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박정희가 싫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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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정희를 좀 비판하는 쪽 부류지만.. (너무도 많은 사람이 그로 인해 목숨을 읽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옛초등학교다닐땐 그거 강제로 외게하고 무슨 조회만 있으면 국민의례중 꼭 이걸 읽고 지나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괴로왔던 시절이지만~~ 지금 나름대로 이 글을 읽노라면 명문이라는 생각은 합니다. 글 자체로만은 피를 뜨겁게 하기도 하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보수화되가는 슬픈 반증일수도 있고~~ 그를 싫어하는 분들도 한번 맘을 비우고 다시한번 읽어보시라고 글을 올립니다. 탈북자분들은 잘 모르시겠죠? 6,70년대 남한 사람들은 이걸 외웠답니다. 국민교육헌장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 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 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 상조의 전통을 이어 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 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 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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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통을 싫어하는 것은 자유지만 말입니다.
잘못 듣고 잘못 안 탓에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예요.
어느 나라 대통령이라도 박정희 만큼만 하면 아주 잘한 것입니다.
일부 좌파들의 박정희 비판과 욕이 바른 올바른 것인가요?
박정희를 비판하면 좌파인가?? 그리고 너느 누구라도 비판받을수 있고
욕도 먹을수 있는 문제인데..
박정희가 사람을 죽이진 않았죠..
김정일이가 사람을 죽였다는소리도 못들어 봤고......
저는 개인적으로 그가 10년은 더 통치했어야 했다고 봅니다. 오늘 신문을 보니 한국의 서열이 14위로 떨어졌더군요. 아쉬울뿐이지요.
분명, 박정희 대통령은, 한 리더로서는 능력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치에 관해서는 무능한 편이였다고 했었습니다.
정치와 거리가 멀었던, 군인이였고, 거기다가 정치에 관한 인맥이
거의 없었으니깐 의견을 종합하고, 조율하는 능력이 없어서
항상 마찰을 빚었습니다.
그래서, 반대하는 세력을 약화시키길 위해
자신을 따랐던 수하들(군인)을, 각 요직에 앉힌거고
수많은 사람들이 쥐도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그중 간첩이나 정치에 무관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모진 고문으로 죽거나, 아니면 폐인이 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군인이 왜 정치에 개입하면 안되는지는,
이미 로마의 역사가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또, 우리가 피부로 느껴보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집권해야한다니요? 이미 힘으로 정치하기엔
사람들이 똑똑해졌습니다. 힘으로 억누르면 오히려 혼란만
초래하는것을 아직도 모르십니까?
원래 박정희 전 대통령과 비슷한 배경에다가
추구해야 할 인물이 있었습니다.
-스틸리코-
스틸리코는 로마인과 반달족의 혼혈아로 태어났다. 그는 직업군인이 되어 383년에 페르시아 왕 샤푸르 3세에게 사절로 파견되었고 그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총애하는 조카딸 세레나와 결혼했다. 그는 385년경에 근위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393년 또는 그 전에 육군 총사령관이 되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출처:DAUM 백과사전-
스틸리코도, 박정희 전 대통령처럼 군 사령관이였고.
정치적인 배경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둘의 차이점이 생겼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주역을 하였고.
스틸리코는 조역(섭정)을 하는것으로 그쳤습니다.
사실상, 스틸리코의 군사력은 로마 제일이여서 사실 마음먹었으면,
군의 힘으로 얼마든지 당시 11세의 어린나이였던
호노리우스 서로마 황제를 죽이고 얼마든지 황제 자리에
오를수 있었습니다. 당시 서로마는 오래된 평화로 인한 나태했던 시기라,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찌들었고 황제가 어려서, 제데로 지도력을 발휘하기
어렸웠었습니다. 거기다가 스틸리코는 이미 몇차례 이민족들의 반란을
(대표적인 서고트족의 족장 알라라크)
물리쳐서,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던 때였습니다. 부족할게 없었는데도
조연으로 그쳤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답은, 군인이 정치판 무대에서 주역을 맡게되면,
필시 나라가 혼란스럽다는걸 예측했을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가 섭정으로서 했던일은,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민족들을 토벌하여
서로마 내부의 기강을 바로잡는데 힘썼습니다.
섭정하는 위치에 서있긴했었지만, 그가 했던건 외부의 문제를
막는데만 힘썼고 정치에 대한 문제는 일절,개입 조차 하지않았던것입니다.
비록 반대파의 모함과 황제의 질투로 인해 죽음을 당했지만,
국민들이 그를 지지했고, 그가 살아있을땐 정치적인 혼란기는 없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군의 힘으로 민주주의 정치에서 최고의 권한을 가진(비록 제한적이지만)
대통령직을 받긴 했지만, 정치라는것은 힘의 논리 뿐만 아니라
각종 의견들을 종합하고,조율하며,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선견지명,
국민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힘인 지도력과
그리고, 정책을 결정하는데 필요한 당력등 어느 하나 빠지면
안되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지도력은 있었으나, 나머지를 갖추지
못한채로, 정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명분없이 일으킨 쿠데타를 일으켰기에,
국민들의 지지도 받지 못했고,외교문제도 심각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대일 청구권,미국의 간섭강화)
그래서, 그들이 들고나온 카드가 반대세력을
좌파 빨갱이로 몰아서 때려잡는것이고,
언론통제와 더불어 헌법개정으로 집권연장
그리고, 후에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들에 의한 군인정치가 시작될
계기를 만들어진것입니다.
스틸리코처럼 조연으로, 당시 힘이 약했던 윤보선 내각에 힘을
실어줬으면, 다른 평가가 내려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http://blog.daum.net/ebolared/5983449?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ebolared%2F5983449
위에 박정희 전 대통령 내각의 문제점이 쓰인 글이 있습니다.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재단하는 것은 이성적이지도 못하다는 전제 하에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일단 박정희와 스틸리코가 다른 점은, 군인이 정치판 무대에서 주역을 맡게 되면 필시 나라가 혼란스럽다는 걸 예측했기 때문이 아니라, 첫째는 스틸리코가 반달족 출신이라는 태생적 약점 때문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님이 언급하신대로 스틸리코가 당시 로마 황실가와 혈연관계로 맺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스틸리코의 아내 세레나는 호노리우스 황제가 어머니를 일찍 여읜 탓에 그를 자신의 아들 에우케리우스와 함께 키웠지요. 스틸리코가 근위대장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당시 그가 황실 가족의 일원으로 맞아들여졌다는 증거입니다. 야만족 출신임에도 육군 총사령관이라는 파격적인 지위에 오른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당시 서로마가 오래된 평화로 나태했다고 했는데, 나태한 건 맞을지 모르나 평화는 뭘 모르는 소리를 하시는군요. 당시 로마는 3세기(일명 위기의 세기) 이후 황제가 포로로 잡히거나 야만족과의 싸움에서 전사할 정도로 혼란이 극에 달해 있을 때였습니다. 호노리우스의 아버지 때 어느 정도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외부 환경은 호의적이지 않을 때였습니다. 또한 황제를 죽이고 왕권을 쥘 수도 있다고 했는데, 물론 그럴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당시 밀라노(당시 서로마 제국의 수도 그후 라벤나로 잠시 천도)는 콘스탄티노플의 입김도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게다가 근대 국가도 아닌 고대 세계에서 왕권은 세습인데 그렇지 않아도 야만족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늘상 따라다니는 그가 왕권을 쥔다면 그 누가 용납할까요? 말 같은 소리를 하셔야지요. 비교할 걸 비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호노리우스는 그의 사위이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스틸리코가 정치에 대한 문제는 일절 개입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것 역시 뭘 모르시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스틸리코가 매사에 공평무사한 지도자였다는 데에 있어 저 역시 부인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황제의 연설문까지 직접 검토하고 틀린 것은 고쳐 쓸 정도로 정치의 모든 문제를 직접 챙겼던 인물입니다. 고트족의 침입은 그럭저럭 막았지만 정치적 안정은 거리가 멀었지요. 당시 로마의 상황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때였으니까요. 서고트족은 막을 수 있었지만 동고트족이나 다른 야만족들은 울드즈가 지휘하는 훈족 원병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막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황실의 암투 역시 음험했습니다.
명분 없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했는데, 제가 쿠데타를 찬성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당시 그것은 역사적 결단이었다고 봅니다. 그 이전 상황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일단 4.19가 일어났던 1960년 상황을 봅시다. 그해 6월 21일 종로구 세종로 중앙청(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 광장에서는 약 6,000여 명의 경찰들이 모여 사상 첫 데모를 했습니다. 이건 심각한 상황 아닙니까? 지금도 없는 일일 겁니다. 군대나 경찰이 데모를 하면 그 나라는 끝장나는 겁니다. 그것이 곧 쿠데타나 마찬가지니까요.
