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른 뒤 한반도가 통일이 되면 남의 국립묘지와 북의 혁명열사릉은 오래오래 우리 민족의 아픔이자 부끄러움이며, 좋은 교훈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전쟁을 일으켜 민족상잔을 자아낸 그 장본인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전쟁 발발에 대한 분명한 징후들이 여러 경로로 확인되었음에도 그 대비에는 소홀한 채 큰소리만 쳤던 당시 남측 군부 지도자들의 역사적 재평가도 분명히 이뤄져야 할 것이고요.
강원도 양구는 당시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들 중 하나로 남북 쌍방 모두 엄청난 사상자가 나왔던 곳으로 압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양구지역 전투들은 1951년 8월 18일부터 9월 17일까지 있었던 '피의능선 전투'나 1951년 9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있었던 '단장의 능선 전투' 등이 있고 도솔산전투, 백석산전투, 펀치볼전투, 가칠봉전투, 크리스마스고지전투 등도 유명합니다.
가장분들의 전사 후 남은 여성분들이 농경 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오로지 모성애 하나로 가정을 이끌며 겪었을 간난신고는 남북 모두 가히 상상을 초월했을 것으로 수이 짐작됩니다.
그리고,그곳에는, 그곳에서 장사하시는 '자갈치 아지매'라는 분들이 계시지요.지금 거기서 장사하는 아지매들은 6.25전쟁과 별 상관이 없지만,원래 자갈치시장에 '자갈치 아지매'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모여들게 됐고,전국적 으로 유명하게 됀것은 바로 6.25전쟁때문이지요.
남편들 다 전쟁터로 내보내고,어린자식들과 남은 이땅의 여인네들이,살아남기 위해서...간난쟁이는 업고, 좀 큰애는 걸리고,머리에는 큰대야이고서... 부산남항에서 생선 받아다가,근처 '자갈치'라고 부르는 자갈밭에서 팔던게 그유래입니다.
리어카에 간단한 취사도구와 값싸고 구하기 쉽고,조리가 간편한 요리와 대중술인 소주를 곁드려 파는 '포장마차'의 원형이 탄생한곳도 자갈치시장과 멀지않은 남포동에서 6.25전쟁때 만들어 졌읍니다.
지금 전국의 왠만한 도시에 다있는 '먹자골목'도,기실 '자갈치 아지매'와 사정이 비슷한 전국의 피난민 아지매들이,전쟁통에 부산지역에 와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능력것 구해다가,판자집에서 조리해서 큰대야에 이고,남포동 골목 한 귀퉁이에 모여서 팔던게 그 시작이 었고요.
비둘기로님~ 하나더
님글에 보니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며 우셨다고~~
강재규감독은 그 영화를 위해 국방부에 영화 지원(떙크며 무기며 그런 대형 소품들)을 요청했는데 거절 당했었죠~
보셨으니 아셨겠지만, 애국,반공 좀 그런거랑 동떨어져 보수층으로부터는 크게 호응을 못받은 영화였습니다. 조선일보로부터도 당연~~
전 나름대로 괜찮은 영화라고 물론 생각하지만, 하지만 님~
혹시 영화 전반에 흐르는 증오 보셨는지요~ 보도연맹이니 머니 ㅎㅎㅎ
저도 여기서 나름대로 약한 보수의 색깔로 싸우는 입장이지만, 우리나라
통일 이전에 남한 전체에 흐르는 "증오"부터 누그려 뜨려야하는데 선결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6.25때에는 그런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인민군 점령 아래에서 피해자가 되고, 그 피해자의 가족들이 인민군이 후퇴하고 미군, 국군이 북진하기 전의 치안의 공백기에 북으로 간 그 가해자의 남은 가족들에게 보복하는 식이지요. 전선이 위 아래로 오르락 내리락 하면 같은 일이 상호 간에 반복됩니다.
문제는 60여년 전의 증오심을 지금까지 계속 끌고 오면서, 화해가 안되고 남북관계의 미래를 향한 진전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의 원한을 묻어 둘 때가 지났습니다.
단지 과거의 원한이 이유라면, 1백만 대군을 투입하고 북진 통일을 막았던 중국은 한국의 제 1의 수출국가가 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자칭 보수파들은 북을 여전히 그리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공산당 1당 독재국가인 중국에게는 상국 대접하니 앞뒤가 안맞는 일이지요.
남이 북을 여전히 점령하려는 냉전의 의지가 남아있고, 그리고 그것이 강대국들에게 이용당하는게 큰 이유라 봅니다.
이제 그것을 그만 둘 때가 오래 전에 지났지요. 증오는 또 다른 증오를 부르고 이는 서로를 파괴할 뿐 아무런 생산적인 결과를 내놓지 못해요.
