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여성, 영어교사로 강단에 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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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북한방송 2007-12-11 애타는 노력 없이는 꿈과 희망도 이루어질 수 없다 북한에서 김형직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청진고등중학교에 배치되어 5년 동안 영어교사로 지내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교사를 그만두어야 했던 탈북자 전희경(39살)씨가 남한대학에서 다시 영어교사로 강단에 섰다. 1968년 청진시에서 외동딸로 태어난 전희경씨는 2000년 남한에 입국했다. 귀엽게 생긴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들과 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부러움 없이 자라났고 인민학교와 고등중학교 시절에는 남달리 영어에 대한 소질이 있어 성적이 상위권을 차지했다. 1983년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김형직 사범대학에 입학한 전희경씨는 영어교사가 되려는 꿈을 안고 대학 전 기간 영어 실력을 높이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 대학을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중학교 교사로 배치되었다. 그는 전교적인 모범교사가 되었고 전국 영어교원경연대회에 당선 되기도 했다. 하지만 식량난으로 교원들의 배급마저 중단되자 전씨는 더는 교원생활을 할 수 없었다. 1999년 10월 결혼한 전씨는 하루살이 장사로 겨우 목숨을 연명해 가고 있었다. 가정형편이 점점 더 어려워지자 전씨의 남편은 몰래 탈북을 준비하고 있었다. 남편은 어느 날 갑자기 무산으로 친구와 함께 장사를 가자고 했다. 그는 남편이 이상했지만, 결혼을 한지 몇 달 안 된 처지라 따져 물어볼 수도 없어 그냥 따라 나섰다. 전씨는 친정어머니에게 5일이면 돌아올 테니 마음 놓으라는 한마디만을 남기고 떠났다. 이렇게 되어 남편을 따라 중국에 들어 온 그는 낯설은 이국생활의 고달픔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탈북자 단속으로 혈안이 되어 날뛰는 중국공안으로 인해, 발자국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 설 때가 많았고 때로는 옷장 속에 숨고 산으로 올려 뛰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 후 전씨는 남한사람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어렵게 3국을 거쳐 한국에 입국했다. 처음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한 전희경씨는 가슴이 떨리기도 하고 믿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창밖으로 흘러가는 고층빌딩과 혼잡한 도로를 보면서 그는 혈육하나 없는 남한 땅에서 잘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앞길이 막막하기만 했다. 그는 처음 새로운 남한 생활방식과 사회 환경에 적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지만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부모님들에 대한 죄책감이었다고 한다. 자식으로서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지는 못할망정 저만 잘 살겠다고 남편을 따라 왔으니 어찌 자식 된 도리를 다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항상 자나 깨나 우리 부모님들도 나하고 같이 한국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 고통의 땅에서 얼마나 고생하실까? 이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여지게 아팠다고 한다. 또 남한사회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부족, 문화의 이질성, 언어소통의 문제, 대인관계의 어려움 등이 늘 스트레스로 와 닿았고 특히 언어의 차이로 인해 곤혹스러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외래어, 한자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당황스럽고 북한말투로 인해 오해받거나 웃음 감이 된 적도 있어 난감할 때도 참 많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늘 어려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 점 혈육도 없는 외로운 생활일 것이라 생각했던 이곳에서 아픔이 있긴 하지만 외로운 그에게 남편이 의지가 되었고 기쁨이 되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선생님이 찾아와 북한에서 배운 전공을 살려 교사 일을 다시 해보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처음에는 선뜻 답변을 못했는데 자신의 전공이라 한번 해보리라 마음 다지게 되었다. 그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남보다 열심히 공부해 졸업증을 받았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취직을 하기 위해 서울의 한 대학을 찾아가 학장선생을 만났다. 