘어간다고 말했는데 그걸 어떤 사람이 그녀가 사회주의 나라 옷은 나쁘고 남의 나라 옷은 좋다고 거짓으로 말해서 고문을 받게 되었다. 나는 네가 청백하고 나라를 팔지 않았으면 끝까지 한마디로 안했다고 말해라, 끝까지 견뎌라 라고 얘기했지만, 계속 불려나가서 고문을 받았고 고문이 또 너무 고되다 보니깐 그냥 인정해 버렸다. 그 날 자백을 하고 와서 많이 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러다가 그 여자는 도 보위부로 끌려갔고 그 후로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때는 당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 도강한 사람들은 처벌하지 말라는 방침이 내려와서 노동단련대로 가지 않았다. 3월 25일 풀려나와 4월 3일에 수구포를 통해서 또 중국으로 넘어갔다. 산에 오르니 변방대가 여러 곳을 지키고 있었다. 해란강을 지나서 건너 마을에 가서 남편한테 전화를 하고 언니가 택시비를 대어 주어 왕청 양강촌까지 왔다. 4월 5일 엄마 산소를 들르고 예전 남편집으로 돌아갔다. 농사를 하다가 연길에 일자리를 얻으러 갔는데 그 사이 5월에 언니가 중국공안에 붙들려갔다. 그 때 중국에 사스가 퍼져 북한에서 탈북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인데, 언니의 경우 언니 전 남편의 인신매매 건이 있어서 붙들리게 되어 북송되었다.(언니 남편은 2000년 9월 20일 병으로 죽었다) 그 때 언니는 중국 남편이 있었는데, 남편이 언니 아들을 어디에다가 판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하기에 조카한테 나의 주소를 가르쳐주고 외우게 하였다. 2003년 11월 2일 목단강 진정부에서 왔을 때 언니 남편이 조카를 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조카를 데리고 오면서 조선 사람인게 들통이 나서 또 다시 잡혀가게 되었다.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서 공안이 아들이 어디 있는가를 말하라는데, 말하지 않자 찾아다니며 학교에서 아들을 데리고 왔다. 11월 13일 변방대로 옮겨져서 왕청에서는 누구하고 살았는지 등을 조사했다. 아들은 조선을 잘 모르고 중국에서 학교 다닌 것 밖에 기억을 못하자 당시 조사하던 사람들도 아들은 거의 중국 사람인데 조선에 가면 어찌 살려나 하면서 안타까워했다. 16일 도문 변방대를 넘었다. 당시 보위부 명절이라 데리러 나온 사람이 한명 밖에 없었다. 그 사람이 어디서 본 인상이라고 말하자 소름이 다 돋았다.

아들과의 헤어짐, 지옥 그리고 존재의 이유

도문 변방대에서는 돈이 있는지를 검사하고 가져온 짐들 중 좋은 것은 다 도적질해 간다. 나는 경제난으로 탈북 하였기에 고문은 받지 않았으나 다른 사람들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나는 문건이 넘어가지 않았지만 한국행 시도, 기독교와 관련된 사람은 문건이 넘어간다. 남자들은 발로 차이고 들어서자마자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숙이고 있어야 했다. 보위부만 들어가면 짐승 취급을 받는다. 보위부원들도 ‘우리에게 너희는 짐승이야, 어떤 취급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라고 말했다. 우리들이 있는 감방은 한쪽 면은 쇠창살로 되어있고 한쪽 면에 겨우 기어 들어갈 정도의 작은 문이 있다. 감방 크기는 3평정도 된다. 쇠파이프로 때리고 움직이지도 못하게 한다.

