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치밀한 대남공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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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북한방송 2008-06-26 김정일의 치밀한 대남공작 북한 노동신문은 6월 26일 “6.15공동선언의 이행은 계례의 한결같은 의지”라는 논설을 내고 6.15공동선언을 고수할 것을 주장했다. 북한 김정일 독재정권은 왜? 이명박 정부가 주장하는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를 외면하고 6.15공동선언만 지속적으로 주장할까? 참으로 많은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기자는 이와 관련하여 자료를 추적하던 중 월간조선(2005년 01호 )특별기고로 발표된 “ 제3국 체류 북한 통일전선부 요원의 충격적 폭로고백”을 찾게 되었다. 이 글은 북한 통일선 전부 직원이 제3국에 탈출하여 쓴 기고문으로써, 김정일의 대남공작에 대한 역사적 자료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왜 김정일에게 끌려 다니며 “혁명전사”의 역할을 해온데 대한 신빙성 있는 자료를 제공한다. 이 기고문이 “네이버”나 “다음”에도 소개되었지만, 김정일의 대남공작에 대한 치밀함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는 취지에서 아래에 그 원본을 소개 한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보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이모란 기자 limoran@hanmail.net [특별기고] 제3국 체류 북한 통일전선부 요원의 충격적 폭로고백 (월간조선) 『金正日 지령하에 통전부-親北단체-남한 정권이 三位一體로 움직인다. 열린당은 통전부보다 더 잘한다. 對北지원은 對南공작비로 돌아간다』 ● 金日成은 金大中 집권의 길 열어 주려고 朴正熙 암살 명령, 陸英修 죽게 했다. ● 金正日 정권 연장이 386 정권 연장이고, 金正日 붕괴가 386 정권 붕괴로 이어지는 게 한반도 운명. 386은 지금도 國保法 대상이기에 철폐 추진, 현재가 두렵기에 과거 캐기, 親北 감추려고 親日 캔다. ● 金正日의 경멸 - 『하나 더 있잖아, 대한민국道』 ● 金正日이 송호경에게 지시-『金大中이는 돈을 달라면 돈을 주고, 쌀을 달라면 쌀을 주게 돼 있는 사람이니 대화상대라고 생각하지 말고 10억 달러를 내리 먹여!』 ● 李哲禹 의원이 가입했다는 민족해방애국전선은 북한 노동당의 남한內 지하당 조직. 노동당 깃발 金日成 초상 앞에서 충성을 맹세한 것이 노동당 입당의 증거 ● 金正男은 親中派. 위조여권으로 제주도 방문 ● 金正日 지시 - 『관리 중인 親北派를 공작원으로 포섭하여 활용할 때가 왔다』 ● 안기부 해체적 개편과 康仁德 장관 해임은 통전부 작품 ● 남측 민족문화작가회의 상대역은 작가가 아니라 통전부 국장 ● 한국 민주주의의 첫 과녁은 金正日 정권 타도이어야 장혜영 前 북한노동당 통일전선부 근무 『하나 더 있잖아, 대한민국道!』 얼마 전 외국순방 길에서 盧武鉉(노무현) 대통령은 北核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국제사회에 강조하며, 『남북간의 체제경쟁은 이미 끝났다』고 선언했다. 과연 이것이 옳은 말이겠는가. 나는 북한 노동당의 적화통일 정책을 제1선에서 실행해 오던 통전부(통일전선부)의 한 일원으로서 최근 김용순 계열 숙청과 관련하여 여러 요원들과 함께 탈북한 뒤 지금 제3국에 머물면서 이 글을 쓴다. 나는 盧武鉉의 무식한 이 말에 『No』라고 대답할 수 있다. 金正日은 자기가 부자이기 때문에 북한을 절대로 가난한 나라로 생각지 않는 특이한 자아 절대감이 있다. 바로 거기서 끈질긴 세습정치욕도 나오고 적화통일 야망도 계속되는 것이며, 그래서 수백만이 굶어 죽든 말든 核 프로그램을 완성하기 위해 오늘도 억만금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지금 자기의 의지대로 좌경화돼 가고 있는 한국 현실을 굽어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그 통쾌함을 혼자만 즐길 수 없어 그는 얼마 전 측근들과의 파티에서 불쑥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 道가 몇 개 있지?』 모두가 어리둥절해하던 중 아홉 개라는 누군가의 대답에 金正日은 웃으며 소리쳤다. 『왜 아홉 개만이야. 하나 더 있잖아 대한민국道!』 순간 좌중에 박수가 터졌는데, 그들 중 누구보다 소리 크게 박수를 친 사람은 통전부 제1부부장 임동욱이었다. 그의 손에 든 힘은 무엇이며 金正日의 만족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오늘까지도 내외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통전부內 각 연락소들의 실체와 그들이 어떤 공작차원에서 활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극히 일부만을 증언하고자 한다. 북한 노동당 규약에는 이렇게 밝혀져 있다. 「조선로동당의 당면 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고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과업을 완수하는 데 있으며 최종목적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 보다시피 북한 노동당의 통일관은 철두철미 적화통일이다. 이러한 야망은 북한정권 수립 이전부터 집요하게 시작됐다. 통전부의 역사적 뿌리는 1946년부터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다. 8·15 광복 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국가안전성 국제정보국 예하에 「소련군 정찰대 극동지부 북조선 파견대」를 조직하고 남한의 좌익세력 확장과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목적으로 1946년 「서울공작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북한 對南공작부서의 원조이다. 左右의 첨예한 대결과 끊임없는 분쟁들이 결국 南北이라는 국토분열로 이어지도록 소련의 충견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이 공로와 경험을 토대로 金日成은 1948년 10월10일 黨 창건 후 「서울공작위원회」를 「對南사업부」로 승격시켜 노동당 중앙위원회에 소속시켰다. 철저한 비밀보안과 은밀성을 보장하기 위해 중앙당 본 청사와 분리시켜 他구역에 별도의 건물을 사용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북한 주민들 속에서 신비의 존재로 불려지는 「3호청사」의 유래이다. 6·25 전쟁 후 북한은 휴전상태의 체제경쟁에서 최우선 당략을 적화통일로 더욱 절박하게 내세웠다. 그래서 金日成은 중공업을 먼저 발전시키고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병행한다는 「군사 제일론」으로 나라의 모든 정책을 펼쳐 나가는 것과 동시에, 내적으로는 對南공작부서의 기능과 역할을 좀더 세부화·고도화했다. 