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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이세상에 태어나서 숨쉬고 있는 이유
Korea, Republic of 이규진 0 548 2016-05-26 09:03:28

불가에서 수행의 핵심으로 말하는 ‘명심견성(明心見性)’은 궁극으로 내 마음을 밝혀서 성(性)을 본다는 것이다. 명(命)은 내 몸에 들어와 있는 삼신의 생명을 말한다. 명命은 목숨이요, 생명이요, 천명天命이며, 궁극으로는 조물주의 생명이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인간의 육체는 얼마 살다 땅속으로 들어가 썩어 버리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삼신의 성령의 생명은 영원하다. 그 불멸의 생명력이 내 몸에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이다. 그 불멸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게 수행이다.

 

유교도 성(性)과 명(命)을 닦는 것이 목적이다. 중용에 이런 구절이 있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요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요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니라.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며, 그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이른다.(『중용(中庸)』) 조화신(三神)이 나에게 내려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이 바로 삼신의 본래 마음. 성(性)이다. 내 마음이 곧 하느님의 마음이요, 천지의 마음이다. 하늘로부터 천명으로 받은 위대한 신성(神聖)! 그 본성을 따르는 것이 생명의 길(道)이요, 인간이 가야 할 궁극의 길이다.

 

 

하늘의 조화신(造化神)이 내려와서 바로 나의 본래 마음, 인간의 본성이 됐다. 이 성性이라는 것은 심心방 변 옆에 날 생生자를 썼는데. 우리 마음이 생하는, 태동하는 그 바탕, 우리 마음의 본체, 심체, 우리 마음의 본원은 수행을 통해 내가 자연과 하나가 되었을 때 나라고 하는 이 색신(色身), 몸은 사라지고 이 우주 자체 법신(法身)이 된다. 그게 바로 성(性)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자성自性, 법성法性, 불성佛性과 같은 경계이다. 따라서 인간은 천지와 그 생명성, 신성이 동일한 존재인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가장 체계적인 해석을 한 인물이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지금으로 말하면 국무총리까지 역임한 행촌 이암(李?,1297∼1364)선생이다. 그는 ‘신(神)의 세 가지 본성이 바로 조화신,교화신,치화신, 조교치(造敎治) 삼신이다.’라고 했다. 즉 신神은 창조적 손길로 만물을 끊임없이 지어내는 조화신(造化神), 만물을 낳아놓고 가르치는 교화신(敎化神),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치화신(治化神)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변하다가 늙어서 땅속으로 들어가는 이 작은 몸뚱아리, 색신(色身)이 아니고, 이 우주 자체인 우리들의 본래 몸뚱아리 법신(法身)은 조화신이 우리 몸에 들어와서 우리 본성(性)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 마음의 본성자리는 바로 조물주 신성 그 자체다. 이건 엄청난 사실이다.

 

조화지신(造化之神)은 강위아성(降爲我性)하고, 교화지신(敎化之神)은 어머니의 이 지구의 신성은 우리 몸에 들어와서 명(命)이 됐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 불멸의 생명이다. 그래서 이 선사상(仙思想)이라는 것은 바로 성명정(性命精)에서 이 지구의 어머니의 신성을 근본으로 해서 선도(仙道)가 나왔다.

 

그다음에 만물을 다스리는 치화신(治化神)은 바로 우리  몸에 들어와서 정(精)이 됐다. 이것을 성명정性命精. 하늘의 조화신, 땅의 교화신, 사람의 치화신. 사람은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그런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우리 몸속에 있는 3가지의 참된 것. 이것을 하나님의 마음(性),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命), 그리고 만물을 다스리는 생명의 동력원 정기(精)를 서양 사람들은 essence로 번역하는데 우리가 의학으로 보면 신장(腎腸)의 정수(精水)를 말하는 것이다. 이 신장(腎腸)의 정수를 축적해서 그걸 굳히는 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수도공부의 핵심인데, 지금은 남녀가 정(精)을 성을 즐기는데 쓰고 그러니까. 대부분 소멸당하는 것이다.

 

 

 

천지일월이 나를 만들어주고, 나에게 생명을 내주는 그 모든 열매가 정(精)이다. 정기를 잘 간직해야 여기서 힘도 나오고, 생명력도, 지혜도 나온다. 모든 것을 극복하는 힘의 원천이 정(精)이다. 그런데 지금의 음란문화는 인간의 정(精)을 파괴하고 분열시킨다. 수행의 근본은 정(精)을 굳히고 맑히는 가의 문제로 떨어진다. 정(精)을 순화해야만 공부가 된다. 수행을 통해서 본래의 성(性)과 명(命)이 하나였던 그 경계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내 생명력이 우주와 더불어 하나인 영원의 경계, 그 자리는 무한의 광명 그 자체요, 성(性)과 명(命)이 하나인 상태다. 그럼 성(性)과 명(命)은 무엇이 다른가? 밝은 모습 자체는 성(性)이고, 그 모습이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한 것, 그것을 하나의 생명력으로 표현할 때 명(命)이라고 한다. 수행이 아니면 내 생명의 본래 모습을 회복할 수 없다. 내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없다. 생명(生命)의 원래 말이 성(性)과 명(命)이다.

 

 

수행은 내 몸과 마음을 닦는 것이다. 유형의 정(精)과 무형의 마음(心)을 닦아 생명의 본래 자리로 들어서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결국 모든 것이 마음 닦는 공부로 떨어진다. 마음을 바르게 가짐으로써 정(精)이 변화된다. 정(精)이 굳어지고 맑아지고 승화된다. 그러면 그만큼 높은 성(性)과 명(命)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는 것이다. 수행의 궁극은 생명의 본성인 성(性)과 명(命)을 회복하는 것이다.

 

 

인간은 왜 사는가?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은 본래 내 생명의 밝은 모습(性),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한 생명력(命)을 회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 나의 생명을 회복하는 과정, 이것이 우리들 삶의 목적이다. 인간에 깃들어 있는 생명의 본래 모습, 성(性)과 명(命)은 하늘땅과 같다. 어머니 뱃속에서 천지와 더불어 호흡할 때는 성(性)과 명(命)이 하나이다.

 

그런데 세상에 나와 탯줄을 끊는 순간 인간적인 호흡을 시작하게 되고, 본래 우주와 하나인 성(性)과 명(命)이 분리된다. 눈을 뜨고도 예측할 수 없는 거대한 우주적인 어둠에 휩싸여 그 이면의 세계를 전혀 못 보게 된다. 우주를 비추고도 남을 만큼 밝은 내 생명의 본래 모습, 내 마음의 근원인 성(性)이 후천적인 성(性)으로 바뀌면서 어둠의 세계로 떨어진다.

