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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곳곳에서 한국인들에 대한 원성이 들려온다.
REPUBLIC OF KOREA Greg 0 347 2007-11-20 18:20:40
탐: 그렉 선생님, 여자 친구 있나요?
그렉: 아니요.
탐: 제 여자 친구(주: 얼마 후 탐 선생은 이 새터민 여자 친구와 결혼함)의 친구좀 소개해 드릴까요? 탈북 여성인데 북한에서 대학을 나온 인텔리고 예쁜데요.
그렉(주: 필자의 영어명): 네?!

필자가 유학 전 어학원 강사를 할 때 절친했던 한국인 동료 강사와 잠시 나눈 대화였다. 필자는 순간 설렜다. '말로만 듣던 탈북자. 남남북녀란 말도 있는데 한 번 만나볼까'. 탐의 아내의 친구는 외대에 다니고 있었는데 영어가 부족하다하여 필자의 토플 수업을 무료로 듣게 하였다. 교재를 소개하기 위해 어학원 지하 서점에서 처음 만났는데 서울 말씨를 사용하려고는 하였지만 거의 모든 점에 있어서 남한 여성과 똑같았다. 언어도, 정서도, 물론 얼굴 모습이나 남자를 대하는 태도도 무엇 하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것은 탐의 아내를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탐의 아내: 더 있다 가시지요.
필자: 아, 괜찮습니다. 가봐야지요.

남한 여성의 정서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성도 이씨요 먼 친척은 수원에 살고 있다고 하였다. 어쩌면 필자가 많은 전후 세대처럼 북한 새터민들을 처음부터 먼 나라 사람이나 호기심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것이 문제였는지 모르겠다. 이에 대해 올해 개천절 남북 정상 회담 때 문화계 수행원으로 방북하였던 의 작가 조정래씨는 귀국 후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식사 때 떡 다섯 개가 나왔는데 눈물이 나올 뻔 했습니다. 그 모양이며 색깔이 우리 것하고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맛을 보았는데 우리가 먹는 떡과 똑같았습니다. 그 때 저는 '우리가 이렇게 같은 민족인데 50년을 따로 떨어져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송 진행자의 또 다른 질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북한 주민들)과 오분만 대화해 보십시오. 우리와 똑같다는 것, 같은 정서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역시 북한인들도 완전한 한민족이었다. 필자는 탐의 아내와의 만남을 통해 이미 통일의 가능성을 느끼고 있었다. 남북한 모두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아직도 혈육 관계로 맺어져 있으며, 비록 오래 갈라져 살았지만 어떤 외국인에게서 느끼지 못하는 같은 정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김일성 부자의 세뇌 교육 때문에 필자가 가장 우려했던 정신 세계에 대해서도 적어도 새터민들은 자신들이 김일성 부자에게 속아 살았다는 것을 분명 깨닫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북한에서는 지하로 사라져버린 불교나 기독교나 천주교 혹은 한국의 전통 사상들이 다시 접목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미국에 거주하던 어느 날이었다. 한 새터민 부자가 한국에 있다가 다시 미국으로 망명 온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그 내용인즉 그들이 남한으로 망명하여 살던 중, 아들이 학교에서 교사로부터 이런 말까지 들었다는 것이다. "남의 밥을 먹고 사는 주제에..." 이는 단적으로 남한 사람들이 북한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잘 보여주는 발언이었다. 남한 사람들의 무시와 차별대우가 단지 이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부자는 부시 행정부의 탈북자들에 대한 특별 조치를 통해서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을 것이다. 많은 탈북자들이 죽음의 사선을 넘어 남한으로 망명을 올 때는 자유와 번영의 나라에서 인간으로서 대우받으며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에서였다. 그러한 그들의 기대를 져버리는 남한 사람들에게 지금 통일을 눈앞에 두고 여러 지각있는 사람들은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한국인의 이러한 차별성은 새터민들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비단 필자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십만명에 육박한 간도의 조선족에 대한 차별과 무시에 대해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느 날 필자는 한국과 조선족을 연결하는 한 인터넷 사이트를 알게 되어 그곳에서 어떤 조선족이 한국인들에게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필자로서는 너무도 미안한 내용들뿐이었다. 즉, 조선족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을 중국인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조선인 혹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생각해 왔다. 그래서 조국이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희망의 꿈을 안고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을 무릅쓰고 한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은 '외국인 등록증'과 무시와 착취였다. 악덕 기업주들에 걸린 이들은 임금을 받지 못하고, 욕을 먹어가며 오랜 시간을 노동으로 허덕거려야 했다. 또 외국인으로 분류가 되기 때문에 여차하면 불법 체류자가 되기 일쑤였고, 의료 및 산업 재해 보상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인들은 같은 한민족인 자신들을 무조건 괄시하고 무시하는 경향도 있었다. 결국 필자는 "모든 한국인이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미안합니다"라는 사과의 댓글을 달았다. 그런데 사실 이제는 조선족도 한국 사회의 일부 구성원임을 자주 체험할 수 있었다. 여기는 필자가 한 때 출강했던 (사)북방권 교류협의회 사무실이다.

