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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실체
아에우에 0 426 2006-05-04 12:19:12
북한의 실체에 도달하기는 무척 힘들다. 북한이 정보를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은 홍보와 사실 보도를 구별하지 않는다. 어디까지가 홍보고 어디까지가 사실 보도인지 구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심지어 북한의 고위층도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다. 안다고 해도 아주 부분적일 경우가 많다. 김일성을 만난 외국 원수들이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김일성은 자신도 조작된 자기 신화를 믿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누구도 제대로 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실체를 알아내려는 노력은 계속해야 한다.
희망 사항만으로 그들을 상대하면,
희망대로 되는 게 아니라 희망하지 않은 대로 되기 때문이다.

정확히 알려진 사실 중에서 결정적인 실마리가 되는 사실의 의미를 제대로 캐면, 이것을 바탕으로 거대한 실체를 알아낼 수도 있다고 본다.
고구마를 캘 때에 무성한 넝쿨을 과감히 제거하고 줄기를 제대로 잡아서 아래로 아래로 그 줄기만 잘 따라가면 땅 속에 숨어서 전혀 보이지 않던 고구마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파낼 수 있듯이,
무성한 첩보와 역첩보, 정보와 역정보의 넝쿨과 잎에서 눈을 떼고 핵심이 되는 사실의 줄기를 제대로 잘 잡으면, 의외로 수수께끼 투성이의 거대한 북한의 실체를 남김없이 파헤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렇게 되면 아주 선명하게 북한의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낱낱의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다. 큰 줄기를 잘 잡아야 한다. 그래야 정보와 역정보, 홍보와 오보의 짙은 안개 속에서 헤매지 않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이 비록 남한에 대해 속속들이 정확한 사실을 무수히 많이 알고 있다고 해도, 그들이 정보 분석을 정확히 한다고는 할 수 없다. 줄기는 못 잡고 넝쿨과 잎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것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가 많다고 해서 실체를 꼭 잘 안다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지식이 많다고 해서 꼭 지혜로우라는 법은 없는 법이다. 북한 전문가라고 해서 꼭 초등학생보다 북한의 실체를 잘 안다는 보장은 없는 법이다. 벌거벗은 임금을 알아본 사람은 한 어린 아이였던 것이다.

우리 속담에 '서울 갔다 온 사람보다 서울 안 갔다 온 사람이 더 잘 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이중의 뜻이 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사람을 비웃는 뜻과 문자 그대로 그럴 수도 있다는 뜻 두 가지다.

밖에서 보면 객관적으로 보기 때문에 적은 정보로도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반면에, 안에서 보면 주관적으로 보기 때문에 무한한 정보와 수많은 이론에도 불구하고 실체에 다가가지 못하고 마냥 헤맬 수 있다.

[한 때 세계가 놀랐던 북한의 발전]

북한은 한 때 세계가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특히 일본의 지식인은 완전히 매료되었다. 일본 지식인이 앞장서서 재일 조선인을 북송했는데, 이것을 오늘날 일본의 간악한 음모로 보는 경향이 많은데 그런 측면도 분명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본다.
그들은 진심으로 남한을 영원히 희망이 없는 나라로 보고 북한이야말로 지상낙원을 머잖아 실지로 건설하리라고 보았다. 일본보다 나은 나라를 건설할지 모른다는 걱정 아닌 걱정까지 했다. 그만큼 북한의 발전은 경이로웠다.

1954년에서 1960년까지 북한의 경제 성장률은 무려 연 평균 20.3%였다. 1961년에서 1970년까지 국방비에 국가 예산의 30%를 쓰는 상황에서도 북한의 경제 성장률은 만만찮아 연평균 10.5%였다.
북한은 모든 생산을 국가가 소유하기 때문에 국가 예산 30%는 GNP의 30%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한이 카터의 주한 미군 철수 보류 대가로 GNP의 6%를 국방비로 지출하기로 약속한 것을 생각하면, 북한의 국방비 지출이 얼마마한 출혈인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건 지금도 그 사정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보면 틀림없다.
남한은 2000년도 국방비는 GNP의 2.8%밖에 안 된다. 우리 경제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는 반증이다.