 

또한 하늘같은 무한의 생명력인 내 명(命)이 불과 몇 십 년 살다가 병들어 죽는 유한의 명(命) 자리로 떨어진다. 온갖 인생의 시련과 역경, 고난의 파도를 만나 고통과 슬픔 속에서 살다가 죽음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을 함으로써 어머니 뱃속에서 가지고 있던 본래의 성(性)과 명(命)을 회복한다. 천지와 같은 내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내 생명의 기반인 성명정(性命精) 3가지 요소를 닦는 것이다. 이것을 구체적인 작용 요소로 보면 심기신(心氣身)이다. 마음(心)과 기(氣)와 몸(身)을 닦는 것이다. 내 몸(身)을 닦는 것은 구체적으로 정(精)을 닦는 것이고, 마음(心)을 닦는다는 것은 원래의 생명력(性)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 몸의 기(氣)를 닦는다는 것은 하늘땅의 무한의 생명력(命)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우주의 본성이 대광명이다. 수행공부가 어느 경계로 들어가면 눈을 감고 있는데도 해가 뜬 것처럼 밝다. 생명의 본성, 인간 마음의 본성은 광명이다. 삼신(三神)이 바로 대우주 광명의 실체다. 동양에서는 이 삼신(三神)이 스스로 현현(顯顯)해서 하늘과 땅과 인간이 나왔다고 한다.『천부경』에서는 이 하늘과 땅과 인간을, 천일天一, 지일地一, 인일人一이라고 한다.

 

천지인(天地人) 모두가 하나(一)의 자리에서 나왔으며, 도의 본원이 같다는 말이다. 이렇듯 삼신三神이 자기 현현하여 하늘과 땅과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천지인 모두가 조물주 삼신의 생명과 신성과 지혜와 광명을 가지고 있다. 삼신의 생명, 지혜, 숨결은 우리 몸속에도 다 들어있는 것이다. 이 우주만유 속에 삼신의 숨결이 살아 있고, 온 우주를 채우고 있는 이 삼신의 생명은 우리 몸속에 그대로 들어 있다. 이걸 생각해 볼 때, 인간의 창조적 신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궁무진한가! 또 진리를 제대로 깨친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제대로 알기만 하고 살아도 인간의 품격이 전혀 달라진다. 그러면 삼신(三神)은 우리 몸에 들어와서 어떻게 작용하는가?

 

 

 

 

인간 몸속에 깃든 삼신(三神)의 3가지 손길은 만물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조화신(造化神)은 내 생명의 근원, 내 마음의 뿌리 자리, 성(性) 이 되어 자리를 잡는다. 만물을 양육하는 교화신(敎化神)은 나의 명 命 , 순수한 우리말로 목숨이 된다. 목숨을 영어로 옮길 때, 수명(lifespan)으로 흔히 이야기하지만, 여기서의 명命 은 수명, 생명, 그리고 천명(天命) 사상까지 포괄적으로 담고 있다.

 

만물의 생명 질서를 바로잡는 치화신(治化神)은 내 몸의 정(精)이 된다. 내 몸속에서 삼신의 마음(性)과 생명(命)이 발동되는 것은 실제로는 내 몸의 정(精) 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내속의 참 마음(性)을 닦고 내 속의 참 생명(命)을 키우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정(精) 을 잘 확보하는 것에 달렸다.

 

인간 몸속에 깃든 삼신(三神)의 3가지 손길은 만물을 낳는 조화신(造化神), 만물을 깨우치고 기르는 교화신(敎化神), 그리고 만물의 질서를 잡아나가는 치화신(治化神)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하늘의 조화신 교화신 치화신의 삼신(三神)이 인간의 몸에 내려와 性,命,精 삼진(三眞)이 된다. 환단고기는 하늘에는 삼신(三神) 이 있고, 땅에는 삼한(三韓)이 있으며, 인간 몸속에는 삼진(三眞)이 있다고 말한다.

 

삼신(三神)이 우리 몸에 들어와 생긴 3가지 참된 것‘이 곧 성명정(性命精) 삼진( 三眞) 이다. 조화신, 교화신, 치화신이라는 삼신이 들어와 성(性)-명(命)-정(精) 삼진(三眞)이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조화신이 내 몸에 들어와 성(性)이 되고, 교화신이 들어와 명(命)이 되고, 치화신이 들어와 정(精)이 된다. 이는 내 몸 속에 삼신 하나님의 생명이 그대로 다 들어 있다는 것이다. 내 몸속에 우주의 생명이 그대로 다 들어 있다. 이것이 삼신문화가 인간의 위대함에 대해 전해주는 깨달음의 한소식이다. 性,命,精 삼진三眞은 인간이 진리를 깨달음에 있어서 어떻게 그 길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말해준다. 그래서 진리를 성취한 인간이 되고자 할 때, 삼진三眞은 우리에게 삼관三關으로 작용한다.

 

 

관關이란 무엇인가? 여행에서 뜻하는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 있다. 그렇듯 성명정性命精을 지키는 것이 내 안에 내주한 삼신의 생명과 신성을 온전히 지켜 진리를 성취한 인간이 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문이다.

 

성(性)이란 무엇인가? 성性은 마음의 본래 실상, 내 마음의 본래 모습을 말한다. 세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은 변화막측하다. 수시로 바뀌고 변덕스러워서 도저히 측량할 수가 없다. 그런데 마음의 본래 모습은 가을 하늘의 순수한 모습처럼 불변지체(不變之體)다.

 

성(性)은 심(心)방 변 옆에 낳을 생(生) 자를 쓴다. 문자 그대로 만물을 낳는 마음이다. 하늘땅과 인간과 만물을 낳아 주는 조물주의 마음, 대자연의 마음이 바로 성(性)이다. 성性은 마음의 본체, 마음의 본래 모습, 본마음이요, 다른 말로 도심(道心), 천심(天心)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마음은 인간의 총체적인 의식 현상을 뜻한다. 그런데 불가나 도가에서 말하는 마음은 본래의 마음(本心), 진리의 마음, 도심道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인간 삶의 3대 가치인, ‘진선미(眞善美)’에 대한 놀라운 가르침이 들어 있다. 진선미의 발원처가 다름 아닌 삼신(三神)의 3가지 덕성이라는 것이다. 삼신三神이 낳은 천지인의 덕성이 각각 진선미(眞善美)이기 때문에, 진선미는 삼신(三神)에서 발원한 영원불변의 가치이다.

 

上界主神은 其號曰天一이시니 主造化하사 有絶對至高之權能하시며 無形而形하사 使萬物로 各通其性하시니 是爲淸眞大之體也오.

하늘은 ‘청정과 참됨을 본질로 삼는 지극히 큰 본체(淸眞大之體)이다. 하늘은 언제나 맑고 참되다. 다시 말해서 하늘의 본성은 참(眞)이다. 그래서 참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거짓된 세상을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천지 대자연이 얼마나 넓고 신비로우며 무한한 생명력으로 충만한 지 느낄 수 있다면 참의 세계, 진리의 세계로 한 발짝 다가설 수 있다.

