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詩集(시집)이 아니라 ‘통곡’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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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북한방송 2008-04-21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 해설."이 시집은 인간이 쓴 시집이 아니다. 詩 스스로 인간에게 걸어 나와 쓴 눈물의 시집이다." 鄭浩承(정호승·시인) ‘生存(생존)’과 ‘밥’ 슬프다. 이토록 슬픈 詩集(시집)이 어디 있으랴. 아프다. 이토록 아픈 시집이 어디 있으랴. 눈물이 난다. 이토록 눈물 나는 시집이 어디 있으랴. 시집 어디를 펼쳐도 붉은 피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그 눈물이 끝내는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룬다. 그렇다. 이것은 시집이 아니라 ‘통곡’이다. 이것은 시집이 아니라 ‘분노’다. 이것은 시집이 아니라 ‘고통’과 ‘절망’과 ‘비극’이다. 그래도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서 마지막으로 부여잡고 놓지 않은 ‘희망’이다. 이 시집은 脫北(탈북)시인 장진성 씨 한 개인이 쓴 것이 아니다. 이 시집은 고통과 절망 속에 사는 북한의 모든 인민들이 쓴 시집이다. 북한에서의 삶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탈북자들의 아리고 쓰라린, 상처투성이의 마음이 저절로 모여 쓴 시집이다. 따라서 이 시집은 인간이 쓴 시집이 아니다. 詩가 쓴 시집이다. 도저히 숨죽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詩 스스로 인간에게 걸어 나와 쓴 눈물의 시집이다. 나는 이 시집을 읽는 내내 고통스러워 읽기가 힘들었다. 먹먹한 가슴 속에 크고 날카로운 돌 하나 박혀 빠지지 않는 듯해서 몇 번이나 책장을 덮었다가 펼치기를 되풀이했다.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가 왜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불가능하다’고 했는지 그 까닭을 다시 한번 깊게 이해했다. 抒情(서정)은 시의 중요한 본질 중 하나다. 나는 지금까지 시를 써오면서 서정의 물기가 촉촉이 배어 있는 시를 쓰려고 노력해왔다. 서정이 있어야 시가 문학적 완성미를 지닌다는 믿음을 저버린 적이 없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는 서정을 찾기가 어렵다. 서정도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야 존재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일깨워 줄 뿐이다. 그동안 내가 쓴 시들의 서정이 이 시집 앞에서는 너무 사치스럽고 부끄럽다. 具體(구체) 또한 시의 중요한 구성 요소 중 하나다. 나는 평소 시는 추상보다 구체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고 가능한 한 구체의 힘에 의해 시를 쓰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 시집에 나타난 구체의 힘 앞에서 그동안 내가 쓴 시의 구체는 참으로 초라하다. 이 시집은 장진성 씨가 겪은 체험의 구체적 힘만으로도 읽는 이의 가슴을 벼랑 끝에 세운다. 이 시집을 다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한 마디는 바로 ‘生存(생존)’이다. 그리고 또 한 마디를 더 덧붙인다면 바로 ‘밥’이다. 생존과 밥은 동질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인간은 밥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집에는 생명, 즉 밥이 없다. 밥에 대한 절망의 처절한 부르짖음만 있다. 밥이 없기 때문에 생존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죽음의 고통 속에서 나뒹구는 모든 상황이 적나라하다. 시 한 편 한 편마다 생존에 대한 갈망과 자유에 대한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그저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다 이 시집은 전체 5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에서 3부까지 40여 편의 시가 온통 밥과 굶주림, 그 굶주림에 의한 죽음을 있는 그대로 가감첨삭 없이 드러낸다. 