필자: 지난 번에 들으니까 중국어를 잘하시던데요. 중국에 어학연수나 유학 다녀왔나요?
여직원: 아니요. 중국에서 한 삼십 년 살았지요.
필자: 그러면 조선족이군요. 어디에 사셨어요?
여직원: 길림성 연변에요.
필자: 간도 지방이군요. 넓은가요?
여직원: 남한보다 크지요. 아마. 선생님은요?

분명 이 여성 또한 본인이 밝히지만 않았다면 누가 보아도 모든 점에 있어서 남한 여성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여직원은 결혼한 지 칠 년 되었고 직장 생활도 이제는 한국의 한 사단법인에서 하고 있었다. 중국어와 한국어가 유창하고 양쪽 문화에 정통하기 때문에 주로 북방 국가들과 교류 업무를 하는 이곳에서는 꼭 필요한 인재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사실 조선족은 우리가 중국과의 교류를 하는데 있어서 또 통일 후에 진행해야 될 간도 수복을 하는데 있어서도 견인차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그 특유의 차별 대우로 새터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듯이 이들 조선족들의 작은 꿈들 또한 짓밟고 있었다.

한국인의 이 속성은 여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한 노교포는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교포들이 동남 아시아의 어느 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의 한 젊은이를 만나게 되었고 그 젊은이는 이들이 한국인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이 한국에서 일을 할 때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고 한다. 그가 일했던 한국의 회사 사장은 그를 늘 'x새끼' 라고 불러서 그의 이름은 'x새끼'였으며 그가 그 사장에게서 배운 말들은 다 욕투성이었다. 후에 남미에서 온 노동자들이 건대의 한 수업에 초대되어 증언한 말들을 들었다. 전형적인 노동 착취, 폭력, 감금, 여권압수, 임금 체불 등이 자행되었고 급기야 그들 동료 중 한명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자살로 삶의 막을 내렸다고 한다. 이러한 자신들에게 관심을 갖고 도와달라는 간곡한 부탁도 하였다고 한다.

이제는 국제 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이주해온 이들을 살펴보았다. 지금 한국에서는 10쌍 중에 1쌍 이상이 국제 결혼을 하며 주로 중국, 베트남, 일본, 몽고,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 연방 국가들 출신과 혼약이 이루어지는데 베트남의 경우만 해도 1만 쌍이 결혼을 한 것으로 보고가 되었다. 문제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언어 장애, 문화의 차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그 무시와 차별성 때문에 이혼을 하거나 배우자가 도망가는 사태까지도 벌어지고 있었다. 외국의 신부들은 심지어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출신까지도 보통 한국의 70-80년대 여성들처럼 아직도 순박하고 한 번 결혼하면 그 집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여기고 있지만 더 이상의 구박을 견딜 수 없어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중 "절대로 한국 남자와 결혼하지 마세요!"라는 호소를 담은 한 베트남 여성의 화면이 베트남 현지에서 방송되어 베트남인들을 격분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배우자가 어느 나라에서 왔건 이들 사이에 난 아이들만큼은 나면서부터 한국인인 우리의 아이들이란 사실을 직시해볼 일이다.

