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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할 때의 나의 심리 (1)
리중건 5 583 2006-04-05 22:24:01
반도체의 꿈도 바꾼 우상 심

나는 중학교 때 이상(꿈)이 전자공학을 하는 것이었다. 중학교 당시는 1970년 초였는데 앞으로 전자공학의 시대가 온다고 믿었다. 그것은 오늘 현실로 되었다. 코피를 쏟으며 공부한 대가로 학교 적으로 2등의 성적을 따내 남한의 서울공대나 포항공대와 같은 평양 김책공업대학 반도체 공학부에 갔었다.(1974년) 반도체공학부 학부장은 북한 최초로 헬기를 설계한 교수였다. 지금은 북한전자공학이 한 세기 떨어졌다고 하지만 당시는 매우 야심 차있었다. 에 라는 말처럼 명문대학 안에서도 전자공학부 하면 알아주었지만 거기서도 반도체공학부하면 대단하게 여겼다.

그러나 김일성에 대한 우상 심은 전자공학에서 식량분야로 꿈을 바꾸도록 하였다. 당시 ,(*1980년대에는 ‘쌀은 곧 공산주의’로 승격)라는 김일성의 교시를 받들기 위해서이다. 라는 구호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는 김일성을 우상화했던 충성분자였다.
그러나 이러한 충성심으로 시작한 식량문제연구는 결국에 탈북으로 이어 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진리를 추구하여 따라가다 보니 진리가 아님을 깨닫고 충성이 곧 반역으로 된 것이다.

나는 북한에서 쉽지 않을 만큼 체계적 공부를 한 사람이다. 전문학교(전문대)와 대학 그리고 대학연구소 연구원, 그리고 남한의 과학기술연구원(KIST)와 같은 북한과학원에서 연구원으로 있었다. 연구과제도 식량증산을 위한 것이었다. 비만을 걱정하는 여기서는 농업을 천시 하지만 북한에서는 라고 할 만큼 비중이 높다.

나는 공부와 연구밖에 몰랐다. 술과 담배는 물론 처녀들의 연애도 받아 줄, 줄도 몰랐다. 얼마나 충성분자였는지 북한청년들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연구소 사로청(사회주의노동청년)위원장까지 선거되었다. 북한 유일 청년조직인 사로청의 위원장은 당 간부의 후비로서 출세는 따 놓은 당상이다. 또 멋진 처녀들이 줄을 서서 살자고 할 만큼 선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 선망의 사로청위원장도 식량연구를 위해 3년 만에 포기하여 버렸다. 위의 지시대로 로 벗 같이 움직이는 정치사업은 나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역시 창조적인 과학연구가 좋았다. 첫 날 밤에 여자를 어떻게 할지 몰라 쩔쩔 맬 정도로 나는 책과 연구밖에 몰랐다. 이렇게 집중하니 연구가 안 될 리가 없었다.

하나님을 대적한 학문을 전공하다.

처음 나의 연구는 최첨단 생물연구인 세포공학이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볼 때 하나님 창조론과 정 반대에 있는 과학 분야이다. 아무튼 박양식이라는 연구원와 함께 북한에서 최초로 옥수수 꽃가루배양을 성공시키기도 하였다. 이 기술을 사람에 비유한다면 남자와 여자의 결합에 의해서 사람이 태어나는 자연의 섭리를 깨고 여자 없이 남자의 정자만 배양하여 사람을 만든 것과 같은 원리이다.

당시 나는 20대 초반으로서 과학원에서 가장 젊고 장래가 총망하여 남들이 시기할 만큼 연구소의 꽃이었다. 연구원 한명의 1년 국가연구과제가 3개정도라면 나는 27개를 해 제끼는 능력과 열정이 있었다. 그러나 시약과 실험기구의 미비로 최첨단 세포공학연구가 북한수준에서는 이었다. 이것을 깨 닿게 해준 것은 연구소 과학소장인 이봉휘 박사로서 그분의 주선으로 현실적인 응용연구를 하게 되었다.

