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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교수 ‘마르크시스트→뉴라이트’ 사상전환 첫 고백 (문화일보)
문화일보독자 0 315 2006-06-06 13:47:39
다음은 문화일보 http://www.munwha.com 에 있는 기사들임.


안병직교수 ‘마르크시스트→뉴라이트’ 사상전환 첫 고백


“집권 운동세력 나라 위기몰아”

이미숙기자 musel@munhwa.com



• “南北현실 외면 ‘통일지상주의’ 어불성설” : 한국좌파 경제학의…
• 安교수의 ‘캐치 업 이론’ : 70년대 이후 운동권 사상논쟁의 한축…




1970년대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던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5일 “지금 집권 민주화 세력이 한국 사회를 구렁텅이로 이끌려하기 때문에 뉴라이트 운동에 나서게 됐다. 한국이 위기이기 때문에 무리하게라도 얘기를 하는 것”이라면서 자신의 사상 전환 과정과 배경을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밝혔다. 안 교수는 특히 70년대까지 신식민지반봉건사회론에 따라 한국 자본주의의 붕괴를 예측하다가 80년대 전두환 정권이 경제를 살리는 걸 보고 충격을 받고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소개했다.

뉴라이트재단 이사장인 안 교수는 “요즘 한자리하는 사람들은 대개 나와 운동도 같이 하고 내가 기른 사람들”이라며 여권의 핵심인사들을 실명거론하면서 “이들이 노무현 정부를 건달정부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선진화를 위해선 한미공조를 통한 국제협력노선이 최선인데 참여정부는 민족자주쪽으로 경사되고 있다”면서 “이 과정에서 이들이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민족자주를 내세우며 한미동맹을 이완시키는 것은 김정일 북한국방위원장의 계산에 말려드는 꼴”이라고 비판한 뒤 통일운동을 펴는 학계의 원로교수들도 실명거론하면서 “북한현실을 외면하고 민족을 사지로 몰고가면 안된다”고 비판했다.

안 교수는 학계의 박정희 전대통령 재평가론에 대해선 “과거 그를 타도해야 할 독재자로 봤지만 이젠 한국 근대화를 이끈 지도자로 본다”면서 “선진국의 기술과 자본을 받아들여 중진자본주의로 나간다는 캐치 업(catch up)이론에 입각해 보면 박정희의 경제개발이론은 탁월하며 박정희식 군부 독재가 아니었다면 경제발전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숙기자musel@ 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06/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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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北현실 외면 ‘통일지상주의’ 어불성설”

안병직 뉴라이트 재단 이사장

이미숙기자 musel@munhwa.com



• 안병직교수 ‘마르크시스트→뉴라이트’ 사상전환 첫 고백 : 19…






▲ 한국의 대표적 경제사학자인 안병직 뉴라이트재단 이사장은 “처음에 나는 책 속에서 진리를 찾으려 했지만 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현실에서 진실을 찾기 시작했다”며 사상적 전환과정을 설명했다. 신창섭기자


한국좌파 경제학의 대부로 불렸던 안병직(70) 서울대 명예교수가 뉴라이트운동의 기수로 나섰다. 과거 안교수를 따랐던 동료 후학들은 그의 ‘전향’에 당혹스러워 하고, 그 반대편 사람들은 그의 ‘변신’에 환호하는 형국이다.

지성의 최전선에서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해온 그를 변화시킨 것은 시대인가, 세월인가? 안 교수는 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에서 뉴라이트 사상가로 전환했는지 그 사상적 궤적과 현재 우리 시대가 당면한 과제를 짚어봤다.

안병직 교수를 최근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만났다. 당초 4월초에 인터뷰하려 했지만 척추수술 후 안정이 필요하다는 가족들의 만류에 따라 늦춘 것이다. 안 교수에게 강의자료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다니며 조선후기 경제사를 열강하던 40대 시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더니 “시대의 급변을 보며 고민이 많았던 시기”라며 80년대 얘기부터 시작했다.

―80년대 전반을 어떤 의미에서 시대의 급변으로 보셨나요?

“나는 70년대말 박정희(대통령)의 죽음과 한국자본주의의 붕괴를 예측했습니다. 70년대말로 접어들면서 그가 두서없이 말하는 것을 보고 ‘아, 저사람이 곧 죽겠구나’ 생각했는데, 정말 죽더라고요. 그래서 한국경제도 붕괴되고 혁명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신군부가 등장하고 큰 경륜도 없는 전두환(대통령)이 나와 한국경제를 살리더라고. 그래서 굉장히 쇼크를 받았어요. 나의 한국 현대사 비전이 틀린 게 아닌가 회의에 빠졌지요.”