아들은 처음 끌려 온 거라 겁을 많이 먹고 있었다. 13살이었던 아들은 키도 커 북조선아이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보였다. 하루는 보위부원이 아들에게 “너 중국말 알아?” 하면서 중국어로 뭐라고 하는데 아들이 못 알아듣자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아들 머리를 구타하니 아들이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다. 또, 중국에선 잘 먹던 애가 잘 먹지 못하니 허약상태에 걸렸다. 불려나가는 아들이 “어머니 난 눈앞이 새까매서 일어나지 못 하겠습니다” 하는데 아들이 무슨 죄가 있냐는 생각과 함께 마음이 아파 그냥 눈물만 흘리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군안전부 소집일인 12월 2일 보위부를 나와 동포보위부로 가게 되었다. 자동차로 가는데 바람이 쌩쌩 불고 너무 추웠다. 나는 어느 정도 추위에 단련되어 있었지만 아들은 그렇지 않았다. 아들의 손과 발이 얼어가서 아들 발을 배에다 놓고 내 몸 겉옷을 벗어 감싸주어도 얼은 몸이 녹지 않았다. 도착해서도 신발 벗고 들어가라고 하는데, 바닥이 너무 차가워서 아들을 내 품에 안고 앉아 감당하기가 힘들었지만 그 찬 발이 혹 동상 걸릴까 걱정이 되어 온 밤 아들을 앉고 있었다.

나는 노동 단련대에 가야하고 아들을 고모 집으로 보내려고 하는데 아들이 너무 허약상태였다. 주재원이 와서 돈이 있으면 달라 해서 아들에게 뭐 좀 먹이려고 100원을 주었더니, 내 몸에서 돈이 나오니 다시 몸을 수색하여 나머지 있는 돈을 다 빼앗겼다. 아들을 고모 집으로 보내면서 나는 노동단련대에 가야하니 옷가지를 가지고 오라고 하니 아들이 눈물을 흘리며 대성통곡하였다. 열흘 있으면 온다고 아들을 달래도 아들은 노동단련대를 알고 있었는지 통곡하며 나를 따라 오겠다고 했다.

동포에서 온성까지는 열두 정거장인데 종성에서 하룻밤을 묵어갔다. 어떤 여자는 몸이 너무 허약해서 가다가 쓰러지기를 반복하고 잘 걷지 못하니 가는 내내 구타를 당했다. 보위부는 그나마 깨끗한 편에 속했다. 중국에서 바로 온 사람들이라 이도 없었다. 노동단련대에는 이도 많아 앉아 있으면 이가 온 몸으로 기어 올라온다. 노동단련대에 들어가서 입소식을 하는데 언제 탈북하고 언제 들어왔는지를 말하는데 말을 잘해야지 못하면 가차 없이 구타당한다. 한 사람 한 사람 말하고 얼마 동안 있을지를 결정 받는 데 나는 6개월을 받았다. 어떻게 살아갈지도 깜깜했다. 북한에 있는 전 남편은 내가 죽기를 바래서 아들이 면회를 가라고 성화해도 하는 척만 하고 면회 한번 오지 않았다.

이번에 잡혀 와서 단련 받는 데, 그해 9월 달에 김정일 방침이 떨어졌다고 한다. 도강자들은 최하 단련대 6개월이라면서 물리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교육하라고 했다고 한다.

노동단련대에서는 노동하는 사람들은 간혹 누워서 자게도 하지만 사람이 많아서 쪼그리고 앉아서 잠을 자야한다. 감방 안에 화장실은 따로 없었고 통 두 개를 들여 놓으면 대 소변을 거기다 해결해야 했다. 통에 대소변이 넘쳐나기도 했다. 냄새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참을 만 했다. 이가 너무 많아 자기 전에 이 잡이를 한번 하고 자야 했다. 6시에는 무조건 기상해야 했다. 새벽 5시, 6시에 벌처럼 튀어나가서 바깥에 줄을 서야 한다. 소금물에 겨 가루를 조금 타서 주는 데 다른 반찬은 구경도 못했다. 그렇게 조금 주고 일하러 가는 데 12시 정도에 오전 일이 끝난다. 단과(돌멩이를 얹히는 나무 들것) 조차도 얼마나 무거운지 거기다 돌멩이까지 얹어야 하니 팔과 어깨가 남아나지 않았다. 하도 무거우니 어떤 사람들은 옷을 찢어서 손잡이와 연결하여 어깨에 걸치기도 했다. 빨리 걷지 앉으면 때린다.

