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 살자! - 곽인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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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이 되어서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던 북녘 동포들을 처음 만난건 1999년 어느 겨울이다. 그들을 만났던 곳은, 가슴 아프게도, 우리 땅이 아닌 중국에서였다. 1999년 7월, 난 중국에 갔다. 내가 다니던 대학의 미술학과와 중국 연변대학의 미술학과 사이에 교류작품전이 있었는데 학생대표 자격으로 나도 따라가게 되었다. 육지로도 갈 수 있는 곳을, 남북을 가로막는 휴전선 때문에 바다 건너 하늘을 빙 돌아 가야만했다. 연변은 한국의 지방 소도시 같았다. 언어가 통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낯선 길을 나서도 어려운 점은 없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의 물가가 굉장히 낮았기에 속된 말로 ‘돈 쓸 만한’ 여행이었다. 맥주 한 병 값이 한국의 연필 한 자루 값도 안되었으니 말이다. 우리가 멋들어지게 썬그라스를 쓰고 연변 대로를 활보하며 낮은 물가에 감탄하면서 갖가지 기념품을 사고 있을 때, 체포의 위협에 떨면서 숨어 지내고 단돈 1원을 구걸하기 위해 새까만 손을 내미는 나와 한 핏줄을 나눈 동포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북한과 중국 국경이 접하는 어느 별장에서였다. 외국에서 손님들이 왔다고 마을에서는 돼지를 잡아 큰 잔치를 벌였다. 취기가 돌자 술병과 잔을 들고 마을 주민들에게 술을 권할때, 나에게 무언가 말을 할 듯 말 듯 머뭇거리는 청년이 눈에 띄었다. 그는 탈북 후 인근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한국에서 대학생들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에 찾아왔던 것이다. 그에게 달리 해 줄 말도 없고,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어 그저 열심히 살라고 말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말없이 눈물을 흘리던 청년, 그가 내가 만난 첫 번째 북한 사람이었다. 혹시 한국에 왔을 수도 있을까 싶어 탈북자 체육대회 같은 행사가 있으면 참석자들의 얼굴을 빤히 살펴보는데, 그날 어둠 속에서 보아서인지 얼굴이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꿋꿋이 살아가길 기도할 뿐이다. 며칠 사이 친해진 연변대학의 학생들에게 북한의 현실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그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연길시 어느 곳에 가면 ‘꽃제비’라고 불리는 북한의 어린 거지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니 궁금하면 그 애들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며칠 뒤 그 아이를 만나긴 했지만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매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10원짜리 중국 지폐 하나를 조용히 손에 쥐어주고 돌아섰다. 그 작은 만남은 내가 북한문제에 관심을 갖고 아예 직업으로 선택한 계기가 되었다. 나는 여행에서 돌아와 휴전선 건너 북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 관심은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2000년 이후 본격적으로 탈북자들을 만나면서 많은 일을 겪었다. 중국에서 수백 명의 탈북자들을 인터뷰했고, 때로는 며칠 동안 한솥밥을 먹으며 북한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처음엔 잘 알아듣지 못하겠던 함경도 사투리도 익숙해져 이제는 제법 흉내도 낼 수 있을 정도다. 하루 종일, 때로는 며칠 밤낮을 함께 보내며 정을 쌓았던 사람들을 뒤로 한 채 떠나는 심정은 살점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기분과도 같았다. 2000년 여름에 만났던 어느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비행기 꼬리에 매달려서라도 제발 한국에 가고 싶소!" 며칠 뒤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는데 승객이 몇 명 되지 않았다. 텅 빈 비행기를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 빈 자리에 그 할아버지 같은 분들을 태워 한국으로 가면 안 되는 걸까 하고 말이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던 할아버지의 그 눈망울이 지금도 떠올라 가슴을 후빈다. 위장염을 앓고 있던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예 바짓가랑이를 잡고 나를 놓아주지 않던 아주머니도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의 손에 돈을 쥐어주고 "힘내시라"고 말하며 어깨를 두드리자 이내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나를 붙잡는 게 아닌가. 평양 출신의 아주머니였는데, 고생을 많이 한 분이었다. 