전쟁을 일으켜 민족상잔을 자아낸 그 장본인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전쟁 발발에 대한 분명한 징후들이 여러 경로로 확인되었음에도 그 대비에는 소홀한 채 큰소리만 쳤던 당시 남측 군부 지도자들의 역사적 재평가도 분명히 이뤄져야 할 것이고요.
강원도 양구는 당시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들 중 하나로 남북 쌍방 모두 엄청난 사상자가 나왔던 곳으로 압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양구지역 전투들은 1951년 8월 18일부터 9월 17일까지 있었던 '피의능선 전투'나 1951년 9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있었던 '단장의 능선 전투' 등이 있고 도솔산전투, 백석산전투, 펀치볼전투, 가칠봉전투, 크리스마스고지전투 등도 유명합니다.
가장분들의 전사 후 남은 여성분들이 농경 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오로지 모성애 하나로 가정을 이끌며 겪었을 간난신고는 남북 모두 가히 상상을 초월했을 것으로 수이 짐작됩니다.
의미로운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재혼을 거의 금기시 한다> 라는 말은 너무 하구만.
북한에서 재혼을 반대하는 법?,,,규정?... 무엇이 있습니까?
재혼하고 싶은자는 10번을 해도 비판하거나 잡아가는자도 없는걸로 아는데요.
오직 남의 눈이 좀 두렵거나 본인의 의사에 따라서 아니 갈분이지 재혼이 거의 금기시 된다는것은 아닌 말이죠.
물론 미혼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과부의 재혼은 법적으로나 당적 규정으로 금기시 한것이 없습니다.
이 남한에도 6.25때 남편을 잃고 혼자 살아온 여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한반도 여인들의 그어떤 의무감에서 출발한 것이 였을뿐... 절대로 그 어떤 , 그누구의 강제적인 금기시조치에 따른것은 아닙니다.
The tree of liberty must be refreshed from time to time with the blood of patriots and tyrants.
미국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이 한말이고,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로 보통 많이 인용되고 있는 명언입니다.
남한도 그랬죠~ 과거 말한마디 잘못했다고 온가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참 많은사람이 새세상을 위하여 목숨을 잃었죠~
북한도 역시~ 여러분을 포함에서 많은 고통을 당하는 북한국민들...
핏값이 차면, 그날이 오면
.....ㅋㅋㅋ
전 상상만 해도 벅차답니다..
님도 그리던 고향에 가실수 있고~
내가 원래 씨니컬해서 이런사람이 아닌데..
이상하게 반말하고 싶지가 않네~~ ^^
위에 화상들님의 말씀을 보니 새삼 생각이 나는군요.
원래 외가에 외삼촌이 한 분 더 계셨답니다. 그런데, 동란 와중에 납북된 건지, 인민군에 편입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북으로 가셨대요.
그런데, 그런 사실을 최근에 와서야 알게 됐습니다. 어머니께서 아직 북에 오빠가 살아 계실 지도 모른다면서요...
그동안 아무도 말을 안했던 거죠.
저희 외가는 어머니를 비롯해서 모두 교육계에 계십니다. 아마도 이런 사실이 알려졌을 때 생길 불이익이 두려웠을 거예요. 이해는 합니다만, 혈육의 존재를 숨기고 살아야 했을 가족들의 맘을 생각하면 맘이 짠해 집니다.
우리 남한도 그런 시절이 있었답니다.^^
제 고향 부산에는 자갈치시장이란 곳이 있읍니다.
그리고,그곳에는, 그곳에서 장사하시는 '자갈치 아지매'라는 분들이 계시지요.지금 거기서 장사하는 아지매들은 6.25전쟁과 별 상관이 없지만,원래 자갈치시장에 '자갈치 아지매'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모여들게 됐고,전국적 으로 유명하게 됀것은 바로 6.25전쟁때문이지요.
남편들 다 전쟁터로 내보내고,어린자식들과 남은 이땅의 여인네들이,살아남기 위해서...간난쟁이는 업고, 좀 큰애는 걸리고,머리에는 큰대야이고서... 부산남항에서 생선 받아다가,근처 '자갈치'라고 부르는 자갈밭에서 팔던게 그유래입니다.
리어카에 간단한 취사도구와 값싸고 구하기 쉽고,조리가 간편한 요리와 대중술인 소주를 곁드려 파는 '포장마차'의 원형이 탄생한곳도 자갈치시장과 멀지않은 남포동에서 6.25전쟁때 만들어 졌읍니다.
지금 전국의 왠만한 도시에 다있는 '먹자골목'도,기실 '자갈치 아지매'와 사정이 비슷한 전국의 피난민 아지매들이,전쟁통에 부산지역에 와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능력것 구해다가,판자집에서 조리해서 큰대야에 이고,남포동 골목 한 귀퉁이에 모여서 팔던게 그 시작이 었고요.