―전두환체제때 경제발전 때문에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시대의 변화를 민감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당시 나는 대학교수였지만 노동운동과 연계돼 있었지요. 한국에서 지식인들을 직접 노동운동에 투입했던 건 우리 그룹이 처음입니다. 70년대 대중운동은 일종의 목숨을 건 운동이었지요. 운동하러 현장에 들어간 사람은 시간이 없어 책을 못읽으니까 나는 밤낮 연구를 했지요. 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는 게 내 임무였거든. 목숨을 건 운동을 하다보니까 80년대 전반기 한국자본주의 부활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때 안 선생님은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주창하다가 중진자본주의론으로 돌아섰는데, 그런 전환이 한국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나온 것이란 말씀이죠?

“한국경제의 전망을 새롭게 모색하던 차에 1984년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잡지 ‘역사평론’에 실린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의 ‘중진자본주의론’을 봤는데 눈이 팍 뜨이더라고. 당시 나는 한국과 같은 저개발국에서도 자본주의의 자립적 발전이 가능한지 고민해왔지요. 80년대 들어오면서 한국경제가 살아나는 걸 보고 한국에서도 자립적 경제발전이 가능한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됐습니다.”

안 교수는 그즈음 일본 도쿄(東京)대 초청을 받았으나, 해직교수들을 돕느라 곧바로 출국할 형편이 못됐다. 그후 84년 해직교수들이 복직되자 그는 85년 3월 도쿄대로 갔고 나카무라 교수 등과 교유하며 사상전환을 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후학들 중 일부는 한국의 대표적 경제사학자가 어떻게 일본 경제학자에게 경도될 수 있느냐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학문적 전통의 문제입니다. 일본은 근대학문 100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한국은 겨우 20~30년밖에 안됩니다. 일본의 번역수준은 세계 최고이고 마르크스전집은 세계적으로 일본판만큼 잘 번역된 게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선 학문의 수준이 나를 포함해 모두 귀동냥 수준이었지요.”

―그런 것도 학문적 충격이었겠군요.

“나카무라는 자기 이론이 있지만, 나는 자기 이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이론이 있는 사람과 남의 이론을 소개하는 사람은 같을 수 없어요.”

―40대 후반에 시작된 한국자본주의에 대한 고민과 나카무라와의 접촉이 첫번째 지적 전환인가요?

“대학원에 들어가서 마르크스를 발견한 게 내 인생의 첫 번째 지적 전환이었어요. 대학 4학년때 4월 혁명에 참여하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전만 해도 고시를 봐서 집안 살림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4·19후 고시 공부를 집어치우고 한국 현대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연구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그때 만난 사람이 바로 박현채(1995년 작고) 선생이었는데, 여러 얘기를 해보니 세상을 보는 눈이 탁월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그의 지도로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게 됐는데, 내가 워낙 빠르게 마르크스 이론을 흡수하자 박 선생이 ‘너 천재 아니냐’고 우스갯소리까지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후 남의 나라 이론을 갖고는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걸 느끼고 우리 역사를 공부하게 됐고 우리나라 선배지식인들은 당시 시대문제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 단재 신채호·만해 한용운의 글들을 보게 됐지요.”

―진짜 치열하게 시대를 고민하셨네요.

“만해 선생은 불교사회주의를 지향했지만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자이고, 단재 선생은 나중에 무정부주의자가 됐지만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자였어요. 그들의 시대인식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오쩌둥(毛澤東)으로 가게 됐습니다. 60년대후반 일본어로 번역된 마오쩌둥 선집을 입수해 읽었고 북한의 한국 근현대사 연구도 입수해 모두 읽었어요. 70년대초까지 그렇게 공부했더니 어떤 토론회에서도 한국근대사에 관한 한 나를 상대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내 “한국에서 유명하다는 게 별게 아니야. 비극이 바로 거기에 있는 거야. 일본에서 학자로서 유명해지려면 몇십년 공부해서 자기 이론을 정립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남의 연구나 이론을 먼저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유명해졌다”고 한국 학문풍토의 ‘가벼움’을 얘기했다.