1970년만 해도 남한은 북한보다 인구가 두 배나 많았지만, 박정희의 등장으로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했지만, 북한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남한이 어떻게 해서 북한을 추월해서 천리 만리 떨어뜨리게 되었을까.

이제까지의 논의와는 반대로 이 글에서는 그 원인을 남한에서 찾지 않고 북한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이 중에서 북한이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던 중에 내린 몇 가지 정책이 그 후의 북한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이것들의 의미를 읽어 북한의 실체를 드러내보려고 한다.

[1958년]

1958년에 도대체 북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얼마나 중요한 정책이 취해졌던가?
1958년은 한 마디로 말해서 농업, 공업, 상업 모두가 국가의 손아귀에 100% 들어간 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958년 8월말 농민의 100%가 '사회주의적 농업협동조합'에 편입되었다. 1956년에만 해도 그 비율이 80.9%였으나 불과 2년도 안 되어 100% 협동조합에 곧 협동농장에 전 농민이 소속되어 공동 생산 공동 분배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고 눈물 꽤나 흘렸다. 남한에 대해 비분강개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북한에 대해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다. 가장 큰 이유는 토지 개혁이었다.
북한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했지만, 남한은 유상몰수 유상분배했다는 것이 정통성을 가름하는 기준이 되었다. 좋은 지적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소설은 소설로 읽어야 하는데, 대학생들은 그러질 못했다. 전쟁 후의 이야기는 없기 때문에 모두가 소설의 상황이 그 후에도 계속된 줄 알았다. 오히려 북한의 눈부신 전후 복구 얘기를 듣고 더욱 감동했다.

본질은 현상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법이다.
북한의 토지 개혁은 겉과 속이 전혀 달랐다.

--30대의 김일성이 어버이처럼 보였다.
이것은 북한에서 무상으로 토지를 받은 60대의 촌로가 한 유명한 말이다. 그러나 현물세라고 해서 연 27%(다른 명목으로 추가된 것을 합하면 실지로는 30%가 넘었음)를 거둬 간 일은 얘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한국은 15할이라고 해서 연 생산물의 30%씩에 해당하는 돈을 5년만 국가에 바치면, 분배받은 땅이 영원히 자기 것이 되었지만, 북한은 이론적으로 30%씩 영원히 국가에 바쳐도 자기 땅이 되지 않았다. 이게 무상 분배의 진실이었다.

그래도 내 땅이 있을 때는 북한의 농민은 신이 났다. 소작농보다는 좋았기 때문이다. 40%, 50%를 지주에게 바치고도 소작권마저 보장 안 되던 과거보다는 나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이기심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공동 생산 공동 분배라는 멋진 말로 개인에게 주었던 땅을 모두 협동 농장으로 만들었다. 말이 좋아 협동 농장이지 이것은 전 농민을 소작농으로 만드는 조치였다. 누천 년 동안 백성이 바란 것은 그게 아니었다. 단 한 뼘이라고 내 땅을 갖는 게 소원이었다. 이걸 협동 농장이라는 교묘한 이름으로 국가가 다시 빼앗아갔던 것이다.

이것을 완성한 해가 바로 1958년이다.
애국심, 새 인간상을 내세워 국민을 정신없이 몰아쳐 멋진 공화국 만들자며 하루 8시간 노동을 완전히 무시하고 단숨에 천리를 달리는 운동을 전개했다. 중국의 대약진 운동과 같은 맥락이었다.

처음에는 공화국을 위해서 사심 없이 다같이 열심히 했다. 그 결과가 7년간 연평균 20.3% 성장이라는 기적이었다. 그러나 1961년 이후 성장률은 곤두박질쳤다. 10.5%라는 건 여전히 경이적인 기록이었지만, 이미 사람들의 마음은 현실과 타협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노력 영웅'으로 치하했지만, 이것도 점점 물질적 보상 없는 훈장 하나로 끝나자 사람들의 근로 의욕이 날로 떨어졌다.