1960년 8월 23일 ‘제2공화국’이 출범했을 때 민주당 정권이 군과 관련하여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감군 문제였습니다. 새 정부 출범에 즈음하여 장면 총리는 시정 방침을 표명하면서 한국군의 10만 감군을 거론하였습니다다. 국방비 부담의 과중이 감군을 불가피하게 한다는 논리였지만 당시 북과 대치한 상황에서 이는 안보에 중대한 공백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요즘처럼 말로만 공갈까는 것이 아니라 당시 북한은 실제 무력 침략도 수시로 감행할 때였습니다. 신중하지 못한 처사였지요. 그리고 그해는 베트남 전쟁이 시작됐던 해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베트남은 결단력 없이 좌파들의 통일전선전술에 말려 안보를 등한시하다 베트콩에 의해 적화통일 당하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당시 혁신계는 통일 이슈 선점을 전략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마침 북한 김일성이 1960년 8월 연방제를 제안하면서 통일논쟁이 불붙었습니다. 기존 체제를 일단 인정하고 민족대표자회의를 열자는 이 제안은 한국 측 입장인 ‘유엔 감시하의 남북 총선거’와 확연하게 달랐습니다. 또 10월에는 미국 맨스필드 상원의원이 “한국도 오스트리아처럼 중립국으로 통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혁신계는 이들을 수용한 중립화통일론으로 여론몰이에 나섰고요.
서울대를 시작으로 곳곳에서 ‘민족통일학생연맹(민통련)’이 결성됐습니다. 이들은 “통일을 기피하는 기성 정치인들은 물러나라”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낭만적 이상주의는 위험해 보였습니다. 1961년 5월 13일 열린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촉진궐기대회’는 절정으로 치달았습니다. 그야말로 첨예한 이념 갈등의 장이었지요. 김일성은 이런 남한의 통일 열기를 적극 환영하고 나섰습니다. 남북 학생회담은 물론 남북 경제교류, 정부 간 접촉도 제안하는 등 정치적 공세를 펼쳤고 남한 내의 여러 인사들과 접촉을 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이러할 때에 쿠데타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상황은 어땠나요?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정치 지도자는 각종 의견들을 종합하고, 조율하며,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선견지명을 가지고 정책을 결정해야 하는데 당시 장면 총리는 수녀원에 도망가 있었습니다. 내각책임제하에서 국정을 책임진 국무총리의 ‘행방불명’은 어처구니없는 것이었습니다. 학생과 시민들이 피 흘려 세운 민주정부가 아니었던가요? 국민에 대한 배신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도 부인하기 어려울 겁니다. 이런 사람이 통치했을 대한민국이 어땠을 거라고 보시는지요. 물론 인격은 훌륭한 분이었다 하더라도 통치자로서의 자격은 미달이었다고 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요. 너무 졸려서 쓸 수가 없군요. 쿨쿨~~ 전 원래 장문의 글은 잘 쓰지 않는 편인데 님께서 친절하게 글을 올려주셔서 답장을 쓰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곧 대일 청구권과 미국의 간섭강화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작정 좌파방송이 보여줬던 이념의 세례와 편식을 피하고 전체적으로 그 시대 상황에 맞게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저의 글의 요지입니다.
제 형편없는 글솜씨를 끝까지 인내하시면서,
친절하게 답변해주신거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싶습니다.
아, 근,현대시대의 정치인을 말해달라고 하신거였네요.
다음번에는 좀더, 확인해보고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이런사람이다'라고 평가하기엔 너무 복잡한 사람이군요.
그러면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명분 없는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했는데, 물론 쿠데타가 좋은 건 아니지요. 교과서 식으로 말해 합법적 권력은 국민의 동의와 지지로부터 나오는 것이니까요. - 막스 베버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보다 잘살고 민주화된 나라도 쿠데타는 일반적인 현상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8년도 안 된 상황으로 정치적 수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경제적으로 세계 최빈국이었습니다. 베트남이나 북한도 한국보다 잘 사는 정도였으니까요. 필리핀 같은 경우는 한국에 비하면 선진국 수준이었고요. 참고로 저는 지금 42살인데 강원도 춘천 출신입니다. 춘천 시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동네인데도 제가 초등학교 때까지 전기가 없어 호롱불을 키고 살았습니다. 버스는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들어왔습니다. 믿지 못하시겠지만 이건 사실입니다. 제가 실제 경험한 것이니까요. 저의 아버지는 우마차로 벽돌을 나르시고 어머니는 두부 장사를 하시면서 저희를 키웠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은 이러한 아버님과 어머님의 일손을 돕고 따라다니는 시절이었습니다. 필리핀에서 오신 수녀님이 주시는 사탕과 빵을 얻어먹으며 성당에 나가곤 했었습니다.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절망적인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공약이 이런 사정을 보여줍니다.
박정희 정부가 출범했던 1960년대 초기 당시 정부는 3가지 정도의 당면 과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미국과 국민의 지지를 획득해 정권의 안정을 기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호시탐탐 남침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북한의 침략을 방지하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끼니조차도 해결하기 어려웠던 서민들의 생활과 국가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3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획기적인 정책이 필요했지요.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외교와 국민의 지지를 받는데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쿠데타 직후 다른 나라에서 정적을 죽이는 것이 당연했던 데 반해 박정희 정권에선 죽이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저 돈 주고 미국으로 보내거나 그 직책에서 해임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님의 주장과는 달리, 외교적 문제를 해결하고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기에 그는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밝혀둡니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정치적 이권에서 밀린다고 느낀 일부 정객들이거나 순수한 낭만적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일 뿐이지요. 그들의 주장이 일방적으로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시대는 전 세계적으로 그것이 국민적 요망이 아닐 때였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선 기회가 있을 때 더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5.16 후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의장은 한일회담을 서둘렀습니다. 산업을 일으키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은 ‘청구권’ 명목으로 일본에서 받아낼 요량이었던 것이지요. 결국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오히라를 만나 3시간 반 동안의 실랑이 끝에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작성함으로써 한일회담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타결지었습니다. 참고로 오히라는 70년대 말 일본의 수상을 2차례 연임하는 인물입니다. 물론 ‘청구권’ 문구는 보이지 않았고 금액은 6억 달러였지만 한국 근대화의 기반을 닦는데 정말 돈이 필요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 때 빼앗겼던 국보급 유물들을 어느 정도 찾아올 수 있었지요. 가난에 허덕이는 국민들의 등을 따시게 해주고 배부르게 해주는 것이 지상과제인 상황에서 자존심 대결로만 나갈 순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입장에선 저도 불만이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봅니다. 당시로서 완벽한 타결은 힘든 상황이지요. 인간은 어차피 결함이 있는 존재들이니까요.
존슨 미국 대통령과 만난 박정희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고 미국 CIA리포트는 적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유엔군을 철수시킨다는 신호가 워싱턴에서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이런 얘기는 베트남에 대한 협조를 매우 어렵게 한다.”
이런 줄다리기를 거쳐 마침내 1965년 5월 19일엔 한미 공동성명을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성명서엔 군원이관의 재검토를 비롯해 북한 재침 시 미국의 즉각적인 개입과 군사지원, 차관 제공과 대미수출 확대, KIST 설치 지원 등 한국이 요구해온 조건들이 대부분 포함됐습니다.
월남 파병에 관해 미국과 협상에 나선 이동원 외무부 장관은 브라운 대사에게 파병의 조건을 제시하면서 이를 문서화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얻어낸 것이 바로 ‘브라운 각서(Brown Memorandum)’입니다. 브라운 주한 미 대사가 미국 정부를 대표해 서명한 이 각서에서 미국은 한국군 현대화 지원과 추가 파병에 따르는 경비 부담. 파월 장병의 처우개선을 보장했습니다. 또 파월기간 동안 군원이관 중단을 거듭 다짐하는 한편 주월 한국군에 필요한 장비, 용역, 보급품 일체를 한국에서 구매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선 파월장병에게 지급할 군복과 전투식량 같은 군수품들을 생산하게 되었지요. 김치 통조림 등이 들어간 한국식 전투식량 케이레이션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군수물자 수출을 비롯한 각종 이권 산업에 참여함으로써 한국의 수출과 무역에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64년 640만 불에 불과했던 수출은 2년 만에 2,400만 불로 증가했습니다.
파병을 단행함으로써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한 미국의 전폭적인 원조를 통해 경제발전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1967년 대전 유세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전투부대 베트남 파병과 관련해 “안 보내려면 안 보낼 수 있었지만 그러면 미 국방부에서 한국에 있는 미군을 빼서 베트남으로 이동시켰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어차피 그렇게 될 바에 국민의 경제적 수준을 높이고 대미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것이 실용적 판단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오늘은 일단 여기서 마무리 하지요. 다른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로 한일회담과 미국과의 막후 협상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세한 많은 부분이 있으나 생략했습니다. 다음에 더 보충을 하기로 하겠습니다. 루터님과 글로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어 기쁘고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럼 항상 행운이 함께 하시기를...
아...그리고 호반의 도시 춘천...
하나원에 있을때 홈스테이로 가보았었는데...
그 유명한 소양강댐도 가보고,
닭갈비하고 막국수는 정말 맛있었던 기억이...
좋은 말씀들 잘 부탁드립니다.
춘천~~ 전 1년에 3번 정도는 가봅니다. 아직도 그곳에 제 친구들과 그리운 이들이 많이 살고 있으니까요.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왔거든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이후 많이 못 가게 됐지만 저에겐 늘 정겨운 곳이랍니다. 하나원에서 홈스테이도 시켜주는가 보네요? 저 역시 님의 글을 잘 읽고 있는 중입니다. 자주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아내와 함께 외출을 해야할 것 같네요 ^^
작년 여론조사에선 박정희대통령 존경하는 사람이
70%넘게 나온걸로 압니다.
전두환이 사람을 많이 죽인거 아닌가요?
박정희대통령은 독재로 갈뻔한것. 빼고는 그닥 흠잡을건 없는것
같습니다.
