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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이 인간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Korea, Republic o 관리자 1704 2008-03-15 17:46:05
자유북한방송 2008-03-15

[지난 5일 중국공안에 체포되어 북송 날자만 기다리고 있는 “요덕수용소” 출신 탈북자들의 마지막 절규가 담긴 메시지가 공개되었다]

지난 5일 중국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시에서 중국공안에 체포되어 현재 강제북송만을 기다리고 있는 4명의 탈북자들이 체포 직전 작성한 도움을 요청하는 메시지가 14일 “탈북난민강제송환저지 국제캠페인” 참여단체들에 의해 공개되어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탈북자인 한창국씨와 이종선씨, 이종신씨, 이공신씨가 각각 작성한 세 개의 메시지들에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폭행당한 뒤 가족의 죽음을 그저 무력하게 지켜봐야만했고, 중국인에게 강간당할 위기에 처해 반항하다 칼에 세 군데나 찔리는가 하면, 그들에게 저항했다는 이유만으로 심지어는 아무 이유도 없이 목숨을 잃을 뻔했던 기억 등 그들이 북한과 중국에서 겪은 참혹한 인권말살의 실상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또한 이 메시지들은 하나같이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하다’ ‘단지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 싶었다’ ‘이번이 인간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는 절규로 마무리되고 있어 읽는 이의 가슴을 한층 참담하게 하고 있다.

그들이 체포 직전 남긴 절규의 메시지를 약간의 오자 수정과 요약을 거쳐 거의 원문 그대로 아래에 옮긴다. 읽는데 있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주석을 달았으며, 사회 보편적으로 금기시되는 다소 노골적인 표현들도 여과 없이 그대로 옮겼음을 밝힌다.

-북한 로미오와 줄리엣(한창국(男.30세), 이종선(女))-

저는 북한출신이고 현재 서른 살입니다. 아버지는 예술가이자 작가이셨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96년 7월 어느 날 아침 6시 아버지와 함께 3명의 보위부 사복요원들에 체포되는 날까지 직장은 구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체포되지 않기 위해 아버지와 강제로 이혼했습니다.

보위부실에서 저는 아버지와 떨어진 채 제 생활과 친구들에 대해 적으라는 지시를 받아 적었으나 보위부는 만족하지 않고 무거운 사슬에 묶인 저를 발로 차고 구타하며 여러 번 반복해서 쓰게 했습니다. 저는 제가 무슨 죄목으로 끌려왔는지도 몰랐습니다. 한 달쯤 지나 아버지와 그 끔찍한 요덕수용소 15호 관리소에 끌려갔습니다. 그곳은 감자밭에서 중노동하며 소량의 배급식량만을 지급받았습니다. 그 곳은 정말 생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4년의 관리소 생활동안 공개처형을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3명의 수감자가 사라졌다는건 알고 있습니다. 99년 4월 어느 날 저와 아버지가 땔감을 모으고 있는데 3명의 무장경비원들이 나타나 우리를 20분 동안 총대로 구타했습니다. 실신한 상태에서 아버지의 등에 업혀 집으로 겨우 돌아온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아버지는 다음 날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저희 동네에는 30명가량의 수감자들이 있었는데 어떤 중년여성은 제게 “한 젊은 남자가 반항했다는 이유로 생매장 당하는 것을 보았다”며 조심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하지만)어느 누구도 저의 부상과 아버지의 죽음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저는 2000년 11월 어느 날 제가 석방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를 찾아 집으로 돌아갔지만 어머니와 저는 곧 멀리 떨어진 황폐한 산자락의 농촌으로 추방되었습니다. 1년 후 간신히 발각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친구들과 여자 친구를 만났습니다.

종종 여자친구(이종선씨)를 만나기 위해 고향을 방문했고 우리는 함께 남한에서 새로운 삶과 자유를 찾기 위해 2007년 9월 초에 떠나 7일 동안 250km를 꼬박 걸어 같은 달 29일 새벽에 국경을 넘었습니다.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에 도착했고 대한민국 영사관에 몰래 진입하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후)한인타운에서 은신처를 마련하고 직업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지만 현재까지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제 여자 친구는 청소부로, 세탁소 아르바이트로, 가정부로 직업을 구했지만 현지인들의 절반 밖에 안 되는 봉급만을 받았습니다. 지난 7개월 동안 안전 문제 때문에 여자 친구 또한 직업을 두 번이나 바꿔야 했습니다.

2008년 2월 27일 여자 친구가 일하던 호스텔의 주인이 제 여자 친구를 감금하여 저와 헤어지고 한족 남자와 만나 살라고 설득했습니다. 바로 제 여자 친구를 매매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여자 친구가 이틀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자 호스텔로 찾아갔는데 그들은 제 여자 친구가 없다며 다짜고짜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3월 1일 여자 친구는 간신히 그 집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후)호스텔 주인에게 전화가 와 우리에게 상당한 몫을 지불할 양이 있다고 해서 갔더니 두 젊은 남자가 따라 들어와 우리를 구타하고 발로 차며 여자 친구를 내놓지 않으면 죽일거라고 협박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반항했고 끝내 풀려났습니다. 우리 둘 다 심하게 다쳤습니다. 특히 제가 너무나 심한 부상을 당해 여자 친구의 도움으로 은신처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탈북자들을 돕는 인도주의 활동가들을 만난 오늘 2008년 3월 3일, 우리는 어려운 상황가운데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는 중국한족 남성의 아내이고 마을 주민들과 공장 사람들의 강간 위협 아래에 살아왔습니다(이공신.女.30세)-