아들 고모가 한번 면회 왔는데, 단과를 걸치려고 배낭이라도 구해달라고 했더니 배낭을 구해 와서 거기에 단과 손잡이를 걸쳐 들고 다녔다. 그렇게 매일 일을 시키는데 몸이 성치 않았다. 살아나갈 것도 막막하고 밤에는 열이 40도로 끓었다. 아프다고 말하면 엄살떤다고 뭐라고 그러고 의사가 하나 있긴 해도 돈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열이 나도 손쓸 도리가 없었다. 그 안에서 내가 사람 죽는 것을 목격했다. 한 사람은 24살 남자였는데 순전히 맞아서 죽었다. 또 한 남자는 중국에서 30년 정도 산 중국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도 붙잡아 강제 노동을 시키고 그것을 견디다 못해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오후 일을 끝내고 저녁 5-6시에 들어와서 학습을 시킨다. 고된 노동에 추운 날씨에 정말 생활이 고되었다. 학습시간에는 사회주의에 대한 학습과 조국을 배반하면 안 된다는 것들을 외우게 한다. 졸거나 외우지 못하면 처벌한다. 방으로 들어갈 때도 구호도 1번부터 차례로 질서정연하게 하지 못하면 다시 해야 한다. 또 도강할 것인가 등을 물어보면 큰소리로 ‘다시는 아니 그러겠습니다’ 하고 바르게 대답하여야 한다.

먹지 못하고 몸이 아프며 온 살이 쑤시고 땀구멍마다 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감방에 들어올 때 빨리 들어와야 자리를 차지하고 눕기라도 할 수 있었다. 감방에 온돌이 들어오는 데가 한군데 있었는데 그 자리를 제외하고는 추웠다. 그중에서 나무 당반이라고 침대처럼 나무를 층층이 벽에 붙여 놔서 잘 수 있게 만든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이 가장 춥웠다. 노동 단련대에는 도망가는 사람이 많아 그 사람들을 잡으려고 온종일 전기를 주어 밤이면 뿌옇게 불을 켜놓는다. 그 안에서는 보통 초로 불을 켜서 생활을 한다. 그래도 98년 99년보다는 죽어나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사람이 죽어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중국에서 임신하고 잡혀온 여성들에게 중국 놈이 그렇게 좋더냐고 하며 배를 차고 여자 사타구니를 차서 강제로 낙태를 시키기도 했다. 그것은 1998년도 노동단련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달째 되는 때는 몸이 너무 허약해져서 밤에는 계속 열이 났다. 다행이 단련대 단련지도원이 인민학교 때 선생님의 아들이여서 신경을 조금 써주었다. 한 날은 감방에 남아 있으라고 한 뒤 의사선생에게 보여주었다. 형편없이 말랐고 가슴은 납작해졌고, 갈비뼈는 눈으로 몇 개인지 셀 수 있는 정도였다. 숨이라는 게 하나도 없고 맥이라는 것도 없으니 선생이 가족이 누가 있는가 하고 물었다. 내가 14살짜리 아들이 하나 있다고 하니 힘쓰는데 까지 힘쓰겠다면서 병보로 나가게 하겠다고 말해주었다.

날마다 기도했다.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죽게 만드는가. 아들이 건사하게만 해달라면서 ‘존재의 이유’(한국 가요)를 날마다 속으로 불렀다. 아들아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생각하면서 몸을 건사하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매일 울었다. 하루는 형편없이 앓았는데 꿈을 꾸었다. 머리를 찧어 자살을 하려는 데 누가 나를 끌어 일으키는 느낌이 들어 보니 돌아가신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너는 죽으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 뒤로는 언니와 아들이 오는 꿈을 계속 꾸었다.

그 때 당시 제대로 걷지도 못했고 낮에 의사선생한테 갔을 때 밤보다 열이 내렸다고 말했는데 그때 온도가 38도였다. 그러자 선생이 병보를 제기한다고 했다. 일하러 작업장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왜 나왔냐고 하시면서 병원에 가자고 했다. 병원에 가서 몸무게를 재보니 중국에 있을 때는 53킬로 하던 것이 살이 빠져서 28킬로가 나왔다. 3·8절 날이라서 이틀 동안 기술부원장을 기다렸다. 얼굴과 몸이 앙상하고 볼품없어 몸을 검사하니 바로 결제를 해주었다.