소련 유학출신 이봉휘 박사는 김일성이 라고 칭하며 벤츠선물까지 할 만큼 북한강냉이 연구의 대부였다. 북한식량생산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옥수수이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남한이 게임이 안 될 정도로 연구역량을 수백 배로 집중하였다. 훗날 남한에 와보니 북한 옥수수 종자연구는 남한보다 상당히 앞서있었다. 남한은 옥수수를 외국에서 사다 쓰기에 관심이 미약한 것이다. 2001년 6월 미 농무성 초청으로 미국에 가보니 유전자조작(GM)종자 외의 옥수수종자는 북한 것이 미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따라서 남한정부와 일부과학자가 한다는 소리는 햇볕정책이라는 정치적 이벤트로서 허구이다.

라고 김일성은 말했는데 맞는 말이다. 요즘 김정일은 옥수수 대신 을 제창하는 데 그것은 농사를 몰라도 한 참 모르는 소행이다. 옥수수농사가 안 되면 감자농사는 더 안 된다. 따라서 북한의 주 작물은 옥수수여야 한다. 이러한 과학자들의 의견대로 김일성은 논외에 밭은 대부분 옥수수를 심게 명령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옥수수생산의 20% 정도를 피해주는 것은 가루깜부기병(sorosporilim reriarilim)이었다. 이봉휘 박사는 옥수수의 암이라고 하는 이 연구 과제를 어린 연구원인 나에게 맡겼다. 특히 옥수수가 많은 북부내륙지대에서 이 병에 의한 손해는 생산량의 절반에 가까워 매우 심각하였다. 그런데 이 병과의 싸움이 어려워 누구도 이 연구를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난제의 연구를 맡았지만 정작 닥쳐보니 의외로 쉬운 것이었다. 토양 전염병인 이 병은 토양을 다 소독하기 전에는 백약이 무효였다. 이병을 결정적으로 퇴치할 방법은 내병성 종자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방향을 옳게 잡은 것이다. 병에 강한 어미와 아비를 골라 교잡 육종하니 대체로 병에 강한 종자가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육종으로 3년 만에 연구 성과를 전망하게 되었다.

북한식량난의 근본원인을 발견하다

사실 북한의 옥수수종자는 북한과학자들의 노력으로 세계적 수준이다. 이것은 멕시코에 있는 국제 옥수수연구소가 인정하는 바이다. 그런데도 북한은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다.
왜 그럴 가? 난제의 과학연구를 마친 다음 더 큰 문제가 바로 이런 문제였다. 그렇게 좋은 종자도 생산현장에만 나가면 30%정도의 효과밖에 나지 않았다. 최근 탈북자들에게 알아보면 더 내려가 10%의 효과성 밖에 못 낸다고 한다. 당시의 충성심과 순수하였던 과학자의 양심은 현장으로 나가게 하였다. 그것도 김일성의 첫 부인이자 김정일의 어머니 이름을 딴 에 나가도록 하였다.

당시는 기차도 없는 삼수갑산지역이지만 수령에 대한 우상 심으로 해수로 6년간 그곳에 있었다. 우리가 신학교와 선교현장이 다른 것처럼 연구기관에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생산현장에 있어보니 식량난의 원인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종자가 나쁘거나 농업기술의 잘못보다 치명적 문제점은 공산 식 농업경영이었다. 이와 관련한 구체적 내용은 여기서 생략하면서 더 알고 싶은 분들은 이 책, [북한알기를 위한 참고자료 편]의 4. 과 8.의 , 9,의 를 참고하시기를 바란다.