저는 북한 함경남도의 작은 마을 출신인 서른 살 된 탈북여성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공장 노동자였고 1998년 돌아가셨습니다. 6남매 중 넷째 딸인 저는 94년 고향에서 중등교육을 마치고 정부의 행정원으로 5년 동안 근무했으나 2000년 10월 심각한 식량난으로 고통 받던 가족들에게 재정에 도움이 될까 하는 소망으로 탈북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저는 중국 샨동주(산동성)에 있는 외진 마을의 한족 농부에게 팔려가 7년 동안 동거하게 되었고 부양하기 위해 가까운 공장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법적 보호대상자가 아닌 탈북자라는 것을 알고 있던 공장의 중국인 노동자들이나 마을 주민들은 항상 저를 강간할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제 남편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같은 동네에 강간하고자 하는 의도로 저를 늘 괴롭히는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2006년 6월 그 남자가 술에 취해 저에게 다가왔고 저는 그 남자를 뿌리쳐야 했습니다. 그 남자가 화를 내더니 저를 세 번이나 칼로 찔렀습니다. 그 중에 한번은 너무 심하게 찔러서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이 끔찍한 상처는 지금이라도 보여드릴 수 있을 정도입니다.

시댁 식구들이 저를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시켰고 저는 거의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저에 대해 걱정해주지 않았고 동네주민들은 ‘저 여자가 죽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죽어도 문제없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저는 너무 화가 났고, 다시금 저는 제가 중국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단지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 싶었습니다.

-이번이 제가 인간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이종신.女.33세)-

저는 2008년 서른 세 살이 된 탈북여성입니다. 92년 제 고향 북한 청진에서 중등교육을 마쳤습니다. 아버지는 보일러공으로 96년 사망하셨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였습니다. 중등학교를 졸업한 후 저는 1년 과정의 직업훈련을 받고 몇 년간 공장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2002년 9월 16일 중국에 좋은 일자리가 있어 소개해주겠다는 거짓 약속에 속아서 중국으로 탈북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 당시를 떠올리자면 저는 가난에 찌들린 어두운 세상인 북한에 대해 화가 나 있었습니다. 저는 산동성의 외진 마을의 40대 한족 농부와 결혼하게 되었고 현재 다섯 살 난 아들이 있습니다.

남편은 번번히 술에 취해 있었고 아무 이유 없이 저를 때렸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중국말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남편과 대화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종종 중국공안에 신고해 체포되지 않기 위해 세 번이나 집에서 도망나간 적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저를 보호해주려고 하지 않았고, 심지어 제 남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저를 인간 이하 혹은 짐승으로 취급했습니다. 더 이상 짐승과 같은 취급에 견딜 수 없어 한 인권활동가의 도움으로 2008년 2월 27일 그 마을을 떠났습니다.

저는 다시 인간이 되고 싶었고 이번이 제가 인간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아직까지 저는 제 미래에 대한 어떠한 계획도, 생각도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단지 다시 인간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제가 다시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한 후에야 제 미래에 대해 계획하고 결정할 것입니다.

동네 버스가 하루에 두 번씩 마을을 지나갔고 다행히 동네 주민들의 눈을 피해 그 버스를 잡아타고 두 시간 가량 떨어진 동네로 이동했습니다.

이번이 제가 인간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오주한 기자 ohjuha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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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천사 2008-03-16 21:00:11
    이들이 북으로 가지않도록 한국정부가 도와주었으면 합니다. 북으로 가면 잡혀서 죽을것이 불보듯 번한노릇입니다. 중국정부는 북한정부의 말만 듣지말고 그들의 말도 들어주엇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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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울 2008-03-17 11:26:15
    중국정부 대변인이 2007년 12월 25일 북한 탈북자들은 북한과 중국의 관계때문에 난민으로 인정하지 못한다고 밝혔습니다.

    중국당국자들도 가정이 있고 자식이 있고 부모가 있을텐데 왜 이렇게도 북한 말만 듣고 있는지...

    왜 국제 인권단체는 매일 북한 인권문제대해 이야기하면서 실천하지못하고 있는지...

    중국당국자들을 왜 아직도 설득하지 못하고 있는지...

    너무나도 안타까울뿐입니다.
    제발 이들을 북송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분들이 이대로 북송된다면 죽음뿐입니다.
    이들을 위해 기도를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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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수중 2008-03-17 17:34:26
    1999년 김대중정부시절부터 난민 문제 제기 했다고들었습니다...
    한번은 주한 중국대사 놈이 우리 정부에 항의 서신 보냇었죠 내정간섭 하지말라고... 국제 관계라는 것이 우리 생각대로 되지 않는가봅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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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타까운 마음 2008-03-18 14:07:22
    넘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들을 도와줄수 있는 사회가 되였으면 합니다
    우리는 한 민족 한 핏줄을 나눈 한 형제가 아닙니까
    그들을 도와줄수 없는 이 마음 너무너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한국정부는 이를 모른체 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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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죽화 2008-03-19 15:49:45
    이들을 어서빨리 구원해야만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무슨수를 써서라도 구할수만이다면...
    그냔 강건너 불보듯 아무것도 할수없는 우리들이 정말 가슴만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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