 

 

下界主神은 其號曰地一이시니 主敎化하사 有至善惟一之法力하시며 無爲而作하사 使萬物로 各知其命하시니 是爲善聖大之體也오.

땅은 ‘선함과 거룩함을 본질로 삼는 지극히 큰 본체(善聖大之體)이다. 땅은 선하고 성스럽다. 때문에 박테리아에서부터 바다 속의 어족들, 공중을 나는 새들, 들판을 뛰노는 짐승들에 이르기까지 온갖 생명체가 함께 살아가는 생태계가 이 지구상에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땅의 덕성, 선善은 마음씨가 착하다는 윤리적 의미의 선善이 아니다. 모든 것을 수용해서 어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낳아서 기르는 어머니 대지의 덕성을 일컫는 것이다. 뱀도 있고, 송어도 있고, 미꾸라지도 있고, 물방개도 있는 큰 연못, 택국澤國을 생각하면 선善의 덕성을 쉽게 그려볼 수 있다.

 

 

中界主神은 其號曰太一이시니 主治化하사 有最高無上之德量하시며 無言而化하사 使萬物로 各保其精하시니 是爲美能大之體也시니라. 인간은 ‘아름다움과 지혜로 지극히 큰 본체(美能大之體)이다. 인간은 아름다움(美)를 추구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먼저 천지의 덕성인 참眞과 선善을 체득하고 생활화 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은 천지의 꿈을 이루는 태일太一이기 때문이다.

 

결국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천지의 광명과 신성, 지혜를 체득하여 천지의 원대한 꿈을 이루는 역사의 주인공’인 태일太一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이다. 인간이 진정 아름다워지려면 천지를 알아야 하고 천지와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인간을 아름다움의 창조자요, 지혜의 주인으로 일컫는 미능대지체(美能大之體) 이 한마디는 인간의 가치에 대한 극치의 표현이자 진리에 대한 최종 정의라 할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해야 할 항구불변의 가치인 진선미(眞善美)도 다름 아닌 하늘과 땅과 인간의 일체 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천지와 하나가 될 때, 우리 몸에서 진선미(眞善美)가 발현될 수 있다. 인간 삶의 제1의 가치인 진선미眞善美의 소자출所自出까지 밝혀주는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진정으로 한민족과 인류의 태고 역사를 기록한 역사경전일 뿐만 아니라 동서 종교와 철학에서 탐구해 온 여러 진리 주제에 대한 명쾌한 깨달음을 열어주는 철학 경전이요, 문화경전인 것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의 가치는 아름다움인 것이다. 인간이 하늘과 땅의 참됨과 선함을 체득하여 마침내 아름다움을 실현한다’는 것이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진선미眞善美 사상이다.

 

 

 

 

11세 ‘도해 단군(BC1891~BC1835)’의 염표문念標文은 당시의 국민교육 헌장이었다. 염표念標, 항상 마음으로 헤아리고 그 가르침을 언제 어디서나 내서 쓸 수 있고 실천해야 되는 하늘의 글이란 말이다.
 
<하늘,땅,사람의 창조 정신과 목적>

其念標之文에 曰,

天은 以玄默爲大하니 其道也普圓이오 其事也眞一이니라
地는 以蓄藏爲大하니 其道也效圓이오 其事也勤一이니라
人은 以知能爲大하니 其道也擇圓이오 其事也協一이니라
故로 一神降衷하사 性通光明하니 在世理化하야 弘益人間하라“ 하고 仍刻之于石하니라.

 

천天은 이현묵위대以玄默爲大하니…”. 천天은, 하늘은 말할 수 없는 고요함으로 장대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수행을 통해 고요히 침묵을 해야 자연의 도와 합일이 되는 것이다. 동정動靜 법칙이니까, 정靜이라고 해서 죽어있는 고요함이 아니고 온 우주가 하나 되어 가지고 살아있다는 말이다.

 

 

“천天은 이현묵위대以玄默爲大하니 기도야보원其道也普圓이라” 하늘의 도라는 것은 보원(普圓)이다. 넓고 원만하다는 것이다. 하늘은 모든 만물을 포용하고 다 담고 있다. “기도야보원其道也普圓이요 기사야진일其事也眞一이니라.” 하늘이 하는 일이란 “其事也眞一기사야진일”, 참됨으로 하나 되게 하는 것이다. 참 되지 않으면 하나가 될 수 없다. 하늘의 정신과 하나가 되지를 않는다. 수행을 해도 광명이 열리지 않는다. 개안開眼이 안 되는 것이다.

 

거짓행위를 하고, 마음이 분열돼 있으면, 앉아 있어야 다리만 아프지 수행이 안 된다는 말이다. “기도야진일其事也眞一이다.” 참 진眞자 한 일一자라는 게 해석이 무궁무궁한 것이다. 거기에 태일太一사상도 있는 것이고, 바로 우주의 본성자리 속에 들어가는 비밀도 거기에 있는 것이다.

 

 

天은 以玄默爲大하니 其道也普圓이오 其事也眞一이니라

하늘(天)은 아득하고 고요함(玄默)으로 광대하니, 하늘의 도(天道)는 두루 미치어 원만(원융무애)하며, 그 하는 일은 참됨으로 만물을 하나 되게 함(眞一)이니라.

 

地는 以蓄藏爲大하니 其道也效圓이오 其事也勤一이니라.

땅(地)은 하늘의 기운을 모아서(蓄藏) 성대하니, 땅의 도(地道)는 하늘의 도를 본받아 원만하고, 그 하는 일은 쉼 없이 길러 만물을 하나 되게 함(勤一)이니라.

 

人은 以知能爲大하니 其道也擇圓이오 其事也協一이니라.

사람(人)은 지혜와 능력이 있어(知能) 위대하니, 사람의 도(人道)는 천지의 도를 선택하여 원만하고, 그 하는 일은 서로 협력하여 태일太一의 세계(協一)를 만드는 데 있느니라.

 

故로 一神降衷하사 性通光明하니 在世理化하야 弘益人間하라“

그러므로 삼신(三神)께서 참마음을 내려주셔서(一神降衷) 사람의 성품은 삼신의 대광명에 통해 있으니(性通光明) 수행을 통해 삼신의 천지광명을 회복하여 삼신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깨우쳐(在世理化) 인간을 널리 이롭게(弘益人間) 하라.