김일성에게 보낸 편지사건

나는 북한식량난 해결의 유일한 진리는 공산 식 집단농을 해체하고 개인농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생산성 차이는 3∼5배나 되었다. 프로 수로 따지면 300∼500% 의 식량을 더 올릴 수 있는 천문학적 수량인 셈이다.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공산 식 마음과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소유본능의 차이가 이렇게 큰 줄을 몰랐다. 훗날 예수를 믿으면서 더욱 확인한 것이지만 공산당의 치명적 결함은 바로 인간의 본질을 잘못 본 것이고 예배당의 위대함은 바로 인간의 죄 성을 제대로 본 것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현장에서 느낀 식량난의 근본해결방안을 우상으로 믿었던 김일성 앞으로 제의 편지를 올렸다(* 이사건의 구체적 내용은 [북한알기를 위한 참고자료 편]의 18. 를 참고할 것).

얼마나 심중한 사건이었는지 중앙당의 위임을 받고 과학원 과학지도국장이 내려왔었다. 그러나 북한식량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이 진리는 북한에서는 이라는 데 놀랐다. 그중에서 가장 큰 충격은 을 준다고 항상 말하던 인민의 수령의 실체를 알게 된 데여서이다. 즉 수령이 권력유지만을 위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집단농 대신 개인농을 받아들이면 인민이 배부르게 된다는 것을 수령은 잘 안다. 바로 등소평의 중국농업개혁이 이미 잘 보여주고 있다. 모택동의 공산식 농 때에는 2억 톤 밖에 못했지만 등소평의 개체농은 4억 톤을 내었다. 이 사실을 김일성, 김정일도 잘 알지만 이를 받아들인다면 지금까지의 우상정치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수령은 포기하지 않는다. 권력유지를 위해서이다.

이러한 수령의 진 모습을 알게 된 것이다. 영원할 것 같았던 수령 우상은 저 남극의 높은 빙산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이 무너져 내렸다. 백성은 굶주리다 못해 식인사건까지 일어나는 판국임에도 권력유지에만 매달리는 수령에 대한 증오가 나도 모르게 차올랐다. 김일성 이름 앞에 반드시 부치던 존칭어 , 소리는 어디로 가고 나도 모르게 라는 말이 나와 나 자신도 놀라기도 하였다. 수령에 대한 미움과 반역은 내 잘못이 아니다. 그 후 탈북도 내 잘못이 아니다. 수령에게 충성했던 나를 반역하게 만든 것은 수령인 셈이기 때문이다.



방황

나는 식량난 해결의 분명한 방도가 있음에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북한사회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다. 김일성 우상에게서 받은 충격은 더 더욱 큰 것이었다. 나는 인생의 방향과 키가 무엇인지 몰라 몹시 방황하였다. 나의 김일성 앞 편지에 대한 해답을 주러 왔던 과학원 과학지도국장은

그러나 생산에 도입이 안 되는 연구를 많이 한 들 무슨 소용이랴?! 과학자의 양심상 그리고 내 성격상 필요 없는 짓은 아예 하고 싶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엇을 할 것인가?란 방향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이렇게 컴컴하게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이러한 방황 속에 또 하나의 조국인 남조선은 어떤지를 알고 싶어졌다. 북조선은 그렇다고 치고 과연 남조선은 어떤지?! 선전대로 북한보다 더 나쁠 가? 만약 조국의 북과 남이 다 이 모양이라면?! 아마도 남한까지도 희망이 없는 사회로 판명되었다면 정말 생을 포기하고 자살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외로 남한사회를 알아보면 볼수록 놀라운 희망을 발견하게 되었다.

남조선을 알게 되다

남조선을 크게 두 가지로 분석하여보았다. 사회의 두 큰 구성인 정치와 경제 분야로 분석한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북한보다 독재적인가, 민주적인가를 살피면 될 것이고 경제적 면에서는 인민을 배부르게 하고 있는 가를 보면 알 것이었다. 나는 어느새 과학연구사가 아니라 정치연구사로 변해버렸다. 문제는 북에서의 남조선자료 모두가 비방한 것뿐이라는 것이다. 무선라디오를 가지고만 있어도 요시찰인물로 찍히는 북조선에서는 외부소식, 특히 제대로 된 남조선소식을 들을 수 없다.

