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홍선생이 직접쓴 지정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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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홍선생이 직접 쓴 진정서 퍼옴[2006-04-10 ] 본문서는 김덕홍 선생이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3 민사부 보정명령 에 따라 본 법원에 제출한《진정서》(근거자료)입니다. 진 정 서 본인은 전 북한 《노동당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 부실장으로 사업하다가 1997년 2월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정치망명자 김덕홍입니다. 본인은 공산계급주의 독재국가인 북한에서 《소시민성분출신》으로써 철이 들어서부터 출신성분에 따른 온갖 계급적 불평등과 불이익을 당하는 과정에 김일성 정치에 대해 깊은 불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것을 하나하나 되씹으면서 성장하였습니다. 본인은 1958년 사회안전부(지금의 인민보안성)에 입대하여 군복무를 하다가 《계급적 성분에 철저히 입각해서 독재기관 대열을 꾸릴 데 대한》김일성의 특별지시에 의해 3년만에 제대되면서 《독재기관(사회안전부)에서 군사복무 한 경력》이 정상 참작되어 1961에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으며, 1965년 대학을 《수석졸업》한 후 1981년 9월까지 김일성종합대학 교무부 지도교원으로 사업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정일이 저들의 통치철학인《주체사상》을 남한을 비롯한 대외에 선전하기 위해 노동당중앙위원회에《주체사상연구소》를 새로 내오고 《본인실력을 위주로 연구소 일군들을 꾸릴 데 대한 지시》에 따라 1981년 10월 노동당중앙위원회에 소환되어 《노동당 주체사상연구소 부과장》, 《노동당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 부실장》직책에서 망명전까지 사업하였습니다. 이 과정에 본인은 김일성-김정일의 범죄적 야망과 그들 정치의 반인민적․반민족적 본질을 명백히 알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서 초래될 심각한 민족적 재난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본인은 1990년대에 들어서서《소련 및 동구라파사회주의 나라들의 자본주의복귀》로 《냉전이 종식》된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여 김정일이《공산세습독재체제 유지를 위해 전시도 아닌 평화시기에 300만 이상의 주민들이 굶어죽고 북한의 옹근 한 세대가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기형화되고 수십만의 주민들이 살길을 찾아 탈북의 길에 오른 최악의 국가적 재난을 방치하면서까지 8억 9천만 달러나 들여 우상화상징물인 을 건축하고》, 《대남 무력적화통일야망 실현을 위해 북한경제를 파멸에 몰아넣고 국제사회를 기만하면서까지 동족살육용 핵무기를 개발하고》, 《북한 주민들의 개혁개방열망을 가로막기 위해 노동당독재에 라고 하는 군사파쇼독재까지 덧붙여 강행하면서 도처에서 무고한 주민들을 공개총살하고 정치범수용소에 끌어가면서 역사에 유례없는 인권유린행위를 감행》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김정일이야말로 북한인민의 모든 불행과 고통의 화근이고, 민족재난의 화근》이며 《김정일체제를 붕괴시키지 않고서는 북한 주민은 물론 온 민족이 결코 불행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더더욱 확고히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본인은 《민족의 일원》, 《민족의 아들》로서 《김정일 체제를 붕괴시키고 북한 주민들을 해방하며, 북한 자유화 실현》에 자신의 모든 것을 깡그리 바치리라 굳게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본인이 북한 김정일절대주의 공산세습독재체제의 총참모부인 《노동당중앙위원회》부실장(부과장 급)이라는 중책에서 사업하다가 온 가족과 일가친척이 김정일 일당에게 멸문지화를 당할 뼈를 깎는 고민과 고통을 딛고 정치적 망명을 단행한 것은 바로 본인의 이런 정치적 신념과 의무감 때문이었습니다. 본인은 망명의 길에 오를 때, 북녘의 동지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타는 듯이 아프고 쓰린 마음을 담아서《백화만발한 화창한 봄날을 앞당기려는 이 나그네의 마음 알아준다면, 먼길 떠나는 이 나그네 발걸음 가볍게 끝내고 봄날의 나비 같이 가벼이 돌아올 것》이라는 위로의 말을 남기고 떠나왔습니다. 