전 존경합니다
그런데 우리 루터님께선 어딜 가셨나? ^^
구체적인 사례를 적절히 들어가시면서 설명해주셔서 편하게 읽었읍니다.
여기서 제가 공부할때,세계 제2차 대전후 독립한 나라들의 경제개발이론에 대해 공부하는 경제학전공 학생과 대화를 많이 가졌었는데,자본도 기술도 없는 후진국일 수록,지도자의 역량과 판단, 정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돼었지요.
그런가운데,고 박정희대통령을 싫어하는 사람들... '박정희 아니라도 한국이 지금과 같은 경제발전이 가능했다'라는 식으로 우기는 정치인들,학자들을 저는 좀 한심하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박정희가 집권할때 그들은 뭘 하고 있었나를 살펴보면 더욱 그런생각이 굳어지고요.
물론,박정희 혼자서 한국경제개발 다했다는 건 아닙니다.
국민들 절대 다수가 그의 정책을 믿어주고,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이지요.그래서,박정희대통령 집권기간의 성과들이 박정희 개인만의 업적일 수 없구요.
그렇지만,박정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지금현재 역대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국민들의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고루하고 무지한 일부 국민들의 생각'쯤으로 폄회할려고 하는 것을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씁쓸한 일이지요.
노란우산님 말씀처럼 진보주의자들은 '만약 박정희가 아니더라도 ~'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역사에 '만약에~'라는 가정은 없습니다. 그저 그 상황과 결과로만 판단해야지요. 다만, 이 논리는 그 반대편으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독재'와 '민주화의 후퇴'는 분명한 박 전 대통령의 '과'입니다.
박 전 대통령만큼 '공'과 '과'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도 드물죠. 저는 그것이 그대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어떤 한 면 만으로 다른 것을 덮으려는 건 어리석죠.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많은 연구와 올바른 평가가 필요한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서울에 가면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도 참배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병신들 ..
하여간 눈앞에 것만 보이고 멀리 볼 줄을 몰라
북한 괴뢰집단으로 부터 오늘의 이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핵무기는 물론 미사일 개발도 북한을 앞질러 김정일이의 공갈 협박에서 자유로웠을 것이며 벌써 남북통일이 되어 자유대한민국이 세계 열강 반열에 당당히 오르고 국민소득도 선진국 수준에 올라선지 오래였을 것이다.
남한의 김대중 좌빨 반역집단은 그 씨를 말려 지구상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여 사회 안정과 부국강병을 동시에 이루었을 것이다.
자유대한민국 만세 !!
조국을 핵과 땅굴침투 좌익세력들의 위협으로부터 똘똘 뭉쳐 지켜내야 합니다. - 멸공!!
박통께서 도요다 놈을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 떨가 주셨더라면 지금 대한민국은 이렇지 않을 것이다.
박정희가 아니었다면 한강의 기적으로 일컬어지는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이 있기 어려웠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누가 대통령이었다 하더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박정희의 독재에 더 큰 비중을 두고 비판한다.
일제에서 해방된 지 얼마 안 된데다 625까지 거치고 난 대한민국은 사람들밖에는 아무 것도 없던 시절이었다. 기본적인 사회의 인프라가 구축된 상황이라면 민주주의나 인권 같은 것도 챙겨가면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기댈 데가 아무 곳도 없던 그때 박정희의 선택은 대기업과 중공업 위주의 경제성장 이었다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주면 얼마 안 되는 자본을 한곳으로 집중시켜 오늘날의 삼성 현대 포항제철 같은 기업을 육성해낸 것이다.
대다수의 국민은 타이밍이란 잠 안 오는 약까지 먹어가면서 재봉틀 돌리고 납땜질 하면서도 파이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 노력했었다. 언젠가 어느 정도 크기가 커진 후엔 노력한 만큼 나눠 받기를 기대하면서.
시간은 흘렀고 박대통령이 서거한지도 30년 가까이 지났다. 세계에서 12, 13등정도 할 만큼 대한민국의 경제규모도 크게 늘어났다.
뭐가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 땅에서는 아직도 파이를 키우는데 중점을 둘 것인가 나누는데 신경 쓸 것인가를 가지고 극한 대립중이다. 한나라당은 키우자는 쪽이고 민노당이나 민주당은 나누자는 쪽인 것 같다.
김대중 노무현이 정권을 잡았던 2007년까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들 말한다. 그리고 대다수 국민은 지난 대선에서 한나라당을 찍으면서 파이를 더 키워야한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부자가 잘살아야 돈을 풀 것이고 그게 돌고 돌아 서민에게까지 도달한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종부세 같은 세금도 정부에서 많이 돌려주고 있다.
그걸로는 많이 부족한지 서민들의 삶은 나아지는 것 같지 않다. 어떤 뉴스를 보니 한국의 백만장자 증가비율이 2006년엔 1등이었고 2008년엔 4등을 했었다.
그리고 2008년 이건희 삼성회장의 재산은 80%정도 늘었고 정몽구 현대회장은 20%정도 늘었다는 기사를 본적도 있다.
부자의 수도 재산규모도 늘어났다는 소식일 것이다. 헌데 다른 뉴스에선 중산층은 무너지고 서민은 늘어간다고 하니 이게 무슨 조화인지.
먹고 사는 게 어려워 경제대통령을 뽑았는데 후보시절부터 이명박이 줄기차게 주장하던 것이 파이 키우기 대기업 몰아주기 이런 것 아닌가.
국민들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TV 신문 인터넷에 뻔히 다 나오는 건데 속았을 리도 없고. 결국 원하는 게 서민들 고혈을 짜서 권력 있고 재력 있는 사람들 몰아주기 하자는 거였나.
나라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국민이고 그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서민들이 하자는 대로 이명박 대통령은 충실히 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는 아무리 이명박이 대단해도 박정희만 할 수는 없으니 역시 대한민국에는 박정희가 최고 대통령일수밖에...
첫째, 걸핏하면 군부독재 지껄이며 박정희를 증오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도 북괴의 선군정치를 군사독재라고 비난한 적 없다.
둘째, 걸핏하면 이승만을 폄하하고 김구를 숭배한다. 그러면서 덤으로 여운형을 비롯한 좌파를 숭상한다. 이는 김일성-김정일 숭배하기엔 낯간지러워서 임시방편으로 김구를 숭배하는 것이다.
셋째, 걸핏하면 친일 들먹이면서도 개돼중을 비롯한 좌빨들의 친일에는 절대로 침묵한다. 독도 폭파를 제기한 일본의 주장에 분연히 반대한 박정희를 오히려 독도 폭파설을 주장한 것으로 거짓소문을 퍼뜨리듯, 남들이 관심 갖지 않은 희미한 야사를 거짓으로 왜곡하는데서 그들의 입지를 쌓아온 것이다.
건국 60년이 다된 지금도 걸핏하면 "독립" 운운하는 것만 봐도, 이들이 분리 독립을 원하지 않는 이상 이러한 행위는 변-태적인 반역으로 보아 마땅하다. 그들이 말하는 자주독립은 북괴에 의한 공산화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 달성될 수 없는 말장난인 것이다.
이런 비정상 똘아이에게 왜 언론들이 나서서 기사를 만들어 주고 키워주는 지 그 이유를 모르겠군요...
어지간이 할 일 없는 언론이 바로 이 나라 언론이 아닐런지...
하긴 박정희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으니 ㅋㅋ
세계 1위의 조선업 철강업 자동차 첨단산업 등등
박정희가 아니었으면 꿈도 못 꿀 그야말로 기적 같은 업적들이
한국을 대표하고 아예 한국국적을 포기하고 이민가지 않는 이상
박정희의 그늘을 벗어날 길이 없지
전국토의 고속도로 항만 전기 수도 가스
전부 박정희의 손을 거쳐간것이고
식목일 만들어 국토를 푸르게
푸른 산 아름다운 국토로 가꾼 것도 박정희
국토를 가로지르는 힘차게
흐르는 강물에 멋지게 놓인 다리들도 박정희가 놔준 것들
박정희 덕분에 지들 목구녕에 쌀 쳐넣은 것도 모르는 좌빨들
그래도 박정희의 영향력이 불가항력에 가까울 정도로 강하고
아직도 살아 숨 쉬는 박정희를 피할 길이 없음을 알긴 아네
이미 흙으로 돌아가신 박정희를 죽인다고 거품 무는 꼴을 보니 푸헐헐
또 한가지 박통의 경제발전 부분입니다
다들 결과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그러나 제가 아는 박정희는 정말 무서우리 만큼 주도면밀한 지도자입니다. 첫째 박정희는 경제발전을 위해 경제개발계획을 만들면서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이 교육계혁이었습니다. 즉 기술분야에 중점을 두고 공고, 상고, 농고를 집중적으로 만들면서 우수학생들게 기술을 익히도록 하였고, 대학의 경우도 공대, 상대 위주로 개편하게 됩니다.
또한 각종 문학 등 예술 관련 대회를 획기적으로 늘리며 국민들의 수준을 올리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둘째 당시 외국에 있던 학자를 불러들이며 과학연구단지를 조성합니다. 물론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면서 약 5000여개의 과학연구소를 없애고 자기수하들이 봉급받을 수 있는 인문연구소로 개편되어 우리의 과학수준이 후퇴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것이 세종연구소입니다. 그래서 연구소 숫자는 비슷하지만 실제 과학연구기관은 대폭 축소되었습니다. 하여튼 박통의 인재 양성정책에 의해 제2의 도약을 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습니다.