단 적 실례로 북에서 태어나 30 여년 넘도록 살면서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은 못 생긴 만화로만 보았지 실물사진을 한번도 본 일이 없다. 심지어 태극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한번도 본 일이 없다. 이럴 정도로 폐쇄되고 통제된 북조선사회라는 것을 여기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할 수없이 비방자료 만 가지고 남조선을 알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비방자료 속에서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정치 분야에서는 남북을 떠들썩하게 했던 임수경의 방북사건(1989년)을 통해서 유추하였다. 임수경은 친북적인 행동을 하였지만 남에 되돌아가서는 처형되지 않은 것이다. 그 부모와 가족도 추방당하지 않고 서울에 그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인기스타가 되어 각광받고 있다는 것은 북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만약 반대로 북한대학생이 그렇게 했다면 아마도 죽어 뼈다귀도 어디간지 모를 것이다. 말 한마디 잘못에 죽고 사는 북조선에 비해서 남조선은 아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판단하게 되었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남조선은 훨씬 나은 것으로 분석됐다. 북에서 남조선경제를 비방한 자료를 보면, 남조선은 자본주의 나라 중에서 가장 낮은 임금을 준다고 하였다. 말로만 해서는 안 믿을 가봐 비교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그 자료들을 잘 기억하고 있다. 남조선은 캐나다에 비해 11분의 1, 미국에 비해서는 10분의 1, 일본에 비해서는 8분의 1, 대만에 비해서는 6분의 1 밖에 노임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캐나다 나 미국, 대만 등은 잘 모르겠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안다.

북조선을 지상낙원으로 믿고 찾아온 10만의 북송재일교포들을 통해서, 그리고 나의 생물과학분야에서는 일본 것을 많이 갔다 보는 데, 그 과정에서 일본의 발전수준을 알게 되었다. 이에 의하면 일본 노동자의 한달 노임으로 조그마한 차를 한대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근거를 놓고 남조선을 비교하여 보았다. 즉 일본에 비해 8분의 1월급을 받는다는 남조선은 여덟 달 만 일하면 조그마한 차를 한대 살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결론에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왜냐면 북조선은 여덟 달이 아니라 일생을 벌어도 차는 고사하고 자전거 하나 사기가 어렵다. 비방 자료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 가?

위의 사실이 믿을 수가 없어 다시 남조선 월급의 가치를 북조선 월급과 비교해 보았다. 역시 남조선자료는 비방한 것을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 북조선에 남조선 비방 자료는 참 많다. 이 자료 속에서 남조선 평균월급을 알아보니 15만원(실제는 100만원)이었다. 이것을 북조선 월급의 가치와 비교하려면 달러로 환산해야 한다. 남조선 돈의 달러가치는 남조선의 인플레를 비방한 자료를 보면 알 것 같았다. 틀림없이 남조선의 인플레에 대한 비방 자료가 있었다. 자료에는 남조선의 인플레는 날개를 달았는데, 1달러 당 700원까지 올랐다고 한다. 현재는 1달러 당 1200원정도로서 날개를 단 것은 사실이지만 좌우간에 1달러의 가치가 남조선 돈 700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을 15만원 남조선월급을 놓고 나누어보았다.

남조선 월급의 가치는 200달러가 넘게 나왔다.(실제 남한에 와보니 한달 월급이 1천 달러가 넘었다.) 나는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당시(1990년) 북조선 월급은 70원 내지 80원 정도였는데 이에 대한 달러가치는 1 달러 정도였다.(북한 돈 84원은 1달러) 그런데 남조선 월급은 200 달러가 넘게 분석되었으니 내가 놀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남조선을 비방한 자료 만가지고도 너무 나 큰 차이가 나서 오히려 믿기 힘들 정도였다. 헐벗고 굶주린다던 남조선이 지상낙원 북조선보다 월급가치가 수백 배로 높으니 정말 어안이 벙벙하였다. 이 의심을 털어버리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남조선에 직접 갔다 온 중국교포(조선족)들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개혁 개방한 중국이 어떤지도 직접보고 확인하고 싶어졌다.