이를테면 1960년대까지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체제와 경제적 우위를 바탕으로 무장기습에 의한 파괴·와해·교란 등 힘의 정책을 對南戰의 기본으로 했다면, 1970년대부터는 駐韓미군에 의해 한반도에 분열이 정착되어 가는 상황에 맞게 長期戰에 대처한 우회적 전략, 즉 사상·문화적 침투와 인물포섭, 심리전 등을 총괄하는 지능 기능의 전문부서를 만들고 발전시켰다. 金正日이 통전부 지휘 그런 의도에서 출발하여 종전에 있던 「조국평화통일서기국」, 「남조선문제연구소」, 「평양주재 한국민주전선대표부」, 「재북평화통일 촉진협의회」, 「조총련결성준비위원회」를 통합하고 여기에 101연락소, 26연락소, 813연락소, 310연락소 등을 신설·포함시켜 북한 노동당에는 「통전부」라는 독립 부서가 생기게 됐다. 뿐만 아니라 부서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최고 실권직을 제1부부장제로 낮추고 모든 행정·인사 결정권은 당 조직비서인 金正日이 직접 틀어쥐고 부장업무를 대행하도록 했다. 북한의 적화통일 노선이 얼마나 집요한가 하는 것은 현재 노동당 안에 對南공작부서만 해도 4개(작전부, 대외연락부, 35호실, 통전부), 그것도 모라자 인민군 무력부 안에 정찰국이라는 것을 또 가지고 있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들의 인원을 다 합치면 무려 3만여 명에 이른다. 金日成 권력으로 북한이 움직여질 때는 허봉학, 김중린, 허담 순서로 對南사업 담당비서가 對南공작부서들을 총괄하였다. 물론 그때도 중요 비준은 金日成이 하였다. 하지만 黨內에서 수령 계승성 문제가 제기되면서 권력이양의 일환으로 金正日이 黨선전부, 黨조직부 사업을 맡게 되면서부터는 對南공작부서의 행정 및 인사 결정권도 對南사업 담당비서 중심제가 아닌 金正日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더욱이 통전부는 다른 부서들처럼 철저히 군사적 은밀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 직접 대화라는 합법성 측면도 있어 對外통일방침 관리상 당적 지도력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부서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통전부만은 최고 실력직을 제1부부장제로 낮추고 당 조직비서인 金正日이 직접 틀어쥐고 부장업무를 대행하도록 하였다. 1994년 5월10일 통전부 산하에 건물도 사업구성원도 없는 간판만의 「조선 아태 평화위원회」를 내오고 對南사업 담당비서 김용순을 위원장으로 발표한 것도 金正日의 이러한 모략정치 이면을 가리고 아울러 평시에는 발톱을 보이지 않는 포악 동물 본성의 통전부 이미지를 미화분식하려는 것이었다. 한국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1976년 8월18일 「판문점 도끼사건」, 1983년 10월9일 「미얀마 아웅산 폭파」, 1987년 11월29일 「KAL-858기 폭파」, 1992년 10월6일 「남조선 노동당 사건」, 1996년 9월15일 「강릉해안 잠수함 침투」, 1998년 12월17일 「여수해안 간첩선 침투」, 1999년 6월15일 「서해 연평도 해상 교전」, 2002년 「서해교전」 등이 反민족·反통일의 원흉 金正日이 저지른 사건이다. 이 모든 것들을 발기하고 총지휘한 악한의 직접 지휘체계下에 움직이는 통전부는 북한 노동당의 핵심부서로서 오늘까지도 평양시 중구역 창광동에 밀집된 중앙당 청사들과는 별도로 모란봉구역 전승동 본래의 3호청사에서 적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對南공작의 전위대 역할을 하고 있다. 그 규모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나 세계 선진국인 대한민국을 상대로 전략적 주동성을 잃지 않을 만큼 통전부의 수완은 참으로 완벽하다. 그들이 공작 차원에서 「수령님의 전사」로 체계적으로 길러낸 金大中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고, 통전부가 마음만 먹는다면 정치인으로서의 목숨이 당장에 끝장날 386이 「적색무리당」이라고나 말해야 할 열린당에 대거 포진하여 공공연한 親北(친북) 및 좌경정책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흔드는 오늘의 한국 현실은 모략가 金正日을 부장으로 하는 통전부 주도의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 「金大中은 수령님의 戰士」 金正日이 비준한 2000년 6월15일 남북頂上회담 일정에 대한 통전부의 계획서에는 역사적 의미로 볼 때 가장 감격적인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첫 부분이 백지화 되어 있었다. 그것은 金大中 대통령이 金正日과 나란히 순안 비행장에서부터 숙소까지 평양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지나가게 되어 있는 연도 환영행사였다. 金日成 사후 공개행사를 극력 피하는 金正日이라 신변보호 차원에서 삭제한 공백인 줄로만 알았던 준비 성원들은 행사 당일에 마치 사전 약속이라도 있은 듯 金正日의 리무진에 단독으로 오르는 金大中의 행동을 보고서야 계획서 공백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어느 한 술자리에서 임동욱은 취중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번 남북 頂上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회담은 벌써 첫 만남에 있었다』 그 후에는 더 무게 있는 말들이 통전부 간부들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수령님은 확실히 천리혜안의 예지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다. 金大中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줄 어떻게 미리 다 아셨을까』 頂上회담 후 몇 개월 지나서부터는 김용순, 임동욱, 안경호 같은 거물급들이 노골적으로 金大中을 「수령님의 戰士(전사)」라고 불렀다. 북한에서 수령에 대한 신격화는 절대적이다. 그런 나라에서 어떻게 수령제일주의가 투철한 중앙당 비서 부부장들이 敵國의 괴수를 「수령님의 戰士」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金大中,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대한민국 대통령인가, 아니면 북한 독재자의 충복인가. 金大中의 이름은 이미 그가 한국의 민주투사로 인정받던 1970년대에 통전부의 문건에 올라 있었다. 북한이 인물 흡수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게 된 계기는 1960년 4·19 혁명이었다. 金日成은 그때 통일의 호기를 놓쳤다고 두고두고 후회하면서 4·19 혁명이 붉은혁명으로 승화되지 못한 요인은 그것을 주도할 만한 적색인물과 그 중심의 지하당이 없었기 때문이니 하루빨리 한국 내에 혁명정당을 구축할 것에 대한 과업을 주었다. 북한은 급기야 「통일혁명당」을 결성하고 마치 그것이 한국 내에 실존하는 지하당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미국·일본·유럽·東南亞에까지 그 지부를 설치하고 요란하게 선전했다. 