셋째 바로 새마을운동과 4H운동을 전개하면서 국민개혁운동을 주도하여 모든국민들이 국가정책을 따를 수 있는 기틀과 국민들이 사회의 주도세력이 될 수 있는 단결심과 의욕을 가지도록 하였습니다.
넷째 돈 한푼없는 이나라, 당시 백만불 수출을 목표로 잡을 때 김대중, 김영삼 그리고 당시 대학교수들 조차도 어처구니 없는 목표다. 우리나라에 뭐가 있어서 백만불을 수출하냐고 비웃고, 반대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당시 정부에서 가발산업 등 가내공업 위주의 정책을 주도하면서 고속도로를 만들고, 포항제철 등을 만들면서 중화학 공업으로 방향을 틀게됩니다, 물론 초창기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조롱거리가 되면서 말이죠.
즉 경제추진에 대한 그의 안목과 열정이 이나라를 만든 겁니다.
그리고 안산과 창원 등 공업단지 및 신도시를 처음으로 도입하면서 살기좋고 아름다운 나라로 꾸며 나가려다가 핵개발과 관련하여 미국의 사주를 받은 부하의 저격에 사망하게 되지만 진정한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다고 판단됩니다.
또한 군사력발전에 가장 많은 공을 세웁니다
현재 우리군이 사용하고 있는 무기 대부분이 박통때 설계된 것들입니다
지금쓰고 있는 주력소총들의 시재품을 79년도에 풍산에서 제가 직접 보았으니까요. 그당시 50MD, 자주포, 발칸 등이 어떻게 도입되었습니다.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미국이 거절하자 월남에서 몰래 들여와 국내에서 해체하여 설계도면을 만들었고 미국 정보부에서 이사실을 알고는 자체 생산 안한다는 조건으로 조립형식으로 우리나라에 제공되기 시작한 것 아닙니까.
즉 박통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 완전 無에서 안보, 교육, 국민의식, 경제, 도시개발 등 모든 분야를 고르게 발전시킨 훌륭한 지도자였다고 생각합니다.
원래는 루터님과 토론을 했었는데 어디로 가셨는지 행방불명이시네요. ㅎㅎ 그 사이 많은 분들이 댓글을 달아놓으셨군요. 예상보단 그래도 다수의 대한민국 시민들께서 박통의 업적을 무시하고 깔아뭉개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보고 다소 안심은 되는군요. 루터님이 등장하지 않는 관계로 루터님에 제기한 문제에 맞춰 월남전 파병 문제를 마무리 지을까 합니다.
전투부대 파병은 박 대통령의 ‘국방과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기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실제로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기간에 파병 국군장병의 해외근무 수당은 총 2억3,556만 달러나 됐습니다. 이 중 82.8%에 달하는 1억9,511만 달러가 국내로 송금됐지요. 한국 기업들은 군수물자 납품과 용역사업을 통해 베트남전 특수(特需)를 톡톡히 누렸습니다. 미국의 군사원조와 국군의 외화 송금에 힘입어 당시 내수산업과 수출은 호황을 맛봤습니다. 전투병 파병 직전인 1964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03달러에 불과했지만 한국군 철수가 끝난 1974년엔 5배가 넘는 541달러였습니다.
베트남전 파병을 바라보는 눈은 지금도 다양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에 이들의 희생이 밑거름이 됐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런 기술도 가지고 있지 않고 스스로의 시장개척 능력이 없었던 우리 기업들이 미국 국무성의 토목국으로부터 기술을 이전 받은 것 역시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에 직접 베트남 협상을 통해 얻어낸 결과입니다. 군사 토목기술을 전수받은 우리 현대건설이 중동으로 바로 진출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베트남 협상을 통한 기술이전으로 우리 기술 자본이 확대된 결과였던 것입니다.
오늘은 너무 늦은 관계로 여기서 마치고 다음엔 박정희 시대 경제발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루터님이 소개한 사이트에는 분노에 차 객관성을 상실, 박정희 시대를 매도하는 글이 쓰여져 있더군요. 그런 글을 읽다보면 피 끓는 정열을 간직한 많은 젊은 학생들은 박정희를 무뢰한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더군요. 이런 것을 통해 젊은 학생들이 소위 좌파들의 견해에 동조하는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정상적 지식인이라면 쓰레기 수준이고 참고할 만한 대목이 있어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연 10$ 안팎의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모두 박정희의 공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 값싼 양질의 노동력이 있었고, 집권 초창기 방위비 부담이 크지 않았으며, 1960~80년대에 걸쳐 미국이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린 데 따라 반사이익을 볼 수 있었다는 객관적 여건을 감안해야 한다.’는 대목입니다.
다음 시간엔 이 부분이 왜 문제가 있고 틀렸는지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부끄럼을 잘 타는 그는 면전에서 누가 칭찬 하면 쑥스러워 하고 육영수와 선을 보러 갈 때는 가슴이 떨려 소주를 마시고 간 사람 이었지만, 1961년 5월16일 새벽, 한강 다리 위에서 혁명군 선발대를 저지하는 헌병들의 집중 사격으로 총알이 날아올 때에는 태연했으며, 8.15, 경축사 낭독중 문세광의 총탄에 육영수 여사가 피격되어도 연설을 계속 할 때, 그는 비정하리 만큼 냉정했음은 인간 박정희를 보는 좋은 예일 것이다.
그리고 여순 반란사건 이후 군내 남로당 조직 수사에 연루되어 체포, 전기 고문을 당한 뒤, 생사 권을 쥐고 있던 수사 책임자, 백선엽 정보국장에게 구원을 요청하던 그의 모습은 전혀 비굴하지 않고 의연해, '도와 드리지요.'라는 말이 무심코 나오더라고 백선엽 장군이 회고했다.
'인격'이 그를 살린 것이다.
신뢰하던 로마군 브루투스에게 배신당한 카이사르는 '믿었던 너마저'....., 하고 죽었고, 철석같이 믿었던 경호실장 차지철은 비열하게 화장실로 도망가 '살려 달라.' 빌었지만, 신뢰하던 김재규에게 배신당한 박정희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딱 이 말 뿐이었다.
'난 괜찮아.'
인간은 가장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언행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과 인품을 확연히 알 수가 있다.
키 165, 64kg, 작은 거인, 그는 분명 대인(大人) 이였다.
가식과 진실은 엄연히 다르지요.
진정한 사랑이 없이는 그렇게 훌륭한 업적을 이룰 수가 없지요.
소찬에 꽁보리밥을 먹으며 오로지 나라사랑
그분의 마음엔 그 생각 뿐이셨습니다.
자식들 앞가림 하나 못하시고
사심 없이 하셨기에 우리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주셨건만
그 뒤로 하나같이 다 그 모양 그 꼴들만 나와서
다 들어먹어 버리고
버는 놈 따로 있고 쓰는 놈 따로 있다더니
국민들이 올바른 길을 걸어가는 지침을 만들어 준 것이 가장 큰 성공한 대통령이라 생각이 든다.
경제성장? 나라가 튼튼하지 못하고 경제성장만 하면 뭐하나. 라면 값 오른다고 방송하면 사재기 하는 나라... 그게 애국인가?
잘 사는 방법이 땅 투기고 아파트 투기고 자기들 자식만 좋은 학교 가는 게 잘사는 방법인가?
물론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서울하늘에 핵폭탄 하나 터지면 바로 끝이다.
그래서 도망갈 거라고? 미국으로?
미국이 대한민국 보살펴줄 거라고 믿나?
빼돌린 돈으로 잘 살 수 있다고?
대한민국은 그런 정치인들을 골라내야 한다. 그게 선거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런 사람을 공천해 준 사람들, 쓴 맛을 보아야 한다.
<박정희는 위선자야!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는 경제개발계획도 사실은 장면 정부의 것이었다고.>
비록 연배는 10여년의 차가 있었으나 나 또한 박정희에 대해서는 나름의 또렷한 인식이 있었기에 바둑친구이기도 했던 그분에게 그 일단을 펼쳐보려 했던가 보다.
<그런가요? 아마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말씀하시나 봅니다만 5.16 당시 그 계획서가 어디 있었는지 혹시 아십니까?>
<..........>
2공화국 당시 수립된 그 계획안이 당시 부흥부 책상 서랍에서 잠자고 있었단 사실은 아마도 모르셨나 보다.
이어지던 대화가 석유파동 당시 범국민적 에너지 절약운동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청와대 집무실의 난방이 금지되고 있었던 점을 지적하자 바로 반박해 오신다.
<그거 다 국민들을 의식한 쇼라고.>
그에 대한 재반박으로 10.26 이후 청와대의 집무실과 내실의 화장실 변기 속에서 발견된 한장씩의 벽돌을 언급하였다. 또 추가하여 10.26 당일 그가 메고 있던 다 낡은 혁대로 인해 넘버원임이 쉽게 확인되지 않았단 점을 지적하였다.
최소한 그것들만은 박정희가 타인을 의식하여 행동한 증거들이 아니지 않으냐는 취지에서였다.
그러자 곧바로 입을 여신다.
<그러니까 박정희가 몰지각한 거지. 소비가 생산을 촉진함은 경제의 기본인데 대통령 자리에 있으면 거기에 걸맞는 소비행태를 보였어야지.>
<.......>
그 순간부터는 내가 입을 닫았다.
아무리 현대가 다원화 시대라 하나 억지논리까지 들어줘야 할 시간도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어 보여서였다.