―그렇게 치열하게 시대의 고민과 씨름해온 선생님의 최근 변화에 대해 후학들이 놀라고 있는데, 학자와 정치인의 발언엔 차이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맞아요, 그 사람들이 틀린 건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교사라는 자각이 있어, 교사는 진실을 진실대로 얘기하는 거지요. 80년대 중반을 돌이켜보면 내가 그런 식으로 중진자본주의론을 받아들였지만 이론적으로는 지지부진했어요. 2001년 서울대에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실증연구는 계속했지만 이론적으로는 별로 진전된 게 없고 몸도 쇠약해져 힘들었지요. 그후 일본 후쿠이(福井)현립대학으로 옮겨 연구를 계속했는데, 그때 학문적으로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중진자본주의론을 한국형 이론으로 새롭게 발전시키는 길이 열렸나요?

“그렇지, 나카무라식의 중진자본주의론이 아니라 내 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길을 발견했는데 이것이 캐치업(catchup)이론입니다. 60년대 이후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들은 선진국과의 국제협력관계가 핵심입니다. 그래서 내가 요즘 발전의 방법으로서 한국은 자주노선을 걸어선 안된다, 반드시 국제협력노선을 걸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이론적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요즘 안 선생의 메시지는 캐치업이론의 정치적 표현인 셈이군요?

“캐치업이론은 이번에 일본 가서 4년간 이런저런 책을 보면서 정리한 한국 근현대 경제발전에 관한 이론적 결론입니다. 이 이론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하는 게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지난 20년간 이룩한 실증연구의 축적이고요. 그런데 이게 모두 민족 이데올로기에 의해 매장 당하고 있습니다. 연구결과가 매장되는 것보다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지요.”

―민족 이데올로기 때문이라뇨?

“내 연구의 결론은, 만약 국정 방향으로서 자주노선이 정당하고 국제협력노선이 틀린 것이라면 남북간에 이런 격차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지요. 진리란 어디까지나 현실에서 찾아지는 것이지, 이론이 진리를 창출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북쪽의 현실과 남쪽의 현실, 그 자체가 진리이지 이론조작을 통해 진실을 뒤집으려 하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내가 요즘 통일지상론자들을 비판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지요. 그런데 왜 학자가 이론적으로 안하고 정치적으로 나서느냐고 하는데, 지금 집권 민주화세력이 한국 사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가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래도 말씀의 톤이 정치인 수준 아닌가”라는 질문에 “아냐. 그렇지 않아”라고 강하게 부정한 뒤 “말이 나온 김에 김정일 얘기 좀 하자”며 화제를 북한 문제쪽으로 틀었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즈음 북한에 기아가 났다는 얘기를 들은 뒤부터 북한체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탈북자문제와 북한체제의 장래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다.

“1994년 여름 내가 대만에서 자료조사를 하고 있을 무렵, 나카무라 교수로부터 북한에 기아가 발생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근대사회에서 기아가 발생했다는 게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2000년의 6·15 남북공동선언을 보고 저거는 아니다라고 생각했어요. 기아에 시달리는 북한주민을 외면하고 민족공조를 한다는 건 말이 안돼요. 더구나 한미동맹을 해치면서 말입니다. 그런 민족공조는 김정일이 오매불망 바라는 것이야. 우리가 한미동맹에서 풀려나오면 이 민족의 장래가 어디로 갈지 몰라요. 그러니 한미동맹을 강화해 선진화로 가자는 게 내 주장이지요.”

―북한체제에 대해선 연착륙론을 주장하다가 요즘엔 붕괴촉진이 대안이라고 주장하는데 변화 이유가 무엇인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가장 바람직한 건 김정일 스스로 개혁개방하는 것인데, 이 경우 김정일체제가 쓰러지지 않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몇년간 북쪽을 관찰해보니까 김정일은 도저히 개혁개방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김정일 체제를 붕괴시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김정일 체제가 붕괴된다고 해도 최소 반세기는 북한을 독립된 정치경제 단위로 두는 게 바람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난민홍수효과 때문에 견딜 수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안 선생에게 “김대중 정부도 북한의 연착륙을 위해 경제협력을 한 게 아니냐”고 묻자 “된 게 뭐 있느냐”고 반박했다. DJ시대 남북협력 성과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다.

―노무현정부를 건달정부로 규정해서 논란이 일었는데요.

“지금 한국이 위기예요. 건달정부라는 논거는, 국정 방향을 국제협력노선이 아니라 자주노선으로 잡았기 때문에 선진화 방안이 나올 수 없고, 국정을 제대로 수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을 하는 척하지만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노무현 정부 사람들은 너무 운동에만 빠져서 공부할 여가가 없었어요. 대단히 가슴아픈 일이지만, 한국사회를 이끌어 오는 데 주로 역할한 사람들은 미국유학파입니다.”

―뉴라이트재단에서 구체적으로 하려는 사업이 무엇인가요?