 

사실 모든 과학자들이 ‘이 우주의 꿈이 무엇인가? 우주의 뜻과 목적이 뭔가?’ 이것을 알고 싶어한다.『신과 천문학』을 쓴 과학자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한평생 망원경을 가지고 우주를 더듬어 보니, 깊은 밤에 이런 의문이 들더란다. ‘야, 우주는 왜 이렇게 광활하냐? 이 우주는 왜 수많은 별들을 자꾸 지어내느냐?’ 하고 말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우주의 목적은 무엇인가?’하는 의문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신학자나, 천문학자나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왜 그런가? 다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한 명쾌한, 살아 있는 대도의 답을 전해주는 것이 환단고기<桓檀古記>밖에 없다.

 

 

도통의 범주를 또 다른 방식으로 유형화하는 방법이 있다. 도통의 뿌리와 그로부터 뻗은 도맥을 기준으로 하여, 크게 정력통精力通과 감화통感化通으로 나누는 것이다. 정력통은 문자 그대로 직접적인 수행을 통해, 내 온 정력을 쏟아 얻는 깨달음을 말한다. 정력통은 한 마디로, 자기 스스로의 정성과 힘으로 성취한 도통이다. 그 대표적인 게 불가의 선禪 수행으로, 앉아서 죽기살기로 수행에 용맹정진하여 도를 통하는 것, 그게 다 정력통이다. 물론 유가의 정성공부나 선가의 일심수행도 마찬가지다. 감화통이란 스승이 가지고 있는 도력道力과 천지정기에 힘입어 도통을 이루는 걸 말한다. 선천에는 어떤 도통이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본래 우주가 태어난 조화세계를 신이다, 도다, 하나님이다, 부처다 등 여러 가지로 얘기한다. 그것을 우리 순수한 한글세계에서는 ‘알’이라고 한다. 태초에 우주가 태어난 생명의 ‘알’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알’에서 마음이 나왔다는 것이다. “내 마음이 아프다.” “내 마음이 기쁘다.” 할 때 ‘맘’이란 우주가 태어난 생명의 근원자리 ‘알’에서 왔다. 그러므로 마음은 온 우주가 태어난 생명의 근원이다. 그런데 그 마음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닦는다는 것인가?

 

 

닦는다는 것은 이미 더러워진 걸 깨끗하게 씻어낸다는 뜻 아닌가. 우리의 생명을 움직이게 하는, 우리의 생명을 끌고 나가는 주인이 마음이다. 그런데 그 주인의 깨어있는 경계가 시시각각 다르다. 잘 때와 일할 때가 다르고, 무엇에 집중할 때와 흐리멍덩하게 딴 생각할 때가 다르다. 밥 먹으면서 재미있는 뉴스를 듣는다든가 좋은 영화를 본다든가 할 땐, 뭘 먹고 있는지 조차도 잊어버린다. 보는 쪽으로만 정신이 가 있기 때문에 감각이 마비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 몸 속에서 사물을 느끼고 터득하고, 뭘 배우고 아는 인식 작용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인간의 감각 작용은 너무도 변화무쌍하다.

 

서양 명언에 이런 말이 있다. “(Now and here.지금 그리고 여기)”  생명, 진리, 깨달음, 고통, 자유, 구원, 그 모든 삶의 궁극적인 명제는 지금, 여기를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 곧 인생은 지금 여기서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마음을 닦으려면, 현실의 삶을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바탕으로, 불가, 선가, 유가의 가르침을 알아야 된다.
 

 

 
감각에 따른 마음의 작용
 
불가의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마나식 그리고 알라야식을 얘기한다. 일반적으로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 오식(五識)이다. 안식(眼識)은 눈으로 보고 아는 것이고, 이식(耳識)은 귀로 들어 아는 것, 비식(鼻識)은 코로 냄새 맡아서 아는 것, 설식(舌識)은 혓바닥으로 맛을 봐서 아는 것, 신식(身識)은 온몸으로 느껴서 아는 것이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주는 것이 첫 번째 안식(眼識)이다. 눈으로 강력한 게 들어오면, 그것이 장애물이 되어 끊임없이 괴롭힌다. 수행을 할 때 집중을 못 하고 자꾸 딴 생각으로 빠져버린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온몸으로 느끼는 안이비설신 다섯 가지 감각을 통해 사물이 우리 의식에 들어오는데, 그것이 정상적으로 순화되어 내 생명을 기쁘게 하고, 내 마음을 밝게 해주고, 나를 깨어있게 하고,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경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그게 전부 마장(魔障)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오식(五識) 다음에 의식(意識)이 있고, 일곱 번째 마나식이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연결해주는 중간 고리가 마나식이다. 그리고 제8식이 인간의식의 바탕, 생명 의식의 창고 역할을 하는 알라야식이다. 그걸 장식(藏識)이라고도 하는데, 장藏이란 저장한다는 의미다. 우리가 우주에서 태어나 살아온 삶의 전과정이 의식의 바다인 장식(藏識), 무의식에 전부 그대로 기록돼 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수행을 하다보면 어릴 때 생각이 그대로 다 난다. 비록 어려서 말은 못해도, 아름다운 노을을 보고 문득 자연과 하나가 됐었다면, 그 때의 장면이 평생토록 잊혀지지 않는다. 사진이 찍히듯 순수의식에 기록되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어릴 때 일이 모두 떠오른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첫째 사물에 대한 인식 능력을 높이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 몸의 기운이 수승화강(水昇火降)의 과정을 거쳐 정화된다. 생리학적으로 우리 몸의 기능은 삼초(三焦)로 나누어진다.

 

폐, 심장, 머리가 상초(上焦)이고, 비위 중심의 소화기관이 중초(中焦), 방광, 신장 등 배설, 생식하는 기관이 하초(下焦)다. 즉 상초上焦에는 신神이 작용하고, 하초下焦에는 신神이 생성되는 힘의 근원, 내 몸이 생명활동을 하는 에너지의 근원인 정精이 자리잡고 있다. 그게 내 몸 속의 천지다.

 

정精은 곧 땅이요, 신神은 곧 하늘이다. 정신精神! 인간은 몸 속에 하늘과 땅을 지니고 사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 우리 몸의 천지 기운이 밝아지면, 사람을 바르게 보고, 사물의 내면과 본성을 보기 시작한다.
 
 
둘째, 수행을 하면 모든 생명의 본성인 신성(divinity)을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 마음은 체(體)와 용(用)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체體란 무엇을 보고 듣고 말하는 등, 주변의 사물과 관계를 맺고 마음이 작용하기 전 단계, 근원 마음이다. 그것을 성性, 본성이라고 한다. “야~, 그래도 걔는 바탕은 착해. 본래 마음은 그런 애가 아니야. 본성은 착해.” 이런 말에서처럼, 본성이란 ‘본래 성품’이다. 그런데 모든 생명의 본래 성품은 같은 경계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늘이나, 땅이나, 사람이나, 짐승들이나, 돌멩이나, 흙덩어리나, 흐르는 물이나, 타오르는 불이나, 저 태양과 달, 은하계 별들이나, 그 본성은 모두 똑같다는 말이다. 본성은 열려있는 우주생명 의식이다. 대우주와 완전히 하나가 돼 있는 환한 불덩어리, 그러면서도 아주 시원하고 의식이 평온해지는 대광명의 경계다. 거기 보면 우주 만유가 다 살아 있다. 천지만물과 하나가 된 일심 경계, 그런 절대 평등의 경계, 절대 순수 의식에 돌아가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선후천을 막론하고 모든 종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이러한 본성에 머무르려면, 그 동안 살아오면서 저지른 모든 죄업을 정화해 나가야 한다.