많은 사람들은 2공화국이 의원내각제였단 점을 들어 민주정치가 마악 꽃피고 있었다고 평가하곤 한다. 그러면서 장면은 5.16의 희생자로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수년 전 어느 대통령은 그에게 사후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었고.
우선은 제 용어의 일반적 정의부터 정리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선 민주정치란 무엇일까?
당시 한국이 처했던 상황을 감안할 때 그때 정치의 최우선 지향점은 무엇여야 했을까?
혹자는 국회의원들 상호간의 자유로운 토론과 협의가 민주정치의 시작 아니냐고 반박할 수도 있으리라.
국리민복 위한 실천은 없고 의견만 난무한 것이 민주정치였을까?
하지만 진정 민주를 들먹이려면 당시 대다수 국민들이 처했던 굶주림의 해결이 정치의 최우선 과제여야 하지 않았을까?
당시 실질적 국가수반였던 장면 총리가 5.16 당일 보여준 행동은 훈장감일까 징역감일까?
역사는 가정법 없이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려하여 냉철히 판단함이 합리적이리라.
당시라면 6.25가 끝난지 불과 얼마 후였고, 휴전선에선 남북한간 국지적 무력충돌이 심심치 않게 발생되고 있었을 때다. 쌍방 지도부의 합의에 의거하여 한반도에서 형식적이나마 남북한간 무력충돌이 멈춘 것은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72년 7월 4일이니까.
5.16 당일 국가수반 장면은 외침으로 인한 국체의 위기가 아닌 내란으로 인한 정체의 위기시에 국가 영도를 포기한 채 수녀원으로 잠적하였었다.
그는 과연 훈장감인가?
국민들은 그날 발생한 것이 북한의 남침이 아닌 5.16 쿠테타였음을 위안 삼아야 하나.
임진왜란 당시 왜구에 의해 부산포가 함락되자 당시 조정대신들은 가솔들을 미리 개성방향에 옮겨둔 채 등청하고 퇴청하던 슬픈 이야기가 남아 있긴 하다.
6.25 당시 부산항에 배를 띄워두고 거기에서 임시정부 청사로 출퇴근하던 당시 고위층들의 이야기도 슬프기만 하다.
지금은 역사 속의 슬픈 지도층과는 크게 바뀌었다고 말들을 하리라.
과연 국민들은 그 말을 믿어줄 것인가?
무엇이 민주정치인지를 다시금 생각할 일이다.
지금껏 민주를 들먹이는 자 민주를 희롱한 경우가 많았음이다.
민주의 이름으로 스러져 간 수많은 이들의 고귀한 피와 땀의 참 가치를 인식한다면 민주란 단어를 함부로 들먹이면 곤란하리라.
그렇게 좌파들도 많고 자신을 친일파라고 몰아 부치는 사람이 있어도 그는 소신껏 자신의 의지를 밀고 나갔고 결국 그는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에 어마어마한 공을 세웠습니다.
그것을 보면 박정희는 멀리 내다 볼줄 아는 대단한 사람인 것 같네요.
전 그 시절은 잘 모르지만 어른들 말씀을 들어면 절로 고개가 숙연해집니다.
과연 이토록 훌륭한 분이 이 땅에 존재 햇을까 하는 것.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정치인들 박대통령의 그 위대한 업적과 나라사랑을 배웠으면 합니다...
현실(現實)은 이론(理論)대로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변혁(變革)의 시기일수록, 예측은 더 크게 빗겨간다. 60~70년대 근대화 격변기에 비견될 상황이 김정일 이후 북한의 미래다. 절대다수 소위 북한학자들은 「북한붕괴」나 「자유통일」 가능성 자체를 언급하기 꺼려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金지사가 30년 지나 『다 틀렸다』 고백하듯, 횡행하는 소위 전문가들의 북한예측도 머지않아 휴지통에 버려질지 모른다. 북한동포가 죽어가는 현실(現實), 북한체제가 망해가는 현실(現實)과 동떨어진 썩은 논리, 죽은 분석이 너무 많은 탓이다. 아래는 이날 金지사의 강연 중 관련 부분을 정리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저력 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보릿고개 넘어 소달구지에서 마이카시대로 진입했다. 고3때 교과서에 정권연장 위한 개헌은 잘 못된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때 마침 박정희 대통령 3선 개헌이 일어났는데,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반대 데모했다가 무기정학을 당했다.
대학 가서도 박정희 대통령에 줄곧 반대했다. 서울 상대 재학 중에 박대통령이 「마이카 시대」를 말했다. 상대 교수들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이유는 이랬다.
「자동차 산업을 할 기술(技術)이 없고, 시장(市場)이 없고, 자본(資本)이 없다. 만들어도 안 팔릴 것이다... 특히 자동차는 생명을 싣고 달리는 문명의 이기(利器)이자, 자칫하면 흉기도 될 수 있다. 이런 자동차를 메이드인 코리아로 만들면 누가 사겠는가? 더구나 영국도 자동차 산업이 기울어서 미국, 일본에 밀리고 있다.」
대한민국 교수, 선생님들이 다 그렇게 말했다. 「마이카 시대니 뭐니 독재의 연장수단으로 국민을 혹하게 만드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정책」이라고.
교수, 선생님들 말씀 들어보니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열심히 데모했다. 내 노라 하는 학자들이 하나같이 다 안 된다고 했는데 이것이 성공할 줄 알았나? 며칠 전에도 기아자동차 공장에 갔는데 그 생각이 났다.
당시는 자동차(自動車) 산업도 반대! 조선(造船)도 반대! 방위산업체(防衛産業體)도 반대! 고속도로(高速道路)도 반대! 주류 모두가 반대했다. 독재 연장수단이다, 국민을 속이지 말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그 경제학자들 했던 말이 사실은 다 틀린 말이었다.》
나의 감정이 어떻고 나의 기분이 어떠한가하고 사실과 실재가 어떠한 것 하고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할 줄 알고 고개 숙일 줄 알아야 진정한 인간된 모습 아니겠나.. 그것이 부끄러울 것이 뭐가 있겠냐고.. 도리어 자랑스럽지.. 김문수 지사의 훌륭한 점이지..
어떤 모모 같은 인간은 고런 진실된 고백은 고사하고 거꾸고 물고 늘어지지.. 죽어도 거짓말 한번 안했다고..ㅋㅋ
좌파, 특히 친북좌파세력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낸다. 그들에게 박정희는 독재자 외에는 생각나는 것이 별로 없을 정도다. 왜 그토록 박정희를 미워할까? 이유는 3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한국전쟁 전 대한민국 군대의 최고위급 간부 1/4은 좌파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이 직접 교육하거나 이들의 영향을 받은 육군사관학교 출신과 군대내의 간부들 상당수는 연쇄적으로 좌파 지휘관으로 육성되었다. 예컨대, 육사 3기의 경우, 여순반란을 주도한 김지회와 홍순석, (제주 4.3사건 진압차 출동한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한) 문상길 등이 좌파였다. 육사 3기가 고위급 좌파장교들을 많이 배출하게 된 것은 이들이 재학 중에 오일균, 조병건, 김학림, 김종석 등의 좌파지휘관(당시 이들은 생도대장, 구대장 등으로 재직했다)의 교육을 받고 사상적으로 깊은 영향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육사 6기는 아예 281명의 임관 장교중에서 무려 258명이 조사를 받았고, 그중 60명이 좌파로 숙청될 정도였다고 한다.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 때 지난 날 좌파에 일시 참여했던 과오를 뉘우치고 우파로 전향했다(아마 6.25 이전에 존재했던 전향좌파, 일종의 ‘뉴라이트’라고 할 수도 있을 법하다). 이 때문에 여순반란사건은 좌익세력이 주도한 국가반역사건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고, 결국 군대내 좌익세력이 상당 부분 박멸되기에 이르렀다. 좌익세력들이 좌익을 발본색원하는 데 기여한 박정희를 곱게 볼 가능성이 없음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둘째,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일부에서는 ‘군사혁명’이라고 칭하고 있다)을 주도했다. 이로써 장면의 제2공화국 정권은 무너졌다. 5.16은 우리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데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여기서 일반인들이 주목하지 못하는 사실 하나를 지적하고자 한다. 그것은 1960년 8월 14일 김일성이 최초로 ‘북남연방제’를 제안했다는 사실이다. 이 통일방안은 4.19 이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소용돌이와 감상적인 통일논의 분위기(여기에는 친북좌익세력들이 배후 조종하고 관여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를 배경으로 하여 북한이 야심차게 제의했던 ‘위장 평화통일공세’(곧 공산적화방식의 대남 흡수통일방안)였다. 당시 북한은 우리보다도 2배나 잘 살았고, 우리 사회에서도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반체제분자들, 낭만적인 친북사회주의자들이 적지 않았다.