본인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기치》밑에 남한 동포들과 힘을 합쳐서 북한인권문제를 해결하고 북한 자유화를 실현하며,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민족통일을 실현하기 위해서 대한민국에 망명한 정치망명자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정치적 망명을 한 다음 해에 들어선 김대중 정부와 지금의 노무현 정부는 오직 본인의 《북한문제해결방안》이 저들의 《대북정책》과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치망명자로서 민간차원의《북한인권문제 해결》과 《북한 자유화 실현》을 위한 본인의 정치적 신념과 그 실현을 위한 활동을 무시하고 저지시켰으며, 각종 정치적 박해와 인권유린을 가하면서 본인에게 여러 해 동안이나 실로 견디기 어려운 정치적, 정신적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정치망명자인 본인에 대한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의 상식을 벗어난 정치적 박해와 인권유린행위는, 《부당한 구실과 조건》을 내걸고 본인의 미국방문을 위한 《여권발급신청》을 5년 이상이나 묵살하고 있으며, 서울행정법원과 서울고등법원의 법정에서까지 사실을 오도하면서 본인을 무시하고 조롱한데서 가장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인은 2001년부터 《북한인권문제해결》과 《북한 자유화 실현》을 위한 대외활동의 일환으로서 미국방문을 끊임없이 시도해 왔습니다. 그 이유의 하나는 구 소련공산국가의 붕괴가 소련의 인권실상을 미국 등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사하로프박사를 비롯한 구 소련인권운동가들의 불굴의 활동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것이 결국 《냉전의 종식》이라는 세기적 사변을 이끌어 낸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미국이야말로 김정일정권의 인권유린실태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기 위한 가장 중요한 활동무대라는 확신에 기초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 하에서는 본인이 정치적 사명감으로 간직하고 있는 민간차원의《북한 인권문제해결》및《북한자유화실현》을 위한 활동을 도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인은 2001년에 미국 의회 인사들로부터 총 6건의 미국방문 초청장을 받았지만, 당시 김대중정부와 국가정보원은 말도 되지 않는 《북한정부가 김덕홍씨의 미국방문을 허용하면 모든 남북대화를 중단하겠다고 하므로 미국에 절대로 보내지 못하겠다》는 천만부당한 구실을 붙이면서 본인의 미국방문 요청을 여지없이 묵살하였습니다. 특히 당시 국가정보원 원장이었던 신건은 2001년 7월 2일 야밤(밤 11시~새벽1시)에 본인을 불시로 국가정보원 구내의 원장자택으로 불러들여서《당신들이 미국에 가는 것을 결심하는 것은 화약을 지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미국에는 몇 백 달러만 주면 당신들을 암살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3번씩이나 곱씹어가면서 협박함으로써 본인에게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었습니다. 당시 그 자리에는 국가정보원 서영교국장과 국가정보원 담당과장 심응석도 동석했었습니다. 2003년 7월 21일 본인은 미국 허드슨연구소로부터 미국방문관련 초청장을 받고 7월 24일 서울시 종로구청 여권과에《여권발급신청서》를 제출하였으며, 같은 날 국가정보원 고영구 원장, 국가정보원 유영걸 국장에게 본인의 여권발급과 미국방문 협조를 요청하는 《요청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그러나 국가정보원 고영구원장은 본인과 같은 시기에 미국방문문제를 제기한 황장엽씨의 방미는 허락하면서도, 본인의 미국방문요청은 철저히 묵살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2003년 7월 18일《국정원 특별신변보호대상에서 경찰의 일반신변보호대상으로 넘긴다》는 일방적 언론발표로 본인을 우롱하고 무시하였습니다. 고영구 원장은 국가정보원장의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미국방문관련 제기된 문제에 대해 단 한마디의 답변도 주지 않았습니다. 본인은 2003년 7월 24일 서울 종로구청 여권과에 《여권발급신청서》를 제출한 때로부터 7개월이 훨씬 지난 2004년 3월 서울 종로구청여권과로부터 《신원조사 미회보》라는 이유로 여권발급이 기각되었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본인은 2004년 6월 4일에 또다시 종로구청 여권과에 《여권발급신청서》를 제기하였으며, 이에 대해 국가정보원은 본인에게 《지난해(2003년) 미국 허드슨 연구소에서 보낸 초청장이 현재까지도 유효한가》라는 문의를 해왔으며 이에 대해 미국 허드슨 연구소는 2004년 6월 25일 본인에게 또 다시 《미국방문 초청장》을 보내왔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본인은 2004년 6월 30일 본인의 미국방문이 성사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하는 《미국방문 협조 요청서》를 미국 허드슨연구소 초청장과 함께 국가정보원 고영구 원장, 국가정보원 유영걸 5국장, 외교통상부 반기문 장관, 경찰청 최기문 청장에게 보냈습니다(※ 본 요청서는 고소장에 첨부하였음). 그러나 우의 본인의 협조요청서에 대해 우의 관계자들은 지금까지도 아무러한 해명이나 답변도 하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 본인은 2004년 7월 6일에는 대한민국 노무현 대통령에게까지 본인의 미국방문이 성사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는 편지와 함께 지난 2001년부터 미국에서 본인에게 보내온 7건의 《미국방문 초청장》을 별지로 동봉하여 보냈습니다(노무현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는 고소장에 첨부하였음). 