 

 

마음 닦는다는 것은, 바로 자기의 후천적인 성품 그걸 기질이라고 하든, 성격이라고 하든, 환경적인 요인 등 여러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형성된 지금의 ‘나’라는 독립된 개체가 갖고 있는 것 가운데 문제되는 것을 정화해서, 천지율려의 조화 속에 일체를 이루는 본래의 자기 생명의 모습, 즉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 경계를 불가에서는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그 다음, 하나의 개체로서 구체적인 의식활동을 하는 것,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걸 정(情, emotion)이라고 하는데, 마음은 동하기 전의 본래의 근원 모습인 본성과, 구체적으로 사물에 동화되어 작용할 때의 감정 둘 다를 포괄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가에서는 “심통성정心統性情”, 즉 “마음은 성性과 정情을 통섭한다.”고 말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불가의 유식설에서 말하는 인간의 감정활동에는 오식五識과 의식, 그 다음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해주는 통로로서 제7식 마나식, 그리고 내 생명 의식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은 바탕인 장식藏識, 알라야식이 있다.

  

나무로 얘기하면, 잔가지들이 오식(안이비설신)이고, 잔가지들 아래로 뻗은 줄기가 의식, 의식의 줄기와 뿌리를 연결하는 가운데 큰 줄기가 마나식, 그 다음 뿌리가 알라야식이다. 뿌리에서 모든 게 뻗어나가는 것처럼, 인간의 말이나 행동, 습관들은 그 사람이 과거에 행해 온 모든 것이 바탕이 되어, 저도 모르게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닦으려면 자기의 과거 인생사, 더 나아가 전생부터의 어둠까지 모두 씻어내고, 잘못한 것, 죄 지은 것을 정화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도 기초 작업에 불과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수행을 통해 내 몸 자체를 정화해서 의식의 경계를 넓혀야 하는 것이다.

  

 

수행하려고 눈을 감으면,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안식(眼識)이 막혀 있기 때문이다. 또 몇 미터 이상만 떨어져 있어도 소리를 듣지 못한다. 냄새도 일정한 거리 이상이 되면 맡지 못한다. 이것이 보통 중생들의 몸이다. 그런데 수행을 통해 수승화강(水昇火降)이 되면서, 내 몸의 음양 기운이 개벽되어 율려도수를 회복하기 시작하면, 혼탁한 음양이 순수음양으로 정화된다. 그렇게 되면, 눈을 감아도 다른차원의 경계가 환히 보인다. 또 깊은 밤 주문(呪文,mantra)을 읽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귀에서 뚝 소리가 난다. 귓밥이 스스로 파헤쳐져서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또 아주 먼 곳에서부터 소리가 들린다. 산에 있는 나무들이 바람에 춤추면서 자기들끼리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바로 내 의식의 경계가 천지의 대생명과 하나가 되어, 내 생명이 온 천지의 생명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체득하게 되는 경계가 있다. 정신이 확 깨져서 수행을 잘 하면, 어느 순간 내 몸이 없어진다. 내 몸뚱아리가 온 우주 생명 자체라는 열려있는 의식의 경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첫 경험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수행을 하지 말라고 해도 하게 된다.

 

 

수도修道의 궁극의 목적은 세속적인 말로 도통道通이다. 불교의 도법은, 오로지 견성見性을 하려고, 부모형제도 세상도 다 등진다. 도통을 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 수행이란 자기가 자기 심법을 연마하는 것이다. 명칭이야 참선이라 하든, 수도, 수련이라고 하든, 뭐라고 명명하든지 간에 다 一心을 강조하는 것이다. 오직 일심으로써만 참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수도를 하다 보면 수승화강水昇火降이 되면서 水氣가 척추를 통해 올라온다. 그러면서 이 얼굴에서 만의회집지상(萬蟻會集之像)이 일어난다. 만의회집지상이란 일만 마리의 개미가 모여드는 현상을 말한다. 만의회집지상이 되면 개미가 얼굴에 기어다니는 것처럼 섬섬대서 못 배긴다. 그런데 이건 피부 밖에서 그러는 게 아니고 피부 속에서, 살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가려워서 도저히 못 배긴다. 그게 바로 水氣가 순환循環하느라고 그런 것이다.

 

만의회집지상은 아주 미세한 세포에까지 수기가 올라오면서 기혈이 작용할 때 생기는 현상이다. 그게 얼마 지나면 완전히 수승화강이 돼서 체질 개선이 된다. 그 경지에 가면 그런 현상이 다 없어져 버린다. 그렇게 되면 아주 피부도 말쑥해지고, 눈도 유리알보다 더 반질반질하니 광채가 난다. 수도하는 사람은 눈을 보면 안다. 또 한편으로는 인당印堂이 얼음을 갖다 얹은 것 모양 시원하다. 육체적으로 수승화강이 돼서 체질이 완전히 변화되면, 청명한 맑은 기운이 하늘까지 꽨다. 체질이라는 게 그렇게까지 변화한다.

 

 

그런데 무형인 정신은‘망형망재(忘形忘在)’가 된다. 자연하고 내가 합치되어 하나가 돼 버린 것이다. 그렇게 되면 광명(光明)이 어느 정도까지 열리게 되느냐 하면, 저 십 리 밖의 소나무에 송충이가 솔잎 갉아먹는 것까지 환하게 보인다. 그렇게까지 광명이 열린다. 그러면서 자꾸 점입가경漸入佳境으로, 다른차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경계까지 간다. 그런데 수도 공부를 하려고 보면, 쉽게 얘기해서 무슨 마魔라고나 할까, 그런 게 자꾸 낀다. 간혹 수행공부하는 사람들 중엔 공부도 못 하고, 입 삐뚤어지고 눈 삐뚤어지는 구안와사口眼?斜 같은 병이 걸리는 사람이 있다. 또 여러 백 대 내려오면서 조상에서 남에게 원한을 맺게 해서 보복하려는 그런 크고 작은 척신들이 있다.