중국에 몰래 가보고

마침 나는 중국국경과 인접한 곳에 나와 있는 기회로 중국을 넘어가 보기로 하였다. 물론 몰래 국경을 넘어 가본 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진리를 알고 싶어 넘어가 보았다. 처음 중국마을을 가까이 보는 순간 하는 걱정된 말이 저절로 튀어 나올 만큼 그동안 중국은 볂화 발전되어 있었다. 내가 가본 곳은 북한국경과 마주한 길림성 장백현 14도구였다. 이곳은 중국의 산간오지이다. 그럼에도 평양 시 사람들보다 옷차림이 좋았고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당국이 선전한 중국에 대한 소식은 다음과 같다. 등소평의 수정주의정책(개혁개방)으로 몇 사람만 잘 살아졌고 대부분은 더 못 살아졌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나라들을 비판하는 식 그대로 중국을 비평했다. 그러나 실제로 가보니 그 반대였다. 못사는 사람은 일하기 싫어하고나 질병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잘살아졌고 평균생활수준이 올라 못사는 이들도 북한주민보다는 생활이 훨씬 좋았다. 잡곡밥이라도 배불리 먹고 테레비와 자전거도 있었다.

배부르고 평화스러워서 인지 북한사람이 몰래 들어와 있어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 냥 지나치고 나, 웃으며 말 걸기도 하는 그들의 착한 심성은 삭막하고 투쟁적인 북한사람과는 달랐다.
또한 신기한 것은 농민문화회관에 가 보고 서이다. 산골이지만 남녀가 손잡고 멜로디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이다. 모택동 시절에 만든 연애장면 하나 없는 중국영화만 보아오던 나는 너무 신기하여 다리가 아프도록 보았다. 중국은 물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너무 변화되어 있었다. 모택동 때는 북한보다 낙후하던 중국이다. 그런데 등소평이 바꾼 정책 하나에 이렇게 변화되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면서 나는 내가 김일성에게 편지 보냈던 의견 사안이 옳았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김일성, 김정일이 더욱 욕이 갔다. 중국 사람들도 일치하게 김일성부자를 욕하였다. 자기들만 뚱뚱하고 백성은 굶긴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서 놀란 것은 남조선이 중국보다 훨씬 잘 산다고 일치하게 말하는 것이다. 남조선이 중국보다 30년 앞서있다고 말하면서 그곳에 돈벌러 누구나 가고 싶어 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믿지 않으려는 북조선사람들이 오히려 답답하다 못해 불쌍하다고까지 하였다.

남조선방문 갔다 온 조선족 여인

장백 시에 사는 한 조선족여인은 남조선의 경상남도 남해도에 있는 친척집에 다녀왔다고 한다. 직접 남조선을 갔다 온 그의 이야기는 북한사람으로서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소리뿐이었다. 자기친척의 집 앞에는 화단이 있고, 식사 후에는 과일을 먹는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이런 수준으로 사는 사람은 김일성부자 외에는 당 간부라도 쉽지 않다. 나는 바보스레 반박하기를 그 집은 부잣집이 아니냐고 하였다. 대답은 남조선의 농민이라는 것이다. 농민이 어떻게 그렇게 잘 살겠는가고 고집스럽게 되물으니 북조선사람들은 참 답답하다는 것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고 또 악선전에만 물들어 있다는 것이다. 또 그 조선족여인은 당시 중국 위해 시와 남조선 인천 사이에 여객선이 새로 개통된다며 어깨를 덩실거리며 좋아하였다. 남한에 가는 여행비가 싸지기 때문이며 또 많은 사람들이 왕래할 수 있게 됐다면서 남조선을 그렇게 공경하는 것이었다.