제첩국이라고,지금은 낙동강하구의 수질환경변화로 재첩이란게 더이상 나지를 않아서,섬진강재첩국이 유명한데...원래 재첩국이 유명하게 됀 계기도 전쟁통의 부산이었읍니다.
젊은남자들은 전쟁터다나가고,남은 40대이상 중늙은이 남자들이 부산에서 입에 풀칠이라도 할려면 날품팔이라도 해야했고,그런사람들이 새벽에 일정지역에 모인곳에서 밥팔아서 먹고사는 아지매들이 국거리로 제일 많이 내어 놓았던것이 바로 제첩국입니다.
당시,계절에 관계없이 낙동강 강바닥긁으면 제일 흔하게 구할수 있는것이 제첩이였으니까요.
또,부산의 '밀면'이라는 것도,알고보면 주로 함경도쪽에서 자식데리고 피난오신 아지매들이,사시던곳에서 즐겨드시던 냉면을, 미국이 제공하던 원조식량의 주를 이루는 밀가루를 이용해서 만들어서 내다 팔았던것이 시초였읍니다.
남한사람들도 평양음식,개성음식이 훌륭했다는건 다알고,지금 대한민국의 향토음식중 제일로 치는것이 호남의 오래됀 도시의 음식입니다만...
한국 제2의 도시 부산의 알만한음식이란것이 거기에 비해 황당할 정도로 간단하고 서민적이고 보잘것 없는 이유도,제 생각엔 6.25와 그로인해서 남편없이 자식데리고 부산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여인들의 눈물때문일 것이고...
전쟁통에서 먹거리란 것이 먹고나서 배부르고,목구멍으로 넘길수 있고,다음날 탈없으면 그만이지...무슨 영양가따지고,입맛따기고 할 처지도 상황도 않이었기 때문이겠지요,
두어달 전 서울로 출장을 갔었는데, 거래처사람이 제첩국 잘하는데 있다고 강남의 한 식당에 데려간적이 있었읍니다.
으리으리한 시설에,제첩국이 타우린인가 뭔가하는 성분때문에 간기능 강화에 좋다는 설명과 함께 먹었었는데,참 묘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전쟁통이나 환란이 있는 곳에서는,사람으로 태어나도 사람대접을 받을 수가 없지만...풍요롭고 평화로운 곳에서 태어나면, 강바닥에 흔히나는 조그만 조개조차도 귀한게 대접을 받는곳이 바로 내가 살고있는 이 세상이라는 거...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힘들고,많이 불편했었어요.
님글에 보니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며 우셨다고~~
강재규감독은 그 영화를 위해 국방부에 영화 지원(떙크며 무기며 그런 대형 소품들)을 요청했는데 거절 당했었죠~
보셨으니 아셨겠지만, 애국,반공 좀 그런거랑 동떨어져 보수층으로부터는 크게 호응을 못받은 영화였습니다. 조선일보로부터도 당연~~
전 나름대로 괜찮은 영화라고 물론 생각하지만, 하지만 님~
혹시 영화 전반에 흐르는 증오 보셨는지요~ 보도연맹이니 머니 ㅎㅎㅎ
저도 여기서 나름대로 약한 보수의 색깔로 싸우는 입장이지만, 우리나라
통일 이전에 남한 전체에 흐르는 "증오"부터 누그려 뜨려야하는데 선결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나서 끄적거렸습니다.
6.25때에는 그런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인민군 점령 아래에서 피해자가 되고, 그 피해자의 가족들이 인민군이 후퇴하고 미군, 국군이 북진하기 전의 치안의 공백기에 북으로 간 그 가해자의 남은 가족들에게 보복하는 식이지요. 전선이 위 아래로 오르락 내리락 하면 같은 일이 상호 간에 반복됩니다.
문제는 60여년 전의 증오심을 지금까지 계속 끌고 오면서, 화해가 안되고 남북관계의 미래를 향한 진전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의 원한을 묻어 둘 때가 지났습니다.
단지 과거의 원한이 이유라면, 1백만 대군을 투입하고 북진 통일을 막았던 중국은 한국의 제 1의 수출국가가 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자칭 보수파들은 북을 여전히 그리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공산당 1당 독재국가인 중국에게는 상국 대접하니 앞뒤가 안맞는 일이지요.
남이 북을 여전히 점령하려는 냉전의 의지가 남아있고, 그리고 그것이 강대국들에게 이용당하는게 큰 이유라 봅니다.
이제 그것을 그만 둘 때가 오래 전에 지났지요. 증오는 또 다른 증오를 부르고 이는 서로를 파괴할 뿐 아무런 생산적인 결과를 내놓지 못해요.
남은 평화적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북을 변화시키고 통일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북한이 공산국가인줄 아니? 공부좀하셔공부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