 

 

하나 예를 들어 수 년 전, 일주일을 한도로 해서 수련공부도 시키고 했는데 박선경이라는 사람이 한 5일쯤 돼서 초통이 됐는데 공부하다 말고 “왁!”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뒤로 나자빠진다. 그러니 여러 사람이 “왜 그랬냐?” 하고 물으니, 이런 얘기를 한다. 그의 큰아버지 얘기다. 강원도 산골짝에 갈 것 같으면 나무뙈기로 얽은 삽짝문(사립문)이 있어서 밤에는 그냥 닫아두고 낮에는 열어 놓는다. 거기는 도적도 없다.
 
하루는 그 큰아버지가 볼일을 본다고 어디를 갔다. 그 일정이 거리로도 그렇고 한 사흘 걸려야 일을 마치고 돌아오게 됐다. 그런데 그날은 얼마 가다가 아는 사람도 만나고 해서 술 몇 잔 먹다가 시간이 없어서 못 가고, 얼큰하게 술에 취해서 밤중에 집으로 들어왔다. 그가 제 집에 돌아와 보니까 토방에 자기 마누라 신발하고 알 만한 동네 사람의 신발이 나란히 있다.

 

 

그걸보고 그 사람이 눈이 뒤집어져 버렸다. 그래서 욱 하는 생각에 헛간으로 달려가 도끼를 들고 연놈을 찍어 죽인다고 뛰어 들어갔다. 하니까 벌써 그 마누라는 뒷문으로 도망가고 동네 사람만 그 도끼에 찍혀 죽어 버렸다. 이유야 어떻든지 그의 큰아버지는 사람을 죽였으니 철창엘 간 사실이 있었는데, 그때 박선경이 도통을 하려고 하니까 그 죽은 신명이 도끼를 가지고 찍으러 달려붙더라는 것이다. 사실은 자기가 유부녀 보다가 도끼 맞아죽었으니 제 잘못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다. 제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죽었기 때문에 복수를 하려고 한다. 신명세상도 그렇고 인간 세상도 저 잘못한 것은 전혀 생각을 안 한다. 그런 것이 척(隻)이다.

 

 

 

 

 

 

천부경(天符經)의 매력은 우주 절대 근원을 어떤 고유명사 도(道), 신(神), 하느님이라 하지 않고 수(數)로 얘기한다. 이 상징성이 무궁하다. 해석의 여지가 많은 것이다. 
 

천부경(天符經) : 상경(上經), 진리의 큰 근본 주제 ? 하늘(天)   땅(地)   인간(人)

 

천부경의 첫 구절은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석삼극무진본(析三極 無盡本)’이다.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은 맨 마지막 구절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과 대구(對句), 짝말이다. 그러니까 천부경 전체 구조가 1로 시작해서 1로 끝난다.

 

첫 구절에서부터 1을 거듭 강조하면서 1에 근본을 두고, 우주의 생성 변화와 인간 삶의 목적에 대해 진리 정의를 해 주고 있다.

 

진리 주제어가 일자(一者)이기 때문에 삼극론三極論(10무극,1태극,5황극)으로 볼 때 천부경은 1태극(一太極) 경전이다. 본체론(本體論)을 얘기하는 것이다. ‘우주의 본체 1에서 어떻게 현상 세계가 벌어졌나, 그 속에서 태어난 인간이란 뭐냐?’ 이것을 정의해 주는 것이다.

 

 

그 뜻을 풀이하면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하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나와 너, 우리들 또 대자연계, 온 우주가 바로 이 하나에서 비롯되었다. 一始, 一은 始다. 정의를 하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간결한 인간 언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一은 始다. 하나에서 모든 것은 비롯되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듣는 것, 즉 이 대 우주의 현상계, 나아가서는 신의 세계 자체도 하나에서 비롯되었다. 一은 기수니 서수니 하는 그런 경계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 一 자를 얘기하는 것이다. 하나 둘 셋의 하나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를 얘기하는 것이다.

 

 

‘일시(一始)’는 ‘하나는 근원이다. 비롯됨이다. 시작이다’라는 것이고, ‘무시일(無始一)’ 시작이 없는 一이다. 無에서 비롯된 하나다. 천부경에 첫 선언이 이 우주 만유가 비롯된 절대 조화의 근원, 一자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一에서 모든 것이 비롯되었으나 無에서 비롯된 一이다. 그러고서 다시 一로부터 현상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이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생명과 진리의 궁극의 근원은 바로 一者라는 것이다. 무無에서 비롯된 하나다. 1의 시작은 무(無)다’라는 말이다.

 

모든 것은 하나로 비롯되는데, 바로 그 하나의 바탕 자체인 無에서 비롯된 하나다. 無라는 것은 카오스다. 어떤 자연의 질서도 우리가 인식이 되지 않는 자리에서 질서가 나온다는 것이다. 하나에서 석삼극析三極(無極,太極,皇極), 하나가 셋으로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하늘과 땅과 인간의 도를 말하고 있다. 이어서 ‘석삼극무진본(析三極 無盡本)’에서는 一과 三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 一은 셋으로 자신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게 석삼극(析三極) 이다. 삼극(三極)은 우주에서 가장 지극한 3가지. 다시 말해 모든 생명의 근원 1이 현상계에 드러날 때, 하늘과 땅과 인간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天地人 이 3가지 지극한 것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진리의 큰 근본 주제는 바로 하늘天과 땅地과 인간人이다.

 

 

‘석삼극무진본(析三極 無盡本)’에서 석(析)은 분석할 석析 자로, 나눈다. 쪼갠다는 것이다. ‘그 하나가 삼극(三極)으로 나눠져도 무진본(無盡本), 그 근본은 다함이 없다’는 의미다.  이 다함이 없다는 건 무슨 말인가? ‘사람이 10억에서 100억으로 늘어나고 우주의 은하계가 아무리 많아져도, 그 근본은 다함이 없다. 고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대우주의 생명력은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해서 항존(恒存), 영원히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이게 과학에서 말하는 우주에너지 보존 법칙이다.

 

또 불가(佛家)의 ‘반야심경’에 나오는 ‘부증불감(不增不減), 우주의 생명력은 늘어났다 줄었다 하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다. ‘무진본(無盡本)’ 이건 우주의 영원성을 얘기하는 것이다. 대우주는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고, 그 진리의 근원 조화 세계는 불변이다. 여기서 본本은 1태극이고, 무無이다. 진리의 본원 자리를 말한다.
 

 

 

하늘(天)  땅(地)  인간(人)에 대한 정의

‘천일일(天一一) 지일이(地一二)  인일삼(人一三)’  여기서는 삼극(三極)을 구체적으로, 하늘과 땅과 인간으로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과 인간은 무진본(無盡本)의 본(本), 본(本)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천일(天一), 지일(地一), 인일(人一), 즉 하늘과 땅과 인간은 일자一를 그대로 가지고 있단 말이다. 이 구절은 또 우주 만유의 본질은 일체라는 뜻이다.