지상낙원 건설이라는 꿈은 말의 형태로 남게 되었다. 말장난이었다. 모든 게 건성이었다. 70년대에는 근근히 버티던 것이 80년대 접어들자 실질적으로 마이너스 성장하게 되었다. 90년대 접어들자 누가 보아도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했다. 이제는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중국은 등소평이 등장하면서 이미 현실적으로 실패가 증명이 된 분야는 과감히 버렸다. 가장 대표적인 조치가 협동 농장의 해체와 '개체호'(an independent household)의 인정이었다. 각 농가에 농토를 실질적으로 돌려 주고 잉여 농산물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생산성이 급격히 올라갔다. 불과 몇 년 만에 기아 문제를 싹 해결했다.
자진해서 협동농장을 유지하는 마을도 잉여 농산물을 처분할 권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개체호나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효율적인 면도 있었다. 인심도 후했다. 문제는 바로 잉여 농산물 처분권이었다. 재산의 사유화 인정이었다.

개혁 개방한 중국이 북한에게 제일 먼저 권한 것이 농지 개혁 곧 개인에게 땅을 돌려 주고 잉여 농산물을 처리할 권리를 주라고 한 것은 한국의 국민이면 초등학생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북한 당국은 이상주의의 노예가 되어 그런 말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마귀라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토지의 소유권은 국가가 유지하더라도 인민들에게 50년 내지 100년간 경작권을 주고 10% 아니 20% 이내의 세금만 내고 농산물을 처리할 수 있게만 하면,
북한은 인구에 비해 경작지가 한국의 두 배나 되기 때문에 비록 논이 적다고 해도 2년 내지 3년이면 굶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된다.
중국인보다 훨씬 억척스러운 국민성으로 보아 오히려 농산물을 수출하게 될 것이다.

집앞의 10평 정도의 남새밭(채소밭)이나 100평도 안 되는 여기 저기 개간한 뙈기밭에서 나는 농산물이 광대한 협동 농장에서 나는 생산물 못지 않다는 것을 고려하면, 생산성 저하의 가장 큰 원인이 이상주의의 열풍에 의해 강제한 1958년의 100% 협동농장화가 북한 쇠락의 최대 원인임을 알 수 있다.

1970년 이후는 북한 사람들이 완전히 지쳐 버렸다. 허리가 부러지도록 열심히 하는 것보다 말만 번드레하게 하는 사상 투쟁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더 한층 각광을 받게 되는 것을 보자 사람들의 마음이 급격히 '말 잘하기'로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

만약 농업을 공동 생산 체제로 했더라도 개인에게 작은 규모의 상업과 공업을 인정했더라면 사정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북한에서 망명한 황장엽이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이 실패한 원인을 딱 하나로 요약했다. 역시 그는 듣던 대로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상업 불법화

이 상업 불법화가 처음에는 기세 좋게 출발한 공산 국가를 파멸로 이끈 가장 큰 이유이다. 유통이 안 되니까 모든 것이 비효율적이게 되었던 것이다. 품질에 관계없이 오로지 양만 채우면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만들기 좋다고 왼쪽 신발만 만드는 나라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생산한 감자가 들에서 썩어 빠져도, 감자를 싣고 가는 트럭에서 감자가 줄줄이 떨어져도 아무도 신경을 안 썼다. 생산만 하면 되었고 운반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유통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통은 상업인데, 상업을 불법화한 결과 생긴 웃지 못할 이런 희극이 벌어진 것이다.

상인은 노력도 않고 자본을 이용해서 생산물을 이 쪽 저 쪽 옮겨 주는 것만으로 돈을 번다고 해서, 불로소득자라고 해서 공산주의는 상인을 사악한 인간으로 본다. 한 지역에서 아무리 쌀이 많이 나도 그것을 다른 지역의 공산품과 바꾸지 않으면 쌀 생산 농가는 헐벗을 수밖에 없는데,
이것을 대신 중개해 주고 단지 그 대가를 받을 뿐인데도 항상 폭리를 취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상업을 불법화했다. 대신 정부가 배급을 통해 유통을 조절했다.