「우리의 밥은」 「밥알」 「밥이 남았네」 「우리는 밥을 먹는다」 「밥이라면」 등 밥이라는 낱말 자체가 그대로 시의 제목이다. 이들 시들은 굶주림에 의해 생존을 위협당하는, 아니 결국 생존하지 못하고 畜生(축생)처럼 죽어간 참상을 노래한다. 300만 명이 굶어 죽은, 이 참상 앞에 굶주림을 경험해 보지 못한 남한의 시인인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다. 우리의 밥은/ 쌀밥이 아니다/ 나무다/ 나무껍질이다// 우리의 밥은/ 산에서 자란다/ 바위를 헤치고 자라서/ 먹기엔 너무 아프다 (「우리의 밥은」 부분). 이 시는 밥에 관한 序詩(서시) 격의 시다. ‘밥이 나무껍질’이라고 말하고 있고, 밥이 논에서 자라지 않고 ‘산에서 자라’기 때문에 ‘먹기엔 너무 아프다’고 말하고 있다. 이미 쌀을 배급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래도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초근목피해야 하는 이런 상황은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전개되고 너무 사실적이어서 마치 한 장면 한 장면 동영상으로 찍은 듯하다. 쌀이 없는 집이여선지/ 그 집엔 숟가락이 없다 (「숟가락」 부분). 멀건 죽물에/ 쌀알이 얼마나 섞인다고/ 어머니는 매끼마다/ 쌀 다섯 알씩 절약하셨네// 알알이 모아지고/ 한 줌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밥을 지으셨네/ 나에게 생일 밥 차려주셨네// 더운 밥/ 목메어 세어보니/ 어머니가 그동안 못 드렸던/ 450개 밥알이었네 (「밥알」 全文). 옥수수 몇 알씩 놓고도/ 우리는 말한다/ 밥 먹자고// 씁쓸한 나무껍질 씹고도/ 우리는 생각한다/ 밥 먹었다고// 소금 탄 맹물/ 한숨에 마시고도/ 그것도 밥이라고 한다// 밥/ 그 말조차 없다면/ 먹은 날이 없기에 (「우리는 밥을 먹는다」 全文). 이 시들은 굶주림에 의해 생존의 기로에 서 있어보지 않은 자는 쓸 수 없는 시다. 일찍이 우리 시에 ‘밥이 먹고 싶다’는, 인간으로서 당연한 이 본능적 사실을 이토록 처절하게 노래한 시들이 있었던가. 굶주림이 이러한 시를 낳았으나 이런 시는 애초부터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시가 아니던가. 왜 집에 숟가락이 없겠는가. 먹을 밥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밥 먹을 숟가락을 한 줌 밥을 먹기 위해 팔아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끼니마다 다섯 알씩 쌀을 모으는 어머니의 심정을, 그 쌀로 생일 밥을 받은 아들의 심정을 남한에 사는 배부른 우리가 어떻게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옥수수 몇 말을 먹고도, 나무껍질을 씹고도, 소금 탄 맹물을 마시고도 밥을 먹었다고 말하는 상황, 즉 밥이라는 말로 밥을 먹는 상황을 나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다. 영남이는 오늘도/ 배고픈 우리에게/ 큰 소리로 자랑했다/ 자기는 어제도 그제도/ 밥 세 끼 먹었다고// 애들은 소리 내어 웃었다/ 한 끼면 몰라도/ 새하얀 쌀밥을/ 세 끼나 먹었다는 그 말은/ 새빨간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全文). 밥이라면/ 시퍼런 풀죽으로만 알던 아이/ 생일날 하얀 쌀밥 주었더니/ 싫다고 발버둥치네/ 밥 달라고 내 가슴을 쥐어뜯네 (「밥이라면」 全文). 옥수수 하나 손에 쥐고 총에 맞아 죽은 아이 밥을 먹었다는 사실이 친구들에게 자랑이 되는 현실, 또 그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다 아는 현실은 그 얼마나 비극적인가. 쌀밥을 먹어본 기억이 없는, 시퍼런 풀죽만 먹던 아이가 생일날 하얀 쌀밥을 줘도 싫다고 밥 달라고 발버둥치는 모습에서는 더 이상 시집을 읽어나갈 수 없다. 그러나 시집은 ‘밥이 사람을 잡아먹는 이 땅’이라고 노래하며 굶주림에 의해 인민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으로 계속 이어진다. 꿈 속에서/ 아이는 무엇을 보았기에/ 간밤에 밖으로 달려 나갔을까// 꿈 속에서/ 아이는 무엇을 보았기에/ 총을 쏘는 군대도 무서워 안했을까// 꿈 속에서 아이는 무엇을 보았기에/ 손에 그것을 꼭 쥐고 죽었을까// 그 꿈은/ 죽으면서도 놓지 않은 그 꿈은/ 작은 옥수수 하나 (「아이의 꿈」 全文). 이렇게 옥수수 하나 손에 쥐고 총에 맞아 죽은 아이, ‘제 목숨 하나 덜면/ 밥 한 술 남는다며’ 사과나무에 스스로 목을 맨 손녀, ‘시체조’에 의해 역전마다 열차가 도착하면 죽어나가는 사람들, 학생들에게 ‘굶어도 배워야 한다고’ 애타게 호소하다가 죽어간 백발 교수, ‘눈 감겨줄/ 작은 손도 없어/ 제 그림자 깔고/ 여기저기/ 누워 있는 시체들’ 등 시인이 목격한 죽음의 참상은 참혹하다. 