본인의 우와 같은 각 방면에 걸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와 관계부처에서 이를 계속 묵살하고 있는 상황에서 본인은 드디어 2004년 7월 20일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장관을 상대로 서울 지방행정법원에 여권발급 관련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이와 관련된 사실들은 고소장에 소상히 첨부하였습니다. 국가정보원(해당 국 옥 처장)은 본인의 여권발급관련 문제에 대해 1년 이상 묵살하고 있다가 법원 재판을 앞두고 2004년 8월 9일 처음으로 본인을 만나주었으며, 그 자리에서 국정원 옥 처장은 본인에게《황장엽씨의 방미사례와 같이 김선생이 미 초청자 측과 협의하여 미국의 책임있는 기관에서 신변안전보장을 약속해 올 경우 정부에서는 여권을 발급하고, 미 측 관계기관과 신변안전문제를 합의한 다음 미국을 방문할 수 있다》고 일방적으로 통지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본인은 당일인 2004년 8월 9일 오후, 미국 초청자 측에 국가정보원이 제기한 문제를 통지하였는 바 미국 초청자 측에서는 《김선생이 우선 여권을 발급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권을 발급 받아야 한국정부로부터 여행할 권리를 가지는 것으로 된다. 여권을 받고 비자를 받은 후에 한국 해당기관이 제기한 신변안전관련문제를 미국 관계기관과 협의해서 답변을 주겠다》고 알려왔으며, 본인은 이에 대해 경호책임자를 통해 국가정보원 5국 사무관 요원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국가정보원은 외교통상부를 내세워 서울행정법원과 그 후 서울고등법원에 준비서면을 제출할 때마다 《신변안전문제와 관련된 초청자 측과의 합의가 이루어져야 여권도 발급하고 미국도 갈 수 있다고 의견을 주었고, 본인도 당국의 입장에 대해 이해하며 수긍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는 식으로 사실을 오도하면서 정치적 망명자의 인권을 유린하였으며, 본인에게 엄청난 정치적 상실감과 참기 어려운 정신적 피해를 계속해서 주었습니다. 본인은 외교통상부와 국가정보원의 본인에 대한 부당한 정치적 박해와 인권유린 행위에 대해 2005년 2월 15일 대한민국 노무현대통령 직속 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에 《본인의 미국방문 문제를 놓고 여러 해 동안 국가정보원과 맥락을 같이 하여 여권발급을 보류하면서 정치망명자에게 북한주민의 인권을 외면하는 일환으로 고통을 주고 있는 외교통상부의 비인도적 태도는 인권침해 범죄행위에 해당함으로 조속한 조치를 취해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신소청원까지 제기하였습니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2005년 10월 6일 조영황 위원장이 주최한 조정 회의와 2005년 10월 20일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침해 조사국 국장이 주최한 본 사건 관련 협의회에서 《①국가정보원과 외교통상부는 김덕홍의 여권을 발급하라. ②발급된 여권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이 직접 보관한다. ③김덕홍은 국가인권위에서 여권을 보관하고 있는 기간 미국 초청자 측에 국정원이 요구하는 신변안전관련 내용을 전달한다. 등등》식의 국가정보원과 외교통상부가 본인에게 부당하게 행사하고 있는 정치적 박해와 인권유린행위를 연장시키는 조정안을 내놓음으로써,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 대한 본인의 신성한 믿음》을 심히 우롱하고 본인에게 또다시 심각한 정치적 상실감을 주었습니다(본 사건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고소장에 서술되어 있음). 지난 2006년 1월 16일 외교통상부는 서울고등법원에서 《원고 승》 판결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서울행정법원과, 서울고등법원에서 계속 주장하던 대로 《신원관계당국은 미국 초청자나 관계기관의 신변안전 대책이 강구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여권발급을 보류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의 신원조사 결과를 외교통상부에 통보되어 ……… 귀하의 여권발급 신청서를 따로 붙임과 같이 반송합니다.》라는 내용의 공문을 본인에게 보내왔습니다. 외교통상부와 국가정보원은 지금까지도 미국 해당기관의 신변안전약속이 있어야만 여권을 발급해 줄 수 있다고 계속 우겨대면서 본인의 정치활동의 자유와 여행의 자유를 엄중히 침해하는 인권유린행위를 서슴없이 감행하고 있는데, 도대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응당 받을 권리가 있는 여권을 발급하는데 왜 방문국의 신변안전약속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까. 정치망명자로서의 본인의 신분이 설사 하다고 해도 우선 여권발급을 받고 비자를 받은 다음, 해당국의 관계기관과 신변안전관련 토의를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닙니까. 