그 조선족여인의 남조선이야기 중에서는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두 가지가 있었다.

그 첫 사실은, 코를 푼 종이를 차창 밖으로 무심결 버렸는데, 이것을 후시경(팩 미러)으로 본 친척이 후진하여가서 말없이 휴지통에 넣더라는 것이다. 휴지를 막 버린 조선족여인은 창피해서 혼이 났다고 한다. 무지막지한 남조선사람들인 줄만 알았는데 이런 신사가 있다는 것이 참 감동적이었다.

두 번째로 감동된 것은, 성묘방문에서이다. 조선족여인은 남조선에 가서 이익만을 챙길 생각에 성묘방문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친척들은 조상 묘를 반드시 찾아보아야 한다며 산소에 데려가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의범절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집에서 멀지 않은 산소에 가는 길은 수풀이 우거져 가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처럼 민둥산 화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간접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남조선에 대한 북한의 모든 선전은 말짱 거짓말이라는 것이 이 한 두 가지사실만으로도 투시가 되었다.

모든 자료와 증언을 종합하여 보니 북에서 선전하는 대로 남한사회가 독재적이고 빈곤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런 판명을 가장 믿을 만하게 제공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남조선에 직접 다녀온 조선족여인의 말에서였다.

남과 북이라는 두개의 조국 중에서 남조선만이라도 북조선처럼 되지 않았다는 것이 참 희망이었다. 정말 삶의 의미가 되살아났다. 희망은 불연 듯 꿈에서조차 생각지 못했던 탈북 월남의 뜻으로 이어졌다. 말이라도 할 수 있는 남조선에 가서 고 소리치고 싶었다. 한편 그토록 고향을 그리시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소원도 내가 찾아가는 것으로 풀어드리고 싶었다. 또 절망뿐인 북한을 하루빨리 벗어나 자유롭고 풍요한 세상을 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탈북 할 때의 심정은 이것만이 아닌 고통도 뒤따른다.

탈북 할 때의 심리적 고통

탈북을 결심할 때 심리적 고통은 가 된다는 죄책감이다. 조국반역자 걱정부터 하는 북한사람들은 끊임없는 사상 선전으로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의 갈등은 남조선도 내 조국 땅인데 그 곳에 간다고 조국반역자로 될 수 없다는 이해로 해소하였다. 이렇게 금방 깨닫는 것을 지금껏 수 십 년 간 생각해 보지도 않고 살았다는 것이 참 이상할 정도였다.

다음으로 무섭고 두려운 것은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와 희망이 없는 북한에서 이렇게 살 바에는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각오를 가졌다. 죽음을 각오한 다음의 걱정은 가족연대처벌문제였다. 가족연대처벌은 북한당국이 쓰는 가장 악랄한 통제방법이며,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인질범죄정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03.3) 런던주재 세계기독교연대(CSW)의 초청으로 유엔인권위원회를 방문하여 북한 인권문제를 고발하였다. 탈북자들이 처음으로 제네바유엔인권위원회에 간 것이라고 우리와 함께한 인권운동가인 김상헌 선생은 말하였다. 우리뿐 아닌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결국 북한 인권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유엔 인권위 결정이 다수 가결되었다(중국은 반대. 남한은 기권). 앞으로도 가족연대처벌을 비롯한 북한 인권문제 개선을 위해 앞장서려한다.