더구나 시인은 자신도 살인자라고 말한다. ‘출근할 때/ 눈물밖에 가진 게 없어/ 동냥손도 포기한 사람 앞을/ 악당처럼 묵묵히 지나쳤다/ 하여 퇴근할 땐/ 그 사람은 죽어 있었으니’ 시인은 ‘스스로의 심판에/ 이미 처형당한 몸’이라는 것이다. 어찌할 방도가 없어 그냥 지나친 것에 불과한데도 그 자체가 이미 살인과 마찬가지라는 인식은 시인이 이 시를 쓰게 된 깊은 내면의 한 단면이다. 그리고 시인의 이러한 깊은 사랑과 自責(자책)은 김일성 시신을 보관한 금수산기념궁전에 대해 이렇게 분노한다. 그 궁전은/ 산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다/ 수조 원을 벌려고/ 억만금을 들인 것도 아니다// 죽은 한 사람 묻으려고/ 삼백만이 굶어죽는 가운데/ 화려하게 일어서/ 우뚝 솟아서// 누구나/ 침통하게 쳐다보는/ 삼백만의 무덤이다 (「궁전」 全文). 아침까지 ‘얼어 죽지 않고 자는 법’ ‘삼백만의 무덤’이 궁전으로 불리는 나라. 그 나라에서 시인의 눈은 인민들의 삶의 구석구석을 그려내는 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아침까지 ‘얼어 죽지 않고 자는 법’은 ‘페트병에 더운 물 채우고/ 이불 안에 넣고 자는’ 것이라며 ‘이 혹한에도/ 시민들은 집에서 안 잔다/ 페트병 안에서 잔다’고 고발한다. 또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라는 글씨가 써진 ‘종이를 목에 건 채’ 시장에 서 있던 벙어리 여인이 ‘한 군인이 백 원을 쥐어주자/ 딸을 판 백 원으로/ 밀가루빵 사들고 어둥지둥 달려와/ 이별하는 딸애의 입술에 넣어주며/ -용서해라!’하고 통곡하는 모습도 놓치지 않는다. 이런 비극의 참상은 이 시집 전체를 관류하는 한 부분에 불과하다. 시집은 유엔에서 보낸 救濟米(구제미)가 원산항에 도착하자 ‘태극기를 내리기 전엔/ 쌀 한 톨도 못 받겠다’고 ‘정부가 단호히 거절하여서/ 고마운 동족의 큰 배’가 오지 못한 일에 대한 안타까움도 이야기하고 공개처형 당하는 인민의 슬픔도 숨기지 않는다. 우리는 굶주리는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도 대중 앞에서/ 누군가 또 공개처형을 당한다// 절대로 동정해선 안된다/ 죽었어도 격분으로 또 죽여야 한다// 포고문이 다 하지 못한 말/ 총소리로 쾅 쾅 들려주는 그 앞에서// 어째서인가 오늘은/ 사람들의 침묵이 더 무거웠으니/ 쌀 한 가마니 훔친 죄로/ 총탄 90발 맞고 죽은 죄인// 그 사람의 직업은/ 농사꾼 (「궁전」 부분). 아, 정부가 배급해주지 않는 ‘쌀 한 가마니 훔친 죄로’ 공개처형당한 한 농사꾼의 피눈물은 누가 닦아줄 수 있을까. 나는 먼저 이 시를 쓴 詩人(시인)의 손이 그 눈물을 닦아주는 것을 본다. 그것이야말로 두만강을 건너 脫北(탈북)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이 시집 원고뭉치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녀온 까닭이 아닐까. 시인은 북한을 탈출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시인이 되었다. 시인은 조국을 버리지 않았으나 시인의 조국은 시인을 버렸다. 그리하여 시인은 남한에 와서 지금 탈북자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탈북자 우리는 먼저 온 미래 오고야 말 통일을 미리 가져온 현재 (「탈북자」 부분). 나는 시집의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이 시를 소중히 가슴에 품는다. 그가 진정 ‘먼저 온 미래’ ‘통일을 미리 가져온 현재’가 되기 위해서는 北(북)도 변해야 하고 南(남)도 변해야 한다. 특히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 정치적으로 눈치만 보고 말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남한 정부는 반성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생존의 밥, 자유의 밥 한 그릇을 위해 짐승처럼 죽어간 북한의 인민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들이 배불리 한 끼 밥을 먹을 때, 우리는 굶주리는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탈북시인 장진성이 이 시집을 굳이 남한에서 펴낸 의미는 상실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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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자식들이 생각나 도무지 견딜수가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