밖에서부터 만들어진 이 유령조직을 안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통혁당」의 이름으로 출간된 각종 격문들과 인쇄물들을 한국에 살포하거나 침투시키는 것은 물론, 인물포섭과 지하당 결성에 총력을 다했다. 『金大中은 쌀을 달라면 쌀을 주고 돈을 달라면 돈을 주게 돼 있다』 이를 위해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돌격대로 내세웠다. 1950년대에 조직된 이 협의회라는 것은 조소앙, 안재홍과 같은 납북자들과 월북자들로 이루어진 순수한 이남 출신 집단이다. 이 협의회는 한국 전반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함께 편지발송, 방송심리전 등 온갖 수단을 통해 한국에 남아 있는 인맥을 최대한 동원하여 對南전선을 형성하는 것을 主업무로 삼았다. 지금은 「재북평화통일촉진위원회」로 격상시켜 그 명맥을 잇는 것과 동시에 북한의 위상을 선전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이렇게 對南공작의 제1과제를 反정부 의식이 강한 인물 흡수와 지하당 구축, 左派단체 확산으로 정한 통전부는 1970년대에는 민주투사로 자처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에게 金日成의 친서와 공작비도 보낼 만큼 혁혁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지금도 통전부 기밀실에는 朴正熙(박정희)의 유신독재 반대를 부르짖으며 金大中이 일본에서 맹활약하던 당시 그 흡수공작에 적지 않게 공헌한 조총련 산하 비밀요원들에 대한 활동내용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朴正熙가 암살된 후 金大中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정국조종 전술案도 보관되어 있다. 1974년 8월15일 陸英修 여사 암살사건은 바로 이 전술案의 첫 단계에 해당하는 작전이었다. 남북 頂上회담 준비역을 맡았던 송호경에게 金正日은 『金大中이는 돈을 달라면 돈을 주게 돼 있고, 쌀을 달라면 쌀을 주게 돼 있는 사람이니 대화 상대라 생각지 말고 무조건 10억 달러를 내리 먹여!』 하고 지시했다. 이렇게 이용 가치 있는 인물들을 하나둘 점거하고 1970년대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일어서는 운동권에도 「통혁당」 지하가 심어지자 여기에 힘입어 金日成은 「고려민주련방공화국 통일방안」을 주동적으로 제기하고 朴正熙 정부를 압박할 수 있었다. 1999년 1월1일 「노동신문」, 「조선인민군」, 「청년전위」 공동사설 「올해를 강성대국 건설의 위대한 전환의 해로 빛내이자!」에서 북한은 「안기부는 당장 해체되어야 한다. 안기부를 해체하는가 안 하는가 하는 것은 통일을 바라는가 분열을 바라는가를 가르는 시금석이 된다」고 전에 없는 어감으로 강조했다. 이어 통전부內 각 연락소들을 발동하여 일대 섬멸전을 벌이듯 안기부 공격 전략을 펼치도록 했는데 실지 그때 이미 내부에서는 안기부가 곧 없어질 것이라는 정답이 나와 있었다. 아니 훨씬 그 전일지도 모른다. 金大中 당선 시점에 金正日은「안기부 해체」계획 수립 金大中의 大選 당선이 확실해지자 金正日은 자기의 경사를 자축하듯 파티를 열었다. 여기서 그는 통전부 사업을 좀더 進攻的(진공적)으로 펼칠 것을 역설하며, 안기부 해체 문제부터 결속지으라고 큰 소리 쳤다. 대한민국 대통령처럼 행세하는 그 장면을 한국 국민들이 보았다면 경악감과 함께 강한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金大中이 대통령 취임 연설을 준비하던 그 시간에 통전부는 이미 金正日의 지시대로 안기부 해체에 대한 구체적인 案을 작성한 상태였으며, 그로부터 1년도 채 안 된 1999년 2월경에는 안기부가 정말로 對北기능이 약화된 국정원으로 개조됐다. 金正日의 욕심은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국정원 개조발표와 함께 책상 위에 놓인 국정원 내부조직 구성 보고서를 받아든 金正日은 『이게 무슨 해체인가, 명칭만 바꾸었을 뿐이지 내부 조직이며 악질들이 그대로 들어 있지 않은가』 하고 보던 문건을 집어던졌다. 그리고 나서 즉시 통전부 제1부부장 임동욱을 불러 『안기부나 국정원이 뭐가 다르냐』며 『이것으로 끝내지 말고 계속 압력을 넣으라』고 지시하였다. 그때부터 「노동신문」은 국정원 규탄으로 지면을 채웠다. 북한의 제1신문인 노동신문은 당보로서의 기능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통전부의 對南전략물이기도 하다. 5면은 소위 한국 국민을 대표한다는 「한국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의 백서·성명·호소문들과, 한국 국민들이 金正日을 열렬히 찬양한 듯 101연락소가 날조한 온갖 허위 내용들을 실음으로써 마치 북한 정부가 全민족적인 합법 통일정부인 것처럼 시위한다. 통전부는 그 5면을 발동하여 金正日의 지시대로 국정원 개조는 눈 감고 아웅하는 식의 기만이며 탈바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국가신문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상말을 연발했다. 「이런 反통일 모략기지, 동족탄압의 본산을 그대로 두고 대화요, 화해요, 교류요 하는 것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우리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강하게 압박했다. 결국 金大中은 햇볕정책의 성과적 추진을 위한다며 자기 임기內에 기어이 국정원의 對北기능을 변질시켰다. 그때부터 통전부 주요 간부들 입에서는 「3위1체 전략」이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되었다. 특히 金大中 정권 초기 통일부 장관이었던 康仁德 제거 작전時에는 그 말이 더는 비밀이 아닐 만큼 공공연했다. 당시 金正日은 康仁德이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한 특강에서 우리 체제를 악랄하게 헐뜯었다면서 『중앙정보부 對北담당 국장, 심리전 국장, 북한문제연구소 소장, 극동문제연구소 소장이라는 경력을 볼 때도 대단히 마음에 안 드는 놈이니 통일부 장관 자리에서 반드시 쫓아내야 한다』고 지시했다. 통전부는 즉각 3위1체 무기를 꺼내들었다. 3위1체란 다름 아닌 통전부, 金大中 정부, 그리고 한국內 親北 및 좌파세력의 일심체였다. 북한은 우선 노동신문을 통해 康仁德에 대한 반대 입장을 거듭 천명했는데, 그 논조는 단순히 규탄이 아니라 명령 같은 것이었다. 그때의 노동신문 자료들을 역사의 산 증거로 여기에 그대로 옮긴다. 1999년 5월3일 노동신문 5면, 사설제목 「시급히 제거해야 할 극악한 통일의 원쑤」 1999년 5월5일 노동신문 5면, 사설제목 「더 이상 살려둘 수 없는 극우반동」 1999년 5월7일 노동신문 5면, 범민련 일본지역 본부 성명 「반통일분자를 파면시키고 對北대결정책을 민족 화해와 단결 정책으로 바꾸라」 1999년 5월10일 노동신문 5면, 사설제목 「지체 없이 제거해야 할 통일의 원쑤」 한편 통전부는 노동신문과 동일한 내용을 26연락소가 운영하는 「서울에서의 구국의 소리방송」을 통해 「한국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 이름으로 한국內 親北 및 좌익세력들에게 거의 매일 방송으로 지시했다. 