아무튼 남는 가족에 대한 걱정은 탈북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민거리이다. 가족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어쩔 수 없는 급작스러운 탈북이 아닌 조건에서는 더욱 고민거리이다. 그렇다고 같이 탈출할 수는 없다. 우선 가족은 탈북 할 만큼의 정신적 준비가 안 돼있었다. 북한사람들은 대개 세뇌교육의 포로가 되어있다. 그 정도는 표류하여 남한에 넘어왔다가 다시 가겠다는 인민군 병사나 어부들을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천국 같은 남한 현실을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세뇌를 털어버리기 힘들어한다. 물론 점차 깨달아 가기는 하지만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우리가족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족 동반탈북의 또 하나의 어려움은 생소한 죽음의 길을 장정인 나 혼자도 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요즘은 가족 동반탈북이 많아 졌지만 당시는 어림도 없는 분위기였다. 나는 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북한 법을 자세히 살펴보니 묘안이 생겼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오랫동안 고심한 것이다. 묘안이란 다음과 같다. 이혼한 경우에는 남, 남으로 되기에 가족처벌하지 말라는 북한 법이 있다. 또 고발하면 오히려 잘한다고 평가를 받는 다.

나는 이혼함으로 처자식은 무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다시 나타나지 않으면 당국에 자발적으로 고발하라고 하였다. 물론 이혼은 간단 한 것이 아니다. 흔히 이점 때문에 탈북자들의 인간성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탈북자의 인간성을 비평하기 앞서 그들의 처지, 북한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아니 경험하지 않고서는 그 고통을 다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동정하기를 바란다. 지금에 와서 하는 얘기이지만 탈북자의 북에 남은 가족들은 차라리 탈북하기를 잘했다고 한다고 한다. 같이 있어봤자 굶어죽고 헐벗기 보다는 누구하나라도 탈북하여 남은 가족을 도와주니 차라리 낮다는 것이다. 이산의 고통보다 살기위한 고통이 더 심한 북한현실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가족의 안전과 함께 나와 연관된 사람들도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심사숙고 하였다. 나와 직접 연관된 직장책임자, 당 비서, 담당 정치보위지도원, 안전원(경찰) 등을 피해주지 않기 위한 일환으로는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핑계이상 없었다. 모든 적을 뗀 상태에서 탈북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차후 문제가 나도 어느 소속도 되어있지 않아 누구도 책임추궁을 받지 않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훗날 체포되었을 때 나를 살린 요인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누구도 감정을 내며 나를 잡자고 문제를 악화시킨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준비를 갖춘 후 탈북하는 날로 정한 것은 1990년 11월 29일 야밤이었다. 북방의 추위는 벌써 탈북해야 할 압록강 가에 살얼음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굳어진 결심은 국경을 넘는 사선도 살을 에이는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게 만들었다. 당시는 탈북자가 극히 드물 때이다. 그만 큼 잡히면 추호의 용서도 없던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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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북고향 2006-04-05 23:35:46
    리중건님의 천로역정과 같은 역경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남북한에 걸친 민족의 비극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됩니다. 이 시대에 태어나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숙명적인 아픔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부디 온갖 시련과 역경을 이제까지 이겨냈듯이 진정 통일되는 그날까지 건승하셔서 함께 부모형제자매가 기다리는 그리운 고향땅으로 갑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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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섭 2006-04-06 00:07:56
    리종건님! 이 민족은 왜 이리도 아픈가요? 무엇이 우리들을 이렇게 몰고 가고 있는지 정말 이해 할 수 없군요. 이제 대한민국에 오셨으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사십시요. 이 곳이 바로 리종건님의 조국이 아닙니까?

    그렇게 몸으로 느끼신 자유주의가치를 이땅에 사는 경험없는 우리들에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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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가다 2006-04-06 15:51:54
    북한알기를 위한 참고자료 편은 어디가면 볼수 있나요?
    아무리 찾을려해도 찾을수가 없네요.아시는분 좀 가르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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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중건 2006-04-07 06:58:07
    참고자료편은 제 책에 있습니다.
    주소를 알려주시면 보내드리지요.
    저의 이메일 <a href=mailto:leejnk@hanmail.net>leejnk@hanmail.net</a>연락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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