 

하늘도 땅도 인간도 조물주의 신성(神聖), 일(一)을 바탕에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늘과 땅과 인간의 존재를 정의해 준다. 우주의 삼신(三神)은 바로 ‘天, 地, 人’ 이다. 삼신의 살아있는 완전한 모습이 하늘과 땅과 인간이다. 이것을 수학으로 나타낸 것이다. 天一, 地一, 人一, 천지인에 똑같이 一 자를 붙쳤는데 바로 一始無始一 할 때 그 一자다.

 

 

우주 만유가 생성돼 나오는 우주의 본체를 후대에 와서 신神이다, 도道다, 그것은 一心이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천부경天符經의 매력은 우주 절대 근원을 수數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상징성이 무궁하다. 해석할 여지가 많은 것이다. 열려 있는 해석, 개방된 해석에 여지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의 매력덩어리라는 것이다. 천부경(天符經)은 진리의 원본이다. 인류문화 경전의 원형이다. 동북아 최초의 계시록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지구가 얼마나 신비한가. 이 지구야말로 대우주 창조주의 몸 그 자체다. 창조주의 생명, 숨결 그 자체다. 우리가 그 위에서 태어나고, 그 위에 지금 살고 있는 것이다.

 

바다의 해변 가를 달리면서, 깊은 숲 속에 들어가서 말할 수 없는 시원스런 자연의 숨결, 생명 이 지구 어머니 창조주의 숨결을 마시고, 그리고 동시에 밤하늘의 별들을 본다. 이 조물주의 두 얼굴 하늘과 땅을, 그런데 그 속에 천지의 영원한 주인 되는 인간이라고 하는 또 다른 절대자가 떡 서있는 것이다.

 

 

‘天一,地一,人一’의 논리는 사실은 진리의 바탕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들려주는 것이다. 수백 수천만 권의 진리 해석의 메시지가 여기에 응축돼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의 근본 유전자 암호판이다. 진리를 해독하는 진리 근본을 깨닫는 우주의 창조 지도의 암호판이다. ‘天一 地一 人一’에서 하늘과 땅과 인간은 동일한 바로 一神이다. 우주 만유라는 것은 절대 근원 一자, 一神에서 나온 하늘과 땅과 인간은 동일한 삼신(三神)이다. 하늘과 땅과 인간이 똑같이 조물주의 신성과 덕성과 지혜가 동일하다. 그런데 생명의 근원은 같지만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에서 ‘天一, 地二, 人三’에서 이와 같이 다름에 있다는 것이다.

 

 

天一은 하늘이라는 것은 모든 생명을 낳는 근원으로서 一자다. 첫 번 째다. 땅이라는 것은 모든 만물을 기르는 근원으로서 음적인 존재 二다. 하늘은 양적 존재로 天一, 모든 양(陽)의 근본이고, 지구 어머니 地二’  땅은 음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天一 地二’ 라는 것은 하늘은 양이요, 땅은 음이다. 하늘은 아버지요, 땅은 어머니다. 천부지모(天父地母) 사상. 천지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부모님이다. 天地父母 사상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천지의 아들이 바로 역사의 통치자 하늘의 아들, 천자(天子) 이다. 그 머리 되는 사람이 인간 역사의 통치자다. 천자(天子) 사상은 동북아 문화의 종주인 바로 한민족, 조선민족의 문화 원형이다.

 
하늘은 아버지로서 양의 근본, 땅은 어머니로서 음의 근본이 天地父母가 하나가 돼서 당신의 뜻과 대 이상을 성취하는 천지의 진정한 주인이 사람이다. 그래서 天一과 地二의 합덕이 人三이다. 人三의 三은 진정한 살아 있는 三神, 우리 각자 인간이 우주의 꿈과 대 이상을 완성하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다. 인간이 얼마나 존귀하고 절대적인 존재냔 말이다. 이게 사실은 엄청난 얘기다. 이 ‘천일일(天一一) 지일이(地一二) 인일삼(人一三)’에서 일一, 이二, 삼三을 서수(序數)로도 볼 수 있는데, 하늘땅이 생겨나고 사람이 생겨났다고 하는 생성, 진화의 순서도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수(數)의 전신을 얘기하는 것이니까 상수철학에서 볼 때 하늘과 땅과 인간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 천일(天一)과 지이(地二)가 음양의 출발점이다.

 

 

동양의 역철학사상 천일(天一)과 지이(地二)를 가장 강력하고 깊고 심오하게 깨달은 분이 복희팔괘를 그리신 5,600년 전 태호복희씨다. 부호언어로 하늘 아버지의 생명은 하나(―)를 그렸다. 그리고 지구 어머니는 둘(?)로 그렸다. 양효(陽爻)와 음효(陰爻)로, 천부지모(天父地母)의 생명의 신성(神性)을 표현한 것이다.

 

천지는 양과 음의 무한한 생명의 근원으로, 그것이 일체가 되서 그 기운을 온전하게 갖고 태어난 게 인간이다. 인간은 양의 근원과 음의 근원, 음양이 완전히 일체가 돼서 나온, 생명의 총체성을 갖춘 존재란 말이다. 그게 ‘인일삼(人一三)’의 의미다. ‘인일삼(人一三)’을  뚝 떼서 보면 인간 존재의 위격(位格)과 생명성에 대한 정의다.

 

 

천부경은 이렇게 하늘, 땅, 인간의 존재와 생명성을 정의해 주고 있다. 하늘  땅  인간은 무엇을 향해 변화해 가는가. 바로 이 대 우주의 절대의 조화의 근원, 창조의 궁극의 손길, 절대 一者가 一始, 一은 始다. 一에서 비롯된 거다. 이걸 제대로 깨치고 느끼고 그 기운을 받고 마음이 순수해서 그 一자 그 자체가 되어야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심법 전수를 하는 것이다. 얼마나 중요한가.

 

 

천부경을 보면 수(數)의 원리, 1에서 10까지 다 드러나 있다. 우주의 절대 근원인 하나, 그 하나에서 셋으로 나타나고, 또 그 하나가 다시 현실 세계, 봄 여름 가을 겨울 순환 과정에는 10으로 커져 나간다는 것이다. 하나가 열로 변화를 한다는 것이다. 천부경을 보면 1, 2, 3이 나오고, 운삼사運三四(3, 4) 나오고, 성환오칠(成環五七)에서 5, 7이 나오고, 生七八九 생 7, 8, 9가 나오고, 일적십거(一積十鉅)에서 10까지 해서, 수의 원리가 1에서 10까지 다 드러난 것이다. 1만 년 전에 1에서 10의 수의 체제를 가지고 있었단 말이다. 이 지구촌 인류문화사상 처음으로 1에서 10수의 자연수를 발명을 한 것이다. 이게 무슨 아라비아인들 또는 중동 인도 유럽에서 처음 나온 게 아니다.