머잖아 그 비효율성이 속속 드러났다. 그러나 상업은 사악하다는 기본 전제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왜곡되었다.

만 원 들여서 만든 것을 물가를 잡는다고 천 원 받고 나눠 주었다. 누구도 생산비를 낮출 생각을 않았다. 오로지 양만 채우면 되었다.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상업을 허용해서 시장을 전면적으로 자유화하자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었다. 억눌렸던 가격이 한꺼번에 현실화되었기 때문이다. 소련에서는 심지어 국가 원수였던 고르바초프도 물가가 불과 몇 년 사이에 1만 %도 더 올랐기 때문에 매달 연금을 받아봐야 단 열흘 살 빵도 못 살 형편이 되었다.

중국의 개혁 개방이 원활하게 진행된 것은 더 이상 상업을 사악하게 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인 특유의 장사 기질을 발휘하여 개인이 소유한 농업이나 공업이나 순식간에 군살을 쏙 빼게 되었다. 생산성이 급격히 올라갔다. 그래야 돈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개체호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자작농, 소상인, 중소기업이다. 자작농에 이어 소상인도 허용하자 그 큰 중국이 아연 활기를 띠게 되었다. 중소기업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공장은 국가가 소유했지만, 작은 기업을 개인에게 허용하자 이것이 국가 전체에 엄청난 활기를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이제는 오히려 자기보다 수십 배 이상 큰 국영기업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북한에 원래부터 상업이 없었던 건 아니다. 1956년만 해도 37.2%가 개인이 소유해서 운영했다. 그러던 것이 판매 협동조합에 급속히 편입되어 1957년에 개인 소유는 겨우 22.8%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어 1958년에는 개인 소유는 전혀 없어졌다.
100% 판매 협동조합에 흡수되었다.
유통을 100% 국가가 소유하게 된 것이다.
상업을 전혀 허용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다. 개인이 경영하던 중소기업도 생산 협동조합이라는 미명으로 100% 국유화했다.

1958년 마침내 북한은 완벽한 공산 체제를 구축했다. 농업, 상업, 공업 세 분야 모두 100% 국가가 소유하게 된 것이다. 협동조합은 말뿐 실제는 국가의 입김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철저하게 중앙 집권 체제로 편입되었다. 물샐틈없는 계획 경제 체제를 구축했다. 곧 거대한 관료 조직의 비효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개인에게 재산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철벽같은 관료체제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거대한 파멸을 향해 달려갈 준비를 100% 갖추게 된 셈이다.

유통을 완전 장악하기 이전 그 사전 조치로 식량의 자유 판매제도도 폐지하고 1957년 11월부터 완전 배급 제도를 도입했다. 이리하여 1958년 이후 배급을 통하지 않고는 어디서도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되었다. 국가의 공급 체제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인민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을 만반의 준비를 갖춘 셈이다. 단지 시간의 문제만 남았다.
공급권을 장악한 무리가 인민들에게 사상을 내세우고 당을 앞세우고 충성을 미끼로 어떤 장난을 칠지 상상하기가 과히 어렵지 않을 것이다.

1969년부터 1970년 사이 전 인민의 계층을 크게 핵심, 동요, 적대 3개로 나눈 다음 이를 다시 51개로 세분해서 동요와 적대 계층에 속한 자는 합법적으로 차별할 수 있게 된다.
공급권을 장악한 자들이 스스로를 어느 계층에 집어넣을 것인가? 동요나 적대 계층에 들어갈 리가 없다. 평등을 지상 목표로 내세운 인민 민주주의가 가장 불평등한 사회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 시발점은 바로 100% 모든 생산 수단과 유통 수단을 장악한 1958년이다.


[1961년]

1961년 김일성은 사업이 부진한 대안의 전기공장을 방문한다. 이 현장지도에서 나온 게 유명한 '대안의 사업 체계'이다. 이는 나중에 헌법(제33조)에까지 명시된 독특한 북한의 기업 경영체계이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로 추앙 받는 김일성이 직접 명령해서 만든 제도인 만큼, 이것은 아무리 비효율적이라고 해도 북한은 이를 고칠 수가 없다.