“뉴라이트 재단은 어디까지나 사상운동단체이지 정당운동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선 한국근현대사를 올바로 정립하는 것이 첫째 과제이고, 둘째는 한국선진화의 방향을 정립하려 합니다. 이 두가지만 해내면 내 임무는 끝나는 것이지요.”

인터뷰=이미숙기자 musel@munhwa.com

[ 안병직 이사장 약력 ]

▲1936년 경남 함안 출생

▲부산공고 졸업(1956)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1962), 대학원 경제학 석사(1964)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1965~2001)

▲도쿄대 경제학부 교수 (1986~87)

▲서울대 경제연구소장 (1990~92)

▲서울대 명예교수 (2001~)

▲일본 후쿠이(福井)현립대 대학원 특임교수 (2002~)

▲뉴라이트재단 이사장 (2006.4~)

기사 게재 일자 2006/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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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교수의 ‘캐치 업 이론’

“선진국 기술·자본 도입 통해 식민半봉건사회도 경제 발전”

이미숙기자 musel@munhwa.com



• 안병직교수 ‘마르크시스트→뉴라이트’ 사상전환 첫 고백 : 19…




70년대 이후 운동권 사상논쟁의 한축을 이뤘던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원래 식민지반봉건사회론자였으나 80년대 중반 중진자본주의론으로 옷을 바꿔입었다. 최근 그는 선진국의 기술과 자본을 받아들여 자본주의를 발전시킨다는 캐치업(catchup) 이론을 내세우며 뉴라이트운동의 핵심이론가가 됐다.

식민지반봉건론에는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가 자본주의체제 에선 자립적 근대국가를 이룰 수 없어 사회주의로의 체제전환이 필요하다는 정치적 함의가 깔려 있다. 이런 이유로 식민지반봉건론은 80년대 학생운동권에 깊은 영향을 미쳐 반제·반파쇼 투쟁의 이론적 근거가 됐다.

안 교수는 80년대 중반 중진자본주의론을 펴면서 급진운동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중진자본주의론이란 식민지 체험국가도 선진국의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이면 자본주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논리라는 점에서 사회주의혁명 포기론으로 이어졌다. 운동권에선 이에 안 교수를 ‘개량주의자’로 몰아붙였고 일부 학자들은 “안 교수가 일본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포위됐다”고 비판했다.

안 교수는 이날 인터뷰에서 캐치업 이론에 대해 “나카무라식의 중진자본주의론이 아니라 한국경제의 발전과정을 내식으로 설명한 이론”이라면서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세계자본주의 제1파동은 영국인데, 여기서는 자본주의가 자생적으로 발전한다. 제2파동은 19세기 중엽의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와 일본 등의 후발자본주의의 발전을 가리킨다. 바로 이곳에선 자생적 발전의 길과 세계시장의 영향으로 발전하는 캐치업과정이 복선적(複線的) 으로 이뤄진다. 그런데 1960년대이후 한국 등 아시아국가들에서 뚜렷해진 제3파동은 재래식 발전이 미약하고, 캐치업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근대적 발전이 우세하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선진국과의 국제협력 강화를 통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캐치업 이론의 대표적 케이스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이 이 이론에 따라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려면 자주노선을 폐기하고 국제협력노선으로 가야한다는 게 안 교수의 주장이다.

안 교수가 이론적 변화를 겪음에 따라 가장 달라진 것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다. 그는 “과거엔 박정희를 타도해야 할 독재자로 봤지만 이젠 한국근대화를 이끈 지도자로 본다”고 말했다.

“캐치업 이론에 입각해 볼 때 박정희의 경제개발이론은 탁월하며 박정희식 군부독재 아니면 경제발전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반면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선 아주 비판적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민족공조론이 파급되면서 한·미동맹이 이완되기 시작했다는 게 그 이유다. 안교수는 “ 민족공조를 한다고 해서 한·미동맹을 해치면 안된다”면서 “한·미동맹을 견지하는 게 바로 국제협력노선을 강화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선진화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이미숙기자 musel@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06/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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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라이트? 2006-06-10 10:32:41
    뉴라이트는 무슨.....어짜피 수구꼴통, 사대주의 세력이지.....뉴라이트의 실체를 밝혀주지....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지만원과 안병직의 저급한 망언

    뉴라이트의 사대주의 가면을 벗긴다

    "평택 시위대에 광주에서처럼 군이 발포했어야 했다"

    어제(11일) 열린 200여 개 단체가 모인 이른바 '평택사태를 걱정하는 비상시국회의'에 참석한 군사평론가 지만원씨가 한 말이다. 이는 수구단체의 본질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을 위해서라면 자국민에게 발포도 불사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 수구 우익들의 생각이다. 지만원 씨의 발언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들 수구 우익 단체들은 '뉴라이트'란 이름으로 뭉쳐 있다. 그런데 뉴라이트재단 대표 안병직 교수는 한 마디로 '제2의 한승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승조씨는 한국이 일본제국주의의 혜택을 입었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 되어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고 고려대 명예교수 자리에서 사퇴했다.