박정희의 5.16은 북한이 연방제 통일을 화두로 해서 대한민국 내 친북사회주의 진영과 연계하여 통일의 결실을 보려했던 그들의 대남전략이 타당하는 공간을 앗아갔다. 다시 말하면 북한은 제2 공화국 정권이 지속됐더라면, 가능한 모든 간접침략의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 대한민국을 흔들어대고, 그럼으로써 멀지 않은 장래에 대한민국을 연방제 하에 접수할 수 있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난데없이 박정희가 나타나 이 같은 연방제 통일전략의 흐름을 끊어버렸다. 김일성의 북한으로서는 통탄스러운 일이었다. 이것이 대한민국 내의 친북좌파들이 박정희를 미워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셋째, 박정희는 집권한 후 ‘반공’을 주요 국가정책으로 제시했다. 박 대통령은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대공수사의 전선을 정비했다. 이후 친북좌익세력이 줄줄이 잡혀가 수난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중앙정보부는 좌파들에 의해 ‘독재의 화신’으로 낙인찍혀 있으나, 그들이 행한 것이 모두 악이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좌익세력의 발호와 이들과 북한간의 연계를 차단함으로써 강력한 안보와 사회안정을 이룩하는 데 기여한 점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박 대통령과 그의 경제참모들은 일관성 있게 경제개발정책을 펼쳐 나갈 수 있었고,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이룩할 수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반공정책의 기치 아래 좌익들이 대수난시기를 맞게 되는 만큼, 이들이 박정희를 미워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니 좌파세력이 박정희를 부정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립근거가 상실되기 때문에 그것은 오히려 ‘필연’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좌익이 박정희를 깎아 내리는 논리는 3가지이다. 첫째는 기회주의자, 둘째는 독재자, 셋째는 친일군인(친일파)라는 것이다.
기회주의자는 여순반란사건 시기 박정희의 전향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고, 독재자는 유신통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친일파라는 것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 황군에 근무했다는 것을 이유로 든다.
여기서는 친일파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한다. 박정희는 일본 육사에 바로 입학한 것이 아니라, 만주군관학교 2년을 이수해 좋은 성적을 낸 결과 일종의 장학생 명목으로 일본 육사에서 2년간 생도로 교육받은 것밖에 없다.
그는 임관 후 독립군 토벌에 참여한 적이 없으며 단지 부관으로만 일하였다. 즉, 같은 민족에 총부리를 겨누는 반민족행위를 한 적이 없었다. 이 점은 박정희를 집중 연구하고 친일파 군인인지 여부를 추적한 친일문제 전문가인 정운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의 책을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1949년 반민특위가 조사대상으로 삼은 친일파는 모두 7,000명 가량이었다(이 중 600-700여명이 검찰에 송치되었다). 이 중에 별 볼일 없는(?) 박정희 소위는 전혀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박정희 소위를 친일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좌파진영의 사람들이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박정희의 반공정책을 반민족정책이자 반통일정책으로, 그리고 그의 한-미동맹 강화를 외세의존정책, 반통일정책으로 폄하하고 매도하기 위한 전략의 일부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는 아버지가 세운 괴뢰공산정권을 물려받은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리더쉽도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생각과 능력적 사고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 집권 당시 평양을 대공사한답시고 커다란 다리를 1주일만에 만들고 여러 건물들을 빠른 시일내에 만들라고 지시하였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다리는 24시간 풀타임으로 열심히 일해도 도저히 1주일만에 완공하기 힘들어 공사중에 물에 휩쓸려 여러번 유실되고 죽은 군인도 여려 명 되며 부실공사 끝에 겨우 기한을 초과한 상태로 그나마 완성했지만 결국 무너지고 각종 건물들도 골조공사만 마친 채 돈이 없어 공사중단에 빠지고야 만다. 그것이 김정일의 능력과 실력의 한계이다.
그는 여러 북한 주민들을 생체실험에 이용했으며 오로지 자신의 쾌락을 위해 기쁨조라는 조직을 구성하여 북한 주민들의 굶어죽는 처절한 곡소리에는 철저히 무시하고 자신의 즐거운 삶의 유지에만 혈안이 되있었다. 결국 북한은 아시아에 있는 국가 중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로 남아있게되어 위조지폐 제작과, 마약 수출 없이는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상황에 까지 이르자 이제서야 김정일이 정신을 차리고 현재 경제에 대해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김정일의 집권 이후 지금까지의 세월은 그 전보다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악화되었다는 것 밖에 설명되지가 않는다. 그에 반해 항상 김정일이 수구독재인라고 외치던 그 사람은 한국 경제를 커다랗게 발전시키는 원동력의 일인자였다.
김정일과 김일성, 이 두 부자가 북한을 지난 반세기 동안이나 민주적인 투표 없이 독재적으로 주민들을 억압하고 도시 곳곳에 동상을 세우며 휘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국민의 투표로 인해 당선 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수구독재라고 외쳐대는 것은 버르장머리 없는 행태이며 앞 뒤가 맞지 않은 위선적인 행태로 밖에 보이지가 않는다.
김정일의 집권 당시와 다르게 박정희는 집권 초기부터 온 국민이 고깃국을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경제계획부터 먼저 세워 한국을 초우량 경제대국으로 성장시키는 디딤돌을 만들어놓았다. 그의 리더쉽과 능력과 실력으로 경부고속도로의 건설과 함깨 여러 공업지대가 신설되고 포항제철이 맨땅에 건설되며 중공업등의 건설과 육성으로 대한민국이 현재 선박수주량 1위를 달리는 것도 박정희 대통령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김정일은 집권 초기부터 경제계획을 세우기는커녕 자신의 삶의 쾌락과 안락에만 힘을 썼고 여러 주민들을 탄압하고 말살시키는데에만 앞장서서 일을 하였다. 정작 그는 남보고 수구독재인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행태에 대해 밑도 끝도 없는 상당히 악한 죄질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는 검소하게 살았다. 그가 죽었을 때 남긴 재산이 있었는가? 정작 그의 생가에는 덧칠한 것이 없었으며 그가 살았던 집은 대통령 집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노후화되있었다. 또한 검소절약정신이 몸소 베어있어 10.26 사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수도국군병원으로 후송되었을 때 병원장이 벨트가 해이해지고 구두는 낡았으며 여러 옷가지들도 몇십년 이상 입어온 것들이라 대통령인지 제대로 확인 할 수 없었는데 배에 있는 점을 보고서야 대통령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는 것은 온 세상이 아는 유명한 일화 중 하나이다.
김정일은 먹고 싶은 요리를 비싸게 돈을 주고 해외에서 공수해오는 그런 자이다. 박정희의 인간적인 삶을 살펴보면 그는 오로지 국가발전만을 생각하였지만 김정일의 인간적인 삶을 살펴보면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위해 남을 죽여도 좋다는 그런 망상에 빠져 자신이 이 세계의 왕인줄 착각을 하고 있다. 그 착각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박정희는 일본에 대해 제대로 알고 일본을 이기기 위하여, 적을 제대로 알고 이기기 위하여 일본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 것이지 만약 그가 김정일이 말하는 친일파였더라면 이 나라의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독도는 일본에게 물려줬을 것이다. 허나 박정희는 독도를 일본으로 부터 끝내 지켰다. 그럼에도 박정희가 친일파인가? 적을 알기 위하여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친일파라면 지금 일본에 유학 간 자들도 친일파이며 그 당시의 인재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와 김정일을 비교해보면 박정희는 유능한자이고 김정일은 자신의 악한 죄질에 대하여 반성감이 없으며 남을 헐뜯는 유치한 장난을 즐기는 자로서 머저리 중에 진정한 머저리가 분명하다. 우리는 이제부터 박정희와 김정일에 대해 대립할 이유자체가 없다고 본다. 뭣하러 머저리하고 유능한 자하고 대립 구도를 만들어놓는가? 결과적으로 김정일은 가치가 없는 빈깡통이지만 박정희는 가치가 큰 유물이다.
이 나라를 살린자와 죽인자, 과연 누구인가? 이 나라를 고성장으로 고깃국을 먹게 해준 박정희와 아직도 이 나라에 불바다를 만들어놓겠다고 협박을 하는 김정일, 우리는 누구를 본받아야 하는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본받아야 하는 사람 쯤은 알아야 하는 것이 기본 도리이다.
금실이가 못 먹어도 박대통령을 사람을 죽였다고 비난했음.
박정희시대 때 빨갱이 몇 명 사형당한 것을 가지고 그러는 것 같은데 수백만 명씩 굶겨 죽이는 개정일이는 욕하지 않더구먼.
완전히 빨갱이야! 인텔켄쟈 빨갱이 딱임 !
나는 누가 뭐래도 제일 존경하는 어른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대학시절(81학번) 운동권 아이들이 박정희를 폄하하면 나는 홀로 고독하게 항변하여야 했다.
늬 들이 뭘 알아? 늬 들이 어떻게 박정희를 알아?
내가 가장 존경한 인물은 오히려 지도자, 대통령으로서의 박정희가 아니다.
내가 진실로 존경하는 인물이야 말로 인간 박정희인 것이다.
그 분은 내게 끝까지 그 믿음을 주셨다. ......나는 괜찮아......
1. 친일과 관련하여
박정희
자질이 우수한 인재들만 들어갈 수 있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당시 조선은 법률상 일본국이었기 때문에 그가 일본육사를 졸업한 것은 법률상, 도덕상 아무런 하자가 없는 것이다.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에 소위로 임관해 처음으로 부임한 곳은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보병 8단이었다. 보병 8단의 주요 임무는 모택동 산하의 팔로군 제17단을 방어 토벌하는 것이었으며, 박정희 매도자들의 독립군 토벌 운운 하는 것은 날조된 거짓말이다. 오히려, 박정희는 만주에 있을 때 독립군들과 인간적 유대관계를 지속했다는 것이 사실로 여겨진다.