대안의 사업 체계는 동기 자체는 아주 순수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집단 지도 체제이다. 당의 지도하에 경영자와 기술자, 노동자가 함께 참여하는 25~35명으로 구성되는 당 위원회가 공장을 이끌어 생산성도 높이고 노동자의 소외도 없앤다는 게 이 경영방식의 취지였다.

얼핏 보면 마치 구서독(현 독일)의 기업 방식이 아닌가라는 착각도 든다. 10여년 전부터 우리 나라에서도 구서독의 방식을 원용하여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거세게 요구해 왔다. 그렇다면 대안의 사업 체계는 참 좋은 제도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할 만하다.

이 제도의 장단점을 논하기 전에 우선 이해를 돕기 위해 중국의 개혁 조치 중에 이와 간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을 살펴보겠다.
1984년 등소평은 직접 지시하여(이런 경우는 이것이 유일하다) 각 공장에 공장장 책임제를 도입했다. 기업의 생산성을 위해 그가 가진 막강한 권력을 사용했다. 극약처방이었다. 최고 권력자가 명령해서 만든 제도는 매우 경직되게 되어 있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무시하고 현실을 단순화하기 때문이다.

일단 이렇게 마련된 제도는 그 권력자가 살아 있는 한, 사후에도 그 권위가 계속되는 한 그 제도가 현실적으로 엉터리임이 증명되어도 버릴 수 없다.
아니면, 그 권력자가 권좌에서 밀려 나는 순간 그 제도는 아무리 좋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폐지될 수도 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등소평은 직접 지시해서 법을 만드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공장장 책임제라는 제도는 직접 지시해서 만들었다. 그만큼 절박했다.

북한도 마찬가지지만, 공산국가에는 모든 제도 위에 공산당이 있다. 이른바 당 우위 정책이다. 각 공장도 마찬가지다. 공장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장(북한에서는 이를 지배인이라 한다)이나 공장장(북한말로는 기사장)이 최고 책임자가 아니라, 각 공장의 당 비서가 최고 책임자이다.

쉽게 말해서 경제 문제를 정치인이 최종적으로 책임진다는 말이다. 공산당이 유일선이기 때문에 누구든 그 지시를 따르고 교화를 받아야 한다.
한국에서 정치인이 권력을 잡는 순간 5대 재벌을 다 합한 것보다 훨씬 큰 공기업들을 한 손아귀에 쥐는 현상과 비슷하다.

문제는 경제가 누구나 알 수 있고 누구나 잘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데 있다. 전문가가 아니면 아무리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도 경제 문제는 잘 풀 수가 없다는 데 있다. 경제를 모르는 사람이 설령 순수한 동기로 간섭한다고 해도, 경제를 도리어 망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등소평은 이를 잘 알았다.
공장은 공장을 가장 잘 아는 사람 곧 공장장이 책임을 져야만, 생산성을 올려서 노동자에게 월급을 줄 수 있고 국가에 세금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정확히 간파했다.
80노인의 지혜에 혀를 내두룰 정도이다.
노동자에게 고용을 보장하고 월급을 많이 주고 복지를 향상시키는 것이 노동자의 소외를 없애는 첩경이요, 국가에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이 기업이 사회에 부를 환원하는 최고의 길임을, 그는 잘 알았음에 틀림없다고 본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당의 간섭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제가 정치에서 독립해야 한다. 경제가 고도로 발달할수록 경제는 전문가가 해야 한다.
그러나 당이 기득권을 포기할 리가 없다. 말은 공장을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고루 잘 지도하기 위해서 당 위원회가 존재한다고 하지만, 실은 그것이 바로 그들의 권력과 부를 보장해 주는 확실한 기득권이므로 절대 그들은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등소평이 유일하게 직접 명령하여 공장장 책임제를 도입하게 한 것은 바로 각 기업소에서 당 위원회의 부당한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대안의 사업 체계도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당 위원회는 최고 의사결정기구이고 당비서, 지배인, 기사장 3인을 포함한 6명 내지 9명의 집행 위원회가 북한의 기업소(공장)에서는 실질적인 경영자이다.
이 중에 당비서가 가장 서열이 높다. 그는 정치인이다. 지배인은 당의 정책을 충실히 이행하는 행정가다. 기사장은 남한으로 말하면 사장 겸 공장장이라고 할 수 있다. 기사장이 실질적으로 공장을 경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힘이 제일 약하다. 그의 목소리는 모기 소리 만하다.