결제를 받기도 힘들고 잘 주지도 않아서 결제를 못 받으면 엄살떨었다면서 더 심한 구타와 노동을 당해야 한다. 하늘이 도왔는지 바로 결제를 받아서 이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까지 12정거장을 걸어가야 하는데 안전원이 걸어갈 수 있겠냐고 물어보면서 3월 16일날 종성까지 가는 차가 있다고 해서 최정애라는 여자와 함께 종성까지 갔다. 그 후 두 시간이면 걸어가는 거리를 엉금엉금 기다시피 걸어서 저녁 늦게 도착하였다.

노동단련대에서는 구금된 사람들끼리 도적질이 심한데, 나는 도적질도 안하고 하니 사람들이 나에게 물건을 맡기거나 했다. 물건을 맡기고 찾아갈 때 고맙다면서 음식을 조금 주기도 하면 나는 그것을 조금 먹고 되팔기도 하여 조선 돈 300원 정도를 모을 수 있었다. 힘을 쓰기가 너무 힘들어 가는 길에 뭐 좀 사먹고 또 두부를 먹으면 다시 감옥에 가지 앉는 다는 말도 들어서 두부도 사먹었다. 그걸 먹고 나서 기운을 차리게 되었다.

안전부에 도착하니 소장이란 사람이 다음날 9시에 나오라고 했다. 몸도 아프고 힘도 없고 하여 나가지 않았더니 그 다음부터는 별 말이 없었다. 아들이 어머니 살아 나와서 정말 감사하다고 했다. 집에 와서 한 달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계속 먹기만 하였다. 아들이 어머니 배가 나왔다고 해도 허기가 져서 계속 먹게 됐다. 아들이 나를 보며 웃으니 고모가 조카도 웃을 수 있는 구나했다. 아들은 나 없는 동안 웃지도 않고 계속 먼 산만 바라봤다고 한다. 아들 맘속에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저랬을까 싶어서 마음이 아팠다. 내가오니 아들 기가 좀 사는 듯 했다.

한국행으로의 결심

영양보충을 해야 또 두만강을 건넌다는 생각에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단련대에서부터 가다가 죽어도 꼭 한국을 간다고 맘먹었다. 중국에서도 살 수 없었다. 항상 문을 안으로 잠그고, 발자국 소리에 놀라 뒷산으로 도망치며 살아야 했다. 중국에서도 숨어 살아야 하고, 아들도 자유스럽게 키우지 못해 자유 대한민국에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북으로 돌아와도 집도 안주고 식량도 안주고, 벌어가지고 간 돈까지 다 뺏어 가는 나라인데 미련도 없었다. 우리를 다시 탈북하게 만드는 것이 조선이라는 나라다.

중국으로 들어가야만 살 수 있어 노동단련대에서 나온 지 한 달이 지나 4월쯤 되니 다리에 힘이 생겼다. 나 먼저 중국으로 들어가기로 하고, 알선해주는 사람에게 돈을 준다하고 동포에서 종성으로 내려와서 길을 나섰다. 넘기로 예정했던 19일 날은 못 넘고 21일 다시 탈북했다. 삼봉을 넘어서 개산툰에 도착해서 강릉이란 곳에 닷새를 있었다. 거기 있는 사람에게 차비에다가 100원을 더해주겠으니 춘양으로만 데려달라고 했다. 언니에게 600원을 얻어서 알선해준 사람 400원을 주고 군대사람에게 100원을 주었다. 언니 남편은 자기 때문에 내가 잡혀갔으니 언니가 돈을 줘도 별 말이 없었다.

삼봉으로 와서 열흘 있다가 접선하기로 했는데 5월 1일 접선 장소에 사람이 나오지 않아 계속 기다리니 경비대에서 한 여자를 보내어 그날 갑자기 검열이 들어와서 못나왔다고 전했다. 그 다음날 일을 다 처리하고 아들을 데려올 수 있었다. 아들을 씻기고 삼봉까지 가서 이틀 있다가 옷을 갈아입히고 5월 20일 아들을 데리고 넘어올 수 있었다. 개산툰까지는 언니 남편이 도왔다. 언니네 집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니 문이 안에서 잠겨 있었다. 언니가 없는가 하고 발을 돌리려는데 창문 틈으로 언니가 얼굴을 내밀었다. 언니도 공안에게 잡혀갈까 무서워 숨어있던 것이었다.