그리고 외교통상부와 국가정보원은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해외주민등록증》과도 같은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으면서, 계속 본인에게 《미국 해당기관의 신변안전 약속을 받아와야 한다》고 억지주장을 하고 있는데, 자국민에 대한 해당국의 신변안전약속 같은 것은 국가정부가 처리해야 할 사안이 아닙니까. 본인이 엄연하게 대한민국 국민이고, 본인에게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이 있고 정부가 있는데, 왜 대한민국 정부는 일반 대한민국 국민과 본인을 차별시 하면서 본인에게 계속 부당한 요구를 해대면서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주고 있습니까. 대한민국 정부는 김정일정권하에서 역사에 유례없는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는 북한 동포들의 고통과 불행을 외면하는 정책의 연장선에서 북한인권문제 해결과 북한 자유화실현을 위한 정치적 망명자로서의 본인의 정치적 신념과 정당한 활동을 외면, 우롱, 유린하는 것과 같은 《구 소련공산독재국가에서나 가능했던》인권침해행위를 해왔으며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의 이러한 부당하고도 불법적인 행위로 해서 본인은 거의 매일, 매 시각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의 고통과 죽음까지도 넘어서면서 심장에 새기고 또 새긴 본인의 가장 신성한 정치적 사명과 의지》가 위협당하는 고도의 정신적 긴장과 강박감을 겪고 있으며, 참기 어려운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정치망명자인 본인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정치적 박해와 인권유린행위가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럽다 해도, 김정일 독재체제 하에서 북한 주민들이 반세기가 넘도록 겪어오고 있는 고통과 불행에 비하면 초개와 같은 것이라고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북한인권문제해결》과 《북한 자유화실현》을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써, 대한민국 정부가 본인에게 가하고 있는 모든 정치적 박해와 인권유린 행위가 중단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 투쟁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본인은; - 2006년 1월 16일에는 대한민국 국회 각 당 대표들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의 위원장 및 위원들에게 본인의 여권발급소송과 관련한 서울고등법원의 《원고 승》 확정판결이 나온 이후에도 이를 무시하고 위법행위를 지속하고 있는 외교통상부 반기문장관을 해임시켜 줄 것을 제의하는 《진정서》를 발송하였으며 - 2006년 1월 16일에는 본 사건관련 외교통상부 반기문장관 외 관계자 2명을 직무유기행위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고발하였으며. - 2006년 1월 30일에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였으며. - 2006년 1월 31일에는 서울행정법원에 또다시 《여권발급거부취소 청구의 소》를 제출하였습니다. 본인은 자유민주주의법치국가인 대한민국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으며, 아울러 본 사건도 자유민주주의 법에 따라 공정하게 해결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전 북한 노동당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 부실장 정치망명자; 김 덕 홍 2006년 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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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영에씨가 선수를 쳤으니...저런!
<사고방식>이라는 님, 김덕홍선생의 처지에서라면 어찌 하셨을까요?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도 미국으로 망명했었습니다. 왜인지는 똑똑한 님께서 아시리라 보면서 생략...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 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여사의 망명문제와 김덕홍씨 진정서문제가 무슨 연관이 있다고 그런 비꼬는 식의 말씀을 하시는지 당신의 <사고>가 심히 의심됩니다.
우리 북한사람들중에 똑똑한 사람 아주 많습니다.
예로부터 북쪽사람들이 똑똑하기로 유명하죠
미국에 이민간 조선사람중 부자가 된 사람들을 조사했는데 거의 80-90%가 북쪽주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개중에는 무식하게 이리저리 권력에 휘둘리우며 이간질시키며, 못된 짓하는 탈북자들도 있답니다.
인정할 것은 해야지요...
감정세우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