노동자도 경영에 참여시켜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서로가 배우면서 동시에 서로가 가르치는 이상적인 체제를 만든다고 했지만, 이것은 필연적으로 당비서 독제체제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황장엽은 이 제도가 원래는 좋은 것이었는데, 나중에 변질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는 너무 순진한 사람이다.

애초부터 이건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서 만든 제도이지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만든 제도가 아니었다. 노동자를 경영에 참여시킨다고 했지만, 그것은 인기 정책에 지나지 않았다. 고도의 기만 정책이었다. 처음에 노동자들이 이를 열렬히 환영하고 열심히 일하고 좋은 제안도 많이 했지만, 그들은 곧 벽을 실감했다. 사사건건 당비서가 제동을 걸었던 것이다.
국가 정책이 어떻고 당 정책이 어떻고 김일성 수령님의 말씀이 어떻고 공산주의 새 인간형이 어떻고 돈이 먼저가 아니고 인간이 먼저고 .....

만약 이것이 제대로 된 제도가 되려면, 노동자의 이익을 제대로 반영하려면 기사장이 제1 서열, 지배인이 제2 서열, 당비서가 제3 서열이 되어야 했다. 당비서는 공장 자체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도맡아 공장 밖으로 나가서 정부를 대상으로, 당을 대상으로 로비를 잘하여 이를 깔끔하게 해결해 주는 역할을 해야 했다. 봉사해야지 군림해서는 안 되었다.

공장마다 처음의 열기가 급속히 식어갔다. 그런데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집단 지도체제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었던 것이다. 책임을 지려면 모두가 책임을 져야 했던 것이다.
당비서가 실지로는 모든 걸 좌지우지했지만, 그도 전혀 책임이 없었다. 형식적으로는 경영자, 기술자, 노동자, 당원이 모두 참여하는 당 위원회가 공장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김일성 수령이 직접 지시하여 만든 제도이기 때문에 80년대 중반 들어 지배인과 기사장에게 권한을 더 주려는 시도는 했지만, 이 제도에 절대 근본적인 개혁의 칼을 댈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북한의 딜레마이다.

[1969]

1969년은 정치, 경제, 군사 모두 매우 중요한 해이다.
이 해에 대논쟁이 있었다. 이를 69 대논쟁이라고 하자.
그 논쟁의 주제는
--군사 우위냐, 경제 우위냐?

논쟁의 결론은
--군사 우위. 제국주의자의 침략을 분쇄하고 남조선 인민을 해방하기 위해 총 한 자루 더 만들려면, 허리띠를 한 치 줄여야 한다.
김일성이 교시로 이를 최종 확정했다.

김일성은 이 해에 한 여인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녀는 할당된 목표량을 초과 달성한 후에 남은 달걀을 팔아서 한 달 봉급에 해당하는 돈을 챙겼다. 이 비난은 어떠한 이기심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이자, 군사 우위의 정책을 확고히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군인 출신의 박정희가 오히려 경제 우위 정책을 편 것과 선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이 정책 선택의 차이가 그 후 남북 역전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1967년 김일성은 빨치산파 가운데 경제 우위를 주장한 이른바 경제파인 박금철 등 갑산파를 제거했다. 북한판 등소평의 싹을 완전히 잘라 버렸다. 빨치산파 중 김일성과 같은 계열인 만주파는 이 때 군사 우위를 주장했다.
이 중에 오진우가 있는데, 그는 1969년 은밀히 김정일과 손을 잡는다. 김정일이 김일성을 계승하는데 최고의 원군을 얻은 셈이다.