언니와 얘기하다가 이렇게 숨어 지내지는 못하겠다면서 한국으로 가자고 했다. 언니를 옮길 때 춘실이라는 먼저 한국에 간 여자가 전화가 왔었다. 중국 돈 4만 5천원이면 청도 대사관으로 가서 한국으로 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언니는 한국으로 먼저 가게 되었다.

언니의 중국남편은 심보가 고약한 사람이었다. 나도 느낌이 안 좋아 아들을 다른 집에 맡겼다. 나와 아들을 돌보아 주던 곳이 몇 곳 있었는데 경찰이 그 곳에 두 번 왔다갔다. 다행이 그 집 딸이 똑똑하여 그런 사람 없다고 잡아떼어 안 잡힐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도망 가야했는데 심리평 고란쪽으로 백리길을 돌아가야 하는 곳이었다. 한족들만 사는 곳이었는데 버티기가 힘들어 다시 결혼을 할까 생각도 해보고 소개도 받았다. 하지만 사람이 게으르고 머저리 같았다. 그 사람에게는 밥은 해 줄 수 있으나 그 이상은 안 된다고 하였다. 그 사람도 동의했다. 기회가 오길 기다리면서 그렇게 두 달을 버텼다.

그 해 7월 3일은 나에게 가장 기쁜 날이었다. 언니가 청도 대사관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전화한 것이었다. 언니는 제발 붙들리지만 말고, 목숨만 부지하고 있으라고 했다. 화북에서 숨어 살면서 하루는 언니 남편을 보게 되었다. 무서워서 숨어 있다가 화남 쪽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그 후 먼저 온 언니의 도움과 북한인권시민연합의 도움으로 아들이 먼저 올 수 있었고 조카와 나는 다시 언니의 도움을 받아서 2006년 5월 태국을 거쳐 한국에 올 수 있었다.

2007년 7월 27일 정미옥(함북 온성군 산성구 출생, 2006년 5월 입국)