그들은 북한과 한 목소리로 「北南(북남)관계의 개선과 통일의 앞길에 새로운 장애를 조성했다. 걸림돌이다」 하는 식으로 康仁德 퇴진 캠페인을 벌였으며, 최종적으로 金大中의 지시로 1999년 5월24일 통일부 장관직에서 康仁德이 해임됐다. 그 시간에 金正日은 강원도에 있는 자기의 갈마초대소에서 통전부 간부들과 함께 康仁德 해임 작전을 자축하는 파티를 성대히 벌였다. 2002 大選 때 李會昌 낙선에 총력 집중 이런 파티와 3위1체 전략이 절정에 달했던 때는 2002년 大選 때였다. 金正日은 盧武鉉이 당선돼야 金大中의 햇볕정책이 계승될 수 있다며, 한나라당 후보 李會昌 낙선에 통전부 역량을 총 집중하라고 했다. 역시 그때도 노동신문은 3위1체의 맏형으로서 먼저 입을 열어 한나라당 죽이기에 열을 올렸다. 2002년 12월1일 노동신문 5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보도 제829호」 2002년 12월3일 노동신문 5면, 「한민전 중앙위원회가 전체 유권자들에게 드리는 글」 2002년 12월11일 노동신문 5면, 사설제목 「매국역적의 당선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2002년 12월15일 노동신문 5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보도 제831호」 이 외에도 노동신문과 「구국의 소리방송」은 大選 전날까지도 한국內 親北세력들에게 反한나라당·反이회창 성전을 연일 호소했다. 통전부 최고 성공작은 386 主思派 金正日이 얼마나 對南전략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욕심을 부렸는가 하는 것은 자기 제도권 밖에 있는 한국의 언론까지 통제하려고 한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조·중·동 신문 안 보기 운동」을 한국 전역으로 넓혀 반드시 한겨레신문처럼 만들라』고 한총련에 지시했다. 金大中도 조·중·동을 길들이려고 했지만, 그때 조·중·동을 지켜준 것은 언론의 양심을 아는 대한민국 국민들이었다. 다 기울어져 가던 운명 직전의 金正日을 햇볕정책으로 구원해 준 金大中, 남북 頂上회담 성사명분으로 5억 달러의 불법자금까지 갖다 바친 金大中, 북한 통전부가 제시한 3위1체 전략, 그리고 그에 발을 맞춘 金大中, 이런 사람이 대통령인 대한민국을 金正日이 왜 대한민국道라고 경시하지 않겠는가. 오늘날에는 386이 金大中도 감히 더 이상 넘어설 수 없었던 체제의 한계선까지 개혁하겠다고 팔 걷고 나섰다. 아직도 전향하지 않은 그들의 낯익은 모습을 TV 화면으로 볼 때마다 남북 간의 체제 경쟁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다. 한국은 지금 극도의 체제 자만으로 국가안보를 책임져야 할 국정원까지 對北기능을 약화시키고 있지만, 북한 통전부에는 對南분야에서 수십 년 동안 잔뼈가 굵은 수천 명의 요원들이 오늘도 이 직업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올리고 있다. 그들의 최고 성공작은 바로 386이다. 이날을 보자고 통전부가 수십 년 동안 한국 사회를 재단하며 그에 알맞은 자기 조직을 부단히 확장해 왔고, 마침내는 그 효력을 보는 것이다. 主思派 工作 공로자 비밀 표창 朴正熙의 유신독재정권 시기 한국內 민주세력에 대한 통전부의 對南공작 주제 침투는 反독재, 자주화, 연방제 통일방안이었다. 4·19 혁명에 자극받은 북한은 민주주의 혁명을 反체제 폭력혁명으로 유도하지 못한 것은 광범한 군중 속에 뿌리박을 수 있는 혁명정당과 함께 북한 주도의 지도이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한국內에 하루빨리 「主思派」를 결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金日成의 연방제를 지지할 수 있으며, 미군을 몰아내고 체제전복도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대상을 진취성이 강하고 지성욕구로 몸이 달아 있는 대학생들로 지목했다. 그 실현을 위해 통전부는 조총련을 앞세워 일본에 나와 있는 유학생 사냥에 나섰다. 납치·회유·기만·협박의 방법으로 적색화한 그들의 임무는 한국內에 주체사상을 전파시키고 동지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조국평화통일 서기국과 한국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 참사실에는 그 工作성과로 영웅칭호,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은 사람들이 활동 중에 있다. 북한 공작금을 뿌려 가며 대학가에 침투하여 主思派를 결성한 초기 창시자들에 대한 조국통일상 내신문건에 金正日은 1996년 2월15일 비준했으며, 그 수훈식을 다음날 2월16일 통전부 본부 회의실에서 몇몇 주요 간부들 참석下에 익명 발표식으로 진행했다. 主思派의 활동에 통전부가 얼마나 의의를 부여했는지는 그들의 조직 확산을 지원하기 위해 대학생들에 대한 의식화·세뇌교육 목적으로 金正日이 「101연락소」라는 것을 만들도록 지시한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평양시 중구역 연화1동 평양의학대학 앞에 건물을 두고 200여 명의 필진들로 구성된 이 연락소의 사명은 한국 작가 명의로 反독재·反美·金日成의 고려연방제식 통일을 주제로 한 소설·詩를 창작하여 한국에 침투 및 보급시키는 것이다. 책의 내용으로 보나, 책 제작으로 보나 어느 면에서도 북한産이라고 의심이 안 되게 철저히 위장 창작된 시집과 소설책들은 젊은 대학생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反정부 행위와 주체사상 신봉이 더는 非합법적인 운동이 아니라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평범한 대학생에서 민주투사로 성장한 책 속의 주인공을 닮고 싶다며 북한으로 밀입북해 노동당에 가입한 386 출신 한 성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386들은 아직도 그때의 대표적인 작품들인 「반항」, 「돌아보는 얼굴」, 「열흘 낮 열흘 밤」, 「통일은 언제 됩니까?」 등을 자자구구 외우고 있을 것이다』 통전부는 이렇게 소설과 詩까지 對南심리전用으로 만들어 대학생들을 사상무장 시키는 데 이용했으며, 主思派는 反정부 전선을 노동자와 농민 속으로 확대하기 위해 대학생들을 노동현장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비밀 訪北해 노동당 가입하고 「혈서 서약」 통전부는 한국內에 「反美결사대」, 「자주군인회」, 「통일결사대」, 「민족해방애국전선」, 「민주운동연합」 같은 비밀조직들을 구축하고 對南공작의 통일전선을 형성했다. 