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안진희씨와의 인터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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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북한방송 2008-05-10 지난 2003년 4월, 중국 공안에 의해 강제북송되면서부터 5년간 아들과 생이별 중인 탈북자 안진희씨와의 인터뷰 전문을 게재한다 (기자 주 - '그곳이 왜 지옥인지 모르는 사람들'에 이어 탈북자 안진희씨의 인터뷰 전문을 게재한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 이해하기 쉽도록 간단한 정리 작업을 거쳤으며, 당시 안 씨가 표출했던 감정들을 그대로 독자에게도 전달하기 위해 사회 보편적으로 다소 금기시되는 용어도 여과 없이 게재한다) 북한에서의 삶은 어떠했는가? "97년~2000년까지 북한에 살며 앞집 세대주도 굶어서 죽고 옆집 세대는 식구가 다섯이었는데 4명이 굶어죽고 뒷집의 세대주와 아이가 굶어 죽고, 엄청 많이 굶어 죽었다. 앞 옆 뒷집 모두 굶어죽었다. 남한에 와서 성공한 사람들 보면 마음이 기쁘고 뿌듯하고 와 우리 사람들 대단하다 빨리 구원받아서 저렇게 큰일을 해야 할 텐데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기쁘면서도 북한만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지게 아프고 참을 수 없이 격분할 때가 많다" 탈북하게 된 경로는? "2003년 3월 말일에 아들을 데리고 강아지들 11마리 싸서 메고 장사꾼으로 위장해서 국경경비대를 속이고 국경을 넘었다. 중국의 친척집에 찾아 들어갔는데 그 때 심양에 한국으로 가는 일행들이 잠시 머무른다는 소식을 듣고 심양 차표를 구입해 연길 역전을 빠져 나오던 도중 연길 공안에 체포되었다. 아들은 잠시 친척집에 맡겨둔 상태였다. 거기서 생이별을 했다" "한국에 올 때는 심양에서 일 년 가량을 지내고 한국에 오려고 노력하다가 2004년 12월에 한국에 올 수 있었다. 몽골 국경을 넘어 40일 만에 올 수 있었다. 공포심이란 말할 수 없었고 이제 다시 그 길을 걸으라고 하면 걷지 못할 것이다" 아들과 헤어지게 된 계기는? "며칠 만에 북송돼 나는 북한 온성 보위부에 이감되고 아들은 연길에 그대로 남았다. 집결소에 간지 3달 만에 도주에 성공했다. 당시 형제들도 이미 북한 보위부들이 포위 상태에 있을 것이란 생각에 고향 대신 친구 집으로 찾아 들어갔다. 친구는 아들이 혼자 북한에 들어왔다가 엄마가 북송된 사실을 알고 다시 중국에 넘어갔다고 했다. 아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면 18살일 것이다. 헤어질 땐 14살이었다. 2003년 4월 10일 헤어졌다. 그 해 8월에 집결소에서 탈출했는데 식구들도 못 만나고 두만강을 넘었다. 그 후 한국에 올 때 까지 아들 소식을 알 수 없었다. 한국에서 어렵게 북한 친척과 전화 연결을 했는데 그 곳에는 아들이 없다고 해서 아마 지금 제3국에 있지 않을까 싶다" 강제북송 당시 경험했던 일들을 들려줄 수 있는가? "먼저 연길 공안에 체포되는 즉시로 개산툰 국제 감옥에 이감됐다. 옷이 모두 벗겨진 채 검사를 당하고 8일간 취급 받았다(감금당했다). 그들은 심양 차표를 샀으니까 한국(행) 도주라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한국 도주라는 것을 인정하면 살려 주겠다고 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는 건 뻔하지 않은가. 사기 아닌가. 그래서 죽어도 한국 도주가 아니라고 버텼다. 여러 차례 잡힌 탈북자들이 개산툰 국제 감옥에 많았는데 그들은 한 결 같이 한국 도주라고 하면 북한 보위부에 직접 넘겨져 정치범수용소에서 영원히 종신형을 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정신을 번쩍 차리고 죽어도 한국도주는 아니고 심양에 돈을 벌기 위해 가다가 잡혔다고 했다" "국제 감옥에서 격분한 게 있는데 중국 연변 공안 요원이 나를 개별적으로 만나서 계속 한국 기도였나 물어봤다. 죽어도 한국 기도는 아니라고 했는데 3일 동안 계속 끌어내 심양행 차표를 산 걸 보면 분명 한국 기도인데 왜 아니라 하느냐고 다그쳤다. 나는 끝까지 돈을 벌어 북한에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잡혀서 돌아가면 죽어야 하는데 어떡하냐 살려 달라 무릎 꿇고 손이야 발로야 빌었다. 하지만 그는 무조건 한국(행) 기도만 인정하라 하는 것이다. 