학장선생은 처음에는 전씨가 북한에서 왔다고 머리를 저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아오는 전씨의 노력에 감동되어 영어교사로 일 할 것을 허락했다. 그리하여 전희경씨는 2005년 10월부터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대학 교단에 서게 되었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혹시 자신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면 어떡하나 걱정도 많았고 첫 수업시간에는 어찌나 떨리던지 자신이 북한에서 5년을 교사생활을 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학생들은 북한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용기를 가지고 기대감과 마음을 조이며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나 막상 수업에 들어가서는 놀라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업에 참가한 학생들의 수업태도는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선생님의 말이라면 아직은 절대 복종하고 획일화된 북한의 학교분위기와는 너무도 달랐다. 머리에 알록달록한 염색을 한 학생, 짙은 화장을 하고 온 여학생, 모자를 쓰고 앉아 있는 학생, 수업도중 핸드폰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학생 등 도무지 북한 교실과는 너무도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런 것들을 자신 스스로가 자유로운 분위기로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과 인내를 필요로 했다고 한다. 전희경씨의 애타는 노력에 의하여 그 후 학생들은 탈북자라는 편견이 없이 배우려는 열의가 높아졌고 수업 분위기도 진지하고 가르치는 보람도 커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수업 도중에 북한식 사투리가 툭툭 튀어나와 당황하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사투리와 북한식 용어는 따로 설명도 곁들여 주면서 수업을 하니 학생들 반응도 훨씬 재미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비록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기는 하지만 어쩌면 자신이 그들로부터 남한을 배워 나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고 한다. 서투르고 어색한 점도 많았지만 학생들과 친숙해지면서 아무런 내색도 없이 한국 선생님들과 똑같이 대해주고 스스럼없이 대화도 나눌 수 있게 되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는 북한을 떠나온 지 어느덧 7년이라는 세월과 함께 자신에게도 많은 변화가 왔다고 말했다. 힘든 시간도 많았지만 무엇보다는 자신이 원하던 일을 하게 된 것이 가장 보람 있고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언제나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며 맡은 바 소임을 다할 것이며 좀 여유가 생긴다면 어려운 이웃들도 도우며 살고 싶다는 게 전희경씨의 마음이다. 마지막으로 전희경씨는 지금 남한에 와있는 탈북자가 만 명이 넘는다면서 자신을 포함한 그들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노력하지는 않으면서 결과만을 바란다거나, 잘 대해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자기 스스로 인정받으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할 때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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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쓰셨어요.
우리 새터민들이 따라 배워야 할 좋은 본보기입니다.
다른과목도 아닌 영어 교수라니 정말대단하십니다.
우리들의 영광이고 자랑입니다.
앞으로 항상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참 그리고 모자쓴 학생은 일단 예의가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도 모자쓰고 수업에 참여하면 교수님께서 바로앞에서 면박주시는데...
그래도 꼭 않벗는 예의없는 학생들이 있는데 그럴땐 조목조목 이미 다 설명한후에 퇴장 시켜 버리세요.^^; 이해도 정도껏 해야지요.모자쓴 학생을어떻게 이해해요.대머리나머리가 아픈 애가아닌 이상 ...
수업시간에 여자애들이 모자를 쓰는것은 보통현상이구요.
하루는 공부가 힘들다며 "선생님 그건 현실에서 쓰는것이 아니니 다른것으로 공부를 합시다"라고 제기하는데 ~~ 전 깜짝놀랐어요.
공부열의는 북한애들한테 비하지 못해요.
한국애들 공부는 엄청하고, 또 예의상 정말로 바른것 같은데 이런부문은 저도 이해가 안가요
학부모들도 선생님께는 항상 존경하며 함부로 대하지 못하죠.
근데 여기 남한에 오니 선생님을 교사라고 부르며 함부로 대하는 모습들을 볼때마다 놀랍기도합니다.
남북이 언어적인 차이가 적지않지만 선생님을 "교수님, 교사"라고 불러야할땐 아직도 어색합니다.
축하드립니다.먼저 한국으로 오신 선배님으로써 남들보다 두배,세배의 노
력으로 당당한 대한민국의 대학교원으로 승진하신 선생님을 진심으로 축
하드립니다. 우리들한테 힘이 되는 이런 좋은 글을 읽으니 정말 힘이 생깁
니다..너무 감사하고 앞으로도 더 좋은 성과와 평온이 있으시기를 바랍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