그 통일전선의 목표는 야당을 지지하여 金大中이 집권하면 국가보안법 철폐, 안기부 해체, 미군철수 등 북한의 적화통일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제도적 장애를 우선 제거하고 정치적 혼란, 親北여론 확산으로 합법·非합법 시민운동단체들을 규합하여 연공 정부의 기반을 확보한 다음 분열 50돌이 되는 1995년을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 50돌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金正日은 한국內 지하당 성원들에게 투쟁의욕과 통일의욕을 자극시키기 위해 「누구는 서울시위원장, 누구는 충청도위원장」 하는 식으로 직위 분담을 하게 하고, 金日成에게 자기의 對南공작 지도 성과를 과시할 목적으로 그들이 노동당 입당 청원서, 충성의 맹세문, 칭송 글, 서약서 등을 작성하여 북한으로 들여보내도록 지시했다. 2002년 4월15일 평양 만수대 金日成 동상 뒤 조선혁명박물관에 새로 개관된 「동지관」 이라는 곳에는 그때 입수한 자료들과(이름은 삭제) 지하조직들이 사용했던 노동당 깃발, 金日成과 金正日 초상화가 전시되어 북한 주민들에게 한국 국민들이 金正日을 흠모한다는 선전用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어 통전부는 지하조직만이 아닌 합법적인 운동단체들도 親北, 좌경화하기 위하여 主思派가 「全大協」을 장악할 수 있도록 많은 공작금과 인적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들을 정신적으로 지원한 것은 북한이 이전에 흡수했던 金大中과 같은 「민주투사」들이었다. 全大協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한 「主思派」는 해외에 유학생 지부를 만들어 놓고 체계적으로 통전부의 지령과 공작금을 받았고,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여 노동당에 가입하면서 金正日에게 충성의 선서까지 다졌다. 그렇게 평양까지 찾아와서 번호를 받은 붉은 당증과 혈서 서약서는 모두 15개였다. 對南담당 비서 김용순은 『金正日 탄생 60돌이 되는 2002년 2월16일까지는 통전부가 선물로 60명의 혈서 서약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간부들 앞에서 지시했다. 통전부는 그 후 한국內 지하조직들을 종합적으로 통제관리하고 적화통일로 유도할 수 있는 유일적인 지령체계를 확립하기 위하여 평양시 대성구역 용흥동에 숨겨져 있는 소위 「서울에서의 구국의 소리방송」 운영을 더욱 강화했다. 150여 명으로 꾸려진 이 26연락소는 한국에 실존하는 방송국으로 위장한 연락소로서 아나운서의 방송언어와 한국식으로 현지화한 억양을 사용해 한국 주민들과 해외동포,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 정부의 정책과 사회상을 왜곡하거나 허위날조 보도함으로써 소요 유발을 부추기고 민주화 운동이 통전부의 對南전략대로 심화되도록 심리전을 폈고, 때로는 지령을 내렸다. 방송의 다양화를 위해 26연락소는 한국대중가요를 전담하는 전자악단도 가지고 있다. 「칠보산」 명칭을 1998년에 「북극성」으로 바꾼 이 악단에서는 한국의 대중가요들을 통전부의 입맛에 맞게 가사들을 바꾸거나 운동권 노래들을 직접 창작하여 방송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들은 운동권 대학생들의 反정부 감정을 더욱 유발시키는 자극제가 되었다. 통전부가 왜곡한 노래 중의 하나인 「사랑의 미로」를 실례로 든다. 인터넷에까지 뻗친 통전부의 손길 통전부는 또한 성숙된 한국 정세에 맞는 對南공작의 입체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26연락소와 함께 813연락소, 310연락소를 최대한 가동시켰다. 평양시 중구역 연화동에 자리 잡고 있는 150여 명으로 조직된 813연락소는 통전부內 각종 기관지들과 인쇄물들을 만들고, 특히 한국內 시민단체들과 여러 조직들이 현지에서 직접 작성한 격문, 삐라(전단)처럼 위장 제작하는 출판연락소이다. 한국적 實感을 보장하기 위해 金正日은 「고난의 행군」 시기 300만이 굶어 죽던 그 엄혹한 때에도 종이와 색감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재를 일본에서 조총련선으로 수입해 오도록 하였다. 아마 거기에 든 비용만 쌀 수입에 돌렸어도 북한 주민들 10만 명은 굶어 죽지 않았을 것이다. 金正日은 『813연락소에 들어가는 당 자금이 적지 않다』며 『그러나 우리가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군사에 힘을 집중하는 것도 다 통일을 위한 것이니 그런 줄 알고 자재낭비가 없도록 하라』고 지시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한장 한장이 그대로 북한 주민들의 피와 목숨으로 바꾸어진 對南심리전用 삐라와 격문들은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金正日의 지시에 의해 정상적으로 생산되었다. 200명 규모의 310연락소는 813연락소 생산물들을 한국에 침투시킴으로써 그 모든 허위와 날조들이 기정사실처럼 느껴지도록 한국 국민들에게 혼란을 조성하고, 북한을 동경하는 조직들이 한국 사회에 널리 전파되어 자기들 곁에서 활동하는 것처럼 확대 조작했다. 「反美애국청년회」, 「이북 바로알기 운동회」, 「자주애국청년단체」, 「하나회」, 「백두-한라조직」, 「금강산 사랑모임」 등의 조직 명의로 된 통전부의 손길이 서울의 골목골목과 인터넷에서 지금도 끊어지지 않고 있음을 한국 국민들은 부디 잊지 말기 바란다. 이렇듯 통전부는 자유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한국 국민들의 순수한 열정으로부터 시작된 민주화 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내부에 이념적 「씨」를 박고 개별적 인물 혹은 단체를 체계적으로 키워 적화통일로 유도하기 위한 환경 마련에 시간과 지혜를 아끼지 않았다. 그 「열매」라고도 할 수 있는 386이 민주운동 경력을 자랑하며 국가보안법 철폐를 누구보다 앞장서 주장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현재 누구보다도 국가보안법의 대상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재가 무서워 과거청산을 부르짖고 親北 행적을 은폐하려 親日 행적을 따지는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면 될수록 그것은 적대집단인 북한의 시각에서 볼 때 일종의 와해이자 기회였다. 그래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는 통전부 對南공작의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통전부를 고발한다면 종당엔 386 때문에 한국의 민주운동도 고발당하는 것이다. 한 민족 안에 서로 다른 양극이념의 두 체제가 대립되어 있는 한 일방적인 참민주주의란 있을 수 없다. 오늘날 한국이 이룩한 기적 같은 이 민주주의는 경제의 고도성장과 함께 아울러진 문명의 현상이고, 이 이상의 민주주의는 이념공세로 인한 자멸의 초대장에 불과하다. 북한이 적화통일 정책을 백지화하지 않는 한 한국이 국가보안법 철폐나 主敵개념을 포기한다고 해서 절대로 세계 선진국 수준의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없다. 그런 날을 앞당기기 위해서 우선 민주주의의 첫째 과녁을 북한 독재정권 붕괴로 조준해야 한다. 「조평통」의 外柔內剛 전략 체제수호 애국세력을 보수꼴통으로 몰아붙이는 現 여당과 노동당 지하 당원들인 386 主思派가 있어 담이 커질 대로 커진 통전부는, 오늘날 한국 사회 전반을 과녁으로 삼았다. 그 목표가 바로 한국 국민들, 즉 합법적인 시민운동단체들이다. 