    그런데 안병직 교수는 똑 같은 말을 내뱉고 있는데도 오히려 여론의 각광을 받고 있다. 그는 일본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무엇이 문제냐고 하면서 이를 비판한 노무현 정부를 '건달정부'라고 몰아붙였다. 그런 그가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것도 결국 따져놓고 보면, 일본제국주의 덕분에 한국이 잘살게 되었다는 이론이다.

    한승조씨가 그런 친일적 언설로 사회에서 매장되었다면, 그와 똑같은 말을 내뱉고 있는 안병직 교수도 그와 똑같은 처우를 받는 것이 올바른 사회가 아니겠는가? 서울대라고 해서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면, 어찌 올바른 사회라고 하겠는가.

    안병직 교수는 4월 25일자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민족민주운동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을 싸잡아 '저급한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럼 그의 인식이 '고급' 인식인가 하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필자는 안병직 교수 이론의 허구성을 학문적으로 심도 있게 비판한바 있다.(<역사비평>, 1994년 및 2003년 경제사학회 학술발표회 논문집 등). 학문적으로 볼 때, 안병직 교수는 자기와 반하는 이론을 저급이론이라고 몰아붙였지만, 그의 견해야말로 경제학의 고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저급' 이론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그런데도 그가 서울대 명예교수라는 간판 때문에 마치 권위자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사회의 지적 수준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지만원 씨와 안병직 교수 등의 관념은 한 마디로 '사대주의'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들은 한미일 동맹만이 한국이 택할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안병직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교과서 외곡행위 등 군국주의 부활 움직임을 경고한 것을 '건달'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독도에 관해 '가만있으면 우리나라 땅인데 왜 일본과 말썽을 피우느냐'고 비난했다. 과거에 일본 극우파 산케이신문은 그의 언행을 1면 기사로 크게 부각시켰다. 일본 극우파가 하고 싶은 말을 한국의 저명학자가 대신 주장해주고 있으니 얼마나 통쾌하겠는가.

    더욱이 그는 북한정권은 타도의 대상이지 협력의 대상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반도의 평화가 깨지면, 우리 강토는 쑥대밭이 되는데, 대북 침공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는 주장은 우리 민족 전체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는 사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는 우리 민족에게는 자주적으로 근대화할 능력이 없었음으로 일본의 식민지로 되는 것은 필연적 추세였다는 이론을 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 민족의 '외래문화 흡수능력'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그의 이론대로 한다면,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하지 않았다면 우리 민족이 '외래문화 흡수능력'을 발휘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화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안병직 교수는 그의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그것과는 정반대로 일본제국주의가 이 땅을 식민지화했기 때문에 그 덕택으로 한국이 근대화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그의 이론이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런 이론상의 문제 이전에 안병직 교수는 앞서 말한 대로 우리나라 사람인가를 의심받을만한 언설을 수없이 내뱉어 왔다. 그와 동일한 진영에 속하는 지만원씨는 평택 시위대에 발포하지 않았다고 다구치고 있다.

    그는 몇 년 전 땅굴이 새로 발견되었는데도 김대중 정부가 은폐하고 있다는 등 허위사실을 유포했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은 빨갱이들의 선동 때문이라는 신문광고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런 '저급한' 혹세무민자들이 우글거리는 '뉴라이트'에 결코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주종환 동국대 명예교수, 민족화합운동연합 대표

    ⓒ시민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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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조심 2006-06-10 19:40:19
    동국대학은 어떻게 된게 이상한 자들이 교수라면서 자리틀고 앉아 있지? 그동네 물이 그런가? 뇌무현이는 지금 갈때까지 가보자고 앉아서 선거가 무슨 소용있냐? 고 외치고 있고 김대중 이는 무조건 밀고 올라가야 된다고 하면서 한국의 돈을 뽀글이 한테 갖다 줄러고 벼르고 있다. 무슨 민족화합이냐?

    완전히 골수 개정일 돌만이. 당신은 이순신장군이 나타나면 벅을 이롭게 하는자라고 하여 큰칼에 목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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