김대중
조선이 일본국이었을 시절에 창씨개명을 하고 회사에 취직하고 사업을 하여 일본국에 상당한 금액의 세금을 바쳐서 살았으므로, 충실한 황국신민의 도리를 다한 것이다. 김대중 씨의 창씨개명은 도요다(豊田)며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이 마지못해 창씨개명을 했기 때문에 석 자로 된 이름에 한 글자를 더 넣어 일본인처럼 넉 자로 늘리는 편법을 사용했지만 김대중씨는 완벽한 일본인 이름으로 바꾸었다. 김대중씨는 만주 여순에도 있었는데, 여순은 만주 침략을 위한 일본의 군사기지였다. 때문에 軍 정보기관이나 경찰의 特高(특고ㆍ사상범을 다룬 경찰) 등을 제외한 민간인은 출입통제지역이었다. 당시 여순의 실태를 아는 사람들은 여순에 있었던 조선인은 거의가 일본군이나 경찰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증언했다.
김대중씨는 만주 여순에서의 활동에 대해 이제는 스스로 진실을 밝혀야 한다. 한 사람은 군인으로, 한 사람은 일본국에 세금을 바치는 샐러리맨으로 살았는데, 군인은 친일이고 샐러리맨은 애국자인가? 내셔널리즘을 떠나서 순수하게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전시상태에서 죽을 확률이 높은 군인의 길을 택한 사람하고 그렇지 않은 길을 걸은 사람하고 비교한다면 나는 전자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일본국 시절이나 지금이나 정치가는 정치가적인 자질, 사업가는 사업가적인 자질, 예술가는 예술가적인 자질...등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국가발전에 이바지 하는 것이다. 일본국 시절에 자질이 우수하여 국가발전에 기여했다고 지금에 와서 매도하고, 무능력하여 백수나 일반노동자로 살았다고 그게 무슨 유세거리인가?
그 당시에 성실하게 노력하여 고등고시 패스한 사람은 친일파이고 대가리가 나빠서 말단공무원도 못한 사람은 친일파가 아니라는 말인가? 한국이 해방되자, 무능한 돌대가리들이 일본국 시절에 출세하지 못한 한을 풀려고 자질이 우수했던 사람들을 친일파라는 딱지를 붙여서 매도했던 것이다.
2. 국가경영과 관련하여
박정희
조국근대화를 위하여 자기희생을 자처하신 분이다. 최고 권력을 쥐었지만 부정 축재는 단돈 1원도 하지 않았고 노벨상 같은 상을 받으려고 쇼도 안했다. 오히려 독재자라는 누명을 뒤집어쓰면서까지 조국근대화를 이루려고 온몸을 불살랐고 그 결과 오늘날 한국의 민주화를 이루는데 100% 공헌하신 분이다.
김대중
박정희의 뛰어난 자질을 시샘하여 박정희의 조국근대화 작업을 사사건건 훼방 놓고 딴지를 걸어서 괴롭힌 파렴치한 인간이다. 모든 점에서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 박정희를 모략할 방법을 강구한다는 것이 고작 친일파라는 허구적인 딱지를 만들어서 공격하였던 것이다. 친일파라는 것은 얼핏 들으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그 허구성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3. 민주화와 관련하여
박정희
민주주의는 빵이 없으면 이룰 수 없는,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누리는 사치품이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는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 실질적으로 노력하신 분이다.
김대중
한통련의 초대 의장을 지낸 좌익적 경력 때문에 즉, 국가보안법을 위반해서 감옥 갔다 온 것 말고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한 일은 단 한 건도 없다. 오히려 박정희의 조국근대화 작업을 방해하였고 지역감정을 일으켜서 남남갈등을 조장한 민족의 역적이다. 그는 민주주의를 이룰 토대를 쌓는 작업을 훼방한 민주주의의 공적이다.
김대중씨는 60-70년대에 북한과 내통되었고, 북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고, 미국 일본으로 다니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고 다니는 등 국익에 반대되는 짓을 한 사람이다. 또한 보릿고개를 없애고 산업화를 추진하는데 반대하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극구 반대하는 등 국익에 해가 되는 짓을 한 사람이다.
김대중은 천재적인 자질을 가진 박정희를 시샘하여 그를 독재자, 친일파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우고 매도하였고, 평생의 라이벌인 김영삼을 물 먹일려고 악동처럼 사사건건 딴지를 걸어서 IMF를 초래하여 국민경제를 도탄에 빠뜨렸다. 그리고 음흉한 방법으로 노벨상을 사취한 사악한 인간이다. 그리고 일부러 무능하기 짝이 없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여 자신의 상대적 우위를 확보하려고 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자가 일국의 대통령이었다는 것이 한심스럽기만 하다.
우리나라는 김영삼과 김대중이가 없었다면, 국민의 GNP는 2만 달러는 넘었을 것이고, 박정희가 10년 정도만 더 일했다면 3만 달러는 거뜬히 넘어서 세계의 선진국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 나라가 이지경이 된 게 누구 때문인데...이거야말로 역사왜곡입니다.
비교를 할 대상이 어느 정도의..
준비된 대통령인줄만 알았었다. 결과는
가문의 영광 또는.. 호남의 꿈을 이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나라의 대통령으로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감히 박정희 대통령이랑는.. 비교라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는 상대라는것을..
앞으로도.. 이런 제목은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다.
두 사람은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박정희, 전두환은 군대의 힘을 빌려 차지한 권력을 이용, 자기와는 다른 반대 의견을 제시하거나 항의히는 사람들을 고문하고 살해했습니다. 그 인권유린이 나라의 경제를 살리기 위함이었습니까? 자신들의 권력을 더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또 만약 그것이 나라의 부를 위한 것이었다 해도, 대통령은 나라의 부를 위해서는 인권을 유린해도 될까요? 당연히 아니죠.
예를 들어, 그 커다란 사회 공동체인 나라를 축소시켜서 한 가정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한 가정이 굉장히 가난하고 아이들이 영양 실조에 걸릴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 때, 어느 돈 많고 갖가지 총기류를 소지한 사람이 우리 가정에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총으로 너희 가정의 안보를 지켜주고 내 돈으로 너희를 먹여 살려 주겠다. 그 대신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처음엔 처자식을 위해서 고마워하며 그렇게 하자고 합니다. 그 남자는 그 가정을 외부로부터 지켜주고 밥을 주는 대신, 그 가정의 와이프와 딸들을 자기 성적 노예로 만들고 남편과 아들들에게는 힘든 강제 노동과 온갖 궂은 일을 시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바로 이겁니다. "우리 나라를 지켜주고 우리가 밥을 먹을 수 있도록 경제 성장을 시켜주신 분이 바로 박정희다."
흠, 근데 이걸 어쩝니까. 우리를 먹여주었던 그 돈은 어디서 나왔나요? 다른 곳에 가서 굽신거리며 받은 돈 (한일협정)과 우리 가정의 아들들을 제국주의 전쟁에 팔아먹고 받은 돈 (베트남 전 파병)이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철저히 이용하고, 우리를 짓밟으며, 우리 위에 군림했었습니다. 무려 17년간이나 말입니다.
박정희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논리는 "경제와 윤리는 분리해서 봐야 한다" 입니다. 윤리에 대해서 말하면, 그건 그거고 경제는 경제다 라는 식으로 말하며 윤리를 이야기하면 꼭 합리적이지 않은 것처럼 비웃어 버립니다. 한 인물을 평가하며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방법으로서, 지양되어야 할 담론이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흔히 주변 사람들을 볼 때, 전두환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는 "정말 싫다. 살인자다."입니다. 그런데, 박정희는? "살인자고 매국노지만 그래도 그는..." 이런 식으로 말을 합니다.
왜, 공통분모가 많은 두 독재자에게 이런 다른 평가가 나오는 것일까요?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겁니다.
박정희의 가혹한 정권과 그의 충실한 개였던 언론사들의 힘이겠죠.
그리고 그것에 세뇌되며 살아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전두환은 아니지만, 박정희는 일부 언론과 작가들이 그를 미화해왔고 또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일부 수구세력과 어용 언론 집단들의 간악한 프로파간다에 속지 말고, 항상 비판적인 사고를 견지하며 매스미디어를 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국력이 미국을 초월하지 못하는 한 뭇 세월이 간다해도 그 진실된 내막이 밝혀질 리 없겠지만 미국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수많은 한국인들은 10.26을 일으킨 김재규의 배후세력으로 미국을 의심하고 있음을.
겉으로는 세계적 인권지도자인 양 행세한 지미 카터가 그 위명과는 전혀 다르게 70년대 후반 국빈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하면서도 김포공항이 아닌 오산의 미공군기지를 통해 입국하고 영빈관이 아닌 주한미군 캠프에 머무름으로써 한국을 모독한 사실과 자신이 의제 상정을 극력 반대한 주한미군 철수의 재고를 한미정상회담에서 박대통령이 간곡한 부탁과 함께 언급하자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였던 사실도 수많은 한국인들이 아직 잊지 않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여긴 인도네시아가 아닌 한국이니까요.
참고로 김일성은 46년간 통치했지요. ^^ 으~~~ 만약 박정희가 이렇게 통치했다면 어떤 평가가 나왔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ㅎㅎ
앞서의 제 글을 읽어보셨으면 알겠지만 저 역시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아쉬움은 아쉬움대로 적고 있습니다. 공정한 시각에서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념적 편향성에 치우친 해석을 피하면서요. 저 역시 님의 견해를 존중합니다. 그러면 기다릴께요.
"대통령직 못해먹겠다!"
"저주의 굿판을 치워라!"