金泳三(김영삼) 정권부터 「우리 민족끼리」라는 구호로 남북대화와 교류의 문을 연 「조평통」은 내부 비밀로 자기들의 이 전술을 「外柔內剛」이라고 명명했다. 통전부가 「조평통」이라고 할 만큼 통전부 안에서 가장 큰 연락소는 「조국평화 통일서기국」이다. 1946년 7월에 공산통일국가 창건을 추구하기 위해 金日成을 중심으로 조직된 이 단체는 그 후 1949년 6월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서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으로 개편되었으며,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거쳐 통전부 신설 당시에는 「조국평화 통일서기국」으로 정식 출범하게 되었다. 이 서기국은 對南정책 작성, 對南정보 수집, 對南심리전, 인물포섭, 남북대화 및 교류전담, 한국內 親北 및 좌파세력 확장·지도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산하에 필요한 연락소들을 가지고 있다. 평양시 중구역 오탄동에 「조평통」과 지붕을 같이 한 「한국민주전선중앙위원회」에 1960년대 초부터 한국內에 지하조직들을 구축, 南南갈등을 유발시키고 조정하여 온 모략의 능수 100여 명이 집결해 있다. 평양시 중구역 연화동에 기지를 둔 「남조선문제연구소」는 1950년대부터 오늘까지 150여 명의 학자들이 한국의 정치·경제·군사·문화·개별 인물들에 대해서까지 자료화하고 학술 차원에서 논문들을 작성하여 통전부의 對南정책을 이론적으로 돕고 있다. 이렇게 적화통일 의도의 모략기지를 튼튼히 꾸리고, 북한 통일정책을 대변한다는 합법적인 의미에서 통일외교의 명분으로 한국內 개별인물 혹은 단체들에 접근하여 對南공작을 활발히 벌이는 「조평통」에는 현재 700여 명의 한국 전문가들이 근무하고 있다. 한국에 군사정권이 유지될 때까지만 해도 통전부는 反독재·자주·연방제式 통일을 對南공작의 기본 주제로 내세웠다. 그러나 金大中 정권 이후부터는 소극적인 틀에서 해방되어 反美, 親北, 親金正日을 노골화하고 지금은 그 전략을 「우리 민족끼리」 실현하려고 하고 있다. 특히 6·15 남북 頂上회담에서 햇볕정책이 원만하게 이어지자면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金大中의 설명 이후 金正日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예술단을 불러들이고 언론사 대표단을 초청하는 등 독재자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쇼를 연출하기도 했다. 386은 통전부의 정규군 對敵관념 교양으로 주민들을 더더욱 사상무장시키고, 先軍제일주의로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북조선의 실상을 가리고 미소전략으로 한국에 다가서는 金正日은 「우리 민족끼리」 이면에서 최근 對南공작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비밀 지령을 주었다. 『지금 남조선 정세는 우리에게 매우 유리하게 조성돼 가고 있다. 이것을 안정적으로 지속 발전시키자면 노출 위험성이 큰 직접 침투를 줄이고 눈에 안 보이는 침투, 즉 통전부가 그동안 관리해 오던 대상들을 현지에서 첩자로 흡수하여 적극 활용하는 방법으로 對南공작을 가속화해야 한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시민단체 포섭이다. 그들을 이용하여 남조선內 국민정서를 더욱 친북화시킴으로써 우리의 전략이 쉽게 먹혀 들어갈 수 있는 틈을 많이 마련해야 한다. 공작자금은 근심하지 말라』 한국은 지금 더더욱 각성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더더욱 북한을 경계해야 할 때이다. 여당만이 아닌 한국內 각 시민운동단체 속에도 대거 포진된 386 무리가 차라리 철없는 이념 공상가들, 극단적인 親北분자들 정도면 다행이지만 이들이 벌써 金正日의 지령대로 통전부의 정규군이 되었다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누가 믿고 외국기업이 투자하겠다고 하겠는가. 통전부는 자금문제도 훌륭하게 해결하고 있다. 한국에서 보내주는 모든 인도주의 물자들은 그대로 통전부 소유로 접수된다. 얼마 전에도 한국에서 보내준 비료 일부가 국경 沿線(연선) 중국 농촌지역들에 은밀히 수출되었고, 옷·식료품·심지어 한국 가수가 보내준 생리대까지 외화상점에 내다팔아 공작자금으로 확보하고 있다. 통전부는 그렇게 마련된 붉은 자금으로 한국內 한총련 등 각 親北단체들의 집권층 장악을 위한 공작에 쏟아 붓고 있다. 특히 통전부는 反체제혁명에서 기본 동력 역할을 할 중산층 이하의 광범한 근로 대중지반을 갖고 있는 「○○○○」, 초·중·고·대학생들에게 親北 세뇌교육을 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를 장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악하고 있다. 결과 몇몇 인물들은 이미 북한을 극비에 방문했고 중국에 비밀 아지트도 두고 있다. 이 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조평통」은 종교 세력이 강한 한국內 실정을 감안하여 통전부 교류과 소속으로 1990년대 초부터 불교도연맹, 기독교연맹, 천도교중앙위원회, 천주교위원회를 설립하고 평양시 몇 곳에 절·성당·교회를 만들어 놓았다. 이 성원들은 철저히 검열된 골수 노동당원들인 통전부 요원들로서 이들의 주된 임무는 종교인 흡수, 물자지원 청탁에 대한 전술안 연구이며 그와 함께 직업오염을 막는다는 의미에서 해당 담당 종교의 非과학성, 반동성 논문을 작성 발표하는 식으로 정신세척을 하고 있다. 때문에 명칭이 불교이고 기독교이지 통전부 내부에서는 엄격하게 1국, 2국으로 명명된다. 통전부는 한국內 親北세력 확장과 시민운동단체 포섭을 심화하기 위하여 민간급 차원에서 대화·교류를 주동적으로 제기하는 전술을 활용한다. 여기서 강조할 것은 한국은 순수한 민간인들로 구성되지만, 북한은 명실공히 통전부 요원들로 편성되어 대화하고 교류한다는 것이다. 실례로 2004년 6월 금강산에서 있었던 南北작가회담 때 김형수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총장과 악수했던 북측 단장 장혜명은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아니라 작가로부터 「조평통」 부원, 101연락소 국장직을 거쳐 지금은 26연락소 對南문학창작국 담당 부소장을 하는 통전부의 핵심 요원이다. 통전부內, 한국 전문가 2550명 만능 기관인 통전부에는 이처럼 한국 각 분야를 연구하고 대응할 수 있는 북한 최고의 실력자들이 2550여 명이나 된다. 그들의 전문성에 의거하여 경제·군사·문화, 그 어느 것 할 것 없이 남북관계 문제는 100% 통전부가 자기의 對南전략 큰 그림 안에서 각본을 쓰고 연출한다. 그래서 통전부이고 그래서 분열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경제장관급회담이라면 경제적인 의미로, 군사장관급회담이라면 군사적인 의미로 천진하게 믿는 한국 정치인들이나 국민들은 불쌍할 만큼 순진하다. 오늘도 통전부는 충실한 자기 당원들의 창발성과 재능을 최대한 살려 對南공작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새로운 시도들을 계속 모색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2003년 9월부터 26연락소가 운영하던 「서울에서의 구국의 소리 방송」을 잠정적으로 중지했다. 