자료제공 : 북한인권시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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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동 2007-07-30 15:34:01
    잘 됐엉요. 참 남들에게는 너무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가 겪어온 피 눈물 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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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꽃지기 2007-07-30 16:52:30
    읽는 동안 절로 목이 메이는 이 내용조차도 님이 겪었던 일들의 한 부분일 것임을 익히 짐작합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늘 건강하시고 다복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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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의기쁨 2007-07-30 18:00:04
    글을 읽으면서 지나온 나의 지난날이 생각나여 많이 울었습니다
    한국으로 오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힘들게 찾아온 이 길.우리 서로 열심히 살아서 다시는 지난날이 되풀이 되지 않게 힘있게 삽시다.
    난 2007년 5월달에 퇴소한 새터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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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찻집 2007-07-31 01:00:28
    사실인가요?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와 한 피를 나눈 한쪽 동포들이 이렇게 살고 있다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미옥님. 이제부터라도 행복하게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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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남^^~ 2007-08-01 11:03:08
    미옥 누나 화이팅 ^^~59반 지금의 27반 6호 엽집 동생이 ~~
    오늘 하루 행복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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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그네 2007-08-02 03:37:12
    당최 몇번을 결혼한거냥...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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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분이 2007-08-02 04:10:04
    잘 됏어요 항상 행복하고 잘살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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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구 2007-08-06 22:08:49
    산성로동자구는 혹시 남양에도 있나요
    저의 동생이 산성에 시집을 갔는데 혹시 아시나 해서요
    남편 이름이 석철만이라고 뜨락또르 운전수 한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아시면 답변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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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수민 2007-11-22 18:34:05
    글 잘 읽었습니다. 이해가 갑니다.그리고 북조선만의 내부적 현실입니다.이 글을 누가 믿든 못 믿든간에 사실이라는 점 입니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힘 내시고 이제부터 행복하시기를 기원 합니다. 너무 과거에 집착하시여 어두운 마음을 가지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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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랭이 2007-11-28 22:39:00
    눈물이 앞을가려 읽을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으로서 할수없는 만행을 지금 같은민족이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습니다. 행복하세요. 저도 믿기지 않는 고통을 겪고있는 북한동포들을 위해서 하루빨리 통일이 되도록 빌겠습니다.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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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게요 2007-11-28 23:32:55
    수기를 읽으면 아 나도 저런적이 있어지라는등 공감이 가야 하는데 탈북자분들의 수기를 읽어보면 정말 공감이라는 것보다 상상을 초월해요.영화에서나, 꿈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을 겪고 계시니 보통 우리가 힘들다라는 개념을 떠나 고통이 크시겠지요?ㅠ 수기보고 다짐 하는바가 있다면 상처많이 받으신 탈북자분들께 댓글달때 한번이라도 더 생각하고 달고, 냉정하고 현실적인 글보다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더해드려야지 마음 먹는데 마음뿐이네요.죄송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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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정 2008-04-07 10:49:36
    미옥씨. 안녕하세요? 수기넘 잘 읽었어요. 정말 눈물 없이는 볼수 없는 글이였어요. 저도 북한에 애들을 두고 온 여성이라서 수기를 보며 넘 울었어요. 언제면 우리 애들도 데려올수 있겠는죠? 같은 동포 여성이라서 한번 껴안고 실컷 울고 싶어요. 열심히 벌어 큰 부자가 되는 그날 꼭 만나리라 기대하며 미옥씨의 사업에서 큰 성공을 바라며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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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뼈속남한 2009-07-13 12:00:00
    어떻게 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어 들어와서 읽어보게 돼었습니다 아이디를 보다시피 저는 남한에서만 지내게 되어서 북한에 대해서 잘 알지도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냥 티비에서 보여지는 그런정도 탈북자라 해도 이렇게까지 고생하려나 했는데 ... 정말 무섭네요 ... 죄송하지만 그런경험이 없던터라 공감은 안돼지만 무섭다는 말밖에 그리고 고생너무 많이 하셨다는 말밖에 못하겠네요 상황을 역전시켜서 북한이 잘살고 자유국가이며 남한은 그반대라고 했을때 오한이 돋네요 ..남한에 잘오셨다고는 말못해드려요 그거야 개인의견이니깐요 개인의견이라면 정말 잘오셨어요 북한이나 중국보다는 숨어지내고 그런건 아닐테니깐요 근데 어쩌면 복잡하고 빡빡한 일상의 연속이랄까.. 저야 20년 가까이 남한에 있었으니 적응하고 잘살고있지만 글쓰신지 1년이 넘고 한국오신지 4년째이니 어느정도 적응하고 잘살고 계시겠죠
    꼭 힘내서 열심히 살길 바래요 님글 보고 많은걸 느꼈습니다 제가 얼마나 행복한 생활을 했는지 그전엔 제앞에 놓여진세상을 부정적으로만 생활했었는데 얼마나 배부른 투정이였는지 알겠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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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자몽 ip1 2015-02-17 16:52:24
    글을 읽으면서 충격이랄까?한국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너무나 많이 겪어 가족이 모두 우리 나라에 정착하게 되었다니 너무나
    다행스럽고 반가운 일이네요.
    더욱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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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리현 ip2 2015-10-28 04:53:13
    맙소사,,,공산당 이라기보다 인간 이라 말하기 어려운 악종들이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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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암 ip3 2016-06-04 00:22:56
    정말,,,정말 생지옥에서 살아 오셨네요,,,,지구상 어디에 그런 참상이 있을까요,,,,부디, 부디 자유의 땅에서 행복하게 잘사셔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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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암 ip3 2016-06-29 02:40:00
    님의 글을 또 읽게 되네요,,,마치 거짓말같은 처절한 경험을 하셨어요,,,마음이 너무 아파요,,,그러나 언니와 조카, 또 아들이 모두 다들어왔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이젠 아픈기억을 악몽으로 빨리 잊으시고 굳세게 열심히 살다보면 꼭 행복한 날이 오겠지요,,,,당신을 환영하며 사랑합니다,,,,이곳에서 태어나 편하게만 살아온 제자신이 죄스럽게 느껴집니다,,, 저도 어떻게든 탈북자들을 돕고 싶어요,,,수기를 읽기전에는 탈북하신분들이 그냥 막연히 목숨걸고 도강만 한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아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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