그 자신의 성향으로 보아 그럴 리가 없었겠지만, 만약 1967년 김일성이 만주파가 아닌 갑산파의 손을 들어주었다면, 북한의 모습은 그 후에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의 사후에 아마 중국처럼 개혁 개방을 주장하는 세력이 권력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이미 1961년 조선노동당 제4차 대회에서 이미 김일성은 정치 걸림돌을 모두 제거했다. 국내의 우익 민족주의자(조만식 등), 남로당 계열(박헌영 등), 소련파(허가이 등), 연안파(김두봉 등)를 실질적으로 무력화시켰다.
이제 빨치산파 중에서 경제 우위를 주장한 갑산파마저 1967년에 제거해 버렸다. 김일성은 거칠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다산 정약용, 충무공 이순신도 봉건주의자라며 비판했다.

마침내 1969년 김일성은 서열이 낮은 오진우를 내세워 잠재적인 위협 세력인 서열이 높은 자들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빨치산파 중에서 자기와 같은 만주파에 소속한 동지마저 버린 것이다.
이유는 군부 강경파라는 것이었다. 비현실적으로 쓸데없이 군사를 현대화한다면서 한반도 실정에 안 맞는 무기를 개발하고 전략을 짜느라 쓸데없이 인민을 괴롭히고 국가 재산을 축냈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자기에게 도전할 세력을 완전히 제거한 것은 물론 추후 김정일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게 되었다.
오진우에게 시혜를 베풀어 그가 김정일 정권을 위해 충성을 다하게 하는 조치도 취했다. 권력의 기반을 다지는 데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귀재였다.

1969년 북한은 전국 사회과학자 토론회를 열어 수령 이론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중소 강대국 사이에서 두 나라를 역이용하여 자주, 자립하겠다는 취지에서 탄생한 주체 사상이 김일성을 수령으로 받들어 모시는 '유일 사상'으로 변질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후 아무리 정교하게 주체 사상을 다듬고 아무리 고상한 철학으로 주체 사상 옷을 만든다고 해도, 그것은 '유일 사상'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에 지나지 않게 된다. 외부 사람들에게 좋은 미끼를 만드는 일만 열심히 한 곳이 바로 주체 사상 연구소이다.
학자는 절대 정치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더군다나 정치가가 절대 권력을 가졌을 경우, 그는 한낱 장식품이자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북한이 개혁하려면 1958년의 전 산업의 국유화 조치, 1961년의 대안의 사업 체계라는 당비서 독재체제, 1969년의 군사우위 정책과 수령 이론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 이것이 북한 개혁의 핵심이다.
이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어떤 제스처를 써도 북한은 변하지 않는다. 남한이 시혜를 베풀면 북한이 결국 못 이긴 체 따라올 거라는 생각은 순진하기 짝이 없는 낭만적인 환상이다.

2000년 3월 9일 미 의회 군사 위원회에서 주한 미 사령관 토마스 슈워츠가 증언했다.
--북한이 지난 1년간 군사력 강화에 들인 노력은 그 이전 5년간 들인 노력을 합한 것보다 많다. 그 군사력 증강은 대부분 휴전선에 집중되었다.
추신 : 이 글이 좋은 글인지 나쁜 글인지...평가 좀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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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비군 2006-05-04 13:57:56
    휴 굉장한 장문이네요.. 다읽는데 힘들었습니다 ^^; 스크롤의 압박!
    어쨋거나 매우 새로운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분단사를 풀이한 글이네요. 어떤 지도자도 처음부터 국가와 국민을 망하게 하려는 사람은 없겠죠. 큰 의욕을 가지고 국가경영에 매진할 것입니다. 하지만 초심이 무너져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는 지도자들을 역사에서 많이 보아 왔습니다. 김일성도 결국 그런 사람가운데 하나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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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에이오우 2006-05-04 15:57:26
    넘 길고,,,정치문맹자니 ,,,그저 약간은 비슷한 글인데요, 아무튼 수고 많으셧어요, ,,동감하는 대목이 더 많으니,,,,좋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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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호~~ 2006-05-10 12:32:01
    이많은 장문을 쓰시느라 정말 수고하셨네요...글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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