종전에 진행하던 전파방송의 단면성과 非진보성을 인정하고 인터넷 보급이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 실정에 맞는 對南선전用 동영상화로 이전하기 위해서이다. 對南영상물 제작의 작품성을 보장하기 위해 101연락소의 對南문학창작국을 26연락소로 옮기고 「북극성」 전자악단의 규모를 더 늘렸으며, 2004년 10월에는 金正日이 직접 그 첫 시제품을 검토하는 등 지금 통전부는 새로운 對南공작 차원의 인터넷 방송국 창설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이 내막도 모르고 한국 정부는 26연락소 「구국의 소리방송」 중단에 대해 2004년 6월14일 북한 측의 요구대로 DMZ 對北방송을 철거하는 또 한 번의 밑지는 장사를 했다. 인터넷 기술과 그 실현을 전담한 101연락소는 필요한 인력과 설비를 보충하고 미국·일본·유럽·東南亞로 지점을 확대하여 2004년 11월까지 한국 국민 전체를 상대로 할 수 있는 대대적인 인터넷 공격 준비를 완료했다. 『과거 결탁에 뒷덜미 잡혀…』 지금 이 시각에도 개인 혹은 각종 단체명의 이메일로 反정부, 反美, 親北, 親金正日 주제의 글과 동영상들을 만들어 한국에 침투시키는 인터넷 침투 연락소 101은 통전부만이 아닌 중앙당 35호실, 대외연락부, 작전부, 인민무력부 정찰국의 지령문들도 암호화하여 발송하는 북한 對南공작의 창구이기도 하다. 통전부와의 과거 결탁에 뒷덜미 잡혀 좌경으로밖에 나갈 수 없는 386, 고집은 있으나 주관이 없는 盧武鉉 정권, 입심 사나운 左派 시민운동단체들. 그들은 어느새 북한식 일심단결로 결집되어 이상한 힘을 발휘하는 권력이 되었고, 여당보다 정체성이 더 불확실한 한나라당은 정치표·민심표·통일표를 고민하며 우유부단하고 있으니, 이제는 우익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고 있는 한국이 되었다. 오늘날 누가 옷을 벗고 있는가. 金大中의 햇볕정책대로 북한인가, 아니면 金正日이 웃으며 말한 것처럼 대한민국道인가. 미국의 북한인권법에 대한 반대, 국가보안법 철폐, 主敵개념 포기, 탈북자 지원정책 반대, 일방적인 전연(전선)지대 선전물 철거, 국방부 문민화, 북한 정권 붕괴 반대…. 金正日이 더 요구할 게 없을 정도로 열린당은 통전부보다도 더 일을 잘하고 있다. 열린당이 이런 행태를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金正日에게 아첨하는 것이 정권 연장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통전부의 對南농사엔 흉년이 없다 통일 문제는 한국에선 汎국민적인 것이다. 때문에 이것을 최대한 악용하려는 기회주의 차원에서 金正日을 만나거나 지지를 얻는 것을 한국 정치인들은 제1의 인기표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한나라당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멀리 가느라고 쉬엄쉬엄 걷는 한나라당은 여당과의 대결에서 항상 자기 정책이 뚜렷하지 못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대통령 꿈을 품고 무슨 운동, 무슨 단체들의 일부 대표라는 사람들도 출세의 길을 닦느라 국가보안법을 피해 가며 통전부와의 밀로를 개척하기도 한다. 이런 정치풍토에 씨앗을 뿌리고 다 익으면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통전부의 對南농사에는 흉년이 없다. 정치적 인기를 위해서라면 체제안보도 고려치 않는 을사오적 같은 정치인들이 머리를 쳐드는 한국이어서 金正日은 여유작작하게 팔짱끼고 계략을 꾸밀 수 있다. 그래서 모든 남북대화는 북한 노동당 일개 부서인 통전부가 하겠다면 하고, 말겠다면 마는 식으로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金正日은 북한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다. 북한의 독재자는 金正日이고, 한국의 독재자는 돈이다. 이 둘 중에 누가 더 수명이 긴가 하는 것을 386이나 일부 親北세력들은 종종 잊는 것 같다. 金正日 정권연장이 곧 386 정권 연장이고, 金正日 정권 붕괴가 곧 386 정권 붕괴로 이어지게끔 우리 한반도의 운명은 흘러가고 있다. 어찌 보면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는 한꺼번에 깨끗이 쓸어버릴 수 있는 역사적인 기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현재다. 오늘의 피해자들이 바로 북한 주민들이고 한국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한민국의 젊은 대학생들에게 말하고 싶다. 50만 명의 탈북자들, 정치범 수용소에 갇힌 28만 명의 생명들, 굶어 죽은 300만 명의 백성들, 이것은 우연한 數(수)가 아니다. 이 수를 감히 지울 수 있는 正義란 있을 수 없다. 金正日 정권을 북한이라는 한 민족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反민족, 反통일이다. 군사독재정권 타도에 대학생들이 앞장섰던 것처럼 오늘은 그대들이 민주주의의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할 때이다. 과거는 삶의 자유를 얻기 위해 極右 군사독재정권을 타도하던 양적 민주화 시대였다면, 이제는 삶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 極左 친북정권을 타도해야 할 질적 민주화 시대이다. 대한민국이여, 이제는 정말 대한민국 다워야 하지 않겠는가!● 통전부 요원 출신 탈북자와의 一問一答 『金正日은 對南적화의 유일한 걸림돌이 조선·동아일보라고 생각한다. 미워하면서도 두려워한다. 金正男은 위조여권으로 제주도에 왔다갔다』 제3국에서 만난 북한노동당 통일전선부 출신 탈북자와 月刊朝鮮 기자의 일문일답 내용을 요약한다(편집자 注). ─李哲禹 열린당 의원이 자신은 민족해방애국전선에 가입한 것이지 북한 노동당에 가입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데. 『민족해방애국전선은 남한에 있는 북한노동당의 지하당이며, 북한 노동당의 산하 위장 조직이다. 노동당 깃발 아래서 金日成·金正日 초상화를 걸어놓고 入黨맹세를 한 것은 노동당에 가입했다는 뜻이다. 이런 노동당 가입 관련 서류는 통전부에서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金正日에게 충성을 다짐해 놓고 무슨 단체에 가입했는지 모르겠다니,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불러세워 가입을 받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민족해방애국전선이 북한 노동당의 직할 조직이란 것은 우리의 상식이다. 이 조직 이외에도 북한 통전부는 여러 위장단체를 남한에 심어 놓았다』 ─金正日은 조선·동아일보를 왜 그렇게 미워하는가. 『金正日은 통전부-親北세력-좌파정권이 3위1체式으로 한덩어리가 되어 대한민국을 적화시킬 자신이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는데, 거의 유일한 견제세력이 조선·동아일보라고 보고 있다. 그는 선전선동부장 출신이라 언론의 위력을 잘 안다. 그는 조선·동아일보를 미워하면서도 가장 두려워한다. 