네가 한국 기도를 인정해서 자기를 도와주면 살려서 두만강 통해 비밀리에 북한에 들어가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중국 보위부는 그렇게 사기꾼들이다. 그래도 한사코 버텼더니 4월 18일 나를 강제 북송시켰다" "(만약) 한국 기도였다고 밝힌다면 중국 감옥에서 1년 이상 있어야 한다고 강제북송을 경험한 동료 수감자들이 말해줬다. 내가 갇혀있던 곳의 맞은편에 한국 기도를 인정한 탈북자들이 수감돼 있었다. 많지는 않는데 한 10명 정도였다. 그들은 중국 공안에서 취급당한 자료까지 모두 북한 보위부에 넘겨져 종신형을 받는다고 했다. 끔찍하지 않은가. 그렇게 나도 한국 기도를 인정한 탈북자들이 장기간 수감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후에 북한 보위부에 가니 중국에서부터 한국 기도를 인정해서 북송된 탈북자 두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며칠 후면 정치범수용소로 간다고 했다. 얼마나 가슴 아프고 불쌍한가. 얼굴들이 아직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렇게 해서 (나도) 1주일 만에 북한으로 넘어갔다. 가자마자 북한 보위부들이 나와 온갖 험악한 욕설을 퍼붓고 발길질을 하며 나를 끌고 갔다. 온성 보위부에서 열흘 간 취급받은 것 같다. 온성 집결소에 넘어가서는 돌 나르기 등의 강제 노동을 했다. 하루 3끼 지극히 작은 양의 풀죽으로 연명하며 새벽부터 밤까지 돌 나르기, 모래 나르기, 풀 뜯기 등 죽을 고역을 다 치르다가 5월에 청진 집결소에 이감됐다. 그곳에서 이름, 나이, 주소를 모두 바꾸고 위조해서 남의 이름을 댔는데 신원이 확인이 안 돼 석달 간 갇혀있다가 마지막에 신원이 노출 되서 해당 안전부로 이감되던 도중 도주했다" "한편 남양에도 갔는데 북한 보위부 요원들이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며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중국에서 잘 쳐 먹고 왔느냐고 다그치며 소나 돼지보다도 더 못한 끔찍한 대접을 했다. 온성 보위부에서는 몸수색을 당했는데 속옷까지 벗기고 일체의 모든 돈을 가져갔다. 심지어 (탈북자들간에) 서로 음부에까지 손을 넣어서 뒤지게 했다. 인간 같지 않은 그런 행위까지 당했다. (탈북자들의) 자궁에 있는 돈까지 모두 빼앗고 그런 일까지 자행했다. 펌프 운동도 했는데 10번 20번 시키면 돈이 다 미끄러져 나오지 않는가. 너무 끔찍하다. 인권이라면 북한은 너무너무 생각도 할 수 없고 인권 보장이라는 것은 더구나 생각할 수 없다" 도주 당시의 정황을 들려달라 "그게 8월이었다. 강냉이가 한창 자랄 때인데 강냉이 밭 사이로 도주했다. 오후 2시쯤 풀을 싹 뜯어 몸에 뒤집어쓰고 벌레들에게 뜯기면서도 목숨이 더 중했기에 달렸다. 정말 생사가 오가는 판이었다. 밤 12시 쯤 달이 기운 다음에 겨우 일어나 두만강 가에 도착했는데 친구집에서 3일을 묵었다" "두만강을 건너기 전에 감동되는 일이 하나 있었다. 옛날에는 안전부나 보위부에 신고 사업, 체계가 잘 되 있었는데 (내가 도주했던) 그 때에는 백성들도 너무 굶고해서 김정일 정권에 불만이 많아 반발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 친구는 나를 선선히 숨겨주었다. 살아서 중국에 가서 편히 살라고 하며 마지막까지 나를 바래다주었다. 정말 눈물 나는 드라마였다고 눈물 나는 이별이었다. 또 언제 볼 날이 있겠는가. 돈이라도 조금 보내주고 싶은데 찾을 수도 없어 많이 찾아보려 노력했었다. 생사도 모른다. 한국으로 오면 얼마나 좋겠는가. 진짜 친구도 아들도 만나고 싶고 남편도 죽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모두가) 살아서 만났으면 좋겠다" 그 때 어떤 심정이었나? "지금 남한 땅에 와서 인권을 보장받고 자유를 누리며 진짜 사람 같은 생활을 해보지만 북한에서 당한 일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북한이 언제 인권을 받아들일지 모르기에 우리 북한 사람들이 너무 불쌍하고 가슴이 아프고 그렇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도 모르고 있고 응당히 자유를 받아야 될 것도 보장 못 받고 있는 것도 세상 소식을 모르다보니.. 정말 독재체제 속에서 진짜 억압적인 삶 속에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고 그것을 모르고 산다는 것도 너무 가슴 아프고.. 그 자신들이 탄압당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도 모른다. 