 

 

지금의 동지,소한,대한,입춘,우수,경칩…24절후와 해시계 규표를 태호복희(BC3528 ~ BC3413)씨가 처음 발명한 것이다. 이것을 시간 공간의 구성 원리로 다시 한 번 계시를 해주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도서관(圖書館)이라는 말의 어원이기도 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다.
 
시간과 공간의 원리에 의해서, 1에서 10수의 구성 원리를 보는 것이다. 생성수 원리(生數,成數), 음수와 양수. 낙서(洛書)는 바로 이 동서남북 각각 사방위와 중앙 토(土) 자리 방위에서 운동하는, 작용하는, 이 오행의 기운이 실제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고 순환하느냐 하는, 우주의 봄 여름에 만물을 낳고 기르는 역(易)의 논리로 얘기하는 게 낙서(洛書)다.

 

 
『 낙서(洛書) 』에는 1에서 9까지 수가 배열되어 있는데 2 7 6, 9 5 1, 4 3 8, 이것을 서양에서는 마방진魔方陣magic square이라 하며 교과서에도 나온다. 미국의 수학자 프랭크 슐츠F.Swetz는 『낙서洛書의 유산Legacy of the Luoshu』에서 ‘낙서洛書는 비단길을 통해 동서양을 왕래한 아랍인들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 인도, 동남아, 중동, 유럽 문화 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하였다. 서양 문명의 뿌리를 추적해 봤더니 이슬람 문화권에도 낙서가 전달됐고 유대문화에도 낙서가 들어 있더라는 얘기다.

 

2,500년 전 그리스 수학자 피타고라스도 이것을 받아 보았다.’고 했다. 그래서 피타고라스가 자연수의 체계에 눈을 뜬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오늘의 서양 과학문명은 끊임없이 피타고라스로부터 영감을 받아왔다고 했다.

 

서양문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피타고라스는 “모든 것은 수(數)에 의해 규정된다(All things are ruled by numbers).”는 유명한 얘기를 하였다. 결론적으로 동서양 문명의 뿌리가 바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라는 얘기다. 낙서洛書의 수를 그대로 옮기면 3차 마방진이 되는데, 가로·세로·대각선의 합계가 모두 15가 된다. 마방진은 한마디로 숫자 속에 숨겨진 우주의 질서와 균형을 의미한다.

 

 

낙서(洛書)는 4,300년 전, 중국에서 9년 홍수가 일어나 우(禹) 임금이 치수공사를 하던 중에 물 속에서 나온 거북이 등에 있는 무늬를 보고 낙서洛書를 그리게 되었다. 당시 단군 성조의 맏아들 부루(扶婁) 태자가 아버지 단군 성조의 명을 받고 우(禹)에게 치수 비법을 전해주었다. 그 사실이 중국 역사책 『오월춘추』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책을 보면 ‘창수사자(蒼水使者)’가 나온다. 창수(蒼水)는 지금의 황해 바다 북쪽에 있는 발해(渤海)다. 사자가 발해를 건너가서 금간옥첩(金簡玉牒), 금옥과 같이 아주 잘 만들어진 함에다가 치수비법을 넣어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오행원리로 되어 있어서 ‘오행치수지법(五行治水之法)’이라고도 한다. 그렇게 해서 우(禹)가 9년 홍수를 다스리고 요순시대를 이어 하(夏)나라를 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희씨가 받아 내린 하도(河圖)와 우(禹)임금이 받아 내린 낙서(洛書)가 중동과 그리스 지역에까지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로 인해 서양에서 이미 2,500년 전에 수(數)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서양의 근대 과학 문명과 오늘날 컴퓨터 문명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낙서(洛書)는 우주의 봄여름 선천, 역동적인 봄여름의 변화에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원리, 상극법칙이 바로 낙서(洛書)다. 낙서洛書는 9수(數)까지 밖에 없고, 하도(河圖)는 10수(數)까지 있다. 그러니까 바로 1수(數)의 조화가 완전히 우주속에서 100% 오픈된 게 하도(河圖)다. 가을우주에 열매를 맺는 이치가 바로 하도(河圖)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시간 공간 속에서 계절의 변화 원리를 나타내준 수(數)의 법칙이 바로 하도와 낙서다. 낙서洛書는 선천 봄 여름, 하도(河圖)는 후천 가을 겨울, 열매를 맺는 것이다.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잡는 것, 평화 , 안정, 조화가 전부가 하도(河圖)의 모습이다. 하도河圖는 10수 이다.

 

피타고라스는 1(monad;모나드)부터 10(dechad;데카드)까지의 수는 제각기 특수한 의미와 역할을 갖는데, 그 중 특히‘10’수는 완전한 포용성을 지니는 만물의 주재자(the keyholder of all)다 라고 하였고, 석가 부처는 화엄경에서 이십표무진본(以十表無盡本)‘ 10으로서 다함이 없는 근본을 나타낸다라 하여 10으로써 우주의 조화법계를 드러낸다고 설파하였다.

 

공자 또한 주역의 부록에 해설서인 10편의 논문 10익(翼)을 보충하면서 10의 완전성을 증언한바 있다. 1수(數)의 조화가 10수(數)로 완전히 우주 속에서 100% 오픈된 게 하도(河圖)다, 1이 완전히 열려서 일적십거(一積十鉅) 무궤화삼(無?化三)이다. 10으로 완전히 열렸단 말이다. 10무극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무궤화삼(無櫃化三)’에서, ‘무궤(無櫃)’는 ‘빠짐없이’란 뜻이니까 ‘이 우주만유 속에서 개미 한 마리 예외 없이 모두가’, ‘화삼(化三)’, 화할 화(化) 자, 변화한다는 화化 자다. 3수의 도(道)로 돌아간다.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 ‘화삼(化三)’은 ‘조화의 3수’다. 무궁한 현상 세계에서 끊임없이 조화를 일으키는 3수. 또는 존재의 기본 구성 원리인 하늘과 땅과 인간이라는  천.지.인 3수라는 뜻으로, ‘무궤화삼(無櫃化三)’은 하늘, 땅, 인간은 한 번도 끊임없이 일체의 경계(삼위일체三位一體)에 있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니까 ‘무궤화삼(無櫃化三)’은 동양의 삼신일체(三神一體) 사상, 서양의 삼위일체(三位一體) 사상의 원 근원이다. 여기서 상경(上經)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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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ㅋㅋㅋㅋ ip1 2016-05-26 09:51:25
    이런 미친애는 여기 뭐를 찾아먹겟다구 기어들어 왔는가?
    이 창을 쓰레기 장인줄 아는가 보구나...
    이규진아........... 네목숨의 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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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부경 ip2 2016-05-26 10:33:53
    한민족의 경전 천부경을 통해 깨달음을 얻습니다.
    한번에 읽기에는 다소 긴 내용~~짧은 스토리텔링이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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