그의 소식도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가장 기쁘고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쥐구멍에 숨고 싶을 정도로 미안할 때는, 중국에서 만난 탈북자를 우연히 한국에서 만나게 될 때이다. 다른 단체의 도움을 받거나, 스스로 한국행 경로를 개척한 경우이다. 2004년 겨울, 맹장염에 걸려 급하게 수술을 받아야 할 탈북자가 생겼다. 비법월경한 신분이니 중국 병원에 입원은 고사하고 간단한 진료를 받을 형편도 못되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탈북자를 치료해주는 의료시설을 찾았다. 한국의 독지가로부터 후원금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수술을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그 후 일년 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행사장의 맨 끝자리에 바로 그 탈북자가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역시 그가 틀림없었다. 중국에서 입었던 그 옷을 그대로 입고 거기에 앉아있었다. ‘하나원’ 교육과정을 마치고 사회로 나온 지 며칠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몽골 사막을 헤치며 어려움 끝에 한국행에 성공하였다 한다.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그에게 그런 말을 했더니 오히려 맹장수술을 받게 해 준 것에 고마워하며 "미안하지만 한국 생활에 어려운 점이 있을 때 많이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죽었던 사람을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이런 인연이 나를 기쁘게 한다. 물론 가슴 아픈 일도 많았다. 엊그제 인터뷰한 탈북자를 며칠 뒤에 찾아가 보니 잡혀버린 경우도 있었고, 누군가는 송환된 후에 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소문도 들었다. 나는 특정한 종교를 갖고 있진 않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 천지신명 등의 이름을 대며 제발 그들을 살려달라고 간곡히 기도한다.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울면서 매달리는 탈북자들을 뿌리칠 때마다, 나이가 한참 어린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간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탈북자들을 만날 때마다, ‘내가 저들보다 나은 게 뭐가 있어서……’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오로지 부모를 잘 만났다는 것 하나뿐이고, 나는 남한에서 저 사람은 북한에서 태어났다는 차이뿐이다. 그래서 부모님께 감사하고, 내 조국에 감사하며, 지금의 대한민국 건설에 일조한 선배들에게 감사한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북녘 동포를 처음 만난 1999년 겨울을 내가 잊지 않으려 노력하듯, 남한에 온 탈북동포들에게도 나는 "목숨을 걸고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던 그 ‘첫 마음’을 잃지 말라"고 당부한다. 때로는 남한에 와서 돌변하는(?) 탈북자들도 여럿 보았다. 어려웠던 과거를 보상받으려는 듯 사치를 일삼는 사람들도 보았고, 자신이 업신여김 당했던 과거를 잊은 채 약한 자 위에 군림하려는 못된 사람들도 보았다. 정착하지 못한 채 방황하던 중 범죄의 유혹에 빠진 사람도 있었다. 그들을 설득할 때마다, 혹은 면회를 갈 때마다 잔소리 하듯 ‘첫 마음’을 이야기한다. 낯선 곳에서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한국에서 제법 잘 나가는 사람도 이민을 가면 적응하는데 최소한 몇 년은 걸리는데, 완전히 다른 체제와 질서 속에 살던 사람이 단 몇 개월, 몇 년 만에 완전히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과한 욕심이다. 꿈과 이상은 높게 설정하되, 눈앞의 시련과 고초에 포기하지 말기 바란다. 내 인생의 가장 암울했던 시기를 떠올리며 다시 일어서자고 사람들을 격려한다. 국경을 넘을 때의 각오, 비행기에서 내려 막 한국땅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의 각오, ‘하나원’을 나와 처음으로 내 집에서 첫날밤을 보내던 날의 각오, 그런 각오를 유리병 속에 고이 간직해 두었다가 흔들리는 마음을 잡았으면 한다. 양손에 선물꾸러미를 들고 고향집을 찾아갈 수 있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희망을 안고 오늘도 열심히 살자. 우리의 과거는 서로 달랐지만 미래의 운명은 하나이다. 우리모두 ‘파이팅’! 2006년 10월 곽인중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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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잃고 가족잃고 희망마저 잃고 서럽게 지내던 지난날이 눈에 선합니다.
저도 평소에 "항상 처음처럼 살자"라고 스스로 자책하군합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곽인중님의 글처럼
정말로 '초심'을 잃지 않고 산다면 삶의 전부가 감사뿐이겠죠.
그런데 저부터도 안락한 생활속에 "초심"을 많이 잊고 사는 것 같아요.
지금도 북한에서, 중국에서 어렵게 사는 분들께 너무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