그것이 너무도 아프고 분한 것이다. 세상에 나와 보니 세상은 인권이 이렇게 잘 돼 있고 자유 보장이 잘 돼 있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이 잘 돼 있는데 북한은 모르고 있는 것이 분하고 아프다. 그런 땅에서 내가 살았다는 것조차도 내가 너무나도 분했다" 본인의 최근 근황은 어떠한가? "이번에 워싱턴에 가서 북한자유주간 행사에 참석했는데 북한에서 미국인들은 승냥이 미제, 침략자 미제, 인디언을 멸족한 식인종 이렇게 배워온 탓인지 (나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 갔다. 나도 미국에 가면 모략과 음모에 걸려서 테러를 당하지 않겠는가, 또 탈북자들이 테러를 당하지 않겠느냐, 교회에 가서 저 살아 서울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도 했다(기자 주 - 안 씨는 여기서 비로소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워싱턴은 정말 평화적 분위기였고 미국의 많은 분들이 북한 인권주간을 진심으로 해주는 데에서 너무 큰 감동을 받았다. 수잔 숄티 여사도 진심으로 북한 인권을 위해서 마음을 써주시는 것이었다. 솔직히 너무 큰 감동 받았고 미국에 대해서 한걸음 더 화기애애하게 다가가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엄청난 감동이었다" 지금 가장 큰소망은? "첫째도 둘째도 아들을 찾고 싶은 큰 바램이다. 한시 바삐 내 가족을 찾고 내 아들을 찾고 싶다. 그것이 우리 북한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고 세계를 알리는데 앞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고 싶다. 하루빨리 북한의 민족 구원이 크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내가 구원 받은 것처럼 북한의 많은 고생하는 사람들이 나처럼 구원받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들을 찾는다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해 주고 싶은가? "아들을 찾게 되면 세계 인권과 자유에 대해 알려줄 것이고, 자기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워주고 싶다. 그런 기초적인 것도 모르고 살고 있을 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나의 모든 걸 바쳐서 대학 공부부터 시키고 꿈도 희망도 크게 심어줄 것이고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칠 것이다. 국제인권 운동에 아들을 바치겠다. 꿈을 크게 키워주고 싶다" "실지 북한 인권은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다. 우리는 북한에 직접 살아봤기 때문에 그 환경을 너무도 잘 알고 있고,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이) 인정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북한 인권이다. 그것을 위해 미국이 진심으로 투쟁한다는 것이 너무도 감사했고 너무 이해가 됐다. 감동이었다. 이런 일을 해주시는 자유북한방송에 대해서도 너무 감사 한다" -2008년 5월 9일 탈북자 안진희- 오주한 기자 ohjuha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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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더더욱 좋은일이 잇기를 바랍니다
하늘에서 날벼락이라도 떨어져라 백성들이 벼루고 있음을 똑똑히 알거라,
오천여년 역사국으로
자자손손 복락하더니
오늘이지경 웬말이냐
억사철사로 결박한 나를
동지들의 손으로 끊어버리고
자유북한만세 우뢰소리에
동해가 끓고 산이 동하리
정일이 정부는 말살될겁니다,
흔들리기시작하는 이는 꼭뽑아야 낳습니다,
우리북한민중들에게 가슴아픈 딱지만 남겨주고 아물어도 허물로 남는 지우지못할 상처자국을 안가진이 어느 누굽니까?..
썩은정치 주물러버리고 새정부가 인민들을 위해서 진정으로 일해줄사람은 과연 누구인지?..
우리오빠는 정치나한번 해보지,,뭘하구있는지?..맘속의소리지만,,,
소낙비가 온뒤 언연히 무지개가 비끼듯이 진희씨의 앞길에도 꼭 좋은 날이 올것입니다. 아들을 찾아 행복해 질 그날을 위해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