"지배권력을 교체해야 한다"
"진보 = 선이고 보수 = 악이다..
"보수는 별에 별놈의 보수를 갖다 붙여놔도 보수일뿐이다"
"재신임을 받을 것이다"
"10분의 1 넘으면 사퇴하겠다"
"행정수도 이전반대는 정권 퇴진 운동이다!"
"유신으로 돌아갈지 미래를 내다봐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고이즈미 총리 앞에서 - 과거사 문제는 임기 중 묻지 않겠다!"
"대통령 권력 반 내 놓을 수 있다 "
"X새끼, 소 새끼 하겠지요"
"대한민국을 깽판을 쳐도"
"국가보안법은 칼집에 넣어서 박물관에 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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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박정희 대통령의 말말말
역사는 언제나 난관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용기가 있는 국민에게 발전과 영광을 안겨다 주었다. -박정희
우리시대의 사명은 경제자립과 자주국방으로 국력을 신장하여 선진공업국가가 됨으로써 근대화를 이룩하고 민족중흥을 구현하는 것이다. -박정희
개발도상국의 나라에 있어서 정치의 초점은 곧 경제건설이며, 민주주의도 경제건설의 토양위에서만 자랄 수 있는 것이다. -박정희
민족적 민주주의의 제일차적 목표는 <자립>에 있다. <자립>이야말로 민족주체성이 세워질 기반이며, 민주주의가 기착 영생할 안주지인 것이다.
<민족자립>없이 거기에 <자주>나 무슨 주의가 있을 수 없으며, 자립에 기반을 두지 않는 민족주체성이나 민주주의는 한낱 가식에 불과하다. -박정희
바르게 알도록 하고 바르게 판단하도록 하고 바르게 행동하도록 하는 무거운 책임이 바로 우리 언론에 있다. -박정희
전쟁을 좋아하는 국민은 망하게 마련이지만, 전쟁을 잊어버리는 국민도 위험하다. -박정희
100가지 중에서 하나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거기에 대해서 그야말로 만전을 기하는 것, 이것이 국방이다. -박정희
시대와 환경의 변천에 관계없이 노동은 인간이 가진 가장 근원적인 생활 무기이다. -박정희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하여 적어도 일세기라는 시간을 잃었다. 이제 더 잃을 시간의 여유가 없다. 남이 한 가지 일을 할 때 우리는 열 가지 일을 해야 하겠고 남이 쉴 때 우리는 행동하고 실천해야 하겠다. -박정희
농사는 하늘이 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서 짓는 것이다. -박정희
우리는 자유 민주 체제보다 더 훌륭한 제도를 아직 갖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 하더라도 이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에는 이 민주 제도처럼 취약한 제도도 또한 없는 것이다. - 박정희
우리의 후손들이 오늘에 사는 우리 세대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고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조국 근대화의 신앙을 가지고 일하고 또 일했다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게 합시다. - 박정희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는 장해가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우리 주위에 잔재하는 수구(守舊)와 파쟁(派爭)이며, 시기와 모함이며, 독선과 아집이며 단견(短見)과 무정견(無定見) 등 전근대적이며 비생산적인 요소이다. - 박정희
제자가 스승을 우습게 여기는 교권(敎權)없는 학원에서 진정한 교육은 이루어질 수 없다. - 박정희
체육은 인간을 강건하게 만들고 규율과 질서와 협동을 존중하는 슬기롭고 애국적인 시민을 만들어 준다. 실로 체육은 심신을 연마하고 조화시키는 사회교육이라 하겠다. -박정희
노무현은 과거를 보게 한다. 그것도 짜깁기 한 과거를 보여주고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누군가를 증오하게 한다.
무엇을 노리고 있을까?
노무현과 그 떨거지들은?
노무현과 닮은 사람들. 노무현은 그 누군가를 저주하고 원망한다. 마치 증오에 가득한 것처럼
그런데 닮아가나? 그런 노무현을 닮아 가는지 노무현을 저주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늘어가더니 이제는 누군가를 저주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증오에 가득 찬 목소리로 저주를 퍼붓고 원망하는 것이 일상생활이 되어버린 이들이 많아졌다.
아무래도 노무현은 증오의 화신인 것 같다. 북쪽의 악의화신, 남쪽의 거짓말의 화신, 증오의 화신 등은 화신들이 되어 신이 된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어 좋을 것이나 그로인해 오염된 민초들은 어이할꼬.......
그러나 저들도 객관적 통계를 부정할 순 없다. 1960년 말 1인당 GNP 82달러의 볼 품 없는 식민지국가를 세계에서 8번째 가는 무역대국으로 성장시킨 주인공이 박정희였다.
1960년에서 1995년까지 36년간 대한민국의 평균경제성장률은 세계1위! 대한민국의 성공은 경제성장에 국한돼지 않았다. 같은 기간 인간개발지수(HID)를 크게 향상시킨 세계2위 국가, HID절대치가 높은 상위 30개국 중 세계1위 국가가 대한민국이었다. HID지수는 각국의 교육수준, 국민소득, 평균수명, 영아사망률, 소득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삶의 질’을 나타내는 수치이다.
성장의 결실은 부익부, 빈익빈이었는가? 세계은행이 95년 발간한 자료에서는 경제성장률도 가장 높고, 부의 분배도 가장 이상적으로 이룬 나라로 대한민국을 평가하고 있다. 이승만의 ‘건국’과 박정희의 ‘개발’이라는 초인적 의지가 단군 이래 5천년 역사 중 가장 놀라운 발전을 이뤄놓은 것이다.
그런데도 이 나라를 뒤엎으려는 左翼혁명세력들은 불완전한 세상 어디나 있을 수 있는 흠결들을 침소봉대해 끊임없이 공략해왔다. 바로 그 공략 가운데 박정희가 있다. 박정희에 대한 부정이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이요, 그에 대한 긍정이 대한민국에 대한 긍정인 이유가 그 때문이다.
남한이라는 지역의 住民이 아닌 대한민국의 國民이라면 박정희를 추모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대한민국이라는 국민국가를 유지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나라 없는 백성의 설움을 반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박정희에 대한 폄하와 훼손과 청산은 悖倫(패륜)이다.(Konas)
정말 선견지명이 있던 지도자였습니다. 중동 진출도 박 대통령께서 김대중, 김영삼 등 말만 앞세우는 민주당 의원들의 거듭된 반대를 무릅쓰고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그때 경부고속도로를 닦으며 쌓았던 노하우를 해외에서 바로 써먹을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니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기회가 와도 다른 나라들처럼 좋은 기회를 눈앞에서 놓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특유의 성실성을 가진 한국인들의 에너지를 국가총력의 결정체로 끌어올릴 수 있도록 정신무장을 강화시킨 것도 탁견이었다 여겨집니다. 그 누가 뭐라 해도 박 대통령은 당시 한국민들에겐 훌륭한 지도자이자 메시아였다고 확신합니다.
영국에서 발행된 인명사전에 있는 독재자 순위네요.1위는 히틀러구요.
제가 먼저 말씀드린 걸로 알고 있는데요. 지도자는 후대의 판단도 판단이지만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같은 시기에 재임한 사람과 비교를 해야 공정하다고 말입니다. 히틀러는 1933년에서 45년까지 12년을 통치하고 자살한 인물입니다. 박정희는 히틀러가 죽고 난 후 16년이나 지나야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같은 시대 정책과 비전으로 비교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닌데도 비교를 해 놓은 것은 유럽인의 왜곡된 시각이 반영됐다 아니할 수 없군요. 그냥 호사가들의 맛깔 나는 양념으로 치부하지요. 제가 부탁했던 위의 글을 다시 잘 읽고 답변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왜 같은 시기 비슷한 때 정치를 한 사람의 업적을 가지고 평가를 해야지 주관이 개입되고 원인관계를 무시한 것을 신봉해야 할까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싶다고 하더라도 이건 아니라고 봅니다. 두루뭉실 독재자 평.... 이런 것 말고요. 같은 시대라야만 합니다. 그게 공정하지 않겠어요?
제 소견으론 김정일이 더 독재자인 듯한데.... 무척 재미 있는 블랙코메디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김일성과 김정일보다 더 독재자들 무척 궁금하군요. ㅎㅎ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에서 미국의 국방비 지원 중단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때 우리는 베트남 정규군 파병이란 무기로 대응했던 것이지요. 한국이 월남에 전투부대를 파병하는 문제는 미국의 군원이관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효과적인 카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랍니다.
1965년 한미 정상회담 다음날(5.19) 김성은 당시 국방장관은 미국의 맥나마라 국방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군원이관 중단을 비롯한 경제 원조를 요구했습니다. 전투부대 파병이 절실했던 미국은 한국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던 거지요.
잘못된 정보만을 갖게 되면 그것이 때가 되어 벗겨지지 않고 사실조차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요.
저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자로 박통은 별로 좋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다시금 새롭게 생각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
안타깝네요. 추천한 분들이 하나도 없어서 인기들에 못오르나 보군요.
그런데 이 글을 올리신 화상들님은 글만 올리시고는 아무 말씀도 안하시네요? 몇 마디 할만하기도 한데...
북괴 인민들 지금도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가? 새벽별보기 운동, 천삽뜨고 허리 한 번 피기 운동, 천리마 운동, 100일 전투, 150일 전투 ... 뭐 별 것 다 하는 데도 그모양 그꼴 아니더냐?
멍청한 시지프스 같은 것들에게 필요한 것은 현대사 공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