金正日이 조선·동아일보를 죽이라고 명령했을 때만 해도 통전부에서는 한국은 언론자유가 있는 곳인데 잘 먹히겠는가 하고 자신이 없었다. 일단 우리가 親北세력에 지령을 내리고 북한 선전매체를 총동원하여 조선·동아일보를 공격하니, 남한에서 親北세력이 들고일어나고 정권이 합세하여 조선·동아일보를 공격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도 놀랐다』 ─金日成이 金大中 집권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하여 朴正熙 암살을 지령했다가 陸英修 여사를 죽게 했다는 이야기는 누구한테 들었는가. 『통전부의 역사 기록 담당자로부터 들었다. 金日成·金正日의 일관된 전략은 金大中의 집권을 도와, 그가 집권하면 그의 손으로 보안법을 폐지하고 연방제를 수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金大中 대통령이 집권한 뒤 보안법 폐지를 시도했으나 보수세력이 강해 못 했는데, 이제는 386 主思派 출신들이 있으니 가능하지 않겠나. 통전부 제1부부장 임동욱은 386 출신 열린당 모 국회의원을 거명하면서 「사랑스런 이름」이라고 말하곤 한다』 ─對南공작 전문요원은 모두 몇 명이나 되나. 『통전부가 약 2500명, 작전부가 약 8000명, 여기에다가 軍의 정찰국 요원들을 합하면 수만 명에 달할 것이다. 이들이 자나 깨나 남한 赤化를 위해 일하는데, 국정원은 對北 자유화를 위해 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金正日의 장남 金正男에 대해서 아는가. 『金正日은 한때 그를 후계자로 생각했으나 지금은 아니다. 그가 중국에 자주 나타나는 것은 중국의 공작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金正男을 親中派로 보면 된다. 金正男은 위조여권을 가지고 외국을 많이 여행했는데 제주도에도 왔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휴전선의 對北 확성기 방송과 전광판 뉴스방송을 폐지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요사이 북한 군인들은 군대 생활을 할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남쪽에서 들려오는 신기한 뉴스를 듣고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알았으니까. 북한에서 비상사태가 생겼을 때 對北방송을 통해서 북한군인들이 총부리를 남쪽이 아닌 독재자한테 돌리도록 해야 하는데, 왜 국군이 金正日 한 사람을 즐겁게 해주고 북한 주민들을 배신하고 한국 국민들을 기만하는 그런 바보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金正日 정권은 오래 갈 것 같은가. 『북한은 지금 썩은 사과처럼 매달려 있다. 金正日만 제거되면 정권은 끝장이다. 한국은 이제 金正日 이후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그의 운명도 다 된 것 아닌가. 나 같은 사람이 탈출할 정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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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남한의 상황을 너무 소상히 알고 있으니까 오히려 믿음이 안갑니다.
우리가 무심히 행하는 왜곡된 언행은..혼란과 불신만을 키워나갈 따름입니
다.
황장엽 선생은 한나라당-조선일보-전통적인 영남지역 기득권 세력-극보수파와 비슷한 입장일 것 같으나, 제가 알기로는 속으로는 북에 대해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 이명박 대통령은 극보수파의 정책노선에 가깝게 간게 최근 남북경색의 이유이고, 그러나 북미관계가 해빙의 단계로 들어선다면, 6.15공동성명을 인정하고 햇볕정책에 가까운 방향으로 선회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탈북자 분들에게는 남한 내의 정치가 익숙하지 않겠지요. 살다 보시면 서서히 알게 되실 거에요.
지금까지 김대중과 북한의 연계에 관한 의혹들은 계속 제기되어 왔지만, 이번처럼 확실한 증언으로 뒷받침 된 적은 없었습니다. 김대중이 김일성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온 사실은 유명한 기자인 손충무씨에 의해서도 증언이 되고 있습니다.
월간조선이나 조갑제씨가 극우적인 경향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우리나라에 조갑제만큼 뛰어난 기자는 별로 없습니다. 그 사람의 기사는 철저한 사실의 바탕 위에서 쓰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요즘 한계레신문이나 경햠신문처럼 왜곡 날조된 기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지금의 한계레신문이나 경향신문은 예전의 그 신문들이 아닙니다. 북한의 선전매체와 다를바 없이 왜곡과 조작으로 대중선동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저는 조갑제씨가 쓴, 박정희 평전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인터넷상으로 읽었는데, 근 한달간을 밤새우며 읽어 보았지만, 어느 하나 흠잡을데 없는 뛰어난 평전이었습니다.
저도 5공 시절 운동권 출신이고, 감옥까지 갔다 왔으며 노동운동도 2년이나 했던 사람입니다. 지금도 레닌을 종경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보기에도 여기에 실린 통전부 요원의 고백은 사실로 보입니다. 북한의 내부에 대해 너무나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탈북자분들 중에도 공감하시는 분들이 많을 줄 압니다.
김정일과 대화와 협력을 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신이 나간 사람들입니다. 히틀러와 대화하자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국민들을 수백만이나 굶겨죽이는 사람은 더이상 사람이 아니라 악마입니다.
악마와 무슨 대화와 타협을 한다는 말입니까?
아시다시피, 남한 내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가 수년 전에 남한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을 때에 김대중에게 노벨상을 주지말라는 편지가 수백통이 노벨상 위원회에 배달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놀이'에 탈북자분들을 끼워 넣는 결과가 되는 것은 옳지 않지요.
지금도 서울 광화문 점령하려는 시위대들 그들이 말해주고
있지요. 이명박대통령 한참 힘들겁니다.
한국에서 보내겠다는 강냉이 5만톤도 결국은 북으로 올것을 알고 있기때문에 안받겠다고 쑈를 부리는거다. 그런것을 보면 정일이가 역시 그 분야에 대해서는 정말 치밀하고 악착스럽게 하고 있는것이다.
국제사회를 통해 5만톤을 지원하겠다는 그 뉴스에 북한의 정일이가 얼마나 웃었을까? 바보 멍청이들 내 뜻대로 움직인다고.윗글은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