이제 한국은 경제, 문화, 교육, 종교, 심지어 정치, 군사 대국화의 귀로에 서 있다. 사실 대국이었던 과거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역사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오직 동이(한민족)만이 큰 것을 따르니 대인이다. 이의 풍속은 어질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살기 마련이기 때문에 죽지 않는 군자가 있는 나라이다. 살펴보면 그곳은 하늘도 크고 땅도 크며 사람 역시 크다.' -중국 대부-
'동방을 이라고 한다. 이는 곧 뿌리이며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한다고들 한다. 모든 것은 땅에 뿌리박고 있으므로 천성이 유순하고 도로써 다스리기 쉬워서 군자의 나라이자 죽지 않는 나라가 된 것이다.' - 동이열전-

남북한의 통일이 이루어지고 간도의 수복까지 이어진다면 많은 이들을 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포용력이 없이는 여러 나라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다른 나라 사람들도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는 대국이 될 수 없다. 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포용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미국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미국은 정확히 미합중국이다. 이태리계, 아일랜드계, 독일계, 영국계, 프랑스계, 동유럽계, 북유럽계, 러시아계, 아프리카계, 남미계, 심지어 아시아계까지 모여서 이루어진 나라이다. 필자는 미국에 있으면서 이 모든 부류를 다 (만나)보았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치와 평등을 위한 포용적 자세이다. 그렇게 해서 미국은 세계 초강대국으로 등장하였고 그 지위를 유지해왔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넓은 가슴으로 다른 이들을 품어 안아야 큰 나라와 위대한 민족이 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성경에,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사람을 구박하거나 학대하지 말아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지 않았느냐?"(출애굽 22:20)는 말씀이 있고 유교에서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말라"(공자)는 말씀도 있으며 불교는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를, 그 자비는 모든 생명체까지 미쳐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한민족은 아직도 중국에 이백만 명, 미국에 이백만 명, 일본에 70만 명 등 많은 이들이 이민 생활을 하고 있고 대학(원) 총정원의 약 5%가 타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다. 이민이나 유학 생활을 한 이들은 한결같이 이 넓은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차별받지 않고 인간답게 대우받기를 바라지만 종종 좌절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필자와 같이 미국 생활을 한 사람들은 일반 미국인들의 무지와 이에 따른 편견 때문에 자주 힘들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성서의 말씀대로 우리 민족 또한 식객으로 살고 있는 이들이 많으니 그 사실을 기억해서라도 우리 민족에게 의존해서 사는 이들, 즉 북한 새터민과 조선족(사실 이들은 같은 한민족!), 외국 출신의 이주 노동자들, 국제 결혼 이주자들과 그 자녀들, 심지어 한국에 사업상 들어와 사는 이들까지 포용력있는 정책과 인간다운 대우를 통해서 위대한 한민족, 대국인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또 불교와 유교 혹은 인간 양심의 가르침대로 보건대 외국 땅 한국에 와서 힘들게 일하고 결혼 생활을 하는 그들에게 자비의 마음이나 측은지심이 생기지 않는지, 더 나아가 어려운 한국어를 배워가며 위험한 노동 현장에서 일하거나 아무도 시집오지 않는 농촌 가정에 시집와 생활하는 그네들이 고맙지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위에서 보았듯이 미국으로 재망명한 그 탈북 부자, 인터넷 사이트에 글로 호소한 그 조선족, 눈물어린 호소를 한 이주 노동자들, 국제 결혼에 실패한 이들과 그들의 뒤를 이어 한국에 들어올 모든 이들에게 한국과 한민족은 비난과 원성의 대상으로 남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동양의 역사가 줄 곧 증언하듯이 군자들의 나라 한국은 옛 칭송을 회복할 것으로 기대한다.

'동방의 사람들은...상대방 명예를 존중하여 훼손하는 일이 없으며 사람이 환란을 당하는 것을 보면 죽을 곳이라도 뛰어들어 도와준다.' -중국 -

*다양한 에피소드와 상세한 내용은 로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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